Σπαρτιατική Συμμαχία(그리스어)
Peloponnesian League(영어)
1 개요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기원전 6세기부터 기원전 4세기까지 유지된 고대 그리스의 스파르타를 맹주로 하는 펠로폰네소스 반도 도시국가들의 군사동맹이다. 아테네가 이끄는 델로스 동맹과 맞붙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유명[1]하다.
2 역사
2.1 초기
기원전 7세기 후반부에 이르면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정치력으로나 무력으로써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폴리스의 자리에 오른다. 이후 코린트와 엘리스를 우방국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 스파르타는 팽창주의적인 대외정책과 강력한 군사력을 결합하여 개별적으로 여러 도시국가와 동맹을 체결해 나간다. 이후 기원전 530년 자신들의 패권에 강력히 저항하던 테게아까지도 꺾고 그들을 자신의 세력권 안으로 편입시키는데 성공하면서 기원전 500년에 이르면 아르고스를 제외한 전 펠로폰네소스 지역을 자신들의 헤게모니에 놓는데 성공한다.
2.2 중기 이후
기원전 5세기 중반의 페르시아 전쟁 이후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사실상 전 그리스의 도시국가를 하나로 모은 반 페르시아 동맹에 가담하지만 승전 후 아테네가 이 반 페르시아 동맹을 좌지우지하는 맹주로 부상하자 이것이 마뜩찮았던 스파르타[2]는 여기서 탈퇴하여 자신들이 맹주인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재구성한다. 스파르타와 그 동맹국의 탈퇴 이후 반 페르시아 동맹 역시 마찬가지로 아테네가 이끄는 델로스 동맹으로 재편성된다. 하늘에 태양이 두 개가 있을 수는 없는 법이었고, 마침내 기원전 431년, 두 세력 사이에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한다. 30년 가까이 치뤄진 장기전에서 마침내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승리하면서 이제 그리스의 패권은 아테네의 손을 떠나 스파르타가 갖게 되었다.
그렇지만 스파르타의 헤게모니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해서 기원전 371년 레욱트라 전투에서 스파르타가 테베에게 참패한 이후 다수의 구성국들이 중립을 표방하거나 아니면 아예 스파르타의 등 뒤에서 칼을 겨누면서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사실상 무너진 것과 마찬가지가 되었다. 그리고 호흡기 떼기관짝에 못을 박아주신 분이 바로 이 분...[3]
3 구성
동맹국 간의 의사를 조정하기 위한 협의체가 존재했다. 인구 수, 경제력 등과 상관없이 가맹국들 모두 공평하게 한 명씩의 대변자를 파견했으며 동등하게 한 표를 행사했다. 타국 혹은 다른 동맹과의 충돌이 발발했을 경우,(즉 전시이면) 모든 회원국은 자신들이 보유한 병력의 1/3을 파견해야 할 의무를 지녔다.[4]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허울좋은 협의체인게, 이 협의체를 소집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스파르타 뿐이었으며, 협의체의 의결 사항도 스파르타한테만큼은 강제력이 없었다. 이쯤되면 동맹이 맞는지조차 의문스러울 정도(...)[5] 여기에 결정적으로 이 협의체보다는 스파르타의 민회가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의사를 결정하는 실질적인 주체였다. 그냥 '스파르타와 아이들'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이다.
4 이념
누가 아테네와 대척점에 있던 동맹 아니랄까봐 과두정을 지향점으로 내걸고 민주정을 반대했다. 다만 절대군주정은 반대했다고...- ↑ 왜냐하면 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또다른 별칭이 그리스의 자살(...)일 만큼 고대 그리스의 몰락을 가져와서이다.
- ↑ 사실 이 전쟁에서 테르모필레 전투와 같이 꽤나 많은 피를 흘린 스파르타의 공헌을 생각하면 아테네 혼자 우쭐했던 게 마뜩찮았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 ↑ 그리스 전역을 아예 자신의 왕국에 합병시켜 버렸다.
정ㅋ벅ㅋ.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그 역사를 존중해서 도시 내의 자치권은 남겨주었지만 뭐,,, - ↑ 대신에 이런 상황이면 평시에 의무적으로 내던 막대한 액수의 가맹금은 안 지불해도 됐다고 한다.
- ↑ 실제로, 학자들 사이에서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동맹으로 보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이 꽤 많은데, 일단 이 동맹 자체가 스파르타에 의해 강제적으로 구성되었던데다가 일부 동맹 구성국끼리만 자기들 사이의 또다른 동맹을 체결하는 것도 가능했던 등 여러모로 부실한 단합력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