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 랜드리

dm_130602_NFL_20Greatest_8_Tom_Landry.jpg

이름토머스 웨이드 "톰" 랜드리
Thomas Wade "Tom" Landry
출생~사망1924년 9월 11일 ~ 2000년 2월 12일(75세)
출신지텍사스주 미션
대학교텍사스 대학교
휴스턴 대학교
포지션코너백
선수 경력뉴욕 양키스(AAFC) (1949)
뉴욕 자이언츠 (1950~1955)
지도자 경력뉴욕 자이언츠 (1954~1959, 수비 코디네이터)
댈러스 카우보이스 (1960~1988, 감독)
1966 NFL 올해의 감독상 (AP 선정)
조지 할라스톰 랜드리돈 슐라/조지 알렌
1966 NFL 올해의 감독상 (UPI/스포팅 뉴스 선정)
조지 할라스톰 랜드리조지 알렌
1975 NFL 올해의 감독상 (UPI 선정, NFC)
돈 코릴톰 랜드리잭 파디

1 개요

NFL 전 감독, 2015년 기준으로 NFL에서 5번째로 많이 우승한 감독[1]이자 두 번째로 오래 한 감독.[2]

2 일생

2.1 선수 시절

학창시절부터 미식축구와 야구에서 활동했으며, 텍사스 대학교에서 산업공학을 공부하다가 2차 대전에 공군으로 참전했다가 1946년에 학교로 복귀하였고, 프로 선수 생활 도중인 1949년에 휴스턴 대학교로 진학, 1952년에야 학업을 마쳤다.

f55b-152.jpg
1949년에 AAFC 팀인 뉴욕 양키스[3]에 입단했으나, AAFC가 해체되자 NFL 팀인 뉴욕 자이언츠로 이적, 선수생활 6년동안의 실적은 별 볼일 없었다.

2.2 감독 시절

Landry.jpg
뉴욕 자이언츠 코치 시절의 모습. 맨 오른쪽이 빈스 롬바르디.

선수생활 도중인 1954년에 뉴욕 자이언츠의 수비 코디네이터로 부임, 당시 감독이던 짐 리 하웰(Jim Lee Howell) 옆에서 5년동안 코치수업을 하다가 1960년에 댈러스 카우보이스가 창단되자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창단 첫 해에는 신생팀이라 그런지 12전 1무 11패라는 최악의 성적으로 시작, 이후 1964년까지 하위권을 맴돌다가 1966년에 디비전 1위를 차지하면서 20여년간의 위닝시즌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지구 1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66년과 67년엔 모두 자신의 동료이던 빈스 롬바르디 감독이 지휘하는 그린베이 패커스에게 무릎을 꿇었으며 다음해, 다다음해에도 이와 비슷하게 연거푸 안습의 대명사 클리블랜드 브라운스에게 졌고 처음 진출한 제 5회 슈퍼볼에서는 볼티모어 콜츠에게 16대 13으로 패하면서 콩라인에 가입하고 말았다... 안습...

landry1.jpg
그것 때문에 사람들은 댈러스는 잘하는 팀이긴 하지만 큰 경기엔 약한 팀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댈러스는 다음 해인 71년 제 6회 슈퍼볼에서 마이애미 돌핀스를 24대 3으로 발라버리면서 사람들의 이 말을 망언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또다시 진출한 10회(75년), 13회(78년) 슈퍼볼에서는 모두 피츠버그 스틸러스에게 패했으나 12회(77년) 슈퍼볼에선 덴버 브롱코스를 27대 10으로 물리치며 두번째 슈퍼볼을 차지했다. 결국 70년대에만 슈퍼볼에 5번 진출하여 두번 우승.

이렇게 댈러스가 70년대에 순식간에 강력한 팀이 된 것은 쿼터백 로저 스타우벅(Roger Staubach)와 디펜시브태클 밥 릴리(Bob Lilly), 랜디 화이트(Randy White), 디펜시브백 멜 렌프로(Mel Renfro), 러닝백 토니 도셋(Tony Dorsett)의 활약 덕분이었으며 이들 다섯은 후에 모두 명예의 전당에 들어갔다.

70~80년대초까지 댈러스 카우보이스는 미국을 상징하는 카우보이를 팀의 상징으로 했기 때문에 미국의 팀(America's Team)으로 불렸다. 댈러스는 유명한 치어리더단을 가지고 있었고, 기념품과 댈러스 뉴스위클리와 같은 잡지, 로고가 박힌 의류 등을 판매하였다. 이후 이런 것들은 다른 팀들도 하나 둘씩 따라하기 시작했고, 댈러스는 연이어 승승장구하게 된다.

그러나 좋은 일이 있다면 나쁜 일도 있는 법. 1981년 NFC 컨퍼런스 결승전에서 조 몬태나에게 The Catch라고 불리우는 극적인 역전 터치다운을 허용한 후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의 전성기의 도래와 함께 1970년대의 '미국의 팀'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나마 85년까지는 위닝시즌이었지만, 번번이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하면서 70년대와 비교하면 임팩트가 약했고 70년대의 전성기를 기억하는 팬들에게는 그 정도로는 성에차지 않았다. 그리고 팀의 몰락은 가속화되어 86년부터 90년까지 암흑기를 보내면서, 조 몬태나와 스티브 영등 레전드 쿼터백이 연달아 등장한 신흥 명문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가 리그의 맹주가 되는 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1988년 시즌이 끝난 이후에 제리 존스가 구단을 인수했고, 새 구단주인 제리 존스는 랜드리 감독 대신 마이애미 대학 감독인 지미 존슨(Jimmy Johnson)을 영입했다.. 이로써 랜드리는 28년간의 감독 생활에서 은퇴하게 된다.

그런데 랜드리는 그 때까지 통산 270승을 달성하여 NFL에서 가장 많은 승수를 달성한 감독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명장을 내친 구단주에게 당시 사람들은 맹비난을 가했다.

2.3 은퇴 이후

1990년 프로 미식축구 명예의 전당과 1993년 텍사스 스타디움 명예의 전당에 올랐으며, 2000년 2월 12일에 백혈병으로 투병 도중 세상을 떴다.

2.4 업적

톰 랜드리는 미식축구계의 리누스 미헬스, 아리고 사키에 비할 수 있는 현대 미식축구 전술의 아버지인 인물이고 특히 수비전술을 현대적으로 정립한데 기여한 가장 창조적인 미식축구인이라는 평가를 받는 코치이다.

과거 럭비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러닝백이 달리는 게 중심이었던 과거의 풋볼은 공격팀 7명이 LOS에 정렬하면 같이 맞불을 놓는 7-다이아몬드 혹은 7-2의 흐름이 일반적이었다. 언제나 구기종목에서 공수의 기본은 선수와 선수의 맨투맨 대응이기 때문에 수비수는 항상 공격수에 1:1로 따라가기 위해 숫자를 맞춰야했고 늘 수동적일수 밖에 없었다. 톰 랜드리는 이때 공격팀과는 달리 수비팀은 공 스냅전에 LOS를 넘지만 않으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규칙에 주목하여 수비 라인맨이 스냅 전에 자유롭게 위치를 바꾸는 변화를 시도했다. 축구로 치면 오버래핑,압박수비,포지션 스위치를 총망라한 유기적인 수비전환으로 공격수들의 각개격파를 노린 것.

이로 인해 공격수들은 수비수들이 눈앞에서 위치를 자유자재로 바꾸는 걸 보고 전술적 혼동을 받게 되고 이로 인해 수비수들이 오히려 경기 주도권을 쥐게 되는 변화가 일어났다. 톰 랜드리의 시도를 통해 현대 미식축구의 수비는 단지 공격수들의 볼 움직임을 따라가는 것이 아닌 공이 움직이기 전에 미리 공격수를 쓰러뜨린다라는 근본적인 마인드 변화가 생겼고 이런 적극적인 공세의 수비라는 개념이 바로 패스러쉬의 정립. 댈러스 카우보이스의 시대를 낳게한 원동력이다.

그런 수비개념의 변화에 따라 다시 정리되어 확립된 수비체계가 바로 현대 미식축구의 기본 수비스킴중 하나인 4-3 디펜스이다. 기존 사람수대로 붙던 수비 라인맨들의 숫자를 줄이고 이를 라인배커로 대체해, 이들의 유연한 수비라인 참여 혹은 커버플레이로 공격진의 다양한 패턴을 하나의 포메이션에서 변용하면서 대응하게 된 것.

이 수비에 대응하기 위해 빌 월시가 개발한 것이 바로 웨스트 코스트 오펜스로 "수비수 니들이 스냅전에 움직인다고? 그럼 우리도 스냅전에 전술을 바꾼다!."라는 개념에서 시작한 공격 전략이다. 톰 랜드리가 코치 커리어의 끝을 맞을때 등장했던 팀이 80년대의 팀이자 웨스트 코스트 오펜스의 원조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와 그 야전사령관 조 몬태나였음을 상기하면, 그 나이너스를 상대로 벌였던 역사적인 경기인 1981년 NFC 챔피언쉽, 그리고 이 경기의 결승 터치 다운 패스를 잡아낸 드와이트 클락의 The Catch가 미식축구 역사의 가장 거대한 변화의 물결의 시작을 알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 1위는 돈 슐라(328승)
  2. 1위는 얼 램보(1919~1949(1920년부터 따진다면 29년), 그린베이 패커스)
  3. 그 야구팀과는 관계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