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회

프란치스코회의 문장

프란치스코회는 탁발수도회이다. 남자여자든 들어오면 일단 머리를 깎고 맨발에 수도복 차림으로 청빈을 추구하는 삶을 산다. 생전에 나환자들을 돌보던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을 본받아, 나환자들을 위한 봉사도 많이 한다.

'프란치스칸'(Franciscan)이라 불리는 수도공동체는 크게 3갈래로 나뉜다. 먼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맨 처음에 직접 조직한 작은형제회는 1회, 아시시의 성녀 글라라와 함께 세운 글라라 수녀회는 2회, 프란치스코가 직접 세우지 않았지만 그의 뜻에 동참하고 있는 수도 3회와 율수 3회, 재속프란시스코회를 통틀어 3회로 지칭된다. 그밖에 이 3개의 프란치스칸에 속하지 않은 많은 번외(…) 프란치스칸은 그냥 4회라고 부른다.

프란치스칸 1회인 작은형제회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물러난 이후 회칙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열정파니 이완파니 온건파니 하는 3개 분파로 나뉘어 투닥투닥 싸웠다. 사실 마구 싸웠다기보단 각기 다른 방식으로 수도회를 꾸려나가며 '내가 진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의지다!'를 서로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2인자라 불리는 보나벤투라는 그의 일대기를 담은 대전기를 편찬했는데, 그의 부모가 큰 병을 앓고 있는 아기였던 그를 안고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를 찾아가자 그가 기도를 해주었고, 이 기도로 병이 씻은 듯이 나은 그에게 성인은 "너는 참 운이 좋구나(Buona Ventura)!"란 말을 했다고 한다. 부모는 그 길로 본래 조반니였던 아이의 이름을 보나벤투라로 갈아버렸다고 한다.(…) 여하간 이 보나벤투라는 수장을 잃고 갈라졌던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다시 하나로 뭉친 제2의 프란치스코회 설립자이다. 뿐만 아니라 토마스 아퀴나스와 쌍벽을 이루는 스콜라 철학자이기도 하다.[1]

하지만 추기경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보나벤투라가 죽은 후, 작은형제회는 다시금 수많은 갈등 끝에 각각 신령파와 꼰벤뚜알파로 나뉘었는데, 꼰벤뚜알은 신령파가 주장한 철저한 청빈과 은거 생활보다는 설교와 신학 연구, 사회 내에서 능동적인 역할을 해내는데 더욱 주력했다. 교황은 꼰벤뚜알을 더 밀어주었기 때문에 당분간 꼰벤뚜알이 주축이 된 프란치스코회는 다시 개혁되어 회칙엄수파가 갈라져나와 엄격한 생활로 돌아갔다. 이 분파는 작은형제회로 다시 뭉쳤지만 오래지 않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특유의 가난함을 내세운 카푸친회라는 분파가 또 갈라져나와 프란치스칸 내 세력을 키웠다. 그렇게 프란치스칸 1회는 작은형제회(Ordo Fratrum Minorum), 콘벤투알 작은형제회(Ordo Fratrum Minorum Conventualium), 카푸친[2] 작은형제회(Ordo Fratrum Minorum Capuchinorum)로 완전히 나뉘었다.

현재 이 3개 분파는 서로 갈등한다기보다 상부상조하며 수도회의 큰 틀을 이끌어가고 있다고 한다. 그렇게 가톨릭의 종교 의식 체계를 확립하는 데에도 큰 기여를 했다.

다음은 한국 가톨릭에 있는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홈페이지.

심지어 개신교 수도회까지도 존재한다.

  1. 단순한 삶과 아이같은 영혼을 추구하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오래 살았더라면, 보나벤투라를 만났을 터인데, 그는 그를 무척 지루한 '형제'로 알았을 지도 모른다. 하루 종일 아리스토텔레스 운운 해댔을 테니... 머리에 쥐난다.
  2. 카푸치노의 유래가 되는 그 카푸친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