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천국 운동

(태평천국의 난에서 넘어옴)

太平天國
Taiping Rebellion
(1851~18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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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세력범위를 나타낸 모습.[2]

1 개요

중국 청나라 말기에 일어난 농민 대봉기이자 신정국가 태평천국 건국 운동. 현재 중국에서는 반봉건주의 정신을 평가해 "태평천국운동"이라고 불린다. 영어로는 Taiping rebellion(태평천국의 난)이라고 불린다.

14년간 이어지다가 결국 무너졌으나, 청나라의 정규군은 제대로 활약하지 못해 그 위상이 크게 떨어졌고, 증국번, 이홍장 등 한인 신사들이 만든 의병이 서방 열강과 연합하여 난을 진압하였다. 또한 이 반란에 가담한 자들의 상당수는 기득권층이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기득권에 편입될 만한 충분한 조건을 가진 실력자들이었으므로 그 자체로 청나라의 경직성을 만천하에 드러냈고 그 결과 지방의 기득권층들이 청 왕조로부터 등돌리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물론 이렇게 버려진 청은 50여년 뒤 결국 멸망하게 되었다.

2 배경

태평천국의 건국자인 홍수전(洪秀全)은 본래 광동성 출신의 유생이었다. 중농층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다른 형제들보다는 낫다고 생각한 부모는 그의 학업을 지지해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과거 시험에 여러 차례 낙방하고 급기야 상심한 나머지 신경쇠약에 걸리고 말았다. 그런데 꿈 속에서 한 백발의 신선이 나왔는데, 그(홍수전)가 자신의 아들이니 세상을 개혁해야 한다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홍수전은 예전에 서양인 선교사에게 받아두었지만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처박아두었던 권세양언라는 선교서를 읽고 자신은 조물주(造物主) 천부상제(天父上帝) 야훼의 둘째 아들이며 천형(天兄) 예수의 동생으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의 뒤를 이어 중국에서 태어난 제2의 천왕(天王) 메시아라는 교리를 세우게 된다.[3] 이후 홍수전은 '배상제회(拜上帝會)'라는 종교단체 겸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농촌 지방 등을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하였다. 권세양언의 기독교 교리에 중국 토착적 종교의 모습이 가미되어 일신교적 단체가 형성되었고, 공자상을 파괴하는 등 그 활동이 점차 과격해졌다. 이 과정에서 홍수전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청 왕조를 타도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1851년 1월 11일, 홍수전과 상제회는 1만여 명의 규모가 되어 금전촌[4]에서 마침내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킨다. 건륭제 말 대외 원정에서 시작된 재정 악화와, 그에 따른 향촌사회와 농촌의 붕괴, 이민족 왕조의 통치에 대한 불만, 아편전쟁 이후 청 정부의 정책에 대한 불만 등이 쌓이면서 많은 사람들이 태평천국의 난에 합류하게 되었다.

3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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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천국군은 그해 영안(永安)을 점령했고, 광서성을 중심으로 외세의 침투가 특히 심했던 호북, 호남 등 양자강 유역을 중심으로, 빈농 및 일용직 노동자들을 합류시키고 그들의 지지를 얻어 세를 확대하였다. 영안을 버린 태평천국군은 북상하여 1852년 장사(長沙) 공략에 실패했으나, 1853년에는 1월 무창(武昌)에 이어 기어이 3월 남경(南京)을 점령했다. 이후 남경을 천경으로 개칭, 수도로 삼았으며 화남지방 대부분을 장악하고, 토지제도의 개혁 및 전족 등 악습철폐, 남녀평등[5], 사유재산 금지, 아편의 금지 등의 사회개혁을 내세워 높은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태평천국에서 실제로 이러한 개혁을 제대로 실시한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점령지에서는 토착지배계급이 '투항'해서 지역적 지배질서를 그대로 유지했으며, 토지제도 개혁은 결국 본격적으로 시도되지 않았다. 계급제도의 철폐를 주장하면서도 홍수전을 비롯한 '노형제[6]' 집단은 왕과 사실상의 귀족의 지위를 차지했으며, 청나라의 지배계층 이상으로 많은 비빈[7]들을 거느렸다. 이러한 약점으로 인해 태평천국은 초기의 열정적 지지를 점차 상실하게 되었다. 더구나 미신 타파라는 명분 아래 농촌에 있는 사당과 유학자들이 조상신과 유교 현인들을 모시는 사당을 부수거나 점령지에 청나라에 협력한 부자들에게 약탈한 재물 일부를 나누어주는 것 외에는 당시 농민들이 간절히 원하던 토지 개혁을 하지 않고 오히려 태평천국 수뇌부와 그 친척들이 새로운 대지주로 농민들을 더 착취하였다. 이는 당연히 농민들의 지지를 상실하는 계기가 된다.

4 몰락

여기에 내분까지 겹쳤다. 천왕(天王) 홍수전 아래의 다섯 왕인 동왕(東王) 양수청(楊秀淸), 서왕(西王) 소조귀(蕭朝貴), 남왕(南王) 풍운산(馮雲山), 북왕(北王) 위창휘(韋昌輝), 익왕(翼王) 석달개(石達開) 등은 각각 독립적인 지지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내분기 이전에 서왕 소조귀와 남왕 풍운산은 호남지역 공략전에서 전사했으니, 천형(예수)의 대행자(천형하범)를 자처했던 소조귀(1852년 9월)와 초창기 홍수전 대신 조직을 구축했던 친족 풍운산의 죽음(1852년 6월)은 양수청을 제어하지 못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재상을 겸임한 양수청은 스스로 신탁을 받는 방식[8]으로 배상제회의 신도를 끌어모았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영향력이 절대적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홍수전과 대등한 지위에 서려고 하다가[9] 홍수전, 위창휘, 석달개에게 숙청당했다. (이는 양수청이 주도한 베이징 공략이 실패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 양수청에게 원한[10]이 있던 위창휘는 양수청의 가족, 추종자 2만명을 학살하고, 이를 만류하던 석달개 역시 의심하며 마찬가지로 석달개의 가족, 부하를 학살한다. 이에 경악한 홍수전과 석달개가 힘을 합해 위창휘를 숙청하고, 석달개 역시 홍수전과 그 형들의 시기를 이기지 못하고 쓰촨성()으로 진출하다가 1863년 그곳의 청군에게 전사한다.[11] 초반 태평천국을 이끌었던 집단지도체제가 붕괴하는 순간이었다.

반면 청은 초반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화북에서 숨을 고르며 진영을 가다듬었고, 한인 출신의 신사층 증국번이 조직한 한족 자위집단(단련이라 부른다.) 연합체인 상군(湘軍)이 반란군 대신 청 조정의 편을 들면서 전황을 반전시킨다. 그리고 상군을 모티브로 삼아 회군이라는 부대를 만들게 되는데, 이 회군을 지휘하여 훗날 정계의 스타로 떠오른 인물이 바로 유명한 이홍장이었다.

이전 서술에서는 북벌군이 북양군벌에게 참패한 뒤에 태평천국이 수세로 전환하고 세력도 축소된 것으로 썼으나 실제로 이개방, 임봉상 등이 이끄는 북벌군과 싸운 군대는 승격림심, 승보가 이끄는 팔기 주력군과 각 성의 지방군들이었다. 그리고 북벌군과 함께 원정을 나선 서정군은 1854년말부터 석달개의 원군과 합류하여 상군을 격파했고 무창[12], 구강, 안경을 차지하고 안휘, 강서, 호북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그리고 1856년에 양수청이 지휘하는 천경의 태평천국군은 청의 강북대영과 강남대영을 격파하여 태평천국은 매우 유리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1855년 봄에 북벌군이 전멸당한 것과 비교하면 태평천국이 북벌군 전멸 이후에 수세로 돌아서거나 세력이 축소되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또 북벌군의 하남, 직예성(지금의 하북성) 공격은 청 조정을 경악하게 했고 청이 군사적 역량을 하남, 직예 방어에 쏟게 만들어 남쪽의 태평천국군에게는 신경쓰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태평천국군의 북벌에 영향을 받아 염군이 봉기하여 청군을 괴롭혔기 때문에 북벌 역시 성과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태평천국의 쇠퇴는 위에 나오듯이 1856년 9월에 양수청이 숙청당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지도자들의 내부분열이 주요한 원인이었고 이로 인해 1856년 12월에는 무창을 뺏기고 다음해인 1857년 여름에는 석달개가 이탈하고 천경이 포위되었다. 1858년부터 태평천국은 수세로 전환하고 세력이 줄어들어 서정군이 점령한 구강도 빼앗겼다. 가지고 있던 장강의 통제권마저 증국번에게 넘겨주게 되었는데 그나마 태평천국에는 이수성, 진옥성같은 뛰어난 인재들이 등장하여 분전한 덕분에 멸망이 늦추어 질 수 있었다.

내부적으로 홍수전은 홍수전 항목에도 나오듯이 1857년에 자기 인척인 홍인발, 홍인달을 안왕과 복왕에 봉해 권력을 나누어줬는데 이들은 모두 무능하고 사치와 축재에 탐닉하고 부패했었다. 그리고 이들의 견제에 견디다 못한 석달개가 대군을 이끌고 이탈해 태평천국의 역량은 약화되었고 같은 해에 군사, 행정 업무를 몽득은에게 맡겼는데 몽득은도 무능한 인물이었다. 총체적 난국이었던 것.

이수성을 비롯한 태평천국의 군사지도자들은 이들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고 경멸했으며 불만도 품고 있었기에[13] 독자적으로 움직였다.[14] 그랬기에 중앙정부와 지방의 군 지휘관들은 서로 연계하지 않았고 태평천국은 군 지휘관들끼리 상호 지원과 연합작전을 하는 방식으로 세력을 유지했다. 태평천국의 내부 분열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동왕 양수청[15]이 군사 작전과 보급을 통제했지만 이 시기부터는 중앙과 지방이 따로 놀게 된 것이다. 다행히 1858년 9월에는 안휘 북부에서 상군을 격퇴하고 11월에는 안휘성 삼하에서 이수성, 진옥성의 태평군이 상군과 격돌해 상군 지휘관인 이속빈과 증국번의 동생 증국화를 패사시키고 상군 정예를 궤멸시켜 증국번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12월에는 강북대영을 궤멸시켰고 안경과 천경이 안정해지고 교통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1859년 4월에는 홍수전의 동생 홍인간이 홍콩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간왕에 봉해지고 자정신편을 저술해 개혁을 시도했다. 하지만 개혁을 할만한 안정적인 분위기를 만들지는 못했는데 그 이유는 1860년 중반에 장강 북쪽에서 청군을 격파해 군사적 압박에서 벗어났음에도 개혁을 보조할 경제적 근거지를 확보하지 못했고 장강 중류에서 버티고 있는 증국번의 상군을 완전히 몰아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안휘의 염군과의 연계도 불안정했다. 또 진보적인 지식인이기는 했어도 기본적으로 낙하산이었던 홍인간은 이수성 등 당시 태평천국 실력자들과의 대립도 심했기에 내부에서 제대로 된 도움도 받지 못했다.

더군다나 서양의 열강도 '상승군'이라는 이름의 군대를 조직하여 청조를 지원하였다. 서양에서는 처음에는 중국에 기독교 국가가 세워진 것에 대해 호의적인 입장이었지만, 태평천국은 농민공산주의적 이념을 바탕으로 반외세를 외쳤으며 실제로 유럽 각국의 조차지를 공격하는 등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특히 난징조약으로 자국 수출품의 주시장인 장강 유역을 얻었던 영국 등은 이 지역을 태평천국이 차지한 것을 우려해 본격적으로 청조를 지원하게 된다. 게다가 처음에는 기독교 국가라고 생각했지만 알고보니 이건 뭐 기독교 껍데기만 뒤집어 쓴 사이비 종교가 아닌가.

결국 1864년 6월 1일 홍수전이 사망한 뒤[16] 1달만에 천경이 함락 당했으며, 태평천국의 잔존세력인 뇌문광이 도적떼의 연합체인 장낙행의 염군(捻軍)과 연합해 4년간 청에 저항하지만 결국 이홍장과 좌종당에게 진압되는 것(1868년)으로 태평천국의 난은 끝이 나게 된다. 안 그래도 국가 막장 테크를 타던 청조는 이를 계기로 그 취약함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청의 정규군으로는 태평천국군을 상대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으며, 청조에 대한 민심 이반은 가속화되었다.

이 사건으로 최소 2천만명의 사람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인류사에서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낸 사건들 중 적어도 5위 안에 드는 수준이다. [17] 당시 청해서 실시했던 인구조사가 불안정했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을 가능성은 있으나 대부분의 추정치가 2천만에서 3천만을 웃돌며, (1억으로 추정하는 곳도 있다!) 이는 태평천국이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등 청나라와 태평천국 양쪽의 국민 대부분이 참가한 총력전이었다는 사실과, 1차대전에 비해 전쟁이 지속된 기간이 길다는 것, 양측의 국민에 대한 학살이 빈번했다는 것, 청나라를 제외하고 여러 열강들 또한 잔당 소탕전을 비롯한 토벌에 참여있다는 사실 등으로 설명된다.

5 의의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로는 2007년작 명장, 드라마로는 TVB에서 제작한 태평천국(1988), CCTV에서 제작한 태평천국(2000)이 있다.

후에 쑨원의 개혁 운동에 영향을 주었으며, 중국 공산주의 정권에서는 최초의 반제 반봉건적 농민 운동으로 일찍부터 굉장히 높게 평가했다. 그래서 중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연구가 활발한 분야로 관련 논문만 수만편이 넘는다.[18] 덕분에 국내 연구자들이 석,박사 논문을 쓸 때 잘 선택하지 않는 분야이기도 하다. 농담이 아니라 논문만 읽다 대학원 졸업하는 일이 생긴다.
  1. 완전히 진압된 건 1868년이다.
  2. 지도에는 상하이를 점령한 것처럼 나타나지만 1860년, 1862년에 상하이를 공격한 태평천국군은 청군과 열강의 연합으로 두번 모두 실패했다.
  3. 나중에 중국 군벌이 난립할 때 똑같은 포지션을 달고 나온 장군이 한 명 나왔다. 이름은 차오쿤. 별명이 크리스천 제네럴. 그는 "내가 짱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메시아의 명령"이라고 부정선거를 일삼았지만 곧 베이징에 쿠데타가 발생. 쫓겨나는 신세를 지게 된다.
  4. 때문에 금전기의(金田起義) 라고도 한다.
  5. 과거 허용은 물론 여군(여영)조차 있었다고 한다.
  6. 처음 거병 때부터 홍수전을 추종했던 광서성 출신들
  7. 태평천국 수뇌부가 미인들을 강제로 공출하자 수많은 처녀들이 얼굴에 흙이나 숫검댕을 바르면서까지 저항해서 여군을 동원하여 강제로 목욕시켰을 정도다. 태평천국이 본래 내세운 구호가 남녀평등이었는데, 권력을 잡자 저 따위 일을 하니 민심이 동요하게 되었다.
  8. 즉, 하나님이 양수청의 몸을 빌어서 명령을 했던 것이다(천부하범). 명목상의 왕은 하나님의 대리자인 홍수전이었지만 양수청의 몸에 하나님이 강림했다면 꼼짝 없이 쩔쩔매었고, 실제로 하나님이 현현한 양수청 밑에서 무릎을 꿇고 죄를 빌었다는 기록도 있다. 천부하범은 양수청이 창조한 것은 아니고 이전부터 광서성에서 무당에게 신이 빙의하여 사람들에게 말하는 방식의 신앙이 있었던 것을 양수청이 살짝 변질해서 써먹은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무당의 신내림에 대해 잘 알고 있고 익숙한지라 자신의 몸에 신이 내려왔다는 양수청의 말에 믿음을 가졌던 것.
  9. 기껏 하나님의 말을 대신 전한다는 게, '왜 천왕 홍수전에게는 만세를 부르고, 동왕 양수청에게는 구천세를 부르느냐. 동왕에게도 만세를 불러라' 따위의 속보이는 것이었으니…#
  10. 위창휘는 지주, 석달개는 부농 출신이었고 양수청은 숯구이 출신이었으나, 양수청은 종교적 권위를 이용해 위창휘와 석달개에게 모욕을 자주 주었다. 서정군과 합류해 원정 중이었던 석달개는 사정이 좀 나았지만 동왕 양수청을 보좌해 국정에 참여하고 있던 위창휘는 늘 양수청에게 괴롭힘을 당했고 홍수전까지 위창휘에게 잔소리를 하기도 했다.
  11. 석달개는 양광, 호광, 운귀, 사천 지역을 휩쓸며 청군을 격파했고 많은 농민 반란에 영향을 주어 농민 반란들이 더 크게 일어나게 만들었다. 하지만 정예병력을 이끌고 이탈한 까닭에 태평천국 본진의 군사적 역량이 떨어져서 여러 전투에서 태평천국이 밀리게 되는 원인을 제공한데다가 본진과 멀리 떨어졌기 때문에 지원을 받을 수 없어 산적처럼 생활해야 했다. 결국 1863년, 사천성 대도하에서 석달개와 그의 군대는 사천 총독 낙병장이 이끄는 군대에게 전멸했다.
  12. 태평군은 거병 초기에 무창을 점령했으나 곧장 포기하고 남경으로 향했다. 서정군이 이 시기에 다시 빼앗은 것.
  13. 태평천국 최후의 명장이자 충신이라 불리는 이수성만 해도 아예 자신의 파벌을 만들어 홍씨 파벌에 맞섰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 다만 홍수전에 대한 충성심은 대단했기에 난 말기에 홍수전을 버리고 도망치거나 아예 독립할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경으로 와 최후까지 싸웠다. 결국 홍수전이 사망한 후에도 홍수전의 아들을 대피시키려다 생포되어 처형당했다.
  14. 북벌군을 이끌었다 전사한 이개방 역시 이들 형제와 몽득은을 싫어했었다. 예전부터 이들에 대한 평가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15. 양수청은 교육을 받지 못한 무학의 숯구이 출신에 무자비하고 독선적인데다 각 왕들과 갈등을 벌였고 주요 인사들 역시 그에게 불만을 갖고 있었지만 정치적 행정적으로 대단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정보기관을 운용해 태평천국의 발전에 기여했다. 처음엔 금지했고 요마라 여겼던 유학을 1854년에는 태평천국의 이념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고쳐 사용하는 선에서 쓸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을 취해 지식인 계층을 흡수하는 시도를 해 인재풀을 늘리려 했던 것도, 1856년에 있었던 청의 강북, 강남대영을 격파한 것도 그의 지휘 아래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16. 자살설, 병사설이 있다. 병사설의 안습한 최후는 홍수전 항목을 참조.
  17. 1차세계대전보다 많은 사상자를 낸 사건 중에선 의심의 여지 없는 1위인 2차세계대전을 제외하면, 몽골제국의 정복활동, 유럽의 아메리카 식민지화, 명청교체기 등이 추정치에 따라 순위가 달라진다.
  18. 여기에는 중국이 한국과 달리 논문쓰기가 쉽다는 점도 작용했다. 한국 기준으론 도저히 논문으로 볼 수 없는 적은 분량의 논문도 많다. 이것은 북한도 마찬가지로 학술지에 실리는 논문이라는 것들이 대개 2~4페이지 분량인데, 그쪽의 논리를 소개해보자면 이미 다 검증된 사람들이 쓰는 논문이라 딱히 검증 어쩌고를 할 필요가 없어서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