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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 섬의 역사 台灣史 | |||||||
선사 ~ 중세 | 근세 | 근대 | 현대 | ||||
타이완 섬의 선사시대 | 스페인 시기 (북부) | 정씨 왕국 | 청나라 시기 | 타이완 민주국 | 대만일치시기 | 중화민국 (국민정부) | 중화민국 |
네덜란드 시기 (남부) | |||||||
다두 왕국 |
목차
1 개요
본 문서는 타이완 섬의 역사에 대해 다룬다. 국부천대 이전까지 중국 대륙을 통치했으며 국부천대 이후 타이완 섬을 실효지배 하고 있는 중화민국 정부의 역사에 대해서는 중화민국/역사 참고.
원래는 근세 이래에 역사에 본격적으로 나타난 지방이었다. 염상섭의 '만세전'에서는 등장인물들의 대화에서 '생번보다도 못하게 산다' 따위의 표현도 나온다. 원주민들은 문자가 없었으며 통일된 국가[1]나 도시도 발달되지 않았다. 특히 중국 중심의 역사관으로 타이완 섬을 볼 경우, 400년 남짓한 역사의 미개한 섬이 되어버린다.
이러한 중국 대륙 중심의 역사관에 반대하여 조영화 같은 대만의 학자들은 '대만사'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여 타이완 섬(대만)을 중국 대륙에 종속되는 섬이 아닌 독자적인 문화권으로 보는 역사관을 확립하였다. 진정한 독자적인 문화권이 되기 위해서는 98%는 대만을 원주인에게 돌려주고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이 영상을 참고하는 것이 좋다.
2 상세
2.1 선사 시대
최초의 인류 흔적은 30000~27000년 전 쯤에 나타나며 이후 오스트로네시아어 사용하는 사람들이. 5000년 전에 유라시아 동남쪽에서 타이완 섬으로 이동해 왔다. 이들은 사이시얏 족 거주지 근처에 불과 100여 년 전까지 살고 있었다. 이들 원주민들은 대만해역의 풍부한 어장을 바탕으로 어업에 종사하며 생활하였다.
대만 원주민은 미국-캐나다와 남미 동부일대의 아메리카 원주민마냥 통일된 정치체제를 이루지 않고 부족별로 흩어져 살았으며, 현재도 크고 작은 부족집단으로 나뉘어 있고 부족별로 언어도 다르다. 고산족(高山族), 일제시대 때는 생번(生蕃 : 날야만인이란 뜻으로 차별용어) 따위 이름으로 불렸으며, 그들이 쓰는 언어는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인도네시아어, 말레이어, 필리핀의 타갈로그어와 태평양 지역의 많은 언어들이 같은 남도어족계 그룹이다) 가운데 가장 오래된 옛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이 섬에 살아온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2.2 고대 ~ 중세 시대
고대에는 그냥 원주민들만 사는 섬이였다. 삼국지에서는 타이완을 이주(夷州)라 불렀는데 관련 사건도 언급된다. 230년에 이르러 오나라 황제 손권은 위나라와의 잦은 전투 등으로 인하여 인구가 감소 추세에 놓이자 위온과 제갈직에게 1만명의 병력을 주고 이주와 단주 등에 건너가서 징발을 명했다. 하지만 위온과 제갈직은 이주에 도착했으나 그곳은 미개한 원주민들만 있었고 위온과 제갈직은 그들이라도 1천명을 징발해서 손권에게 돌아갔으나 태풍 등에 의해 8천이나 되는 많은 병력을 잃어(...) 분노한 손권에 의해 참수당했다.
이후 송나라부터 원나라 시대 때 섬이라는 지리적 이점으로 해양무역이 발달하였다. 타이완 섬은 중국 대륙과 동남아시아 사이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중계무역이 발달하였다. 그러나 명나라 때에 이르러 해금정책이 실행되자 타이완 섬의 해양무역은 쇠퇴하게 되었다. 한편 타이완 섬 중서부에서는 원주민들의 연합 왕국인 다두 왕국이 성립하였다.
2.3 조기대만시기
스페인 제국, 네덜란드 제국의 타이완 섬 통치 시대부터 정씨 왕국 통치 시대까지를 지칭하며 보통 조기대만시기(早期臺灣時期)라고 불린다.
중국 대륙에 명나라가 건국된 이후 타이완 섬은 여러 소왕국들이 존재하였다. 이후 스페인과 네덜란드가 해양무역의 거점으로써 타이완 섬을 정복하고 세력을 다투다 1624년부터 1662년까지 네덜란드가 스페인을 쫓아내고 타이완 일부 지역을 점유하게 된다. 청나라에 맞선 정성공은 이런 타이완 섬에 주목하고, 명나라 부흥을 위한 활동의 거점으로 삼기 위해 네덜란드군을 몰아내고 접수하여 정씨 왕국을 건국하였다. 정성공과 그의 자손들은 정씨 왕국을 거점으로 수십년을 청나라에 항쟁했었다.
정성공이 들어오기 이전부터 네덜란드인들이 이곳에서 사탕수수를 대량으로 재배하여 큰 수익을 올렸는데, 이는 이후에도 대만의 주요사업원이었다. 다만 이들 세력과 국가들이 대만 전체를 지배하던건 아니고 서남부나 항구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여전히 다두 왕국을 비롯한 원주민의 영역이었다.
2.4 청나라 통치 시대
- 자세한 건 청나라 치하 타이완 섬 문서 참고.
청나라가 정씨 왕국을 멸망시키고 타이완 섬을 통치한 시대를 지칭한다. 정성공이 죽은 후 정씨 왕국은 3대를 가면서 삼번의 난 때도 적극 동조하는 등 계속 반청정책을 펼쳤지만 결국 청에게 정벌당해 청의 영토가 되었다. 정씨 왕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청나라는 타이완 섬에 지속적으로 진출하여 1732년에는 원주민들의 국가인 다두 왕국 마저 멸망시키고 청나라에 편입하였다.
이때 본격적으로 한족들이 이주하여 살기 시작하면서 저항하는 토착민들은 산으로 쫒겨나서 고산족이라고 불리게 되었고, 평지의 나머지 원주민들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한족에 동화되었다.
2.5 근대 시대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하면서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이 맺어지고 일본의 영토로 할양되었다. 이때 대만에 거주하던 한족들이 청나라의 할양조치에 반발, 타이완 민주국이라는 정부체계를 세우고 일본에 대한 항전의지를 불태웠으나 5개월 간의 항쟁 끝에 끝내 일본에 의해 무력점령되어 타이완 섬에서 대만일치시기가 시작되었다. 이후 1945년 일본 패망 때까지 일본의 총독부인 대만총독부 치하에 있었다.
일제 치하에서 고생한 것은 한국과 마찬가지지만, 조선총독부와는 달리 대만총독부는 조선보다는 유화적인 통치를 했다. 조선과는 달리 1920년대에 대만총독부를 일제 내각 휘하에 두는 데 성공하면서[2] 문관총독을 둘 정도였다. 이때의 경험이 현재 대만에 반일 정서가 심하지 않은 까닭이 된다. 물론 대만에도 일본군에 의한 대만 원주민 학살 사건이나 대만 원주민의 저항(우서 사건), 한족의 저항(타파니 사건) 등이 벌어진 점에서 보듯 순탄한 통치만 이어진 것은 아니다.
2.6 국부천대 이후
그런데 일제 패망 이후, 본래 중국 본토를 차지하고 있는 국민당 정권이 그야말로 꿈도 희망도 없는 저런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뒤 곧바로 벌어진 국공내전에서 압도적인 전력을 가지고도 공산당에게 안드로메다 관광을 당해, 중국 본토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섰고, 국민당은 기존의 정부 조직과 요인들, 그리고 피난민들을 데리고 타이완으로 철수했다. 덕분에 한국과 북한마냥 두 국가의 정부는 서로를 듣보잡 취급하고 있으며, 서로의 헌법에는 "쟤들 땅도 내 땅"이라고 써 있다.
도올 김용옥의 강의
명목상 수복영토를 규정하고 있으나 현실은 시궁창이다. 특히 1971년에는 중국(중공)의 UN 가입과 함께 중국 정통정부의 자격, 상임이사국 자격, UN 가입도 강제로 모두 박탈당하고 모두 중공에게 그 권리가 이전되면서 수교가 대거 끊겼고, 올림픽에서도 중공의 압박으로 '중화민국'이 아닌 '차이니즈 타이베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와야 하며 자국 국기(청천백일만지홍기)를 쓰지 못하고 국가인 '삼민주의'도 못부르는 안습된 상황을 맞고 있다.그냥 올림픽이나 국제 대회 나가지마라
2.7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갈등
전쟁과 양측의 영토 수복 기도는 1950년대에도 계속 되었으며, 특히 1958년 8월 23일부터 10월 5일까지 44일간 금문도 포격사건이 발발하여 44일간 국지전을 치루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은 주로 공산권과 제3세계 비동맹권에서만[3] 인정을 받았다. (단, 노동당 내각의 영국은 1950년에 중공을 국가로 인정했었다.[4] 소련과 미국 사이에서 독자노선을 걷던 프랑스도 마찬가지였다.) 대외적으로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중화민국이 중국의 대표로서 UN상임이사국 자리도 차지하고 세계 각국과도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있는 등 외교적으로 인정받는 국가였지만…
1971년 중국이 죽의 장막을 걷어치우고 개방정책을 시작하면서,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대만 인정 안 하고 중국하고 무역하기 vs 중국 인정 안 하고 대만하고 무역하기"를 들이대었다. 미국의 리처드 닉슨이 데탕트로 중국과의 핑퐁 외교에 나섰고, 이를 위시로 전 세계의 나라들이 다 같이 "대만 인정 안하고 중국하고 무역하기"를 선택하여 전 세계에서 외교관계가 뚝뚝 끊겨져 나가 고립당했다. 중공이 가입하면서 UN에서도 자동 퇴출되고 대부분의 나라에서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 그나마 돈의 힘으로 후진국에 경제원조를 해줘서 외교관계를 유지하여 지금은 바티칸 시국을 포함하여 총 23개국이 남아있는 상황이다. 물론 거기에 가장 경제력이 좋은 나라는 남미의 파라과이 뿐. 게다가 지금 유지하는 나라들도 수교하면 다시 또 단교하는 상황이 계속 늘고 있다. 라이베리아나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의 경우 3번이나 단교했을 정도.
중국이 틈만 나면 양안(중국과 대만)관계의 특수성을 주장하면서 대만에 대해 무력시위를 일삼는 탓에, 대만군은 이곳 저곳에서 무기를 마구 사들여 이에 대응하고 있지만 외교관계가 저 꼴인 탓에 무기구입도 쉽지가 않다. 대표적으로 네덜란드에 잠수함 6척을 주문했는데 중국의 협박에 2척만 받은 사건 등...
'프랑스가 Mirage2000 전투기, Lafayette급 호위함을 판매하는 과정에서 사기를 쳤네'는 소문도 떠돌고는 있지만 이는 사실 한국에서(!) 만들어진 헛소문, 해당 소문에서 피해자로 지목된 대만인들조차 그게 무슨 소리냐고 반문할 정도고, 타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소문은 2000년대 초 FX사업 당시 인터넷에 뿌려진 괴담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프랑스측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기 위해 상대방측(주어는 없다)[5]에서 만들어낸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이른바 '프랑스 괴담'의 전 항목은 팩트를 살짝 비틀어서 만들어낸 헛소문. 해당 소문을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넷상에서 만나면 일단 경계하자.
하지만 2008년 취임한 국민당의 마잉주 총통은 더이상의 수교국확대를 늘리기 위한 외교투자를 중단하겠다고 하였으며, 본토도 이에 동의하여 이후 수교국의 수가 변화하거나 하는 일은 없을 듯.
2.8 현대 정치사
타이완 현대사의 시작은 암울했다. 외성인과 본성인의 갈등이 쌓여지다가 1947년 2.28 사건으로 폭발했고, 이 사건은 이후 국부천대로 인해 오랫동안 금기시되고 오늘날까지도 이 사건의 진실은 완전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후 1949년부터 1987년까지 38년 동안 타이완에는 계엄령이 내려져 있었으며 1996년까지 국가원수조차도 국민이 뽑지 못하는 나라였다.[6]
장징궈가 1988년에 죽은 이후 리덩후이가 2000년까지 총통직을 맡았다(이 시기의 주요 역사는 중국 국민당 항목 참조). 1991년에 와서야 주권재민이 확립되었고, 1996년에 와서야 첫 총통 선거를 치루어 다시 리덩후이가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에도 탄압은 어느정도 있었고, 2000년에 두번째 선거에선 반세기 동안의 국민당 독재를 종식시키고 민주진보당의 천수이볜이 당선되었다.
하지만 그동안 아시아의 4룡이라 불려왔던 경제를 말아먹고 당선 직후 부정부패 의혹이 제기되면서 내내 레임덕에[7] 2008년 마잉주 총통이 당선되었다. 아마 쇼가 의심되는 대선 직전의 암살 미수사건만 없었다면 정권 교체는 4년 일찍 왔으리라... 마잉주 총통은 중국본토와 같이 1개국 다체제를 희망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3無(무통無統, 무독無獨, 무무無武) 정책을 내세우며 현상유지를 표방중. 사실 이건 대다수의 대만인이 바라는 바이기도 하다.
결국 지나친 친중국적 정책을 편 국민당 정권은 2009년 말에 치뤄진 지방선거에서 관광을 탔다. 14:3에서 12:4로 수치상으로는 큰 차이가 없지만, 득표율에서는 47.88% : 45.32%로 민진당은 1986년 창당 이래 최고의 득표율을 얻었다. 그럼에도 정책을 크게 수정하지 않고 중국과의 ECFA(The Economic Cooperation Framework Agreement; 경제협력기본협정)을 체결함으로서 대외적으로는 "차이완(Chiwan - China + Taiwan)[8] 시대 개막"이라며 주목을 받았지만 대내적으로는 민진당과 국민 다수의 반발을 받고 있다. 대만판 FTA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덕분에 2010년 11월경에 이루어질 5대 시장 선거[9]에서도 역시 대패를 할지 모른다는 예측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태권도에서 양수쥔 사건을 우려먹은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건 민진당이나 국민당이나 모두 다. 선거 결과는 국민당의 상처뿐인 승리. 선거 막판에 국민당 중앙위원이 총에 맞아 다치는 사고로 국민당 표가 집결하면서 다섯 곳 중에 세 곳을 차지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전체 득표에서는 민진당이 49.9%(377만2000여표)를 차지해 국민당의 44.5%(337만9000여표)를 5.4%포인트 앞섰다. 이건 이긴 것도 아니고 진 것도 아니여.
이러한 위기감 속에 펼쳐진 2012년 총통선거와 입법위원선거에서는 치열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반중국노선의 민진당의 집권을 원치 않은 중국의 지지와 대만해협의 대립상황을 원치 않은 미국의 암묵적 동의가 이루어지면서 국민당이 손 쉽게 재집권에 성공하였다(총통선거에서 과반 이상(51.6%) 득표, 지역구 선거에서 48:27의 대승). 하지만 이후엔 마잉주 지지율이 크게 떨어져서 10~20%대로 나오고 있고 국민당 지지율도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다. # 그의 지지율이 낮은 이유
결국 2016년 제14대 중화민국 정부총통 선거에서 민진당 소속 후보인 차이잉원이 당선되면서 대만의 정권은 다시 민진당으로 넘어갔다.
-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은 점, 이후 장기간의 독재, 직선제 후 여당 후보 당선, 아슬아슬한 표차로 승리한 야당의 정권 획득 2회, 이후 다시 이루어진 과거 여당으로의 정권 교체란 점에서 한국과 비슷하다고 외국인들에게 비교되기도 한다. (이 부분도 중국 국민당 항목에 좀더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하지만 정당의 수명이나 국회의원 선거 득표율을 보면 다른점도 많다.
- ↑ 단, 작은 나라는 있었다.
- ↑ 조선총독부는 내내 덴노 직속의 무관총독들이었다.
- ↑ 세계를 양분한 미국과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서 중국은 인도와 손잡고 제3세계 비동맹운동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 ↑ 동양의 진주로 여기는 홍콩문제도 상당한 변수였다. 좌우파를 막론하고 영국 정치권은 중국공산당군이 홍콩까지 집어삼킬까봐 두려워했다.
- ↑ 사실 주어가 없어도 문장에서 지목하는 대상이 명백할 시에는 법적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 쉽게말해서, 트위터에서 누군가를 없는일 만들어서 실컷 욕하고 '주어는 없습니다.'라고 적어놔도 결국은 고소크리를 먹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누군가를 근거없이 까는건 자제하도록 하자.
- ↑ 1946년에 장제스는 3당 훈정의 막후 공작을 추진하면서 중국 국민당과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 사회당의 정치인들을 차례로 초청하여 최고위급 관직에 등용을 약속했다. 여기서 3당 훈정은 강력한 총통제와 3개 정당의 연립내각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형식적인 헌정(憲政)과 실질적인 훈정(訓政)을 동시에 추구하는 1946년 체제를 가리키는 낱말이다. 곧이어 3당 훈정의 여당으로 변신한 중국 국민당과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 사회당의 정치인들은 연립내각의 여당으로서 중앙정부의 장차관으로 출세했다.
- ↑ 다만 대만독립 추진에 반발해서 중국이 각종 군사훈련으로 위기감을 조성하고 갖은 경제적 압박을 가했다. 또한 내부에서도 수십년간 국민당과 밀착돼있던 기업인과 부호들이 민진당의 경제개혁정책에 반발하면서 고의적인 막장 상황을 유도, 방치한 측면도 매우 크다.
- ↑ 사실은 양쪽 다 중국 정통 정부를 자처하고 있어서 정반대 의미인 하나의 중국이 먹힌다. 그러니 사실은 차이완이 아닌 차이나다.
- ↑ 한국으로 따지면 특별시와 광역시 선거로, 대만 전체 인구의 60%를 차지하는 선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