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완 섬의 역사 台灣史 | |||||||
선사 ~ 중세 | 근세 | 근대 | 현대 | ||||
타이완 섬의 선사시대 | 스페인 시기 (북부) | 정씨 왕국 | 청나라 시기 | 타이완 민주국 | 대만일치시기 | 중화민국 (국민정부) | 중화민국 |
네덜란드 시기 (남부) | |||||||
다두 왕국 |
일본 제국의 외지 | |||
외지 | 지역 | 시대 | 통치기관 |
화태(樺太) | 가라후토 ⒧ | 화태청 | |
조선(朝鮮) | 조센 | 총독부 | |
대만(臺灣) | 다이완 | 총독부 | |
남양(南洋) | 난요 | 남양청 | |
관동(關東) | 간토 | 관동청 | |
⑴ 가라후토는 1943년 이후 내지(內地, ないち, 본토)로 편입 |
대만일치시기 日本統治時代の台湾 臺灣日治時期 (정체) 台湾日治时期 (간체) | |
국기 | 국장[1][2] |
1895 ~ 1945 | |
위치 | 타이완 섬 |
수도 | 다이호쿠 |
정치체제 | 군주제 군정체제 |
군주 | 덴노 |
언어 | 일본어 |
성립 이전 | 타이완 민주국 |
멸망 이후 | 국민정부 |
1 개요
대륙의 기준으로 통칭 대만일치시기(台湾日治时期)라는 명칭으로 부르며, 자국에서는 편의상 '일치시대'나 '일본시대', '일거시대' 등으로 표현된다.
이 시기는 간혹 중화민국사의 일부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중화민국은 1945년이 아니라 1911년에 중국대륙에서 세워졌다가 1949년 대만 타이베이로 천도했을 뿐이라서 일제강점기의 대만은 중화민국과 큰 관련이 없다. 대만의 역사 관점에서의 일치시대는 19세기까지의 '청조 시대'와 현재의 '중화민국 시대' 사이의 계보에 해당한다.
2 명칭 논란?
이 문서의 항목명이기도 한 대만일치시기, 혹은 '일치시기', '일치시대'라는 명칭은 일반적으로 일본의 대만 식민 통치시기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이 명칭은 한국에서 쓰이는 '일제시대'와 비슷한 뉘앙스이다.
그러나 항목명과는 달리 대만에서는 이 시대를 일거시기(日據時期)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는 한국에서 말하는 일제강점기와 비슷한 뉘앙스로 일본의 대만 통치의 불법성을 강조하는 용어이다. 주로 중국 국민당 등을 중심으로 한 범람연맹 세력에서 사용한다. 마잉주 정권에서 있었던 역사 교과서 개정에서 '일치시기'를 '일거시기'로 바꾸어 논란이 되었던 적이 있다. 이런 논란 때문에 대만의 문서에서 日據와 日治를 병기하기도 한다.
3 상세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여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승전 대가로 대만과 요동을 합병한 후부터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그해 10월 중국 국민당 군대가 진주한 기간 사이에 해당하며, 따라서 한국의 일제강점기보다 15년 이상 긴 50년 반 정도를 일제 치하에 있었다. 이에 따라 일본의 타이완 총독부가 구성되었다.
흥미롭게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무단 통치 → 문화 통치 → 말살 통치(황민화) 테크를 비슷하게 밟았다.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에 맞서 저항했던 것도 비슷하다. 심지어 이들 사이에서 다시 좌우로 분열되어 서로 편가르고 싸운 것까지도(…). 다만 일제가 조선에 대해서는 소위 '내선일체'라 일컬을 만큼 (명목상으로나마) 서로 동화하려고 했던 것에 비해, 대만에 대해서는 일본과 이질적인 식민지라는 인식이 분명히 박혀져 있었고 그래서인지 조선과 달리 엄격한 자격요건에 한해서 창씨개명 정책을 진행했다. 위에서 까라고 해도 속으로는 대만인을 결코 일본인으로 취급하고 싶지 않다는 차가운 식민지주의 차별의식이었다.
대만총독부는 조선총독부와 비슷한 통치 단계를 펼쳤다. 다만 통치체제와 그 방식은 비슷했음에도 효과는 크게 달랐다. 조선총독부의 한반도 통치는 사실상 실패하고 말았지만, 대만총독부의 타이완 섬 통치는 큰 효과를 보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오늘날 한국인과 대만인과의 일제강점기 인식과 평가는 크게 다르게 되었다.
3.1 초기 통치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인해 청으로부터 타이완 섬을 할양받은 일본 제국은 타이완 섬에 상륙했다. 그러나 대만인들, 특히 그 중 청나라의 관료들은 일본 제국의 통치에 강하게 저항하였으며, 청나라의 타이완 섬 할양을 '매국행위'라고 비난하였다.
1895년 5월 25일 당경숭과 구봉갑, 유영복을 중심으로 타이완 민주국이 건국되었으나 일본 제국이 대만총독부 총독으로 임명한 가바야마 스게노리(樺山資紀)[3]에게 진압당하고 동년 10월에 멸망하고 만다.
타이완 민주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1902년까지 7년 동안 대만인들은 산발적인 저항운동을 벌였으며 이는 일본 제국 정부에게 재정적 부담을 주었다. 이 때 총독부 지출이 수입의 3배를 넘었으니 그 부담을 알 만 하다. 그래서 당시 제국의회에서는 타이완 섬을 프랑스에 팔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다행히(?) 4대 대만 총독 고다마 겐타로가 타이완 섬의 지정학적 가치의 중요성(일본 남부에 대한 방어요충지)을 역설하고, 타이완 섬을 통해 일본도 서구 열강에 맞서 식민 통치를 할 수 있음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여 매각 계획은 철회되었다.
1902년 이후에는 저항운동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타이완 섬 사회는 안정되었으며 이후 총독들과 관료들이 식민지 대만의 경제 발전을 위한 통치를 펼치면서 대만총독부는 본격적으로 타이완 섬의 재정자립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 때 고토 심페이 등 유능한 관료들이 대만을 통치하면서 타이완 섬의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3.2 문관 통치
총독의 권한이였던 타이완 섬 주둔군 지휘권이 군사령관에게 이양된 이후, 타이완 섬에서는 문관이 총독으로 임명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조선총독부와 달리 실제로 문관 총독이 임명되었다. 문관 총독들의 통치에 의해 타이완 섬의 근대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3.3 후기 통치
1936년부터 대만총독부에 무관 출신 총독이 임명되기 시작했다. 일본 제국의 무분별한 전선확대로 인해 이뤄진 조치였다. 고바야시 세이조(小林躋造), 하세가와 기요시(長谷川清), 안도 리키치(安藤利吉) 모두 무관 출신이였다.
특히 이 시기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병력 부족을 느낀 일본 제국이 식민지에서도 징병이 이루어졌다. 약 20만 명의 대만인들이 동남아 전선으로 차출되었다. 결국 일본 제국이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1944년 대만 총독에 임명된 육군대장 출신 안도 리키치를 마지막으로 대만총독부는 폐지되었다. 타이완 섬의 일제강점기 역시 종료하였다.
4 결론
사실 일제에 점령되기 전부터 이미 청의 속령으로서 받는 대우도 찬밥이었기에, 적어도 조선에 비해서는 주민들이 '탄압'이라고 느끼는 정도가 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일본 제국의 통치가 안정화되자 주민들의 저항도 적어졌고, 일제 역시 대만에서는 상당히 유화적인 통치를 했었다. 이 때문에 "우리도 일본인 될래요"라며 탄원이 빗발치는 일도 있었다(…) 심지어 해방 당시에 철수하는 일본총독부에게 "우리도 따라가면 안되냐?"고 할 정도였다. 심지어 조선에는 규정에만 있을 뿐이지 실상 한 번도 오지 않은 문관 총독이 대만에는 있었다. 그래서인지 타이완 국립대학은 서울대학교와 달리 제국대학 시기를 긍정한다.
애초에 대만이 독립국으로서 제대로 된 지위를 누린 것은 전체 역사에서 극히 한시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지금조차도 독립국이라기보다 대륙 세력의 강점기라고 할 수 있으니까.[4] 그래서인지 식민 지배를 겪었음에도 대만인들의 일본/일본인에 대한 감정은 한국에 비하면 그리 나쁜 편이 아니다.
5 관련 문서
- 대만총독부 - 일제가 타이완 섬을 통치하기 위해 세운 기관. 행정 조직과 행정 구역, 장관 등은 이 문서 참고.
- 타이완 섬의 역사
- 청나라 치하 타이완 섬
- 시모노세키 조약
- 한국의 일제강점기
- ↑ 이미지 출처
- ↑ 예전에 중화민국 여권에 '대만국' 국명 및 휘장 스티커 붙이기 운동이 일어난 적이 있는데, 배포된 스티커 중에 대만총독부 휘장이 그려져 있는 스티커가 있었다.
- ↑ 세이난 전쟁에서 활약한 군인으로 당시 일본 해군 대장이였다.
- ↑ 중화민국=대만으로 한정해서 본다면 대만은 사실상의 독립국 지위를 누리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지만, 중화민국은 본래 대륙을 통치하는 국가로써 세워졌으며, 그래서 대만의 지위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논란이 있다.
사실 대부분의 대만인도 대륙에서 이주온 이들이라 한족이 모두 대륙으로 다시 이동하지 않는 한 대만은 언제나 대륙 세력의 강점기라고 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