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코 브라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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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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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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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자라나라 머리머리를 시전해 줘야할 것 같은 괴악한 초상화도 있다. 화가가 위의 머리모양을 그리려다 비례가 망한게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한다.

Tycho Brahe.
본명은 튀게 오테센 브라헤 (Tyge Ottesen Brahe)
1546년 12월 14일 ~ 1601년 10월 24일

덴마크천문학자. 교과서에서는 지동설의 성립에 주목하는 탓에 잘 언급되지 않지만, 과도기적이었던 16 ~ 17세기 천문학계에서는 언급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 천문학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의미로 대단한 사람이다. 의 '티코 크레이터'는 이 사람의 이름을 딴 것이다.

2 천문학자로서

그는 '인간 천문대'로 불릴 정도로 엄청나게 시력이 뛰어난 걸로 유명했고, 이것이 그를 천문학자로 대성할 수 있게 만들어진 원동력이었다. 이 시력을 가지고 그는 엄청난 양의 정밀 관측을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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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것을 만들어놓고 의자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관찰하는 것이 그 시대의 관찰 방법으로 보는 사람과 각도를 불러주는 사람이 따로 존재했다. 이 방법으로 그는 초신성을 발견해 천구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였다. 초신성 사건은 당시 교회의 '중층적인 천구 중 가장 바깥의 천구는 영원불멸하다'는 천구 이론에 대하여 '영원불멸의 천구'에서 생사가 존재하는 별을 반례로 제시한 것이었다. 그는 그 '별'을 계속 관측한 끝에 이를 토대로 『신성에 관하여』라는 책을 냈으며, 덕분에 학계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후에 정확히 확인해 본 결과, 티코가 발견한 것은 그냥 신성이 아니라 초신성이었다.

한편 그 또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지동설에 대해 알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노력했다. 천동설을 따를 경우 금성의 위상 변화와 연주시차, 즉 금성이 새벽과 저녁에만 보이면서 보름달에 가까운 위상이 보이는 것을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문제는 천동설과 지동설 사이의 갈등을 해결할 열쇠였다. 티코 브라헤는 자신의 그 미친듯이 뛰어난 눈을 가지고 노력하나 결과는 참패.[1] 하지만 그는 주전원 같은 문제를 해결하며 교회의 심기를 거스리지도 않는 천동설과 지동설의 중간 단계인 자신만의 체계를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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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태양은 지구 주위를 돌고 다른 모든 행성들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것이 바로 그 체계. 교과서에서는 천동설과 지동설을 모두 받아들였다고 하여 절충설이라고 나와있다. 당시의 천동설과 지동설의 문제점을 모두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었으나, 요하네스 케플러식 지동설에 의해서 이 체계는 깨지고 만다. 하지만 지구과학 과목에서 죽어라 보게 되었다

이후 그 공로를 인정받아 덴마크의 프레드릭 2세로부터 Öresund해협의 Ven섬과 그 곳의 주민들을 하사받았고, 그 곳을 우라니보르크(빛나는 성)라고 이름붙인 뒤 자신의 천문학 기지로 삼았다. 여담이지만 그의 서재에는 유명한 천문학자들을 그린 벽화가 있었는데, 마지막 인물은 바로 자신이었다. 사실 당대의 입장에서는 코페르니쿠스갈릴레오 갈릴레이를 감안하더라도 틀린 말까지는 아니었으나 요하네스 케플러가 다음 세대라 묻혔다. 안습.

3 기행과 죽음

서로 자신의 말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여 결투하다가 코가 날라가서 으로 만든 코 대용품을 로 붙이고 다녔다고 한다. 그런데 2012년 그의 시신을 분석한 결과 그의 코 대용품은 금이나 은이 아닌 놋쇠로 만들어졌다는 게 밝혀졌다. 다음은 최초의 브라헤 전기에 나와있는 사건경위.

"티코는 갑자기 테이블에 앉아 있던 여러 동료들 중 파르스베르크와 언쟁을 시작했는데, 채 얼마가 되지도 않아 그 둘은 흥분한 채 덴마크 말로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서로 검투를 신청하게 되었고, 곧장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 당시 나의 할머니는 그들과 같은 방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덴마크 말도 알고 있었다. 나의 할머니는 테이블의 다른 친구들에게 그 둘 사이에 실제로 결투가 벌어지지 않도록 곧장 뒤따라가서 불행한 사건을 말려 달라고 요청했다. 그 둘이 교회 마당으로 나올 때까지도 다른 사람들은 시끌벅적한 파티를 이어갔는데, 결국 티코는 자신의 코를 베어가는 칼끝의 일격을 당하고 말았다."

그의 죽음은 이 사람이 컬트적인 인기를 끄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 귀족의 만찬에 초청받았는데, 오줌이 마려웠으나 체면 때문에 오줌을 너무 오래 참다가 너무 많이 참은 나머지 오줌을 쌀 수 없을 정도의 상황으로까지 악화되어 방광이 터져 버렸고, 11일 후에 죽고 만다. 왠지 이게 생각난다. 모두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였고, 그의 죽음을 슬퍼하던 수하의 요하네스 케플러는 티코 브라헤가 살아 생전에 보여주지도 않아 그토록 갈망하던 관측자료를 손에 넣는다. [2] 브라헤의 관측자료와 케플러의 천재성이 만나 이후 천문학, 나아가서 물리학등 과학의 나머지 분야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치게 된다.

티코 브라헤가 죽은 지 300년 후인 1901년에 그의 무덤을 열어 본 과학자들은 그의 시신에서 수은이 발견되었다는 이유로 케플러에 의한 독살설[3]을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2012년에 덴마크의 한 대학에서 그의 시신을 다시 분석한 결과 수은이 검출되지 않아서 독살설은 부정되었다.
  1. 연주시차의 경우는 단위가 도와 분을 넘어서 초 단위로도 소수점까지 떨어지는 매우 작은 차이다. 아무리 눈이 좋다 한들 맨눈으로 관측이 가능할 리가 없던 것.
  2. 사실 케플러를 브라헤의 제자라고 하는 건 어폐가 심하다. 미하엘 매스틀린이라고 멀쩡히 지도교수는 따로 있었던 데다가, 케플러가 브라헤 밑에서 일한 건 1년을 조금 넘길 시간 뿐이기 때문. 케플러와 브라헤의 관계는 천문대장 브라헤 밑에 포스닥 연구원으로 고용된 케플러라고 보는 게 정확한 이해이다.
  3. 위에서 알 수 있듯이, 케플러는 티코 브라헤의 관측 자료를 탐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