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역사

그리스의 역사
Η ΙΣΤΟΡΊΑ ΤΗΣ ΕΛΛΆΔΑΣ
선사고대
미노아 문명미케네 문명암흑시대고졸기아테나이헬레니즘 제국
(안티노고스·
셀레우코스·
프톨레마이오스)
로마 제국
스파르타
마케도니아
중세근대
비잔티움 제국
(니케아·라틴제국·
에피로스·트레비존드)
오스만 제국제1공화국그리스 왕국제2공화국그리스 왕국그리스국
현대
그리스 왕국군사정권그리스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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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의 진화 과정…? 잠깐, 마지막이 무시무시하다

그리스의 역사를 다루는 항목.

1 고대

본래 고대 그리스는 다양한 부족들로 이루어진 여러 도시국가들의 연합이었다. 이것은 그리스란 땅 자체가 산이 많아 교통이 불편하여 도시간의 독립성이 컸던 이유도 있고, 민족 자체가 독립성이 강한 이유도 있었다.

페니키아인과 더불어 타고난 해양민족으로 항상 대립해왔다. 이 대립구도로 인해 후에 지중해 서쪽은 페니키아(카르타고), 동쪽은 그리스로 양분한다.

고대부터 무역으로 번성했으며 인본주의적인 신화와 철학이 유명하고 그 점이 아니더라도 여러 면에서 고대세계의 선두주자. 국내에도 익히 잘 알려진 인물만 꼽아도 아르키메데스, 유클리드, 피타고라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소크라테스, 히포크라테스...많기도 하다.

현존하는 세계에서 제일 오래된 악보세이킬로스의 비문이 고대 그리스 문명의 산물이다.

1.1 초기 역사

그리스의 문명은 크게 거슬러 올라가면 BC 3000년경에 성립된 것으로 추청되는 키클라데스 문화와 동시대 육지에서 성립된 펠라고스 문화로 올라갈 수 있다. 키클라데스 문화는 키클라데스 제도 (낙소스, 산토리니, 미코노스섬등이 포함된)를 중심으로 매우 추상적인 인물상으로 상징되는 해양문화를 가지고 있었지만 문자가 없는 관계로 이들이 그리스어를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 크레타문명의 경우에도 아직 그 문자가 완전히 해독되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크레타문명을 무너뜨린것으로 여겨지는 미케네인들은 확실히 원시 그리스어를 사용했다는 점과 크레타문명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다.

결국 그리스의 역사시대는 초기 아카이아계 그리스부터가 시작인데, 신화로 널리 알려져 있는 배경이 바로 이 그리스다. 트로이 전쟁의 주체도 아카이아계 그리스인데 재밌는 것은 이 트로이 전쟁으로 인하여 국력이 쇠퇴했고, 이 때문에 북쪽에서 온 도리아인들을 막지 못해 대부분의 폴리스들이 멸망했다. 사실 신화에 나오는 스파르타와 역사에 나오는 스파르타가 다르다. 역사의 스파르타는 도리아계에 의하여 뒤집힌 스파르타다. 참고로 이 격변에서 유일하게 아테네만 살아남아 아카이아계 폴리스로 명맥을 유지한다.

최근에는 도리아인들의 남하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청동기 시대 도시들간의 반목, 가뭄, 질병, 지진 등이 청동기 시대 도시들이 더 막장으로 치닫게 되는 원인이라는 설이 더 유력시되고 있다.

1.2 페르시아 전쟁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대두로 델로스 동맹이 형성되고, 괜히 소아시아의 사르디스를 건드렸다가 페르시아에게 멸망할 뻔한 페르시아 전쟁에서 이 델로스 동맹을 중심으로 필사적으로 저항해서 페르시아군을 물리치는데 성공한다. 이것은 최초이자 최후의 폴리스 연합작전이었다.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네는 역으로 이를 기회로 삼아 에게해 일대에 자신들의 제국을 만들어 전성기를 누린다. 하지만 이를 고깝게 여긴 스파르타와 이를 중심으로 하는 펠로폰네소스 동맹과의 전쟁이 일어난다. 전쟁 과정에서 지도자였던 페리클레스페스트로 사망하고, 중우정치로 몰아가기 시작하면서 막장화되어 결국 펠로폰네소스 동맹에게 패한다. 아테네는 맹주 스파르타의 휘하에 들어가고 스파르타는 그동안 아테네의 뒷공론에 대한 보답으로 아테네에 귀족정을 세워버렸지만, 딱 1년만에 아테네는 민주정에 복귀하고 스파르타가 자신들을 무시한다고 여기던 기존의 스파르타 동맹국(테베, 코린트, 여기에 적국이었던 아르고스 포함)들과 힘을 합처 다시 들고 일어난다. 스파르타는 이들을 제압하나 그리스 전체를 휘어잡을 힘이 없었고, 테베의 사선밀집진형에 완전히 제압당하면서 몰락한다. 하지만 테베 역시 그 능력이 뒤쳐진 것은 마찬가지라서 결국 내전의 길로 접어든다.

그리고 북쪽에서 바르바로이라 멸시당하던 마케도니아 왕국[1]냅더적하고 날름 그리스를 집어삼킨다.

1.3 헬레니즘 제국

이후 그리스 역사는 알렉산드로스 3세가 이끌던 마케도니아를 따라서 헬레니즘의 원류가 된다. 이후 알렉산드로스 제국은 디아도코이 전쟁으로 분열하여 아시아의 셀레우코스 왕조, 그리스-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 왕조, 이집트프톨레마이오스 왕조로 나뉘었다. 이 때부터 로마의 이집트 정복까지를 헬레니즘 시대라고 한다. 그 뒤로 본토는 마케도니아에 속하게 되었고, 알렉산드로스와 그 후계자들에 의해 소아시아, 시리아, 이집트의 그리스화가 급격하게 진행되었다.

이 시대에는 간단한 컴퓨터를 발명하였으며[2]를 포함한 온갖 시대를 앞선 기술적인 불가사의를 창조해 냈다.

가장 압권은 기계공학계에서 최고의 천재로 손꼽히는 헤론이다. 그는 다름아닌 증기기관(헤론의 공)을 발명했지만, 당시에는 노예 노동력만으로 충분히 놀고먹을 수 있었기에 (혹은 노예노동보다 연비가 나빴기에) 폐기되었다. 무서운 놈들 이밖에 헤론은 증기로 여는 자동문[3]성수 자동판매기(역사상 최초의 자동판매기)까지 만들었다고 한다. 기원전에.

당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이집트는 헬레니즘의 중심지로 영화를 누렸으며, 수도 알렉산드리아는 그 부와 높은 학문적 명성으로 유명했다. 이후 헬레니즘 세계는 서방을 재패하고 부유한 동방에 침을 흘리는 로마 손에 의하여 먼저 본토가 병합된 후, 그 유명한 클레오파트라 여왕이 지배하던 이집트 또한 로마에 병합되면서 헬레니즘 시대는 종말을 고한다.

1.4 로마 제국

이후 역사는 로마 제국의 일부일 뿐. 그리스 본토의 문화와 학문은 여전히 선진적이었지만, 본토는 전략적으로는 그다지 중요한 땅은 아니었다. 본토보다는 오히려 그리스화한 시리아와 이집트가 그리스 문화의 중심지였다. 또한 기독교 발흥 이후에는 유대인들 이외에 최초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그리스인이기도 하다.

중세에 들어와서는 아예 로마라는 신 문화속으로 모조리 녹아 들어가 민족 구분이란 것 자체가 사라지고 모두가 로마인으로 대동단결. 이 때문에 심지어 중세까지 살아남은 동로마의 후신 중 직계를 자처하는 그리스도 오해 방지를 위해 (...) 중세의 동로마를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부를 정도다. 이 당시 동로마는 세르비아의 전통적인 상징물인 드라코가 군기로 사용되고 어쩐지 페르시아에서 본듯한 (음?) 양식이 군대에 있는 등 그야말로 동로마의 권역에 있던 모든 문화를 싹 녹여낸 듯한 위용을 자랑했다. 오죽했으면 후대에 다시 갈라진 이후에도 동로마 문화권으로 묶기까지 할까. 정작 로마의 근원이었던 라틴 문화가 상당히 빠저버리긴 했지만.[4]

2 중세

2.1 동로마 제국

서로마의 멸망 이후에는 동로마 제국의 영토이자 정교회의 중심지로서 영화를 누렸다. 유럽에서 가장 먼저 그리스도교화 된 지역이 바로 키프로스와 그리스 지역이다. <사도행전>을 참고하시라. 그 외에도 그리스도교와 그리스는 연관성이 크다.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묵시록>은 사도 요한이 파트모스 섬으로 유배되었을때 그곳에서 쓴 책이다.

서유럽 중심의 역사 서술에서는 자주 간과되지만, 동로마 제국은 12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기독교 세계의 주요 강대국이었다. 정치-군사적으로는 이슬람 세계의 공세를 막아내는 최전방의 역할을 했으며, 문화적으로는 정교회의 총본산인 동시에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의 잔재를 계승-발전시켰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은 국내의 봉건화로 인한 재정 적자와 중앙권력의 약화, 유럽-아시아 양면 전선의 유지, 불가리아, 마자르, 페체네그, 킵차크, 셀주크 제국 등 각종 유목민 세력들의 침입 등에 시달리다가 제4차 십자군 전쟁에서 십자군의 라틴 제국에게 수도를 함락당해 한 차례 멸망했다. 이후 니케아, 트레비존드, 이피로스 등의 그리스계 계승 국가들이 창건되었고, 이 중 니케아가 1261년 십자군들의 봉건 국가인 라틴 제국으로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되찾았다.

그러나 라틴 제국으로부터 제위를 수복한 후, 한때 제국의 확고한 기반이었던 아나톨리아와 발칸 반도는 수많은 영주들과 토착 세력, 침입자들이 뒤엉켜 혼란상을 빚어냈고, 여기에 자체 내분까지 겹치는 바람에 이후의 제국은 아나톨리아 서부와 발칸 반도 동부 일부를 지배하는 소국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영토가 쪼그라듦에 따라 보편 제국으로서의 특성도 약해져서 제국 말기에 이르면 그리스인이라는 개념이 대두되기도 하였다. 멸망 직전에는 테살로니키마저 빼앗겨서, 한때는 로마 제국의 고토를 거의 회복했었었던 대제국이 마지막에 가지고 있었던 것은 콘스탄티노플 도시 자체와 모레아의 일부 밖에 없었다.

결국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오스만 제국에 의해 정복되고 1460년 모레아, 1461년 트레비존드가 차례차례 떨어지면서 베네치아 공화국이 지배하고 있던 일부 영토[5] 를 제외하곤 그리스계 인구 전체가 오스만 제국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이마저도 후에 베네치아 공화국이 쇠퇴하며 최후까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안 받는 지역은 코르푸 밖에 없게 된다.

동로마 제국을 훗날 서유럽 역사가들은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별개의 역사로 분리하려 하였지만, 사실 당시에는 동로마 제국 본인들은 물론 서유럽 · 슬라브 · 이슬람 세력 또한 동로마 제국이 로마 그 자체라고 인식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한 이래 변함없는 로마 제국'이었던 것이다.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소아시아(지금은 터키와 다른 나라들의 영토)는 고대부터 그리스화가 완전히 이루어진 그리스 지역이었음에도 이 시기에는 '그리스인'이라는 개념은 희박했다. 중세의 동로마의 양식은 단순히 그리스 양식이라 하기에는 뭔가 좀 낯선것이 상당히 많다. 예를들면 독수리 대신 쓰이게 된 드라코나 바이킹쪽과 닮은 듯한 무장 양식, 페르시아가 생각나는 갑옷 등. 그리스적 요소가 주류였다곤 하나, 이미 주변의 다른 문화들이 싹 녹아들어 로마가 되어 있던 시기였다. 제국의 공식 언어는 그리스어였지만 애초에 동서로마 분열 이전부터 제국 동방의 공용어는 그리스어였다. 이렇게 따지면 그리스인 입장에서는 디아도코이 제국들이 로마 제국에 먹힌 이후 오스만으로부터 독립할 때까지 무려 2천여 년의 세월 동안 '그리스 민족 국가'가 없었던 꼴이 된다.

3 근세

3.1 오스만 제국 치하

오스만 제국의 그리스 지배 기간은 대략 450년에 달한다. 웬만한 왕조들의 존속 기간을 능가하는 이 기간 전체를 한 가지 단순한 시각 -관대한 통치냐, 아니면 악랄한 통치냐-로 일반화하기는 어렵다. 기독교도 봉건 영주에게 착취당하던 발칸 지역의 농민들이 상대적으로 세금을 덜 내게 해 주는 이교도 지배자를 환영했던 시기도 있었고, 그리스인들이 제국의 행정과 지방 통치의 구성원으로 참여하여 권세를 누리던 시기도 있었으며, 서유럽의 "다른 기독교도"들을 상대하기 위해 무슬림 오스만 지배자들이 그리스인들을 찾던 시기도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정교도들이 변변한 예배장소를 찾지 못해 무슬림들의 눈치를 보던 시기도 있었고, 오스만 지배자들이 강렬한 민족 감정을 불태우는 그리스인들을 가혹하게 탄압하던 시기도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이슬람을 국교로 삼았던 오스만 제국이 국내에서 허용된 기독교 분파로 오직 정교회만을 허용하고, 정교회의 관리를 그리스인들에게 맡겼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 정교회는 그리스인뿐만 아닌 다른 정교회를 믿는 민족들까지 책임지고 오스만 제국에 충성하도록 만드는 역할을 맡았다. 훗날 루마니아불가리아 등 다른 민족들이 그리스어를 버리고 각자 민족어를 사용하게 된 것도 바로 이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현재 발칸 반도의 복잡한 민족 갈등 문제가 오스만 지배 체제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반대로 그리스인들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들 역시 오스만 제정에 의해 폐위, 처형, 감금, 신체 절단 등의 형벌을 밥 먹듯 당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은 근대적 식민제국이 아니라 전근대적 전제군주제 왕조임을 유념해야 한다. 전제군주제 국가에서 명목상 "군주의 윤허를 받아 권력을 누리는" 유력자들이 상황 변화나 지배자들의 변덕에 따라 처지가 민감하게 변하는 것이 흔한 일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리스인 권력자들의 불안한 지위가 특별히 그리스인 전체에 대한 민족적 탄압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투르크 종족의 정통 귀족들 역시 오스만 제국의 술탄에게는 여러 모로 경계와 탄압의 대상이었다. 물론 지배층에 편입하기 위해서는 무슬림이 되어야 했으며, 기독교도는 딤미(Dhimmi)로써 무슬림에 비해 법적으로 몇 가지 불리한 점이 있었다. 이는 분명한 차별 대우이지만, 기독교도들이 무슬림에 비해 특별히 훨씬 가혹한 탄압이나 착취를 받지는 않았다. 훗날 그리스인들이 가혹한 탄압을 받은 이유는 그들이 그리스인/기독교도라서가 아니라,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면, 제국의 신민은 오스만 황제의 지배에 복종하는 한 다른 신민들과(터키인이든, 알바니아인이든, 그리스인이든 간에 상관없이) 비슷한 대우를 받는다는 것이다. 니코스 카잔자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서도 언급하지만 알렉시스 조르바스는 터키인 사부로부터 산두리(악기 이름)를 배웠으며, 터키어 노래도 서슴치않고 부른다. 또한 18세기 그리스를 방문한 유럽인에게 터키인들은 자신들을 소개하면서 "우리는 성모 마리아를 믿는 무슬림입니다."라고 소개할 정도로 두 민족은 완전히 섞여 있었다. 부활절날 터키인들이 그리스인 마을에 놀러가고, 라마단이 끝나고 3일간 계속되는 축제기간에 그리스인들이 터키인 마을에 놀러갈 정도로 이들은 큰 갈등 없이 지냈다. 이러던 것이 공화주의, 민주주의, 민족주의 등의 근대적 이념이 확산되면서 "이민족"이자 "전제군주"인 오스만 황제의 지배에 대한 거부감이 확산됨으로써 갈등이 급격화되고 독립 의식이 고취된 것이다. 발칸 민족들 간의 갈등 역시 그리스-불가리아인들의 경우처럼 오스만 지배 이전부터 있었던 뿌리깊은 갈등이 오스만 시대에도 계속 유지되고 있다가, 근대 이후 민족주의의 확산으로 인해 폭발한 것에 가깝다.

17세기 이후 서방국가와의 외교교섭 등에 그리스인들이 많이 필요해지면서 오스만 제정은 기독교도인 그리스인들을 무역 담당자나 관료로 대거 기용했다. 이 때문에 '파나리오테스'라는 이름의 관료집단이 형성되었다. 이스탄불의 '페네르' 지역에 주로 거주한 상인계층으로 이런 별칭이 붙었는데, 20세기 전까지만 해도 이스탄불에 거주하는 인구의 약 40%는 그리스인이었다. 이들은 그리스 독립을 비밀리에 지원하는 등의 활동도 하였으나 불가리아세르비아인들과는 반목했다.

4 근대

4.1 그리스 민족주의의 발흥

사실 그리스인의 독립시도는 굉장히 자주 있었다. 17세기에는 수도사 디오니시오스가 이끄는 반란군이 펠로폰네소스 일대에서 일시적으로 흥하다가 진압된적도 있고, 18세기에는 이오안니나를 본거지로 한 알리 파샤(알바니아계다)가 휘하의 그리스인들을 이끌고 독립을 꿈꾸며 봉기했다가 진압되었고, 마찬가지로 18세기 후반에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반란군이 궐기했다가 진압된 역사도 있었다. 그러던게 1814년 앞서 언급한 파나리오테스 가문들과 오데사의 상인들이 주축이 되어 형성된 친우회(Φιλική Εταιρεία)가 결성되면서 본격적인 그리스인의 독립기운이 싹트기 시작했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이후 민족주의의 물결은 그리스에도 몰아쳤으며, 그리스인들은 선전물과 신문을 통해 차츰 민족의식을 각성하기 시작했다. 오스만 제국에서도 이를 인지하고 있었으며 결국 그리스어 교육의 금지와 역사교육의 금지, 인쇄물에 대한 검열강화로 맞섰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은 동방정교회를 중심으로 민족의식을 고취시켰고 소위 비밀학교(το κρυφο σχολειο)를 통해 그리스인의 역사와 언어를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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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그리스 독립 전쟁, 그리스 제1공화국

이후, 오스만 제국이 막장화되기 시작하자 1821년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며 이듬해 1월 독립선언과 함께 독립전쟁을 시작했다. 반란은 1821년 트리칼라에서 대대적인 무슬림학살로 시작했으며, 물론 오스만제국은 훨씬 더 대규모의 그리스인을 학살했다. 크게 펠로폰네소스를 중심으로 한 반란군과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북쪽에서 남하하는 반란군으로 구성되었으며 쎄오도로스 콜로코트로니스 등을 위시로 한 반란군은 펠로폰네소스에서 오스만 제국과 일전일퇴를 거듭한다. 이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마흐무트 2세는 이집트에 지원을 요청했으며, 유럽열강들도 처음에는 관망상태로 일관하다 점차 그리스 독립전쟁에 끼게 된다. 다민족 국가였던 오스트리아는 자국의 문제와 더불어, 1815년 빈 체제의 붕괴를 우려하며 그리스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으며 주변국을 압박하였으나 당시 그리스인 학살로 국내여론이 굉장히 시끄러웠던 영국[6]러시아, 프랑스를 움직여 1827년 나바리노 해전에서 오스만 제국 해군을 박살내버리면서 1830년 결국 독립하였다.

4.3 그리스 왕국

그러나 독립을 강대국들이 거저 시켜준 게 아니었다. 크레타를 비롯한 여러 섬은 영국 및 다른 나라들에게 빼앗겼으며, 또한 많은 항구 이용권리를 넘겨줬고, 독립 이후 강대국들의 임시 신탁 통치로 3년동안 지배받다가(한국과 비슷하다) 1833년 그리스와 전혀 무관한 독일인 비텔스바흐 왕가의 오토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왕자가 겨우 18살 나이에 오토 1세로 국왕에 올랐다. 이 또한 강대국들이 독립 조건으로 마음대로 앉힌 국왕이었으나 아무런 불만없이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골수 가톨릭인 오토 1세와 정교회가 대다수인 그리스인들은 시작부터 갈등을 빚었고 오토 1세는 그리스어를 전혀 하지못해 통역을 통해 이야길 들어야 했다.

오랜 갈등 끝에 오토 1세는 후계자는 정교회 신자에게 물려준다는 양보를 해야했으나, 그 뒤로도 많은 갈등을 일으켜 왕당파 및 비왕당파 민주 세력의 갈등은 오랫동안 그리스를 어지럽혔다. 거기에 백성들에게 인기가 없던 오토 1세는 유달리 '동로마 고토의 회복'을 표방하며 크레타섬과 과거 동로마 영토를 두고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일으켰다. 그런데 하필이면 크림 전쟁 당시 영국, 프랑스와 손잡고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는 오스만 제국 뒤통수를 치려다가 분노한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의 대대적 공격으로 그리스 여러 곳이 점령되어 많은 사상자를 내고 휴전과 같이 양국에 막대한 보상금 및 여러 굴욕적인 조건을 들어줘야 했다.

결정적으로 이탈리아 독립전쟁 당시 오스트리아(오토 1세 고향이 오스트리아였고 오스트리아에 많은 지인들이 살았기에 친오스트리아 정책을 취했다)를 돕다가 패배하면서 그리스는 또 많은 피해를 겪어야 했고, 결국 1862년 혁명을 일으켜 오토 1세를 퇴위시켜 추방했다.

하지만 차기 국왕을 두고 여러 갈등 끝에 이번에도 그리스와 무관한 덴마크인 글뤽스부르크 왕가의 크리스티안 빌헬름 페르디난트 아돌프 게오르크 공이 겨우 17살 나이에 요르고스(Γεώργιος) 1세로 새로운 왕으로 제위하게 된다. 이 또한 영국·프랑스·러시아에 의한 강압적인 조치였기에 그리스는 그냥 외국인 왕족을 왕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거기에 덴마크 출신의 귀족 빌헬름 스포네크(Wilhelm Sponneck) 백작이 왕이 어린 탓에 섭정으로 와서 그리스를 마음껏 지배했으며 이번에는 개신교 종파 중 하나인 루터복음교 골수 신도인 스포네크의 강압 정책으로 정교회와 또다른 갈등을 일으킨다. 그러나 요르고스 1세가 결혼하면서 아들(콘스탄디노스 1세)을 얻고 스포네크를 추방하면서 안정을 되찾게 된다. 우선 게오르기오스 1세는 정교회를 믿었으며 입헌 정책으로 그리스계의 입지를 많이 생각해주는 정책을 취하여 비로소 백성들의 믿음을 얻게된다.

요르고스 1세 시대에, 세르비아, 불가리아가 독립하면서 마케도니아 지배권 및 영토분쟁으로 그리스 및 오스만 제국 서로가 계속해서 마찰을 빚다가 2번의 발칸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5 현대

제1차 세계대전 시기에는 국왕 콘스탄디노스 1세가 친독 정책을 취하다가 연합국의 강압으로 퇴위하여 둘째 아들인 알렉산드로스 1세가 제위하여 친연합정책으로 연합군에 참전하여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스미르나(이즈미르) 지역을 빼앗았으며, 당시 오스만 제국 및 독일 제국과 손잡은 불가리아로부터도 트라키아 지역을 손에 넣게 된다.

그러나 이걸로 만족하지 못하고, 쫓겨난 왕 콘스탄디노스 1세와 국왕 알렉산드로스 1세 및 큰 아들 요르고스 2세와도 갈등을 빚을 때 1920년 거짓말같이 국왕 알렉산드로스 1세는 기르던 원숭이에게 물린 상처가 덧나 갑자기 죽는 일이 벌어졌다. 암살이란 주장으로 엄밀한 조사가 이뤄졌으나 조사 결과는 자연스러운 패혈증이었다. 결국 다시 콘스탄디노스 1세가 재위하면서 그는 떨어진 인기를 만회하기 위하여 무리하게 1920년 아나톨리아에 쳐들어갔다가 '무스타파 케말이 이끄는 터키군에게 참패하고[7] 빼앗은 이즈미르를 비롯한 1차대전에서 승전하여 얻은 땅 대다수를 잃고 물러나 결국 국왕이 비난 속에 퇴위하여 큰 아들 요르고스 2세가 자리를 이어받는다.

이 당시 그리스가 트라브존과 여러 곳에서 벌인 학살이 국제적으로 욕 먹으면서 비난 받았고, 1923년 체결된 인구 교환 조치에 따라 터키 안에 살던 150만이 넘는 그리스인들은 추방당해서 그리스로 와야 했는데 또 이들이 그리스 안에서 골치가 되었다. 그리스인이지만 오랫동안 터키에 살았고 말투와 여러가지가 낯설었기에 이들은 차별을 받으면서 나중에 좌익 이념으로 기울어졌으며 나중에 이들 상당수가 반정부세력을 이뤄 그리스 내전에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5.1 그리스 제2공화국, 그리스국

터키 독립전쟁이후 그리스는 1924년부터 1935년까지 '제2 공화정' 정부가 수립되지만, 혼란으로 인하여 뭘 하고싶어도 제대로 할 수도 없었고, 1936년에는 이오아니스 메탁사스(Ιωάννης Μεταξάς)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왕국을 복권시키되 국왕을 허수아비로 앉혀놓았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세기의 막장군대 이탈리아군의 침공을 간단히 물리치고 이탈리아가 지배하던 알바니아까지 역습하면서 영토 확장(이 덕분에 알바니아와 원수지간이 된다)을 꿈꿨으나 무솔리니의 뻘짓을 수습하러 온 나치 독일과 억지로 참전한 불가리아 왕국의 참전으로 결국 점령되었다. 1941년 그리스는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불가리아 왕국에게 삼분할되고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이 점령한 지역에는 이들의 괴뢰 국가 그리스국의 영역이 되었다. 그리스 국왕은 망명을 택했고, 유고슬라비아 왕국과 마찬가지로 공산주의계열 빨치산들이 나치에 맞서 힘겹게 전투를 벌였다. 이윽고 전쟁 막바지로 넘어가면서 그리스 인민해방전선 게릴라들은 북부 그리스를 장악했으며, 그리스국 붕괴 이후 돌아온 왕당파와 공화파, 군부와 공산 게릴라 사이의 충돌로 거의 내전 상태가 되어버렸고, 공산주의 세력 확대에 위기감을 느낀 미국이 개입하여 겨우 왕당파가 승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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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요스 파파도풀로스

이후에 선거를 통해 줄곳 우파정당이 집권해있다가 60년대 초반에 자유주의 성향의 정권이 들어섰다. 하지만 새로 국왕에 취임한 콘스탄티노스 2세가 대놓고 중도연합에 반대를 표하면서 변절사건이 일어났고, 요르요스 파판드레우 당시 총리와 콘스탄티노스 2세간의 충돌이 격화되면서 정치혼란이 가중되었다.

5.2 군부 독재 시대

때마침 키프로스에 내전이 발발하자 이를 핑계삼은 요르요스 파파도풀로스(Γεώργιος Παπαδόπουλος,영어로는 Georgios Papadopoulos ) 장군을 주축으로한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콘스탄티노스 2세는 선서취임식에 참석함으로써 이 쿠데타에 적법성을 부여하는 병크를 저질렀다. 이후에 콘스탄티노스 2세는 그 해 12월에 역쿠데타를 일으켰으나 결국 망명길에 올랐다. 1968년부터 1973년까지 그리스는 이른바 '대령들의 7년'이라는 군사독재를 겪었는데, 당시 미국(=닉슨 행정부)은 '반공 성향'인 군사독재정부를 뒤에서 지원했다.

잇따른 정치적 혼란에 지쳤던 그리스인들은 군사 쿠데타에 조직적 반발을 하기보다 수세적이지만 동조하는 편이였다. 물론 콘스탄틴 2세 국왕이 쿠데타 몇달 후 역으로 쿠데타를 모의하다가 적발되어 해외로 망명하였고, 1대 파판드레우 전 총리는 가택에 연금되어 1968년 11월 사망할 때까지 자택에 감금되어야 했다. 군사 쿠데타 정권은 반대파에 대해 무자비한 탄압을 가하며 권력을 유지하려고 하면서도 민심을 얻기 위해 포퓰리즘적 정책을 폈는데 대표적인 것이 농가 부채의 상당액을 탕감이였다. 그래서 정권의 정통성이 부족했음에도 그리스 경제의 성장이 지속되면서 군사정권이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1973년 1차 오일쇼크가 발생하자 군사정권이 주장하던 고도 경제성장의 시기는 안드로메다로 날아가 버렸다, 또한 포퓰리즘 정책을 위해 필요했던 외국으로부터의 차관도입도 더 이상 불가능해져 위기감을 느낀 군부는 군주정을 아예 폐지하고 대통령제를 내세우며 안정을 취하려고 했다. 문제는 경제상황 악화와 함께 정치적 불안도 커졌다는 점이다, 특히 미국과 유럽을 강타하던 청년들의 반전운동과 반기득권 투쟁 68 혁명에 영향을 받은 그리스 학생들이 본격적으로 반독재 투쟁에 나섰고 1973년 11월 아테네 폴리테크닉 대학에서 수천명의 대학생들이 학교를 점거하고 반독재 시위를 벌였다.

5.3 민주화

그러나 군부는 학생 시위에 대해 탱크까지 동원하며 강경진압을 했는데 11월 17일 아테네 폴리테크닉 대학에 진입하면서 민간인을 대상으로 총을 발포하여 군사정권 추산 11명 비공식 집계로는 50여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11월 25일 비밀경찰 장관, 즉 파파도풀로스의 심복이었던 디미트리오스 요안니디스가 쿠데타로 그를 축출하나 군부독재라는 현실이 바뀌지는 않았다. 실제 독재를 종식시킨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군인들이 국외에서 벌인 병크 때문이였다. 1974년 7월 군사정권은 키프로스 사태에 개입하는데 사태가 국제적으로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며 결국 아르핸티나 군사정권의 포클랜드 전쟁처럼 그리스를 파국으로 몰아넣었고 결국 그리스 군사독재는 1967년 4월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지 7년 만인 1974년 7월 24일 종식되었다

이처럼 군사독재에 대한 국정불안과 사람들 반발, 이를 마구잡이로 막는 독재화를 겪다가 1974년 터키와의 키프로스 분쟁 당시 패하면서 정권을 내놓고 공화국으로 재탄생되었다.

참고로 2000년대 와서 30여년동안 해외 망명해있던 전 국왕 콘스탄티노스 2세가 다시 왕위를 노린다고 나서서 여론의 질타를 받기도 했다. 민주화 이후 국민 투표가 벌어졌지만, 이전과는 달리 그리스인들이 왕정 폐지를 지지하여 세 번째 왕정 복위는 아루어지지 못했다. 결국 2013년 오랜 해외 생활을 마치고 아테네로 돌아왔다.

5.4 오늘날의 그리스

1974년 민주화 이후 그리스 신민당이 집권했다. 그러나 당시 그리스는 오일쇼크의 여파로 인해 경기침체가 가속화 되면서 신민당에 대한 지지율이 점차 떨어져나갔고, 결국엔 1981년 총선에서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가 집권하면서 범 그리스 사회주의 운동이 집권하였다. 초기에 NATO탈퇴(참고로 키포르스 분쟁때 나토에서 개입을 안하는 바람에 당시 그리스에서 나토에 대한 반감이 상당했다.)와 미군기지 철수, 복지확충등으로 인기를 누리는가 싶었지만 1980년대 후반에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가 조강지처와 이혼한데다가 크레타 은행 비리로 측근들과 각료들이 줄줄이 구속되면서 인기가 급락하였고 이와중에 치러진 총선에서는 신민당이 재집권 할듯보였지만 선거제도 개편으로 두차례에 걸쳐 추가로 선거를 벌이는 촌극을 벌인끝에 1990년 총선에서 가까스로 과반을 확보해 집권했다.

신민당 정권은 민영화 정책을 대대적으로 추진했지만 인기없는 민영화 정책과 교육정책을 펼친덕택에 지지율이 급락하여 1993년 총선에서 사회당이 재집권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의 경제정책은 1993년에 재집권한 사회당 정권에서도 계속해서 이어지기는 했다. 여하튼 사회당 정권에서 아테네 올림픽의 개최를 다시 이끌어내고 경제자유화 정책도 적극적으로 추진해나가며 2001년에 유로존에 가입하는 업적(?)을[8] 세우면서 도합 11년을 집권하였지만 올림픽 개최비용이 말썽이 되어서 2004년 초에 치러진 총선(아테네 올림픽이 개회되기전이기는 했다.)에서 신민당이 재집권하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신민당 정권은 자산가격 상승과 관광산업 호황을 바탕으로 매년 4%대의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기록해나갔고 덕택에 그리스의 1인당 GDP는 급속히 상승하여 2008년 들어 3만 달러를 돌파하였지만 2007년 산불사태로 그리스 경제는 큰 손실을 입었고, 신민당은 2007년 총선에서 재집권에 간신히 성공을 거두었지만 호황기가 끝나가고 그 동안 호황의 혜택을 받지못하고 저임금 문제[9]와 고실업 문제[10]에 시달리던 젊은층들이 과잉진압으로 한 소년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지자 대거 시위를 벌이면서 신민당 정권은 궁지에 물렸고 결국 버터지 못하고 조기총선이 치러져 사회당으로의 정권교체가 이루워진다. 이후에 감사를 벌였는데 신민당 정권때 재정적자를 대규모로 은폐했다는게 드러나면서 그리스의 부채규모는 급속하게 불어난 상황이 되어버리고 말았고 결국 버티지 못한 사회당 정권에서 GG치고 IMF에게 구제금융을 요청하게 된다. 그리고 이 때부터 그리스에 헬게이트가 열리기 시작하였다.

현재는 극심한 경제위기를 겪고 있다. 최근에 중국의 코코스 그룹이 그리스의 피레우스 항구를 인수했다.#
  1. 이들의 민족구성은 불확실하다. 일단 왕가는 그리스계가 맞는 것 같지만 기록 자체가 적어 피지배민들까지 그리스인들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마케도니아 지역의 선사시대 유적은 그리스보다는 지금의 터키 영토인 아나톨리아 지역의 유적들과 유사하다고 한다.
  2.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정밀기계이자 유이하게 인정된 오파츠안티키테라 기계. 용도를 알 수 없었던 매우 복잡한 기계장치였으나 의 운행을 계산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퍼페츄얼 캘린더?!
  3. 헤론이 아닌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인이 만들었다고도 한다. 다만 위에서 말한 것처럼 노예가 넘쳐나기 때문에...
  4. 어디까지나 '상당히'지 전부가 아니다.
  5. 당시 많은 그리스의 도시들이 보호를 요청하며 베네치아 공화국에 도시를 바쳤지만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부유했던 베네치아 공화국이라도 이를 모두 커버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점을 제외하곤 방어를 하지 않았다.
  6.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로맨티즘 사조의 영향을 받은 지식인들이 영국 내 여론을 주도하거나 로비, 심지어는 사적으로 항쟁에 참여하기도 했다. (단, 그들의 공상가적 기질 때문에 실제 전투에서의 기여도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게릴라전을 펼치던 현지인들에게 "왜 고대 그리스 군인들처럼 밀집대형으로 정면공격하지 않는가?" 등의 소릴 한다거나...) 대표적으로 시인 바이런이 있다.
  7. 이 부분에 대해 자세히 알고싶다면 터키 독립전쟁항목을 참고
  8. 당시에는 업적으로 평가받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리스내에서든 외에서든 희대의 삽질로 평가된다. 그도 그럴것이 유로존에 가입하기 위해서 무리한 정책들을 시행한데다가 유로존 가입으로 더욱더 가속화되어나가며 그리스의 수출경쟁력이 크게 떨어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고 경상수지 적자는 심각한 수준으로 불어나게 되었다.
  9. 애시당초 700유로 세대가 화두에 올랐을때가 이때의 일이다.
  10. 2000년대 초중반에 그리스 실업률은 10% 초반 정도의 수준이었고, 청년실업률은 20%를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