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의 역사 | |||||||
마케도니아 왕국 | →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 → | 로마 공화정 |
BC 300년 경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영역(파란색).
Πτολεμαϊκὴ βασιλεία (그리스어, 프톨레마이케 바실레이아)
Ptolemaic Dynasty, Ptolemies (영어)
1 개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사망한 BC 323년부터 BC 30년까지 이집트를 지배한 마케도니아 혈통의 왕조. 국력이 강성할 때는 키레나이카를 비롯한 동부 리비아, 누비아, 팔레스타인, 아나톨리아 해안 전역을 차지하여 명실상부한 동부 지중해의 지배자였다. 나일 델타 지역에 건설한 신도시 알렉산드리아를 수도로 삼았는데, 경제, 학술,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이자 고대 세계에서 가장 번영하는 대도시였다.
하지만 라이벌인 셀레우코스 왕조와의 잦은 전쟁, 소수의 이민족 특권 계급이 지배하는 기형적 지배 구조 때문에 군사력이 급속히 쇠약해져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다가 결국 로마 제국(당시에는 공화정)의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합병당했다.
시조인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의 아버지인 라고스의 이름을 따서 라고스 왕조(Lagid Dynasty)라고도 한다.
'고대 이집트 32왕조'라고도 부른다.
2 역사
2.1 건국과 번영
시조인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의 활동은 디아도코이 항목을 참고하라.
그 활동상에서 드러나듯이,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이집트에 안정된 기반을 확보한 뒤에는 다른 디아도코이들 사이에서 절대강자가 나타나지 않도록 술수를 부렸다. 따라서 많은 역사가들은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애초부터 통일 제국에 관심이 없었으며, 이집트에서 자신만의 왕국을 만들려 했다고 본다. 물론 프톨레마이오스 1세나 그 후계자들이 이집트 외부나 그리스 일대에서 활발한 정복이나 외교 활동을 벌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영토를 크게 넓히려는 것이 아니라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처럼 이집트 본토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또한 이집트 땅이 나일 강의 덕택에 미친 듯이 비옥하긴 하지만, 이집트에서 조달되지 않는 원료나 재화가 많았기 때문에 동지중해 일대를 장악하여 원활한 교역을 시도했다는 설명도 있다.
이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초기 전략은 성공하여, 부친으로부터 안정된 왕국을 물려받은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는 평화롭게 내정에 치중하며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그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3세 에우에르게테스는 강력한 국력을 바탕으로 셀레우코스 왕조와 전쟁을 일으켜 바빌론까지 밀어붙이는 기염을 토했다. 전쟁 이후 실제 획득한 영토는 시리아 일대에 한정되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동부 지중해 해안가 전체를 차지하여 왕조의 최전성기를 누렸다.
2.2 몰락과 쇠퇴
그 뒤를 이은 프톨레마이오스 4세 필로파토르 때부터 나라에 망조가 들기 시작했다. 비록 라피아 전투에서 안티오코스 3세의 어이없는 실수로 승리를 거두고 왕국을 무사히 보존하긴 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내정에 무능했으며 측근들의 부정부패를 막지 못했다. 그리스-마케도니아인들에 대한 이집트 피지배층의 반감도 극에 달하여 무려 20년에 걸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BC 205년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죽은 뒤 그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5세 에피파네스가 즉위하였으나, 나이가 어렸으므로 섭정을 둬야만 했다. 이에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3세가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와 동맹을 맺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해외 영토들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에게 해와 아나톨리아 일대의 전초기지들은 마케도니아에게 빼앗겼고, BC 198년 파니온 전투에서 안티오코스 3세에게 대패하여 코엘레-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유대를 상실하였다.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서방의 떠오르는 강국 로마와 동맹을 맺었고, BC 190년 안티오코스 3세가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로마에게 참패하면서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프톨레마이오스 6세 필로메토르는 BC 170년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에게 다시 쳐발렸고, 로마의 개입으로 간신히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안티오코스 4세가 허수아비로 세웠던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동생 에우에르게테스가 왕위를 주장하며 서로 다투는 통에 또다시 로마의 개입을 초래했다. 그 결과 이집트에 대한 로마의 영향력은 더욱 강해졌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더욱 막장이 되었다. 결국 프톨레마이오스 6세가 왕위를 지켰으나, BC 145년 안티오케이아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의 어린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7세 네오스 필로파토르가 왕위를 계승했으나, 곧 삼촌 에우에르게테스에게 제거당했다.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역사는 가족들 간의 치열한 왕위 쟁탈전으로 점철되었으며, 그 와중에 사실상 로마의 보호국 수준으로 전락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최후는 클레오파트라 항목을 참고하라. 유럽인에 의해 세워진 정복왕조가 결국 멸망하는 순간까지도 같은 유럽인에 의해 멸망했다
3 정치/사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셀레우코스 왕조나 박트리아 같은 다른 헬레니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소수의 그리스-마케도니아 엘리트와 군대가 다수의 바르바로이를 지배하는 통치 구조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세부적인 양상은 꽤 달랐다. 셀레우코스 왕조는 과거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었다는 것 말고는 별다른 공통점이 없는 다양한 피지배 종족들로 이루어진 제국을 다스려야 했던 반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차지한 이집트는 폐쇄적인 지형과 오랜 역사(이집트는 지금으로부터 2300년 전에도 수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땅이었다), 전통 문화를 가진 땅이었다. 게다가 이집트의 전통적 지배 계급인 사제 계급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관용 정책 덕택에 존속하여 토착 사회에서 막강한 권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두 금판 모두 프톨레마이오스 6세 필로메토르를 묘사한 것이다. 위는 헬레니즘 지도자로서의 모습, 아래는 이집트 파라오로서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성공적인 통치를 위해 토착 문화와 종교를 우호적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집트의 신들에게 경배하고 거대한 신전들을 지어 주며 사제 계급과도 손을 잡았다. 대중 앞에 나설 때는 항상 고대 파라오들의 복식을 갖추었으며, 심지어 전통에 따라 프톨레마이오스 2세 이후 모든 왕들이 친누나나 여동생과 근친혼을 했다.[1] 하지만 그들은 그리스-마케도니아인으로써의 정체성과 자부심, 바르바로이와 그 문화에 대한 거부감까지 완전히 떨쳐 버리지는 못했다. 역대 왕들 중 토착 이집트어를 할 줄 알았던 사람이 클레오파트라 7세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그러한 단면을 보여 준다.
예로부터 이집트는 비옥하고 풍요롭기로 유명한 땅이었고, 지중해 동부 일대를 장악하여 엄격한 국가 통제 아래 교역도 활발히 했으므로 부유하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울 지경이었다. 재무장관의 지위가 높아 재무장관=재상이었다. 수도 알렉산드리아는 서반구 최대의 대도시이자 교역의 중심지였으며, 유명한 알렉산드리아의 대도서관이 있는 만큼 학술과 예술, 헬레니즘 문화의 메카이기도 했다. 그리스-마케도니아인들은 왕조 내내 소수 특권계급으로 남았으나, 알렉산드리아를 비롯한 주요 도시에 거주하며 이집트인들과 통혼하여 혼혈 집단을 만들기도 했고, 헬레니즘식 교육을 받은 토착 이집트인들도 늘어났다.
또한 안정적인 통치를 위해 그리스-마케도니아 군인들에게 각지의 땅을 주어 정착시켜서 예비 군사력으로 삼았다. 셀레우코스 왕조 항목에도 나오지만 이런 정착 군인들을 카토이코이(Katoikoi) 혹은 클레루코이(Klerouchoi)라고 한다. 이들 중 상당수가 군대의 주력인 팔랑기타이로 복무했다. 그리스의 유입 인구가 줄어들자 그 대신 갈라티아의 켈트 병사들과 같은 여러 용병들을 적극 유치, 정착시켰다. 클레루코이들과 마찬가지로 땅을 주어 정착시켰는데, 그 땅(파윰 분지)엔 아직도 켈트 혈통의 후손들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이를 위한 재원은 이집트 농민들을 가혹하게 착취하여 충당했다.
하지만 왕조에 유입되는 그리스인 인구가 거의 단절되고 용병 고용에도 한계가 찾아오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군사력은 급속히 기울기 시작했다. 거기에 셀레우코스 왕조와의 시도때도 없는 전쟁은 그 한정된 병력 자원마저 빠르게 소모시켰다. 나중에는 도저히 군사력을 유지하지 못하여 라피아 전투 때처럼 이집트 병사들을 대거 훈련시키거나 이집트인들을 클레루코이에 받아들이는 등의 시도도 있었지만, 이미 불신과 반발심이 팽배하여 그다지 좋은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만약 승리한다면 승리에 공을 세운 이집트 병사들이 그 대가를 요구하고, 이를 그냥 받아들여 주면 그리스-마케도니아인들의 배타적 권력 독점에 차질이 생긴다. 실제로 라피아 전투에서 팔랑크스의 주력이 된 이집트 병사들이 분전하여 승리를 거뒀지만, 승전 후 기고만장하여 독립을 주장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이 바로 상술한 "20년에 걸친 반란"의 원인이다.
애초부터 피지배층과 유리되어 있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실은 강력한 군사력이 사라지자 빠르게 통치력을 상실하기 시작했고, 왕조 말기의 내분과 암투, 곳곳에 만연한 부정부패와 착취는 이러한 상황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클레오파트라가 등장하기 수십 년 전부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이미 시한부 선고를 받은 말기 암 환자나 다름없는 상태였던 것이다. 물론 망하는 그 순간까지도 막대한 부를 갖고 있었지만, 그것이 생명연장의 꿈을 이뤄주지는 못했다.
4 문화
시리아에서 셀레우코스 왕조가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집트의 역사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가장 큰 의의는 찬란한 헬레니즘 문화를 길러내고 정착시켰다는 점이다. 이 헬레니즘 문화는 이집트의 풍요로움에 힘입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막장이 돼 가는 와중에도 계속 번영하여 로마 제국 시대까지 이어졌고, 동로마 제국 초창기 제국의 가장 중요한 중심지 중 한 곳이 되게 해 주었다. 이슬람의 발흥 이후 중세 이슬람 세계의 찬란한 번영 역시 헬레니즘 문화를 그 근간으로 한 것이다.
이집트 고대 문자 해석의 단서로 유명해진 로제타 석이 만들어진 것이 이 왕조 시대이다. 왕조 특성상 이집트 문자와 함께 그리스 문자를 기록하였는데, 그 덕택에 이집트 문자 해석의 결정적인 돌파구가 생긴 것이다. 또 행정과 기록을 위해 대량의 파피루스가 사용되었는데, 후대에도 남은 것이 많아 연구에 도움을 주고 있다. 중부 이집트, 특히 파윰 지방엔 파피루스 조각들이 많이 보존되어 있다. 미라의 관을 채우기 위해 재활용된 것인데, 주로 하급 관료들의 휴지통으로 들어간 공문서들이다. 공식 서한, 청원서, 소환장, 증언 녹취록, 재판 기록 등등 많은 기록들이 남아 있다. 단 그리스어 파피루스가 3만여 개인데 이집트 민용 문자는 2천 개에 불과하므로 이 기록들만 가지고 이집트의 행정을 일반화하기는 어렵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상당히 복잡하고 발전된 행정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달리 말하면 이집트인들을 더욱 효율적으로 착취했다는 소리도 된다. 상술했다시피 교역도 엄격한 국가 통제 하에 두려고 노력했는데, 결과적으로 교역의 수익은 대부분 왕조에 바치는 세금으로 귀결되었다. 그나마 셀레우코스 왕조는 동방 지역에 많은 도시들을 건설하거나 자치권을 주기라도 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이집트에서 그야말로 세금만 바득바득 긁어갔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에게 몽땅 들어다 바쳤다 (...)
5 역대 왕
이름 뒤의 숫자는 후대 역사가들이 임의로 붙인 것이다. 당대에는 프톨레마이오스 다음에 오는 별명으로 구분했다. 별명의 뜻은 비고 란의 큰따옴표를 참고.
이름 | 재위 기간 | 배우자 | 비고 |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 | 305 - 285 BC | 베레니케 1세[2] | "구원자" |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 | 285 - 246 BC | 아르시노에 2세[3] | "형제를 사랑하는 자" |
프톨레마이오스 3세 에우에르게테스 | 246 - 221 BC | 베레니케 2세 | "후원자" |
프톨레마이오스 4세 필로파토르 | 221 - 203 BC | 아르시노에 3세 | "아버지를 사랑하는 자" |
프톨레마이오스 5세 에피파네스 | 203 - 181 BC | 클레오파트라 1세 | "신의 현신" |
프톨레마이오스 6세 필로메토르 | 181 - 164 BC | 클레오파트라 2세 | "어머니를 사랑하는 자" 1차 재위 |
프톨레마이오스 8세 에우에르게테스 2세 | 170 - 163 BC | - | 1차 재위, 형과 내분 |
프톨레마이오스 6세 필로메토르 | 163 - 145 BC | 클레오파트라 2세 | 2차 재위 |
프톨레마이오스 7세 네오스 필로파토르[4] | - | - | |
프톨레마이오스 8세 에우에르게테스 2세 | 145 - 116 BC | 클레오파트라 2세[5] | 2차 재위 |
클레오파트라 3세 | 116 - 101 BC | 공동 통치[6] | |
프톨레마이오스 10세 알렉산드로스 1세 | 107 - 88 BC | 베레니케 3세 | |
프톨레마이오스 9세 소테르 2세 | 88 - 81 BC | 클레오파트라 4세[7] | |
베레니케 3세 필로파토르 | 81 - 80 BC | [8] | |
프톨레마이오스 11세 알렉산드로스 2세 | 80 BC | 베레니케 3세[9] | |
프톨레마이오스 12세 네오스 디오뉘소스 | 80 - 51 BC | 클레오파트라 5세 | |
클레오파트라 7세 필로파토르 | 51 - 30 BC | 공동 통치[10] | 해당 항목 참고 |
- ↑ 이 때문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말기의 왕들은 유전적 문제가 생겨 대개 허약하고 단명했으며 자손을 많이 남기지 못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 왕조 말기는 피비린내 나는 정치적 혼란과 암투의 연속으로 제 명에 죽기 힘든 환경이었기 때문에 속단하기 어렵다.
- ↑ 넷째 부인. 첫째 부인은 타이스, 둘째 부인은 페르시아 귀족인 아르타카마, 셋째 부인은 디아도코이 중 하나인 안티파트로스의 딸인 에우뤼디케.
- ↑ 둘째 부인이며 여동생. 근친혼 전통의 시작이다. 첫째 부인인 아르시노에 1세는 디아도코이 중 하나인 뤼시마코스의 딸이며 프톨레마이오스 3세의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이혼당했다.
- ↑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어린 아들. 위에도 나오지만 삼촌인 프톨레마이오스 8세에게 살해당했다.
- ↑ 나중에 프톨레마이오스 6세와 클레오파트라 2세의 딸, 즉 조카인 클레오파트라 3세와 결혼했다. 나중엔 클레오파트라 2세가 반란을 일으켜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쫓겨나기도 한다.
- ↑ 116년부터 107년까지는 큰아들 프톨레마이오스 9세, 107년부터 101년까지는 작은아들 프톨레마이오스 10세
- ↑ BC 115년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와 재혼
- ↑ 남편이 죽고 6개월간 통치
- ↑ 결혼하자마자 암살했으나 며칠 못 가 그도 살해당했다.
- ↑ 프톨레마이오스 13세 테오스 필로파토르(51 - 47 BC), 프톨레마이오스 14세(47 - 44 BC), 프톨레마이오스 15세 카이사리온(44 - 30 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