타이완 섬의 역사 台灣史 | |||||||
선사 ~ 중세 | 근세 | 근대 | 현대 | ||||
타이완 섬의 선사시대 | 스페인 시기 (북부) | 정씨 왕국 | 청나라 시기 | 타이완 민주국 | 대만일치시기 | 중화민국 (국민정부) | 중화민국 |
네덜란드 시기 (남부) | |||||||
다두 왕국 |
타이완 민주국 臺灣民主國 | ||
국기 | 국장 | |
1895년 | ||
위치 | 타이완 섬 | |
수도 | 타이베이 → 타이난 | |
언어 | 중국어, 민남어 | |
민족 | 한족, 토착민 | |
성립 이전 | 청나라 | |
멸망 이후 | 대만일치시기 | |
오늘날 | 중화민국(타이완) |
1 개요
1895년 5월 25일부터 10월 21일까지 약 5개월(...) 동안 타이완 섬에 존재했던 나라.
1894년 발발한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 제국에게 패하고 시모노세키 조약을 채결한다. 조약으로 인해 청나라는 일본 제국에게 타이완 섬과 요동을 할양하게 되었고, 이 소식을 들은 대만인들은 조약에 반대하며 당경숭과 구봉갑 등을 중심으로 1895년 5월 25일 타이완 민주국을 수립한다.
당시 청나라의 총군이였던 유영복은 자신의 무장 조직 흑기군(黑旗軍)과 함께 타이완 민주국에 가담하였다. 이에 일본 제국 측에서는 가바야마 스게노리에게 대만 총독 자리를 위임한 후 타이완 민주국 정벌을 맡겼다. 전쟁은 5개월 동안 계속됐으며 결국 군사적으로 우위에 있던 일본 측이 승리하였고 타이완 섬은 일본 제국의 관할이 되었다.
국가원수였던 구봉갑, 당경숭, 유영복 등은 하문(廈門, 샤먼)으로 도망쳤으나 이후 7년 동안 대만인들의 산발적인 저항이 이어졌다. 일본군은 1895년 10월 하순까지 계속된 대만에서의 전투로 사망자 5천, 부상자 2만 7천명의 피해를 입었다. 요동, 산동 방면에서 1만 7천여명의 손실을 입은 것과 비교하면 당시 대만인들의 저항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애당초 대만의 영유권을 할양한 청은 물론, 어느 외국 열강도 대만의 항전을 지원하려 들지 않았고, 일본의 압도적인 병력이 상륙하자 주민들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끝내 일본의 점령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이전부터 스페인, 네덜란드, 명나라 유민 출신의 정성공 일파, 중국 본토의 청나라 등 외래 세력의 지배가 계속되어 대만인들은 이를 당연시하는 태도를 보였고, 독자적인 정체성, 민족 의식도 희박한 편이었다. 그 결과 일단 일본의 점령이 완료된 후, 대만 주민들은 일본의 지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편을 택했고, 일본도 굳이 강압적인 방식을 적용할 필요없이 온건한 식민통치를 펼쳤다. 이후 일본의 대만 식민통치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일본이 패망한 1945년까지 50년 동안 계속되었다.
2 평가
청일전쟁 이후 한때나마 대만의 항일 주체로 존속했던 대만민주국에 관한 대만 내부의 평가는 다소 엇갈린다. 대만 민족주의 독립진영 내에서 일부는 대만민주국을 신해혁명을 통한 중화민국 선포보다 16년 앞선, '아시아 최초의 민주 공화주의 국가'로 평가하며 역사상 대만의 자주 독자성이 시작된 기원으로 옹호한다. 그러나 대만민주국의 주도 세력이 본토 출신인 청나라 관료들이었으며, 막상 일본의 대만 점령이 본격화되자 대다수가 본토로 피신하여 대만을 위한 저항 주체로 보기 어렵다는 점, 그리고 불과 5개월의 단명 정부로 끝나 의미있는 활약을 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평가 절하하는 이들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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