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한의 역대 황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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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 | 통종(統宗) | |
시호 | 효성황제(孝成皇帝) | |
연호 | 건시(建始, BC 32년 ~ BC 29년) 하평(河平, BC 28년 ~ BC 25년) 양삭(陽朔, BC 24년 ~ BC 21년) 홍가(鴻嘉, BC 20년 ~ BC 17년) 영시(永始, BC 16년 ~ BC 13년) 원연(元延, BC 12년 ~ BC 9년) 수화(綬和, BC 8년 ~ BC 7년) | |
성 | 유(劉) | |
휘 | 오(驁) | |
생몰기간 | BC 51년 ~ BC 7년 | |
재위기간 | BC 33년 ~ BC 7년 |
成帝
(BC 51~7)
전한의 12대 황제. 묘효는 통종(統宗). 효성황제(孝成皇帝). 재위 기간 BC 33년 ~ B7년.
외척인 왕씨 일족이 권력을 잡아서 횡포를 부리자 황제는 무력해져갔다. 즉위 초에 맏사위인 함평후(咸平侯) 왕봉(王鳳)을 대사마 겸 대장군으로 삼았고, 이어서 다른 사위들인 왕담(王譚), 왕상(王商), 왕립(王立), 왕근(王根), 왕봉시(王逢時)를 제후로 삼았다. 이들을 제후로 삼을때 날씨가 요동치고 황색 안개가 끼어 불길한 징조를 나타냈다 한다.
왕봉의 뒤를 이어 왕상과 왕근이 대권을 잡았는데, 이들 왕씨 일족으로 고위직을 차지한자가 25명이나 되었고, 그 외의 관직도 왕씨가 독점하여 닥치는대로 뇌물을 받아 조정 기강을 개판으로 만들었다. 심지어 왕봉이라는 성제의 외삼촌이 정권을 잡고는 무엄하게도 임금의 거처인 궁정을 빌린 일이 있었다. 게다가 왕봉은 집을 붉은 색으로 칠하고 토산점대(土山漸臺)도 세웠다.[1]
이렇게 개판이 되니 상소가 빗발쳤지만 성제는 대놓고 무시. 점점 망한 나라길로 가는 것이다. 결국 야심가 왕망이 출현, 후손들을 등쳐먹고 찬탈을 하게 된다.
굳이 아름다운 일화를 꼽아본다면, 성제의 황태자 시절의 글 스승으로 있었던 장우(張禹)라는 사람이 왕씨 일파에게 아첨하고 간신짓을 했는데, 이를 본 괴리현(槐裏縣)의 현감인 주운(朱雲)이라는 사람이 황제를 알현한 한 자리에서 '간신배를 처단하십시오' 라고 말했다. 성제가 '간신배가 누군데?' 라고 묻자 주운은 '너님 스승 장우요' 라고 대답했다. 일개 고을 현감이 자기 스승을 욕한 것에 빡친 성제는 노발대발해서 '저 놈의 목을 베어라' 라고 소리쳤다. 주운이 질질 끌려나가다가 난간을 잡고 부러지도록 버티면서 '전 걸왕(桀王)이나 주왕(紂王)에게 죽은 충신들처럼 죽을수 있지만, 앞으로 우리 폐하는 재난이 끊이지 않을 겁니다' 라고 소리쳤다. 이에 좌장군으로 있던 신경기(辛慶忌)가 '저 놈 입은 험해도 강직하거든요. 용서하세요' 라고 빌어 주운은 목숨은 건졌다. 얼마후 난간을 수리하고자 했는데 성제가 그만두라고 했다. 이유인즉슨 '그거 그대로 남겨두어서 주운이 직언한 사실을 기리는 징표로 삼으리라.'
이 사실만 보면 나름 개념군주처럼 보이지만, 문제는 개념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것과 그것을 실천하는 것의 차이. 직언을 끝까지 듣기는 들었지만 막상 실행한 적은 거의 없다. 즉, 폭군 소리 듣기 싫어서 신하의 간언은 다 들었지만 막상 행하지는 않은 것. 왕씨 일가에 대한 상소만도 산처럼 쌓일 지경이었지만, 상소를 거부하지는 않고 받기는 다 받았는데 무시한 셈.
왕씨도 왕씨였지만 성제 본인도 행실에 꽤 문제가 있어서 취미가 사복차림으로 밖으로 몰래 나가 닭싸움과 경마로 내기하기, 게다가 부평후(富平侯) 장방(張放)이라고 성제의 총애를 받던 신하가 있었는데, 성제는 밖에 나돌아다니다가 누가 신분을 물으면 '나 장방님 하인이에요, 헤헤' 라고 대답.
사실 중국에서 성제가 유명한 이유는 본인보다는 2번째 황후인 효성황후(孝成皇后) 조비연(趙飛燕) 때문이라고 한다. 언제나처럼 사복차림으로 누이 양아공주(陽阿公主)의 집에 갔다가 춤추고 노래하던 조비연을 보았는데, 한눈에 홀딱 반해서 후궁으로 삼았고 매우 총애했다. 조비연의 원래 이름은 조의주(趙宜主)였으나 워낙 몸이 깃털처럼 가볍고 날아다니는 것처럼 춤을 춰서 이런 별명이 붙었다. 얼마나 몸이 가벼웠느냐면 성제와 같이 뱃놀이를 즐기다가 배가 흔들렸는데, 춤을 추던 조비연이 빠지려 하자 성제가 팔을 뻗어 조비연의 발목을 잡았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도 춤을 멈추지 않고 성제의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추었단다.
조비연은 성제의 본처인 허황후(許皇后)[2]를 '성제를 저주한다' 라는 명목으로 참소했다. 성제는 허황후를 폐비시키고 칙령을 내려 자결하게 했고 조비연을 새 황후로 삼았다. 그런데 이후 그녀는 성제의 아이를 낳은 후궁 및 그 소생들을 떼몰살시킴으로서 당대에 적지않은 악명을 얻었다.
게다가 조비연에게는 합덕(合德)이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성제는 합덕도 총애하여 후궁으로 삼았다. 기록으로는 합덕은 조비연을 능가하는 미모의 소유자로서, 조비연이 차츰 나이를 먹어가자 '이러다 나 소박맞으면 안 되니까 동생을 끌어들여서 황제에게 주면 동생 봐서라도 나 내치지는 않겠지?' 라는 생각에 조비연이 합덕을 추천했다고 한다. 결국 성제는 합덕의 침실에서 옷을 갈아입다 쓰러져 붕어하게 된다.[3] 애제 때에 조비연을 탄핵하는 여론이 있었으나 '태후(조비연)가 성제의 서자들을 죽인 것은 바로 어지신 폐하(애제)를 제위에 모시기 위해서였다'라는 애널써킹을 애제가 매우 좋아했기 때문에 여전히 권세를 누릴 수 있었다. 그녀는 결국 평제 때 탄핵되어 서인으로 강등, 빈곤하게 살다가 자살했다. 합덕은 애제 시절에 행해진 탄핵 때 미리 겁먹고 자결.
다른 것은 몰라도 외척을 대거 등용함으로서 전한 멸망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것으로는 어느 정도 알려진 황제라고 할 수 있다. 자식이 없어서 이복동생 정도왕 유강의 아들이자 조카 유흔이 뒤를 이어 애제가 되었다. 정확히는 후궁들이 아들을 몇 번 낳았는데 요절하거나 자식을 못낳던 조비연 자매에 의해 살해되어 성제의 뒤를 잇지 못한 것이다.
여담으로 조비연과 관련된 고사성어로 연수환비(燕瘦環肥)와 연탁황손(燕啄皇孫)가 있다. 연수환비는 조비연은 말랐으나 미인이었고 양귀비(양옥환)은 뚱뚱해도 미인이었다는 말에서 나왔고 연탁황손은 조비연은 성제가 다른 후궁들에게서 황자를 볼 때마다 황자들을 살해한 고사에서 나왔다.
- ↑ 거처에 붉은 색을 칠하거나, 누대를 세우는 것은 황제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대놓고 맞먹은 셈.
- ↑ 선제의 아내인 공애황후 허씨의 조카. 그러니까 성제의 아버지인 원제랑 같은 항렬이다.
- ↑ 고대의 두리뭉실한 표현이라는 것을 유념하자. 복상사를 에둘러 표현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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