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스터 존의 전설

프레스터 존의 왕국에 대한 중세의 전설. 한국말로 고쳐쓰자면 '사제왕 요한의 전설'

1 소개

처음 확인된 것은 십자군 전쟁이슬람교의 반격으로 성지가 위험하던 시기인 1145년으로서 교황이 새로운 십자군을 알리는 칙서를 발표할 때 바이에른의 역사가 오토가 <두 도시의 역사> 라는 책을 집필하면서, 최초로 사제왕 요한의 기록을 서양인이 기술(위교 주교의 교황에 대한 보고)한 일이다.

이전에 인도기독교도가 있다는 소문은 있었으나, 위의 기록을 통해 위고 주교가 전해준 것은 상상을 초월 - 거대한 세력을 가지고,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고, 인근까지 왔다가 돌아갔다는 소문 - 하였기에 서양인에게 큰 흥분과 환상을 불어넣었다.

그런 소문이 계속 돌아서 요한의 군대가 티그리스강 유역까지 왔다가 회군했다는 소식까지 들려오게 되자, 이는 무슬림의 압박을 받던 십자군에게 아쉬운 소식이었고 또한 서구가 처한 위기의 심각성을 알려 교황 중심의 유럽단합을 촉구하게 되었다.

교황 에우게니우스 3세가 제2차 십자군을 소집하나 실패. 이런 상황에서 사제왕 요한이 비잔티움 황제인 마누엘 콤네누스에게 보냈다고 하는 편지가 유포된다. - 연도불명(황제 제위기인 1143~1180년으로 추정) 하지만 그 내용은 상대를 폄하하는 내용으로 시작해 외교적 격식 없음, 서구인 사이 유행하던 관념이 그대로 반영(세인도, 복류설, 유대의 10부족 등)된 것으로서 동방의 군주가 아닌 유럽인의 작품이 분명했으며, 비잔티움에 적개심을 가진 라틴계 서구인이 썼다고 여겨진다. 작자는 요한의 이름을 빌려서 유럽의 상황을 질타, 화해와 통합의 필요성을 역설하는데 흔히 말하는 정치적 풍자라고 할 수 있겠다.

1215년 제5차 십자군이 결성, 전투 중 1221년에 다윗왕의 소문이 전해짐에 따라 - 작크의 <인도의 왕 다윗의 행적> - 경교를 믿고 사라센을 공격, 바그다드에 입성하게 된다.

그러던 중 1222년부터 유럽은 몽골의 침입에 경악, 서구인이 가진 사제왕 요한에 대한 희망은 무너지게 되고 1243년 교황의 친서를 가진 수도자들이 몽골을 방문(볼가강가의 바투) 프레스터 존의 소식을 전하게 되는데 이는 '대인도의 기독교도들이 타타르를 막아냈다'는 사실과는 전혀 관련 없는 이야기였다. 여기서 칭기즈 칸은 사제왕 요한이 아닌, 그와 결전을 치루는 인물로 묘사되었다.

한편 중동으로 파견된 수도사는 네스토리우스파의 수도사를 통하여 1202년경 칭기즈 칸이 요한(또는 다윗)왕을 죽이고 그 딸과 혼인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또, 1248년 프랑스 루이 9세를 방문한 몽골의 사신에 의해 위와 같이 요한왕의 죽음과 동시에 자신들이 기독교도들의 친구임을 자처하는 편지가 보내지기도 했다. 이 이야기가 유포된 데에는 몽골인들이 서구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사제왕 요한을 누른 것이 자신이라고 강조하여 서구의 자발적 복속을 유도하려는 의도과 동시에, 이슬람을 상대하기 위해 서구의 연대가 필요한 상황에서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다는 점을을 주지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즉, 사제왕 요한의 죽음을 알리는 소식은 몽골이 세계정복 과정에 서구를 대상으로 만들어낸 교묘한 정치적 선전이었고, 이를 위하여 종교적 관용을 표방하며 고위직에 진출하기도 한 네스토리우스파를 적절히 활용한 것이다. [1]

이후 수도사 루부룩의 윌리엄이 요한왕의 진실을 밝히는 여행을 떠나고, 마르코 폴로의 기행기에도 언급되기도 한다.

하여간 동방에 파견한 수도사들을 통해서 교황청은 요한왕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동방의 기독교 군주에 대한 기대는 무너지나, 1324년 조나단 카탈라니가 요한이 에티오피아에 있다고 주장, 이 견해는 많은 유럽인에게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에티오피아로 가는 육로는 차단되어 해로를 찾아야 했고, 이는 희망봉 개척에 중요한 기여를 한다. 15세기 바스코 다 가마는 출항시 요한에게 보내는 소개장을 휴대할 정도였다. 마침내 요한의 왕국을 발견하나, 현실은 '토착민' 가운데 하나... 이로서 사제왕 요한의 전설이 사라지고, 13세기 사제왕 요한을 찾으려는 서구인의 노력은 300년만에 에티오피아에서 끝을 맺는다.

서구인들이 이렇게 전설에 열광한 근본적인 원인은 이슬람에 대한 공포였다. 당시 이슬람 세계는 몇 세기 동안 지속적으로 확장되며 번영을 누리고 있었고, 반면에 서구 기독교 세계는 이슬람의 침략으로 무너질 지 모른다는 공포에 떨고 있었다. 이슬람의 뒷편에 이슬람보다 강한 기독교 왕국이 있다는 헛소문은 진위를 따지기 이전에 당시 서구인들에게 큰 위안을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2 진위여부

그리고 위에 나온 중세인들의 전설의 진위를 밝히자면...

첫 이야기의 근거는 1141년 사마르칸트 북방에서 벌어진 셀주크와 카라키타이야율대석의 전투로서, 이때 셀주크인이 참패하면서 이 사건은 서양에 큰 파문을 주었다. 때문에 실제로 야율대석은 기독교도가 아니었지만, 이슬람을 적대한 사실에서 더 나아가 기독교 신봉군주로 여겨지고, 야율대석의 명칭 '구르칸'이 일부에게는 중국의 칭호와 합쳐져 '왕칸'으로 불리면서 이것이 음의 유사성으로 인해 '요한'으로 와전되었다고 여겨진다.

1221년 다윗왕 이야기의 근거는 몽골 초원 서부의 나이만족의 쿠출루크로서, 그는 칭기즈 칸과 맞서다가 중앙아시아로 도주, 카라키타이(서요)의 군주 '구르 칸'의 신임을 얻고 그의 딸과 결혼, 이후 쿠데타로 지배권을 손에 넣고 부인의 영향을 받아서 불교도로 개종하고 이슬람을 박해했다. 그 이유는 고조부의 명칭과, 나이만족이 기독교를 신봉한다는 점이었다. 쿠출루크 본인은 후에 개종했지만 기본적인 성향은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소문과 달리 그는 서쪽을 공격한 적은 없고 이는 칭기즈 칸의 행적과 혼동된 것이다.

이런 일이 발생한 원인은 1210년에서 1220년까지 중앙아시아, 서아시아의 사건들이 주체의 구분없이 십자군측에 전달된 결과로 쿠출루크와 칭기즈 칸의 이야기가 뒤섞였거나, 혹은 특정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선전용 낭설인 것으로 여겨진다.

몽골인들이 퍼트린 요한왕의 죽음에 대한 근거는 칭기즈 칸과 케레이트의 옹칸의 사건이 와전된 것. 케레이트 옹칸은 경교도인 유목군주로서 딸을 안 주다가 칭기즈 칸에게 박살났다.

3 기타 매체에서의 등장

  • 대항해시대 시리즈의 몇몇 작품 스토리 초반에서 프레스터 존의 왕국을 찾는 내용이 나오기도 한다. 물론 대부분 시리즈에서는 스토리상 떡밥에 불과하지만. 게임 내에서는 중앙아시아보다는 짐바브웨설을 차용한듯. 뜬금없이 동아프리카에서 발견된다.
  •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바우돌리노에도 나온다. 사제 요한 뿐만이 아니라 그 당시 유럽에 존재했던 수많은 떡밥과 소문들을 같이 볼 수 있다.
  1. 사실, 당시 중동을 모두 쓸고 있던 훌라구는 그에게는 별 쓸모 없는 땅인 성지 예루살렘 일대를 기독교측에 그냥 넘겨주려는 의사를 비추기도 했다. 그래서 교황까지도 한동안 마구 설레여했으나, 훌라구가 후계자 문제로 인해 돌아가고 남아 있던 부대가 맘루크들에 의해 관광당하면서 상황은 종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