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르모필레 전투

테르모필레 전투
날짜
BC 480년 8~9월
장소
그리스 남부 테르모필레[1]
교전국1교전국2
교전국그리스 연합군아케메네스 왕조
지휘관레오니다스 1세 †
데모필로스 †
크세르크세스 1세
히다르네스
마르도니오스
병력5,200명+기타 (헤로도토스)
10,000 ~ 20,000명 (현대 추정)
2,600,000명 (헤로도토스)
70,000 ~ 300,000명 (현대 추정)
피해 규모4,000명 (헤로도토스)20,000명 (헤로도토스)
결과
페르시아군의 승리

1 서두

테르모필레 전투는 그리스 연합과 페르시아 사이에 벌어진 페르시아 전쟁 중 페르시아의 2차 그리스 원정때의 대표적인 전투 중 하나이다. 대중에게는 영화 300이 흥행하면서 많이 알려졌다.

2 배경

2.1 전쟁의 시작

페르시아 전쟁의 발단은 이오니아 반란에서부터 시작했다. 이 지역은 키루스 2세 시절에 페르시아에게 정복된 지역이였으나 페르시아의 지배에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이것이 여러가지 요인과 어우러져 결국 반란의 원인이 되었다 전해진다.

BC 499~BC 493년에 걸처 일어난 반란은 다리우스 1세의 강경 진압에 의해 정리되었는데 이때에 아테네와 에라트리아가 이오니아 반란세력을 도운 것을 빌미로 다리우스 1세는 그리스 각지에 사신을 보내 땅과 물(페르시아의 지배권을 받아들이겠다는 상징적인 내용)을 요구한다.(BC 491) 대부분의 도시국가들은 이를 받아들였지만 단 두개 도시국가,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이에 대해 사신을 처형해 버리는 것으로 응수한다. 아테네는 사신들에게 재판을 때려서 처형을 판결한 다음 바위틈으로 던져버렸고, 스파르타는 재판같은 것도 없이 그냥 우물 안으로 차 넣었다. 우물로 집어넣으면서 스파르타가 사신들에게 했다는 말이 '거기 얼마든지 있으니 마음대로 가져가시오'였다고.[2] 유명한 장면 이로써 페르시아에 대한 적대세력이 어떤 국가들인지를 파악한 다리우스 1세는 일단 아테네에게 응징군을 보내나 마라톤 전투의 패배로 인해 실패한다.

이에 복수를 단단히 결심한 다리우스 1세는 이전의 아테네에 대한 단순 응징군 성격이 아닌, 그리스 전역을 제압할 생각을 가지고 그 준비에 들어가나 이집트에서 일어난 반란에 의해 이는 연기되었고, 다리우스 1세는 이집트로의 행군 도중 사망하여 그 아들인 크세르크세스가 왕위를 계승한다. 크세르크세스는 이 군사원정을 그대로 수행하여 이집트를 격파하여 반란을 진압, 이후 연기되었던 그리스 공격 계획에 다시금 착수한다.

2.2 크세르크세스의 원정

페르시아 제국의 그리스 원정 준비는 중간중간에 일어난 반란으로 인한 지연에도 불구하고 계속되었으며, 결국 크세르크세스는 BC 480년, 보병 180만 명, 기병 10만 기, 해군 50만 명, 함선 1200척에 달하는 대군을 편성해내는 데 성공한다. 거기에 한술 더 떠 아시아의 전차대, 아라비아의 낙타부대까지 합쳐 무려 230만의 이례적인 대군단이 조직된 것이다. 물론 아테네라고 그동안 놀고 있던 것은 아니였고, 테미스토클레스의 주도 하에 자체적으로 200여 척의 해군을 육성함과 동시에 여타 그리스 도시국가들에게 지원을 요청해 힘을 합처 막아내고자 계획한다.

공격하기 일년전인 기원전 481년 크세르크세스는 그의 아버지가 한 것 처럼 사절을 그리스 도시들에게 보내 흙과 물을 달라고 요구하였는데 아테네는 사신들을 절벽에서 던져버렸고, 스파르타는 우물 속에 빠뜨려 죽여버렸다.

2.3 그리스의 대응

그리스 도시들은 페르시아의 공격이 임박했음을 알고 대표단이 코린토스에 모여 대책을 논의하고 연합을 결성키로 결정한다. 그리고 페르시아군이 진군을 개시한 기원전 480년 봄에 다시 모여 어떻게 방어를 해야하는지를 논의하였고 그 논의 끝에 1만여의 호플리테스 보병을 템페 계곡에 보내 방어키로 한다. 하지만 마케도니아 왕인 알렉산드로스 1세가 이 계곡을 우회하는 루트가 있음을 알려왔으므로 이 보병은 이 계곡을 포기하고 뒤로 후퇴한다.

곧 크세르크세스가 그리스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리스 연맹은 아테네의 대표인 테미스토클레스의 제안대로 테르모필레 계곡에서 요격키로 결정한다. 그리고 페르시아군이 해군을 이용해 테르모필레를 지나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리스의 해군이 아르테미시움이라는 해협에서 페르시아 해군을 저지하기로 결정한다. 이러한 결정을 한 그리스 연맹은 이 작전이 실패할 경우 코린토스 지협을 방어하고 아테네 시민들은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이주하기로 하였다.

(테르모필레 Thermopylae 와 아르테미시움의 Artemisium 위치. 절묘하게 육, 해로를 동시에 틀어막을 수 있는 지형임은 지도상으로도 확인 가능하다)

한편 봄에 진군을 개시한 페르시아군은 8월이 되어 드디어 테르모필레로 접근한다. 이때 스파르타는 카르네이아 축제를 개최할 때였고 또한 올림픽이 열리는 해였다. 스파르타 법에 따르면 이 축제가 열리는 해엔 모든 군사행동이 금지되어있었다. 이때 스파르타의 에포르들은 상당히 위기상황이므로 이 법을 무시하기로 결정하였고 그 결과 스파르타의 두 왕중 하나였던 레오니다스가 스파르타에서 천 삼백명의 보병을 소집한 뒤 출동한다. 이 보병은 3백명의 레오니다스와 그의 호위병들, 그리고 1천명의 스파르타 외부자유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여기에 9백명의 노예계급인 헬롯이 동행하였다.

왕이 직접 이끌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많은 병력을 동원하지 않은 이유는 첫째로 테르모필레라는 곳이 워낙 좁은 계곡이라 방어할 때 대군이 필요하지 않았고, 둘째로 그리스군을 구성하는 자유시민들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였는데 장거리 원정을 떠나게 되면 이들이 자신들의 농지를 장시간 관리하지 못하는 까닭에 경제적으로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었다.[3]

펠로폰네소스 동맹군의 파견 병력도 4천여명에 불과했는데, 보이오티아 북서쪽에 위치한 테르모필레는 펠로폰네소스지역 도시국가들이 중심인 그리스군에겐 대단히 멀었고, 아르테미시움 전투에 동원된 함대 규모 및 운용 인력까지 계산한다면 300여척의 함대와 함께 4천여 원정군을 파견한것이므로 결코 적은 병력은 아니었다.

스파르타 왕인 레오니다스는 행군하면서 많은 그리스 동맹군을 합류시킨다. 레오니다스는 행군하기 전 델포이에서 신탁을 받았다고 한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O ye men who dwell in the streets of broad Lacedaemon!
Either your glorious town shall be sacked by the children of Perseus,
Or, in exchange, must all through the whole Laconian country
Mourn for the loss of a king, descendant of great Heracles.

오, 광활한 들판의 라케다이몬[4]주민들이여, 그대들의 운명을 들을지어다.
그대들의 훌륭하고 위대한 도시가 페르세우스의 자손들에게 파괴되든지
아니면 헤라클레스의 혈동을 이어받은 왕이 죽어
라케다이몬의 전 주민이 애도하게 되리라.

톰 홀랜드, 페르시아 전쟁 403~404p, 책과 함께

즉, 왕이 죽거나 도시가 함락되거나. 헤라클레스가 죽어서 시체를 불태우고 신들에게 영혼을 바친 장소가 테르모필레 협곡 위, 오이타 산 봉우리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적중률이 대단하다.

스파르타군이 행군하면서 언제나처럼 펠로폰네소스 동맹군을 동원하여 코린토스 지협을 나섰을때는 4~5천에 달하는 병력을 편성한다. 레오니다스는 테르모필레에 도착한 뒤 예전 포키스 인들이 세워놓은 성벽을 수리하고 보이오티아 일대의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합류를 받으면서 페르시아군의 도착을 기다린다.

2.4 페르시아의 도착

파일:Attachment/테르모필레 전투/termo.jpg

페르시아군이 마침내 모습을 나타내자 그리스 연맹은 다시 모여 대책을 의논하였다. 이들은 페르시아군이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규모인 것을 보고 혼란에 빠졌고 테르모필레를 포기하고 코린토스 지협으로 철수해 이곳을 방어해야 한다는 의견이 강하게 나왔다. 그러자 페르시아군의 근처에 있었던 포키스 인들과 로크리스 인들은 분노하면서 테르모필레를 방어하기로 했으면 그래야지 왜 말을 바꾸냐고 항의한다. 이에 레오니다스는 사절을 보내 자신은 테르모필레를 방어할 것이니 더이상 논의하지 말라고 하면서 소동을 진정시킨다.

크세르크세스는 싸우기에 앞서 사절을 보내 다음과 같은 조건을 제시한다. 그는 항복하면 그리스의 자치를 보장해 줄 것이며 페르시아 인의 친구라는 타이틀을 줄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인들에게 더 비옥한 땅으로 이주하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에 응할리가 없었다. 다른 땅으로 강제 이주 당할텐데 자치를 보장해 줄리 없잖아 레오니다스는 거부하였고 이때 사절은 레오니다스에게 무기를 내려놓고 대화하는게 어떠냐라고 말한다. 이때 레오니다스는 사절을 쫓아내며 "와서 직접 가져가시오(μολὼν λαβέ)"[5]라는 유명한 대사를 한다. 협상이 결렬된 뒤 크세르크세스는 4일간 공격을 멈추고 지켜보았는데 이는 소규모의 그리스군이 겁먹고 달아나길 기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3 병력구성

3.1 페르시아군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군이 군인만 2백 10만, 잡역부 합처서 4백 70만이라는 초월적인 수치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고대 역사가들도 이는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는지 8십만이라고 줄여잡기도 한다.[6] 만약 정말로 병력이 210만이라고 한다면 칭찬을 들을 쪽은 되려 막아낸 그리스보다는 페르시아일 것이다.[7] 순수병력을 210만씩이나 확보할 정도로 매우 강대한 제국을, 그렇지 못한 그리스와 동시기에 이룬 셈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리스인들이 그들의 승리를 부풀리기 위해 과장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추정은 7만에서 50만으로 다양하다. 하지만 대개 보병과 수병을 더해서 20~50만 정도로 추측된다. 이렇게 규모 예상치가 널을 뛰는 이유는 어디까지가 정규전투병력이고 어디까지가 수송 및 보조 병력, 심지어 군대의 가족인지 애매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마케도니아의 페르시아 원정 시기 그리스 군은 실제로 전투를 벌였지만 기록상으로는 정규군의 보조전력으로 참가하던 이들조차도 머릿수에서 제외한 반면에 페르시아는 머릿수 과장 차원에서인지 비전투 병력마저도 머릿수에 포함시키는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더구나 이 경우는 페르시아의 원정이기 때문에 해상수송을 고려하더라도 치중대가 적은 숫자일리가 없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크세르크세스가 당시로썬 상상도 하기 힘들 정도의 규모의 병력을 동원한 것이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맞서는 그리스 연합군은 페르시아 전쟁의 최후의 대전인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역대 최대의 병력을 동원하는데 이때의 병력이 3만~7만 사이로 추산된다.

3.2 그리스 병력

그리스군의 구성은 300명의 스파르타 완전 시민, 1000명의 스파르타 외부 자유민, 3000명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시민, 그리고 3000명의 테살리, 아카디아 인(즉 코린토스 지협 밖의 펠로폰네소스가 아닌 그리스 대륙 시민들) 등 총 7천 300명 정도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900명의 헬롯(스파르타 노예)들도 있어다고 추정되는데 이들이 전투에 참여했는지 아니면 단순히 스파르타 군의 시중을 드는 역할만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헤로도토스는 5천명으로 추정하나 그는 합류된 많은 수의 동맹시민군들을 언급하면서 그들의 병력의 기록을 누락하였고 이를 종합해 본다면 대략 1만 1천명이라고 추정된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7천명 정도였을 것이라고 대부분 추정하고 있다.

테르모필레를 방어하는 것은 당시로썬 최선이라고 현대학자들은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페르시아군이 대군이라 보급하는데 곤란을 겪고 있으며 따라서 이들은 반드시 전진하면서 현지 조달을 같이 해야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테르모필레는 소규모의 군대로 방어하기엔 최적이었고 아르테미시움과 곁들이면 육로와 해로 동시에 진군을 봉쇄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결국 아르테미시움과 테르모필레를 방어해 낼 수 있다면 이 시기 소극적인 그리스국가들 역시 승산과 후방의 안전함을 느끼고 참전할 것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살라미스 해전만 봐도 알 수 있다. 해당 해전은 페르시아 군대의 입장에서는 할 필요가 없는 무의미한 전투를 괜히 했다가 패배한 것으로, 정석적으로 진행되었다면 그리스 연합군과 페르시아 군은 코린토스에서 최후의 전투를 벌였을 것이다. 코린토스 지협 이북은 모두 페르시아의 손에 들어간 상태로. 실제로 살라미스에서 승리하기전에 이미 아테네는 불탔다.

더군다나 테르모필레는 정면에서 매우 강력한 그리스군의 주력인 호플리테스 팔랑크스의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장소였으며, 페르시아군의 장점을 살리기 힘든 지역이였다 이는 이 군대의 좌우가 각각 벼랑과 산+성벽으로 막혀있었고 페르시아군의 포진 지역에서는 다수의 궁병을 집중시켜 사격을 퍼붓기 힘들었기 때문. 물론 기병도 쓰기 힘들다.

따라서 이곳을 돌파하기 위해서 페르시아군은 자신의 장점인 대규모 병력, 다수의 궁병, 기병 등이 모두 봉쇄된 상태로 좁은 지형+성벽이라는 엄폐물까지 지닌 그리스군의 정면에 들이받아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꽤나 가볍게 무장했던 페르시아군은 녹아내릴 것은 분명하였다. 즉 지옥불 조기점화기 업글을 한 화염기갑병이 입구를 막고 있는데 저글링으로 들이받는 것과 흡사한 것.

4 전투 시작

4.1 전투 첫날

파일:Attachment/테르모필레 전투/ttm.jpg

(지형 묘사를 CG로 재현한 것. 적은 수로 다수를 막는데 아주 적합한 지형임이 확인 가능하다.)

4일간 기다린 뒤 크세르크세스는 드디어 공격명령을 내린다. 그는 우선 메디아인들로 구성된 병력을 보낸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그리스군은 어깨를 나란히 한 뒤 거대한 방패를 들어 맞섰다고 하는데 이는 팔랑크스의 대형을 묘사한 것임이 틀림없다.

(그리스의 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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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 시민군의 무장)

그리스군은 싸우면서 계속 전방의 병사와 후방의 병사를 교대했는데 이는 계속된 전투에 병사들이 지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완벽한 지형 보정과 높은 무장수준, 그리고 철저한 규율을 지닌 그리스군에게 페르시아군은 예상대로 녹아내렸다. 이에 크세르크세스는 매우 당황하여 그가 앉은 의자에서 세차례나 내려왔다고 한다. 이때 최정예군인 스파르타 군의 희생은 두명 정도에 지나지 않을 정도의 일방적인 싸움이라고 한다. 다른 그리스 연맹군의 희생도 있을 것이나 스파르타 군의 희생을 보면 그 수는 미미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희생을 보다 못한 크세르크세스는 자신의 최정예인 아누시야(이모탈)를 투입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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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이모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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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탈 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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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300에서의 이모탈, 고증 같은 건 안드로메다로)

비록 이모탈이 기존 징집병에 비해 중무장했던 것은 사실이나 이들의 갑옷 또한 궁병 사격에 대응한 얇은 수준이였기에 접근전에서는 메디아 징집병과 마찬가지로 그리스군에게 취약했다. 이때 그리스군은 후퇴를 가장하여 많은 수의 이모탈을 끌어들인 뒤 돌진하여 피해를 급증시키는 전투기술까지 선보였으며, 이로인해 이모탈도 막대한 피해를 입는다. 이모탈 역시 앞서 투입되었던 메디아인들과 비슷한 운명을 맞이한 뒤 패주한다.

4.2 전투 둘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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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세르크세스는 그래도 단념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인에게 그래도 어느 정도 피해는 입혔겠지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시 보병을 보내 싸우게 하였는데 그리스군은 약해지긴 커녕 전투 첫날의 성과로 사기가 크게 오른 상태라 더 강해져 있었다. 첫날과 마찬가지로 싸움은 그리스군의 일방적인 학살이였고 크세르크세스는 매우 당황하여 싸움을 중단한다.

그런데 그날 밤 페르시아 왕은 희소식을 전해듣는데 트라키니아 인이었던 에피알테스라는 자가 방문하여 우회로가 있다는 것을 전한 것이었다. 에피알테스는 이로써 전설이 되는데, 그 이유는 그의 이름은 그리스어로 '악몽(εφιάλτης, 현대 그리스어로도 악몽이다)'이라는 뜻이 되어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게 된 것이다. 에피알테스는 많은 포상을 기대하였는데 뒤이어 살라미스 해전의 대패로 인해 페르시아군이 철수하자 아무런 포상을 받지 못했다. 그리스에서 살기 어려워진 그는 테살리로 달아났는데 그리스 연맹측은 그의 목에 많은 현상금을 걸었다. 결국 그는 아테나데스라는 사람에게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크세르크세스는 자신의 지휘관이었던 히다르네스에게 2만여 병력을 주어 이 루트를 통해 우회한다. 이 병력엔 이모탈도 동행하였다고 한다.

4.3 전투 셋째날

3일째 새벽에 이 우회로에 주둔하고 있었던 포키스 인들이 페르시아 병력이 접근하고 있음을 발견하였고 대단히 당황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당황한 것은 페르시아군도 마찬가지였고 그 이유는 설마 이 우회로에까지 그리스군이 주둔하고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페르시아 인들은 이 그리스군이 스파르타인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두려워했는데 길안내 중이었던 에피알테스는 아니라고 하며 안심시킨다. 곧 전투가 벌어졌고 숫적으로 밀린 포키스 인들은 뒤로 밀린다.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았던 페르시아군은 구석에 몰린 포키스 인들에게 화살을 퍼부은 뒤 그대로 지나친다.

포키스 인들이 보낸 사절에 의해 우회로에 페르시아군이 진입했다는 소식을 들은 레오니다스는 장교들을 모아놓고 대책회의를 한다. 그리스인들은 서둘러 후퇴해야 한다고 했는데 레오니다스는 자신은 남아서 최후까지 싸우겠다고 하였다. 그는 그리스인들에게 남아서 싸울 것인지 아니면 후퇴할 것인지 선택권을 준다. 700여의 테스피아인들은 스파르타인들과 남아 같이 싸우겠다고 한다. 그리고 400명의 테베인들 역시 남아 싸우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질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왜 남아 싸워 몰살당하기로 하였는지는 논란이 많다. 단지 '스파르타인은 후퇴하지 않는다'라는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하기엔 1천 500명의 희생은 상당한 손실이었다. 스파르타 완전시민 단 200여 명이 포위, 항복한 것만으로도 모든 해군을 포기까지 할 정도로 자기 시민들을 아꼈던 훗날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의 스파르타인들을 생각하면 이는 더더욱 이상하다.

따라서 일반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유력하다. 즉 레오니다스가 상황을 파악했을때 이미 페르시아군의 접근이 상당히 진행되었고 따라서 누군가가 남아 후방을 지켜 남은 그리스인들이 안전하게 후퇴할때까지의 시간을 벌어야 했다는 것이다. 또한 페르시아 인들에겐 상당수의 기병이 있었으며, 만일 레오니다스가 전군과 함께 후퇴했다면 이 기병에게 곧바로 따라잡혀 모두 죽음을 당하는 신세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레오니다스는 1천 5백명을 남겨 후방을 지키며 남은 6천여의 병력을 보존시켜 훗날의 싸움에 대비하게 하는 선택을 한 것라고 한다.

이 1500명중 테베인들과 테스피아인들이 왜 남아 같이 죽는 길을 선택했는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는데 이들은 순수한 기사도 정신으로 남기로 한 것으로 보여진다. 400여의 테베인들이 인질이라는 설도 있긴 하지만 그렇다면 테베인들만 인질로 잡혀 테르모필레 전투에 동행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된다. 그렇다면 이들 테베인들은 페르시아군에게 협력하기로 한 테베시의 결정에 반발한 강경파 시민들이라 보여지며 따라서 어짜피 오갈데 없는 신세에(테베로 돌아가면 권력을 쥔 친페르시아 세력에 의해 숙청당할 것이 분명하므로) 페르시아 인들에 대한 적대심 때문에 끝까지 남아 싸우기로 한 것이다. 다른 700여의 테스피아 인들의 경우엔 완전히 깨끗한 희생정신으로 남아 싸우기로 한 것으로 보여지는데 그들이 테스피아 시가 동원할 수 있는 대부분의 호플리테스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상당히 놀라운 결정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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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그리스 측에서 모든 결정을 내린뒤 곧 페르시아군이 공격을 시작하였다. 이번엔 그리스군은 사방에서 몰려온 페르시아군들과 싸워야 했고 하나라도 많은 적을 죽이기 위해 진형을 넓게 핀 뒤 앞으로 전진하였다. 이 싸움은 격렬하여 그리스군은 그들의 창이 부러질 때까지 싸웠고 창이 부러지자 허리에 찬 칼을 뽑아들고 싸웠고 칼이 부러지면 땅에 떨어진 돌을 주워 싸울 정도였다고 한다. 이 싸움에서 페르시아 측의 장교들이었던 크세르크세스의 동생들인 아브로코메스와 히페르안테스도 죽었다고 한다. 레오니다스 역시 전투하는 와중에 죽었는데 이 왕의 시체를 지키기 위해 그리스군은 이 근처에서 격렬하게 싸웠다. 이때 이모탈이 투입되었는데 그리스인들은 전투에서 밀려 성벽쪽으로 내몰렸다. 이때 테베인들은 고립되었고 따라서 이들은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한다. 테베인들은 나중에 포로로 잡힌 뒤 페르시아 측에 의해 낙인이 찍힌다. 테베인들을 제외한 남은 병력은 칼을 들어 맞섰고 칼이 못쓰게 되자 주먹과 이빨로 저항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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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세르크세스는 지겨워서 이에 자신의 궁병대를 투입해 그리스인 전원이 사망할때까지 화살을 퍼붓는다. 이렇게 무지막지한 화살공격에 그리스군은 당해내지못하고 그야말로 전멸한다.훗날 1939년의 고고학 발굴을 통해 이 장소에서 상당한 양의 청동 화살촉이 발굴되어 이 설명을 뒷받침해주게 된다.

전투가 종료되자 페르시아군은 드디어 그리스 본토로 진입할 수 있는 루트를 확보하게 된다. 페르시아군의 총 전사자는 2만여 명으로 기록되었는데, 헤르도토스가 페르시아군이 2백만이 넘는다고 서술한것을 조금 감안해 줄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리스군의 전사자는 전멸당한 수를 포함하여 2천여 명이었다. 결국 4천 정도가 패주하여 살아남는데 성공했다는 이야기인데, 병력 차이와 페르시아군에 기병이 존재한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정도면 대단히 양호한 결과물이다.

끝으로 본 전투에서 결사대의 무훈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졌다.

우리는 그리스를 위하여 다함께 싸웠고 다함께 죽었나니, 나그네여, 스파르타에 가거든 이 말을 전할지어다.

5 그 후

레오니다스의 시체를 발견한 페르시아군은 그의 머리를 자르고 몸을 십자가 형에 처한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페르시아가 전사한 적장에게 이러한 처우를 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페르시아 인은 용감한 적장에게 예우를 보이는 것이 일반적인 풍습이었기 때문이었다.[8] 시신은 훗날 페르시아군이 철수한 뒤 그리스군에 의해 수습되어 그 자리에 묻힌 뒤 사자상을 세워 그의 용기를 기린다. 그 뒤 40년 뒤 스파르타인들은 그의 뼈를 스파르타에 가지고 와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고 해마다 그의 죽음을 기리는 스포츠 행사를 열게 된다.

테르모필레가 페르시아군에 의해 점령되자 아르테미시움에 머물던 그리스 해군도 철수한다. 그 뒤 보이오티아 지역에 전진한 페르시아군은 저항하는 도시들은 파괴하고 그렇지 않은 도시들에게는 항복을 받으면서 진군한다. 그리스인들의 인명피해는 얼마 없었는데 보이오이타 일대의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친페르시아 성향이 있었고, 이는 위의 전투 종반에 테베군이 남은 이유로 꼽히는 것이 자국 도시 안에 친페르시아 성향 시민이 더 많았기 때문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쉽게 답이 나온다. 물론 페르시아 편을 안 든 도시들은 8개월간의 페르시아군의 진군동안 이미 피신해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코린토스 지협에서 페르시아군을 저지하기 위해 병사를 소집한다. 그리고 그 지협에 성벽을 건축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페르시아군이 해군을 통해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상륙한다면 의미가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 해군이 페르시아 해군을 맞서서 이들의 진격을 저지해야만 했다. 그런데 아테네의 지도자인 테미스토클레스는 단지 저지하는 것에만 만족하지 않고 페르시아 해군과 적극적으로 싸워 격파하기를 바랬다. 따라서 테미스토클레스는 살라미스 해협에 페르시아 함대를 유인한 뒤 격파하였으며, 그로 인해 펠레폰네소스의 가장 큰 위협이 제거되는데 성공한다.

(코린토스 지협)

해군이 괴멸되자 크세르크세스는 헬레스폰트의 다리를 그리스군이 파괴하여 페르시아군을 본토로 부터 고립시키는 것을 대단히 우려하였다. 특히 크세르크세스가 페르시아 본토로 부터 차단된다면 페르시아는 왕의 공백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원정을 중단하고 페르시아로 귀환하기로 한다.

그런데 페르시아는 코린토스 지협 동쪽의 대륙을 점령한 상태였으므로 자신의 장군인 마르도니우스에게 상당한 병력을 남기고 이곳을 지킴과 동시에 그리스 원정을 계속 수행할 것을 지시했으며, 이 마르도니우스는 다음해에 다시한번 아테네로 진격해 도시를 불태운다.

이때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있었던 대다수의 그리스인들은 살라미스 해전을 통해 입지가 강화된 아테네인들의 압력을 받아 코린토스 지협을 나와 페르시아군과 적극적으로 맞서기로 결정한다. 그리스인들은 중장보병만 수만에 이르는 대군을 조직하였고 아티카에 있는 페르시아군과 싸우기 위해 전진하였으며, 이에 대해 평야가 많은 보이오이타 지역으로 철수한 페르시아군과 플라타이아이시 근방에서 대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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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타이아이 시의 위치. 테르모필레 및 살라미스의 위치도 함께 표시되어 있다. 코린토스 지협의 위치는 왼쪽 아래 박스에 가려져 있다.)

플라타아이아시는 오랫동안 아테네와 밀접한 동맹이였던 보이오이타의 작은 도시국가로, 아테네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마라톤 전투에 참전한 유일한 도시국가이다. 뒤이어 벌어진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그리스군은 페르시아군에 대해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으며, 동시에 터키 서부 지역에 있었던 미칼레 지역에 머물고 있었던 페르시아의 잔여 해군까지 격멸시켜 페르시아의 그리스 원정을 완벽하게 실패로 돌렸고, 이후 페르시아 전쟁은 페르시아의 그리스 공격이 아닌 그리스의 페르시아 공격 국면으로 전환되게 된다.

6 의의

이 전투가 전황에 끼친 실질적인 영향은 미미하다. 사기를 크게 고양시켰다고 하는 것도 무리인데, 테르모필레 전투 이후 페르시아가 코린토스 지협 동쪽의 그리스 영토를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 채 휩쓴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전투가 페르시아 전쟁에서 가장 유명해진 이유는 바로 그리스인들의 불굴의 정신을 보여준 것에 있다.

또한 이 전투는 그리스 전체의 자유를 위해 싸운다는 프로파간다에 써먹기에도 적절하였다. 그 이유는 테르모필레의 연합군은 그야말로 그리스 측의 다국적군이었으며 후미를 자청하여 전사한 시민들은 그들의 시민이 아닌 다른 폴리스인들의 생명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압도적인 병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전진해서 싸운 것은 '그리스인들의 자유를 위해 용기를 내었다'라는 식의 그럴 듯한 해석이 덧붙여지기에 충분하였다. 그 결과 이 전투는 패배에도 불구하고 가장 유명한 전투가 된다.

더구나 이 전투의 핵심은 마라톤 전투에 이어서 중장보병이었다. 유산시민층을 주축으로 하는 중장보병 신화라는 점에서 테르모필레는 마라톤과 더불어서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다. 실제 페르시아 전쟁이 결국 살리미스의 3단 노선의 수부들의 힘에 의해서 결정이 되었으며 그 결과 무산시민층이 성장하게 되지만, 단적으로 플라톤은 <<법률>>에서 살라미스 전투를 "그리스군인들을 더 나쁜 사람으로 만들었다"라고 평가되며,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불행한 사건"으로 표현할 정도의 반발로 인해 중장보병의 위대함을 보여준 전투들에 대한 평가는 더더욱 높아질 수 밖에 없었다. 이와 유사한 것이 미국의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민병대 신화이다.

다만, 전투에 참여했던 3백명의 스파르타인들이 모두 사망한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실제로는 마지막 전투에 두사람이 불참했다. 헤로도투스의 기록에 의하면 이들의 이름은 판티테스, 유리투스, 그리고 아리스토데모스이다. 이 중 판티테스는 레오니다스의 명령에 의해 텟살리아에 사자로 가느라 마지막 전투 당시 자리에 없었다. 나름 정당한 이유가 있다 하겠으나 스파르타로 생환한 이후 비겁자로 칭해지며 당하는 모욕을 견디다 못해 결국 목을 매 자살했다. 한편 유리투스와 아리스토데모스는 당시 안질을 앓고 있어 실질적으로 전투를 수행할 수 없었으므로 마지막 전투 직전 레오니다스의 명령에 의해 국가노예의 인도로 본국으로 후송되었다. 그러나 그 중 유리투스는 귀환하던 중 자신을 인도하던 국가노예를 위협해 도로 테르모필레로 돌아가 마지막 전투에 장님인 상태로 돌격하여 전사했고 다른 한편인 아리스토데모스만이 홀로 스파르타로 돌아왔다. 이후 아리스토데모스는 "겁장이 아리스토데모스"로 불리며 어느 스파르타인도 그에게 말을 걸거나 불을 빌려주지 않았다. 절치부심 한 탓인지 그는 뒤에 벌어진 최종결전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명예회복을 위해 팔랑크스 진형에서 뛰쳐나가 광란에 가까운 자살적 돌격을 감행하여 가장 큰 전공을 세우고 전사했다. 다만 스파르타인들은 전열을 유지하지 않고 군율위반 스스로 죽음을 구하는 과정에서 세운 공적이라 평가할 수 없다 했다고 한다. 스파르타가 어떤 국가인가 보여주는 사례.

여담으로 시간이 흐르고 20세기가 되어 그리스인들은 테르모필레에서 한번 더 전투를 치르게 된다. 상대는 이탈리아군(...).
  1. Thermopylae. '뜨거운 관문'이란 뜻이다.
  2. 영화에서는 페르시아 사신을 레오니다스가 발로 차서 우물에 떨어트린 것으로 나오나, 당시 스파르타의 왕은 레오니다스의 형인 클레오메네스 1세(Κλεομένης , BC ~ 489)였다.형이 똥을 싸 질러 놓으니 동생이 개고생 참고로, 클레오메네스는 저 사신사건 2년 후 그 동생의 손에 의하여 구금되어 결국, 감옥에서 의문사 한다.
  3. 그나마 이러한 한계를 어느정도 극복했던 것은 애초에 막강한 경제력을 지닌 전성기의 아테네와 거대한 농경지를 지니고 헤일로타이를 부려먹는데다 다수의 동맹국을 움직일 수 있었던 스파르타였다.
  4. 당시 스파르타의 이름. 스파르타는 건국시조 라케다이몬의 왕비이다.
  5. 진중권에 의하면 이 말은 현재 그리스 육군 제1군단 구호로 쓰이고 있다고...
  6. 역사상 가장 많은 숫자의 군인이 공격에 투입된 전쟁은 제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소전쟁인데, 인구 8천만의 독일+오스트리아를 포함한 이탈리아, 헝가리, 불가리아 등의 각 추축국 군사력을 끌어모아도 소련 침공군은 350만을 넘기는 수준이었다. 서부전선 및 다른 곳에 배치해 놓은 병력을 포함하면 좀 더 많아지지만. 그래도 지금보다 인구가 훨씬 적은 2천년 전에 단독으로 210만의 순수 군인을 확보했다는 사실은 터무니 없는 소리에 불과하다. 무슨 스타크래프트처럼 마구 찍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show me the money?
  7. 대군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만큼 병참 조달이 힘들고, 당시에는 통신 기술도 없어서 저 많은 군대를 통솔하기가 힘들다. 오히려 그리스가 아니어도 자멸했엇을지도. 동양에서도 비수대전이라는 유사 사례가 있다.
  8. 이게 사실 화풀이에 불과하고, 그리스와 터키 지역을 가르는 흑해의 입구인 헬레스폰트를 페르시아군이 건널때 풍랑이 쳐서 배다리가 부서진 덕분에 행군이 늦는다고 바다에 채찍질을 한 것으로 볼 때 크세르크세스는 다혈질이라는 말이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이는 헤로도토스의 편향된 서술이고 실제로 크세르크세스 1세는 전쟁을 싫어하는 섬세한 성격이다, 페르시아의 병력에 대한 엄청난 과장을 생각하면 그리스 측의 편향된 서술일 가능성이 높다고도 하는데, 편향편향해도 어차피 기록은 헤로도토스 하나밖에 없다. 고대에 뭐 이만큼 출장한다고 신문에 써서 알리고 보존하고 그게 또 교차검증돼서 정확하게 알려지던 것도 아니고, 머릿수 과장해서 나쁠 것도 없다. 헤로도토스는 그냥 이런 설화들을 채집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