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역대 황제 | |||||
전한 15대 정안공 | ← | 1대 가황제 왕망 | → | 현한 1대 경시제 |
묘호 | 없음 |
시호 | 없음 |
호칭 | 가황제(假皇帝) |
연호 | 시건국(始建國, 9~13) 천봉(天鳳, 14~ 19) 지황(地皇, 20~23) |
성 | 왕(王) |
휘 | 망(莽) |
생몰기간 | 기원전 45~ 서기23 |
재위기간 | 8~23 |
1 소개
왕되고 망한 인물
우왕~망했당~
삼국시대 이전을 기준으로 나라를 말아먹거나 찬탈한 역적들로 평가받는 망탁조의의 필두이며, 후세 사람들의 평가를 보았을 때는 약간이나마 재평가의 기회를 얻은 조조와는 달리 현대 이전까지 전형적인 위선자 원톱으로 통했다. 사마의도 삼국지 덕분에 부각된 거지 역사적인 관점으로는 좋은 취급을 받지 못하며, 뭐 동탁이야 위선자도 아닌 그냥 악당 취급.
오죽하면 왕망의 신나라가 엄연히 있건만 중국 왕조의 변천사를 논할 때 신나라는 쳐주질 않는다. 한나라의 허리를 자르고 들어선 왕조임에도 정통성을 중시한 중국의 전근대 역사가들은 단 한 명도 예외없다 장담할 수 있을 만큼 유교적 역사관을 충실히 따라 왕망과 신나라를 적법한 왕조로서 인정하지 않았다. 현대 역사교육에서도 없다시피 한 신 왕조의 비중 상, 중등교사 임용고사에서나 왕망의 시대착오적 토지개혁 정도나 문제로 나올까 말까 한 수준이고, 한국에서 시행중인 중등 교육과정 내의 동양사 파트에서는 은-주-춘추전국시대-진-한-위진남북조 순서로 고등학생에게 중국사를 가르친다.
전한 말기의 권신으로 선제의 치세였던 초원 4년(기원전 45)에 태어났다. 그의 조상은 전국시대 제나라의 왕이었으며 그는 제나라 마지막 왕 전건(田建)의 손자로 제북왕이었던 전안(田安)의 후예이다. 제나라 사람들이 전안의 집안을 왕가(王家)라고 불러서 아예 왕씨(王氏)로 갈았다고 한다. 원제의 황후 효원황후 왕씨의 조카로, 정권을 장악하고 황제를 폐위하여 스스로 황제가 되어 신(新)을 세웠다. 하지만 폭정과 실정을 반복한 탓에 여러 반란이 일어나 망했다. 그러니까 왕망은 자신이 세운 나라의 초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인 것. 이래서인지 명분론적으로 전한을 계승한 후한이 건국되면서 얄짤없이 역적으로 규정된 이래로, 어쨌든 후대로 이어진 왕조를 건설한지라 현대에는 창업군주로 인정받는 조조, 사마의와 달리 복권은 커녕 재평가도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일부에선 흉노에서 투항한 김일제의 외가쪽 친척이라 추정하기도 한다.
2 생애
2.1 한나라 시절
자는 거군(巨君)으로 산동 지역인 위군(魏郡) 원성현(元城縣) 사람이다. 아버지 왕만(王曼)은 일찍 죽었는데 왕망은 그의 차남이었다. 왕망의 숙부들은 모두 후작의 지위에 있었지만 왕망은 외롭고 가난했다. 왕망의 고모 효원황후 왕씨는 왕망과 그의 어머니를 동궁에 데려와 부양했는데 왕망은 절개를 굽혀 공손하고 검박하며 부지런히 일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또 어머니와 과부 형수를 섬기는데 공손하고 주도면밀하였으며 밖으로는 영준한 인물들과 사귀고 안으로는 여러 숙부들을 섬기면서 예의를 지켜왔다. 왕망의 백부이자 대장군이었던 왕봉이 병석에 있을때 왕망은 병문안을 정성스럽게 했는데 달포동안 옷을 벗고 잠자리에 든 적이 없었고 스스로 직접 약을 달이고 맛을 볼 정도였다.
왕봉은 죽기 전에 누이 효원황후와 조카 성제에게 왕망을 돌봐주라고 부탁하여 왕망은 황문랑, 사성교위가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당시 명사들과 그의 숙부 성도후 왕상, 태후 등은 모두 왕망의 행각을 성제에게 고했고 성제도 결국 왕망이 어질다고 인정했다. 영시 원년(기원전 16년), 신도후, 기도위, 광록대부, 시중으로 승진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망은 오히려 더욱 검소하게 살고 의복과 물건을 손님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명사들을 문하에 끌여들여 많은 권문세가들과 사귀었다. 이에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져서 높은 벼슬아치들이 앞다투어 그를 추천하였고 수화 원년(기원전 8년), 왕망의 숙부 곡양후 왕근은 대사마였는데 병환으로 여러차례 사직을 청원했다. 이에 태후 왕씨 언니의 아들인 시중 순우장이 황제의 총애를 받았고 무엇보다 재능이 있어서 마땅히 왕근의 뒤를 이어야 했다. 하지만 왕망은 이를 시기하여 오히려 순우장이 성제의 황후였던 허씨[1]의 언니와 간통했고 허씨를 희롱하였으며 궁중 물품 천여만을 횡령했다고 무고하여 결국 순우장은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성제는 왕망을 오히려 충직하다고 칭찬하고 왕근 역시 추천하였므로 왕근의 뒤를 이어 대사마에 올랐다. 이때부터 왕망은 권력의 중심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이때 왕망은 자신의 명예를 위해 자기를 단속하고 부지런히 했으며 그의 처도 검소하여 공경과 열후의 부인들은 그녀가 손님을 맞이했을 때 하녀로 잘못 알 정도였다.
하지만 건평 2년(기원전 5년), 왕망은 부태후의 존호를 반대한 탓으로[2] 귀양을 갔는데 조정의 많은 관리들은 억울하다고 동정했고 왕망 자신은 두문분출하면서 그의 차남 왕획이 노비를 함부로 죽이자 아들에게 자살하라고 요구했고 이에 귀양 3년 동안 왕망의 죄를 씻어달라는 요구와 상소가 엄청나게 올라왔다. 결국 원수 원년(기원전 2년), 애제는 왕망을 수도로 불러들여 태황태후 왕씨를 시중들게 한다. 이 해 부태후가 죽고 이듬해에는 애제마저 죽었다. 결국 평제가 즉위하자 태황태후는 조서를 내려 대사마에 마땅한 자를 추천하게 했는데 결국 왕망이 다시 선출되었다.
이에 왕망은 대사마, 상서가 되었고 원시 원년(기원후 1년)에는 안한공에 올랐는데 세 번 사양한 후에야 이를 수락했다. 왕망은 태황태후가 늙어 정사를 귀찮게 여기자 대신들에게 '태후께서 춘추가 높으시니 작은 일까지 걱정하시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고 보오'라고 하니 태황태후도 스스로 안한공 왕망과 네명의 대신들이 정사를 의논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왕망은 평제의 외갓집이었던 위씨 일가가 권력을 얻을 것을 걱정하여 그들을 수도로 오지 못하게 금지했다가 나중에 위씨 일가를 멸족했는데 오직 평제의 어머니였던 위씨만이 목숨을 건졌다. 또 자신의 장녀를 평제에게 시집보내어 스스로 국구(황제의 장인)가 되어 더욱 권력을 튼튼히 다졌다.
또 종실과 대공신들의 후대를 높은 자리에 임명하고 원시 2년(기원후 2)에 전국에 한재가 들자 왕망은 돈 백만 냥과 땅 30경을 빈민들에게 주어 민신을 얻고 원시 4년(기원후 4)에는 8천 명, 이듬해에는 무려 48만여 명이 그에게 상을 내려야 한다고 청원을 올렸다. 이에 왕망은 앞에서는 이를 다 사절했지만 뒤에서는 오히려 사람을 시켜 자기의 공덕을 칭송하고 태평성대를 가장하게 하여 '지금은 관청에 송사가 없고 고을에 도적이 없고 들에 빈민들이 없으며 길가에 떨어진 물건이 있어도 가져가지 않는 태평성대'라고 조작했다.
2.2 신나라 건국과 병크
그런데 이 해에 평제가 자신의 외가가 박살난 것을 알게 되어 불만을 가지자 12월, 왕망은 평제를 독살하고 당시 겨우 2살이었던 선제의 현손 유영을 황태자로 책봉하여 유자영이라고 부르고 자기가 섭정하면서 섭황제를 칭했다. 이미 이 때부터 전한은 사실상 멸망한 상태였고 왕망은 선양이라는 목적으로 결국 초시 원년(8년) 11월에 결국 신나라를 세우고 수도 장안을 상안으로 고치고 한을 멸했다. 결국 그는 일명 '가짜 선양'의 시조가 됐는데 이러한 선양 방식은 무려 천 년 가까이 지속되어 북송 대에 이르러서야 이민족에 의한 정복왕조에 의해 끝났다.
이때부터 그는 대인배스러운 것들을 다 버리고 본격적인 삽질과 막장을 보여주었다. 재위 기간에 왕망은 전국의 토지를 왕전으로 고쳐 조정 소유로 귀속시키고 사사로이 매매를 금지했다. 또 관직 제도는 주나라의 제도를 본받아 오등작을 실시했고 화폐 제도를 개혁하여 장안, 낙양, 한단, 임치, 완, 성도 등의 전국 6대 도시에 오균사시와 전부관을 설치하여 오균육관을 실시했다. 이 오균육관에서는 외상을 주는 것과 돈을 빌려주는 것을 시행하고 물가를 관리하게 했으며 술, 소금, 쇠붙이 등의 세금을 매기게 했다. 그러나 이건 오히려 물가가 폭등하고 이래저래 제도가 복잡하여 기존 제도보다 훨씬 못하고 오히려 사회 혼란을 야기했다.
또 선제 이래로 흉노와 서역 여러 나라들과 평화롭게 지낸 것을 무시하고 전쟁을 감행했는데 왕망이 워낙 여기저기 적을 만들어놔서 주변의 민족들은 모두 왕망의 적이 되었다. 시건국 원년(9년)에 사신을 흉노로 보내 한나라의 책봉 인장을 '흉노선우새'에서 '신흉노선우장'으로 낮추게 하고 오환이 흉노에게 세금을 바치지 못하도록 했다. 이에 흉노는 대노하여 이듬해에 삭방에 쳐들어왔는데 12월, 왕망은 30만의 병력을 이끌고 흉노를 4년 동안 공격했으나 결국 국력을 거의 다 소모하고 얻은 것도 없게 되었다. 또 이해에 구정의 왕을 후작으로 낮추었는데 구정왕이 이를 무시하자 왕망은 구정왕을 회견을 빌미로 암살했다. 그리고 이때를 틈타 20만의 군사를 보내 구정을 공격하여 일단은 평정했지만 전염병에 태반이 죽고 오히려 서남 지역의 이민족들도 왕망에게 저항했다.
또 시건국 2년(10년), 왕망은 고구려의 군사들을 징발해 흉노를 치려했지만, 반발이 있자 엄우로 하여금 그 수장인 구려후(句驪侯) 추(騶)를 죽였다. 또한 고구려의 이름을 고쳐 "하구려"라 칭했으며, 그 우두머리 또한 하구려후로 낮추었다. 그러자 고구려인들은 이에 반발하여 변방을 약탈함이 더욱 심해졌다. 삼국사기에서는 이 내용을 다소 다르게 전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당시 고구려의 왕은 유리왕이었으며 당시에 죽은 사람은 고구려의 왕이 아닌 고구려의 장수인 연비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왕망의 과격한 대이민족 정책은 중국에 인접한 여러 이민족들의 거센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이들은 왕망에게 복종하기는 커녕 등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고구려의 사례는 당시 왕망이 실시한 이민족 정책이 사실상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이다.[3][4]
또 서역의 여러 나라들도 건드려서 서역왕을 후작으로 낮추고 그들을 모욕했다. 이에 언기가 가장 먼저 배신하고 시건국 5년(13년)에 서역 도호 단흠을 죽이고 흉노에 투항했다. 이듬해 왕망은 서역 여러 나라에 군대를 파견하여 언기를 습격하고 구자를 보호하게 했지만 이것도 대패하고 오히려 그들과도 단절되었다.
결국 왕망의 이러한 정책들은 국내와 국외 모두 적을 만들고 결국 자신을 파멸로 몰아가는 병맛스러운 짓이었다. 또 왕망은 신선과 귀신을 믿어 엄청난 돈을 들여 궁중에다 팔풍대를 짓고 구묘를 지어 수만에 달하는 군사와 죄수들이 죽어 나가고 국고가 엄청나게 나갔다. 이처럼 왕망은 정치가나 사상가가 아니라 권모술수를 쓰며 명예욕에만 사로잡힌 소인배었다. 사실 초시 원년(8년)에 재동 사람 애장을 시켜 천서를 위조하게 하여 '왕망은 천자가 틀림없노라'라고 조작하게 하고 주변 나라에 몰래 뇌물을 주어 귀한 조공을 받는 척을 하여 그의 시대임을 조작하게 했다. 또 왕망은 고조 사당에 가서 '황천상제와 고조 폐하의 위명을 이어받겠습니다'라는 깃발을 걸게 하고 유자영의 손을 잡고 울면서 '나는 이러고 싶지는 않지만 황천의 위명을 어길 수 없다'라며 황제가 되었다.
어쨌든 왕망은 대범한 풍도가 없어서 자기에게 순종하는 자는 등용하고 그렇지 않은 자는 죽였다. 충신들은 죄를 날조하여 죽였는데 자기의 가족들과 친척들을 가리지 않았다. 명성을 얻기 위해 차남 왕획을 자살하게 한 것 외에도 자기의 숙부 홍양후 왕립과 장남 왕우 등이 황제가 되는 것의 부당함을 건의하자 그들을 모두 죽였다. 또 이전에 섭황제 시절이었던 원시 7년(7년)에 동군태수 적의가 군대를 이끌고 봉기했는데 이에 왕망은 적의의 아버지를 포함한 그의 선조들의 무덤을 파헤쳐서 관들을 불태우고 삼족들 멸했으며 어린 아이들도 오독을 먹여 죽이고 모두 한 무덤에 묻었다. 적의도 곧 체포되어 주살되었으며 천봉 3년(16년), 적의의 동지였던 왕손경이 체포되자 그의 가죽을 발라버리라고 명을 내렸다.
또 그 외에도 일부 황족들의 반란이 일어나고 무엇보다 지황 2년(21년), 자다가 고조의 꾸지람을 받자 무사를 파견하여 고조의 사당에 들어가서 사당을 부수게 하는 졸렬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왕망의 재위 기간에는 이처럼 많은 돈이 들어가서 요역과 부세가 과중하였다.
2.3 반란과 죽음
결국 각지의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여 눈썹에 붉은 물감을 들인 도적들의 집단인 적미군을 비롯하여 황족 유현의 지도하에 유수(광무제) 형제, 그 외에 공손술, 연잠, 왕랑 등 군벌들이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에 왕망은 겉으로 태연한 척 하면서 머리와 수염에 물감을 들였는데 너무 걱정을 하느라 머리와 수염이 하얗게 샜기 때문이었다. 또 근심걱정 때문에 자다가도 잠을 이루지 못하면 병서를 읽다가 술과 당시로서는 엄청난 사치인 말린 전복으로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
결국 곤양대전에서 유현의 군대에게 대패를 당한 이래로 그 유현이 결국 낙양과 무관을 함락하자 대사마 최발이 울음으로써 하늘에 구원을 청하게 하자고 건의했다. 이에 왕망은 문무대신들과 남교에 가서 절을 하고 아침저녁으로 통곡했고 백성들 중에서 잘 우는 3천여 명을 뽑아 통곡하고 기도하게 했는데 최대한 잘 우는 자들에게는 낭중이나 낭관 자리를 주었다. 그래서 이 자리에 임명된 자들이 5천여명이나 되었는데 당연하게도 효과를 보지 못하고 경시 원년(23년)에 결국 유현의 군대가 장안의 선평문을 부수고 진입했다. 이에 왕망은 백만명의 군대도 무릎을 꿇게 만든다는 마력을 가진 북두칠성 모양의 두병을 들고 저항했지만 효과를 보지 못했고 다만 점대에서 무려 사흘이나 버텼지만....
결국 상인 출신 두오(杜吳)가 왕망을 살해한 다음 교위 공빈취(公賓就)가 왕망의 목을 자르고 그 옆에 있던 수천명의 군사들이 왕망을 난도질하여 갈기갈기 찢은 뒤 장군 신도건이 왕망의 머리를 완성으로 보내 효수하게 했을 때도 분노할대로 분노한 백성들은 왕망의 머리를 때리고 칼로 난도질하고 혀를 잘라 베어먹기도 했다. 그야말로 온 몸이 토막난지라 고우영 화백은 '항우는 죽어서 5동강났지만 왕망은 훨씬 더하게 그야말로 끔찍한 최후로 토막났다'고 십팔사략 만화에서 다뤘다. 다만 그 과정이 폭정에 핍박받은 백성들의 분노라기보다는 현상금에 눈이 먼 백성들의 탐욕에 의해 한푼이라도 더 벌려고 토막을 치는 아비규환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더이상 자를 몸뚱이가 없으니 주변에 있던 사람의 몸을 베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밟혀 사망한 자까지 나왔다면서 인간의 탐욕을 보여주는 거로 마무리했다.
한편, 왕망을 죽이고나서도 신도건,이송이 이끄는 유현 군대를 길라잡이하던 백성 반란군들은 궁궐을 약탈하고 마음껏 날뛰다가 나중에 들어온 신도건과 이송 장군이 이끄는 군대에게 잡혀 황제의 물건을 건드리는 자는 처형이라는 법으로 인하여 수천여명이 참수되었다.
슬하에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녀가 황황실주 왕씨이다. 황황실주는 평제의 황후 효평황후 왕씨였다. 황황실주는 아버지가 남편을 죽이고 과부로 지내다가 아버지가 살해당하는 모습을 보자 백성들을 볼 면목이 없다며 불타는 건물 안에 들어가서 스스로 자결했다. 이 때가 향년 33세. 비슷한 처지의 인물로 북주의 황후->황태후였다가 그녀의 아버지인 외척 양견이 정제(靜帝)에게 억지로 선양을 강요하여 황제로 즉위해버린 탓에 낙평공주(樂平公主)가 되어버린 양려화(楊麗華)가 있다.
광무제 유수는 곤양대전에서 왕망의 대군을 무찌르고 의양 땅에서 전국옥새를 얻고 나중에 황제가 된다. 유수 등의 의해 추대된 황족 유현은 남양에서 황제에 올라 경시제라고 칭했다. 경시제는 왕광에게 낙양을, 장안은 신도건, 이송, 우광, 등엽, 왕헌 등에게 공략을 맡겼다. 왕광은 쉽게 낙양을 떨어뜨렸고 장안도 위급하였다.
경시제는 마침내 한나라의 옛 수도 장안에 입성해 조회를 받았고 먼저 입성해 왕망을 살해한 다음 황제의 거마와 전국옥새, 깃발 등을 마음대로 사용하고 약탈을 저지르고 있던 왕헌을 죽이면서 왕위에 올랐지만 정작 백성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나중에는 오히려 백성들은 오히려 왕망의 시대를 그리워 했다. 그 뒤 경시제는 나중에 적미군들이 장안으로 들어올 때 잡혀서 유폐된 뒤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유현의 군사들은 장안에 입성해서 왕망의 죽은 조상들과 처자들의 무덤을 파헤져 관들을 모두 불태우고 남은 왕망의 일족들을 멸족했으며 왕망이 건축했던 건물들은 모두 불에 타면서 장안은 폐허가 되었다.
여담으로 서유기에 그의 이름이 언급된다. 왕망이 천하를 찬탈할 무렵이 손오공이 석가모니에게 벌을 받아 오행산에 갇혔던 때라고 한다. 신나라, 후한, 삼국시대, 위/진/남북조, 수나라 다 보고 당나라 돼서야 풀려난 손오공. 취소선은 그었지만 농담만은 아니다. 서진 때 무고(武庫)에 화재가 발생해 보물들이 소실되었을 때 왕망의 머리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비슷한 예로 육조시대 양나라에서 후경의 난을 일으킨 후경이 있다. 후경은 황제를 자칭하고 한(漢)나라를 세우는 등 기세등등했으나, 폭정을 하다 막판에 진패선, 왕승변 등에게 반격당하고 부하에게 피살당했다. 후경은 머리가 잘려 소금에 절여지고 소역이 있던 강릉으로 보내졌다. 후경은 난을 일으킬 때 양무제 소연을 유폐해서 아사시켰기에 소연의 아들 원제 소역이 후경의 머리를 아버지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한 제삿상에 올렸다. 제사가 끝난 후 후경의 머리는 썩지 않게 옻칠을 하고 물감으로 색을 입힌 다음 강릉 무기창고에 보관했다. 그 뒤의 후경의 머리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서위의 침입을 받을 떄 강릉이 폐허가 되면서 사라졌을 것이다.
3 평가
그냥 닥치고 개화기 이전 동양에서 가장 나쁜 놈을 꼽으라고 하면 주저없이 1순위로 꼽히는 인물.
고대 중앙 집권 사회에서는 역모죄가 가장 중대한 죄로 인식되었기에 그렇다. 왕망이 했던 행위는 흑역사이자 금기로 규정되었다. 현대에 하켄크로이츠를 비롯한 나치의 유물이 법으로 금지되고 있는 상황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또한 한을 멸망시킨 4대 주적인 왕망, 동탁, 조조, 사마의에서도 필두로 꼽히는데 후세 사람들은 이 4사람을 욕하는 말로 망탁조의(莽卓操懿)라 부르며 나라를 멸망시킨 매국노의 대명사가 되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중국역사상 본격적으로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도입하여 체계화한 인물이다. 사실 최초로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도입했다는 평을 받는 전한은 한고제 유방과 문경지치 시대에는 도교와 임협사상이 유행했고 한무제 시대에는 법가사상이 주류를 이루었다.
고조 유방은 향촌 깡패에서 시작한 인물인지라, 전한 초기에서는 신하들도 황제에게 무례한 표현을 어렵지 않게 구사했고, 유방은 대놓고 막말이었다. 육가의 제안으로 유교를 받아들이는데 이 배경중 하나가 위아래가 없었던 전한 초기 궁정의 분위기를 좀 바꾸기 위한 목적이란 이야기까지 있다.
이렇게 유가적 관리가 미약하던 시점에서 한무제가 정복사업을 하면서 통치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수단으로 법가적 관리가 대두되었으나 엄청난 부작용을 초래한 뒤 유교의 풍조가 점점 강해지더니 왕망으로 정점을 찍었다. 실제로 왕망의 정치는 주의 것을 본받았던 초기 유교 사상의 재현 그 자체였다. 문제는 지나친 복고주의였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개념없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로 왕망한 인물이다. 왕망의 행위는 700년도 더 된 방법을 후대에 이론만 가지고 재현한 방법이 먹힐리가 없기 때문에 실패한 케이스이다.
- 사유재산이 등장한지 한참도 지난 상황에서 공동소유 경작법인 정전제를 도입해 각계각층의 반발을 산다.
- 경전에 써진 방법을 일일이 따라하느라 관직체제가 쓸데없이 복잡해졌다.
- 관료들에게는 무조건 봉사하라고 해서 녹봉도 안 줬으니 조선시대 서리처럼 당연히 부정부패 및 착취로 전환 되는 길을 걸었다.
- 타국을 함부로 후(侯)로 낮추었는데, 이런 밑도 끝도 없는 중화사상으로 외국을 개무시해서 적의 침략을 괜히 불러오기도 했다.
중국 측 인터넷으로부터 비롯된 루머에서는, 모든 것을 주나라 시절로 돌린다는 정치적 신념에 의해 주나라 시절에는 두 글자 이름이 없었다는 이유로 두 글자 이름을 금지하고 죄인에게 두 글자 이름을 부여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실제 신나라 이후 후한과 위진남북조 시절에 외자 이름이 대세가 된 경향이 있기는 하나, 이는 단순한 관행이었지 특정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늘날 두 글자 이름이 대세인 것도 별 이유가 없는 단순한 관행인 것과 같다. 사실 왕망이 시행한 정책은 죄다 엎어져서 반대로 돌아갔는데, 이것만 왕망이 망한 뒤에도 이어졌다는 건 이상하지 않은가. 삼국지집해의 편저자 노필(盧弼)은 후한 시대에 이름이 전부 외자라는 건 깊이 살피지 않은 잘못된 설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는데, 실례로 삼국시대에 살았던 원희(元姬)나 만세(萬歲)[5]나 유지(攸之)가 있다. 더군다나 그 주나라 때에도 후직(后稷)이나 진탁(振鐸)이나 녹보(祿父)나 이오(夷吾)나 계찰(季札)과 같이 두 글자 이름은 있었다.
4 기타
한서 왕망전에는 교위 한위가 왕망에게 한 말의 식량도 안쓰고 배고프면 오랑캐의 고기를 먹고, 목마르면 그 피를 마시며 싸울거라는 식의 말을 했고, 왕망은 한위를 장군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 선제의 황후 공애황후 허씨(허평군)의 조카로 이름은 허과. 성제의 제1황후였으나 폐위되었다.
- ↑ 성제의 조카 애제가 뒤를 이은 후, 애제의 아버지가 황제로 추존되면서 애제의 할머니 소의 부씨가 태후가 된다. 그녀는 스스로 존호를 요구하고 친족들을 등용하라고 압박했다.
- ↑ 혹자는 기록에 나온 고구려를 고구려현으로, 죽은 구려후 추를 고구려현의 우두머리라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근거가 미약하며 실제로 이렇게 보는 학자도 얼마 없다. 왕망은 즉위 이후에 주변 이민족들의 왕을 후(侯)로 격하했는데, 구려후 추 또한 본래는 고구려왕이었으나 왕망의 이런 정책에 의하여 격하된 것이다. 기록에 보이는 구려후 추가 정말로 일개 고구려현의 우두머리였다면 애초에 왕을 칭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애시당초 고구려현이 속한 현도군은 기원전 75년경에 고구려의 원주민들의 거센 저항에 밀려나 다른 곳으로 이전되었기에 고구려현은 그저 이름만 유지했을 뿐이었다.
- ↑ 만화 바람의 나라에서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신뢰하여 고구려후 추가 죽었다는 기록을 잘못으로 보았고, 고구려의 장수인 연비가 대신 죽었다고 묘사했다.
- ↑ 주치의 넷째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