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배수

조선의 레기온
조선 초기에 주로 산악전, 보병전, 대여진족 싸움을 치렀던 근접전 보병. 후기에는 등패수가 되었다가 사라진다.

1 설명

팽배수는 조선초기 조선군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던 보병이다. 팽배(작은 원방패, 서양의 라운드 실드와 유사하다)와 근접전 무기[1]로 무장했으며, 기본적인 방진을 형성하는 근접전투를 맡았다. 팽배수의 전성기였던 초중기에는 중앙의 시위대에만 수천여명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팽배수들의 전투능력을 상당히 높게 묘사를 하는데, 장창 5기와 팽배 1기가 붙으면 팽배 1기가 이긴다는 기록이 꽤 흔하다. 방패와 한손검은 매우 실용적인 무장이고, 아래처럼 빡센 훈련을 받았음을 감안하면 나름대로 강병이라고 할만했다.

팽배수는 능동적인 대처력을 기르기 위해 방패를 바닥에 내려놓고 잽싸게 들어올려 공격을 막는 훈련부터, 실제 전쟁터에서 쓰는 병기보다도 무거운 갑옷과 방패를 착용하고 훈련을 받았다. 팽배수는 최전방에 서서 싸우는 병과이며, 일차적으로 모든 방진의 중심이 되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의 패인으로는 오랜 평화기간, 수비전략의 변화 때문에 팽배수의 양성이 부실했던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2] 두 차례의 전쟁이 끝나고부터는 명나라에서 도입한 등패를 이용하는 등패수가 이러한 역할을 대신했다.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부터 조총을 널리 보급했기에 주력에서는 밀려난 것으로 보인다.

팽배수와 창기병의 훈련비율이 낮아진 것은 조선중기의 군사력이 약해진 이유였다. 조선은 초창기부터 승자총통을 시작으로 갑옷이나 방패를 쉽게 무력화 할 수 있는 화약무기를 대량으로 보급한 나라였다. 따라서 화약무기에 쉽게 격파당하면서, 무거운 화약무기를 운용하는데 거치적거리는 군용방패를 주력으로 근접전에만 올인하는 팽배수의 중요성이 낮아지는 것은 당연한 변화였다. 하지만 200여년간의 평화는 조총병 등 팽배수를 대체할 후속병종에 대한 연구를 부실하게 만들었다. 사수를 보호해줄 근접전투 병과의 부재는 종종 벌어지는 조선군의 참패를 낳았다. 물론, 이들의 부재 외에도 지상군 전체의 훈련도와 사기가 매우 낮았으며 전국시대를 거친 열도의 봉건사병/용병집단의 전투력과 숙련도가 월등히 높았던 문제점도 있다.

2 팽배수의 방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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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주형투구, 경번갑을 입고 있으며, 팽배수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원방패를 착용하고 있다. 이것은 조선초기의 대표적인 갑옷 양식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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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팽배수는 허리 아래까지 내려오는 쇄자갑(체인메일)이나 쇠미늘 갑옷을 입었다. 야전군은 위의 복원처럼 화려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사진자료에서 보는 것과 같은 수수한 갑옷에 목/어깨 보호대를 착용했을 것이다.

조선군의 초기 복장은 저런 형태였다. 조선전기에는 화포를 주력으로 쓰더라도 여전히 육박전을 중요시해서 중무장이 기본이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검은 전포를 걸친 조선군은 총포류 무기가 보급된 조선후기의 모습이다. 조선의 대표적인 갑옷으로 유명한 두정갑, 두석린갑도 조선후기에 유행했던 갑옷이다.

3 팽배수의 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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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배수는 위의 갑옷, 원방패와 함께, 환도, 박도, 유엽도, 도끼철퇴[3]를 비롯한 근접전 무기들을 사용했다고 한다.
참고로 위의 그림에서 잘못된 점은 수군이 아닌 팽배수가 함선에 올라탔다는 상황이라고. (...).[4]

인터넷에는 조선전역해전도를 근거로 팽배수가 을 주무기로 썼다는 이야기도 도는데 애초에 근거가 희박한 이야기다. 애초에 조선전역해전도자체가 20세기에 그려진 그림인데다가 고증이 정확한것도 아니고, 팽배수는 다른 근접무기와 함께 환도방패를 썼다는 기록이 많지만, 검을 썼다는 이야기는 없다. 애초에 검 자체가 동아시아에서 실전무기로 사용된 것은 고대 뿐이기도 하고. 다시한번 말하지만 조선 팽배수의 주 무장은 환도이고 이것이 도끼나 철퇴로 대체가 가능하지만, 양날의 을 썼다는 예는 어떤 기록에도 찾아볼수 없다.

팽배수와 유사한 병종으로는 조선후기의 등패수가 있다. 등패수는 방패 뒤에 꽂아둔 투창(원래 표기는 표창)을 자주 썼는데, 적이 접근하면 투창을 던져서 견제하고, 적이 완전히 근접하면 무기와 방패를 들고 방진을 형성했다. 인터넷에서는 표창이 팽배수와 등패수의 주무기라는 이상한 말이 떠도는데, 이것도 잘못 퍼진 정보다. 팽배수는 표창이 없었고, 표창 자체가 임진왜란을 거치며 절강병법과 같이 들어온 물건이다.

4 팽배수와 여진족

조선초기에는 주로 북방의 여진족과 대치했으며, 최전방 지역에는 주요 거점마다 목책으로 이루어진 요새들이 건설되어 있었다. 여기에는 일정 규모의 병력이 상주하고 있었다. 여진족은 주로 이들 요새들을 공격하거나 주요 이동로에서 이동하는 조선군을 기습공격하는 경우도 많았고, 국경지역에서 자주 소요를 일으켰다. 팽배수는 바로 이들을 상대로 싸웠던 병력이었다.

흔히 여진족이라고 하면 기병을 연상하지만, 조선시대에는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여진족은 완전한 유목민으로 볼 수 없었고, 특히 함경도 지역은 산세가 험준해서 산악전투가 많았다. 조선으로 침입한 여진족들은 숲이 우거진 지역이나 바위가 많은 이동로에서 기습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럴 때 방패로 신속히 방진이나 귀갑진을 형성해서 신속한 대응이 가능한 보병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밖에도, 팽배수는 기병전에서도 중요한 병종이었다. 하지만 전쟁터가 영토 바깥이나 해안까지 넓어지고, 전반적으로 국토가 안정되자, 중무장을 하고 방패를 사용하는 팽배수는 점점 줄어들게 된다. 넓은 영역을 수비해야 하는 전략 상황에서, 근접전에만 올인하는 팽배수는 비효율적인 병종으로 변했던 것이다. 안 그래도 훈련이 빡세고 오래 걸린다는 점을 감안하면.도태된 이유도 군단병이랑 비슷하다

5 팽배수의 진법

이들이 활동했던 조선 초중기 팽배수와 총통은 보병전에서 반드시 투입되는 병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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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병은 상황에따라 병종이 유기적으로 투입되는데, 위의 유형이 가장 기본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원거리에서 적을 총통으로 무력화 시키고, 팽배수는 적이 돌진해오면 저지선의 역할을 하거나 전진해서 적을 제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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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창수가 뒤를 받치는 형태이다. 총통이 원거리 공격을 하고, 뒤이어 팽배수가 선두에 서며, 창수가 뒤를 받치면서 적의 돌격에 대비하거나 전진해서 제압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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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을 쏘는 사수가 추가된 형태이다. 원거리의 적은 총통을 발사해서 1차로 무력화 시키고, 사수가 활로 2차로 무력화 시킨다음, 팽배수와 창수가 맞서는 형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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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보병의 오위병종이 모두 포진된 유형으로 총통이 원거리의 적을 무력화 시키고 사수가 지근거리에서 2차로 무력화 시키면, 팽배수가 근접하는 적을 맡게 되고 창보병이 뒤를 받치며 장검을 든 도수가 마지막으로 가지치기를 하는 전형이다.

6 기타

다른 매체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팽배수의 초기 조선군 갑옷, 환도와 근접무기들을 이용하는 방진을 구현하기가 비싸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국 사극에서는 조선시대의 전반적인 복장은 물론이고, 고려시대 병사들의 복장조차 고증이 안 되는 편인데, 시기적으로 애매한 조선초중기의 팽배수는 더욱 홀대를 받는다. 이들이 주력으로 동원되었던 여진족과의 싸움에서도 기병과 창병이 시나리오를 대다수 차지하기에 더욱 등장할 기회가 없다.

그나마 등장한 사례를 보면 대왕 세종이 있다. 대마도 정벌전이 벌어졌을 때 팽배수들이 상륙해서 왜구들과 싸운다. #[5] 참가했는지 확실치 않은 팽배수의 고증도 엉망이지만, 캡틴 아메리카처럼 싸워서 더욱 소소한 웃음을 준다. (...). 그래도 위에서는 방패 던지기가 안 나왔는데, 웃기게도 왕의 얼굴에서는 진짜 방패 던지기가 나왔다. # (...). 중간에 캡틴 고려께선 궤적까지 계산해서 받아냈다
  1. 환도, 철퇴, 박도, 유엽도 등등.
  2. 원방패와 근접무기의 보급 문제가 아니라, 근접전을 전담하는 병종의 전략적인 중요성이 쇠퇴했기에 벌어진 현상이란 소리이다. 팽배수의 전성기였던 초중기를 마지막으로 핸드캐논천자총통이 엄청난 속도로 보급되었다. 중기부터는 조총이 주력으로 바뀌었다.
  3. 팽배수가 주력으로 활동하던 조선 전기 오위진법에서는 환도를 장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상황에 따라 도끼와 철퇴로 대체 가능했다.
  4. 다른 부분에도 갑주를 입은 병사들이 있지만, 명백하게 팽배수로 보이는 장비를 지닌 병사가 함선에 타고 있다는 점이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팽배수는 수군과는 근본적인 편제부터가 다르다. 현대로 치면, 육군수색대가 육군 장비를 지니고 해군함정에서 전투를 맡는다는 이야기랑 비슷하다.
  5. 드라마 이름에서 헷갈릴 수 있지만, 대마도 원정은 세종이 아니라 상왕이었던 태종이 진행했다. 또한, 팽배수는 북쪽에서 산악전과 기동전을 치르는 병종이었으므로, 대마도 원정에 참가했는지는 알기 어렵다고 한다. 대마도 원정은 남부의 수군부대가 주력이었는데, 위의 주석에도 나오듯이, 육군과 수군처럼 소속이 전혀 다르면 훈련방법이 다른 병종이 된다. 여진족을 밀어내고 있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