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교

(네스토리우스파에서 넘어옴)

이 문서는 종교에 관한 내용을 다룹니다.

이 문서가 다루는 종교, 종교인에 대한 내용은 읽는 이에 따라 민감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잘못된 요소가 있을 수 있으므로 이 문서에 쓰여진 내용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마십시오. 편집할 시에는 문화상대주의를 기반으로 객관적으로 작성하고, 논란이 될 수 있는 내용은 신중히 검토한 뒤 작성하십시오. 또한 문서의 사실에 관한 내용을 수정할 때에는 신뢰가 가능한 출처를 기입하시거나, 토론 과정을 거치신 뒤 하시고, 다른 종교를 비방하거나 비하하는 내용을 넣지 마십시오.

이 틀을 적용할 경우, 문서 최하단에 혹은 분류:종교의 하위 분류를 함께 달아 주시기 바랍니다.


景敎
Nestorianism

1 개요

기독교의 종파 중 하나로 칼케돈 교파이다. 기독교 초창기에 나오고 심하게 탄압받았지만 현대까지 이 종교는 존재한다. 지금은 소수의 일부만 남겨진 상태. 네스토리우스의 신학론이 중심인 교파이기에 구미권에서는 네스토리우스주의라는 식으로 부른다. 이들은 기독교의 초대 공의회 중 제1차 니케아 공의회,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만을 인정한다. 중국에서는 빛의 신앙이라는 뜻에서 '경교'라고 불렀다. 景은 언덕 위에 건물이 있고 그 위에 해가 빛나는 모양.

2 고대

2.1 네스토리우스의 마리아론

당시 기독교는 서방교회와 동방교회가 분리되지 않은 상태로서 5대 교구가 나뉘어 있던 시기로서, 5대 교구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옥, 예루살렘, 콘스탄티노플이었다. 로마 교구는 서로마가 점차 몰락해감에 따라 권위가 약해지고 있었고, 위세가 강한 동로마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직을 놓고 알렉산드리아 파벌과 안티오키아 파벌의 경쟁이 치열한 상태였다.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에는 알렉산드리아 파벌과 안티오크 파벌로 나뉘어 있었다. 성모 마리아에 대해서 전자는 하느님의 어머니란 뜻의 테오토코스(Theotokos) 설을 주장했고, 반대로 네스토리우스가 속한 후자에서는 단순히 인간 예수를 낳은 안트로포토코스(Anthropotokos) 혹은 그리스도의 어머니란 뜻의 크리스토토코스(Christotokos) 설을 주장했다.[1]

이러한 논쟁의 배경에는 알렉산드리아 파벌과 안티오키아 파벌의 사상의 근원이 놓여있다.

알렉산드리아 파벌은 그리스 철학인 스토아 학파의 로고스 사상을 근거로 하여 하느님의 정신인 로고스(요한 복음서 처음에 나오는 말씀)가 인간의 세상에 들어와 완벽한 대속물으로 죽임을 당하여 구원을 이루는 신학을 위주로 하였다

이와는 전혀 다르게 안티오키아 파벌은 유대주의에 근거를 하여 신학을 주장하였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부당한 사탄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죽음까지도 감내하는 복종의 아름다움을 보였으며, 죄 없는 예수가 사탄에 의해 죽음으로써 이전까지 사탄이 내세웠던 주장의 근거인 죄의 댓가는 죽음이라는 사탄의 주장이 허망한 것임을 예수는 증명하였다. 이러한 예수의 모습을 따라 모든 인간은 예수를 본받아 하느님께 다가감으로써 사탄의 주장인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는 복종의 구원론을 가르쳐 준 존재가 예수라는 안티오키아 신학의 대결이었다.

428년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직에 취임한 안티오키아 출신의 수도원장인 네스토리우스(Nestorius)의 사고는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강조한 그의 학문적 배경, 안티옥 학파에서 등장한 것이었고, 신성(神性)과 인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엄격하게 구분된다고 주장하였다. 즉, 하느님으로서의 예수와 인간 예수 간의 두 위격이 느슨하게 연합된 것이었고, 때문에 하느님에게는 어머니가 없으며 단지 예수의 인성을 낳은 어머니였기에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부른 것이었다. 게다가 당시 이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용어 자체가 네스토리우스 눈에는 성모 마리아를 신격화시키는 용어처럼 보였고, 그는 당시 안티오키아 학파(사람의 어머니)와 알렉산드리아 학파(하느님의 어머니) 간의 대립에서 나름대로 중립적인 용어를 도출했다고 생각해 자신의 주장을 그대로 밀고 나갔다.

니케아 공의회 때에 안티오키아 파벌과 알렉산드리아 파벌은 힘을 합쳐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하지만 이후 자신들의 단어 사용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가자 알렉산드리아 파벌과 안티오키아 파벌은 서로간의 간극이 너무나 큼을 깨닫기 시작하였고 상대방을 이단으로 정죄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하였다.

이전까지 로마 제국과의 항쟁을 하던 그리스도교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인정을 받게 되자 이제 내부의 적들에 대한 항쟁을 시작하였으며 최초의 항쟁은 아리우스 파벌과의 항쟁인 니케아 공의회였다. 아리우스 파벌을 제거한 이후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에 대한 논쟁 즉 그리스도론을 논하기 시작하며 내부의 적들에 대한 항쟁을 시작하였다. 수많은 항쟁중 큰 항쟁은 네스토리우스 파벌을 제거하는 에페소 공의회를 들 수 있으며, 이후 에페소 공의회의 승자들 간에 의견을 정리는 과정인 칼케돈 공의회를 들 수 있다.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그리스도의 본질에 대한 에페소 공의회의 각 파벌의 입장을 정리하자면

파일:Attachment/네스토리우스교/body1.jpg파일:Attachment/네스토리우스교/body2.jpg

- A.이성론(네스토리우스派, 안티오키아) : 하나의 인간 존재(one prosopon) 속에 2가지 본질(인성, 신성, two nature)를 가진 2개의 위격(two united hypostasis, two united qnome)이 서로 연합(union, united)하여 하나로서 작용함.
- B.양성론(치릴로派 일부)[2] : 하나의 인간 존재(one prosopon) 속에 2가지 본질(인성, 신성 two nature)이 결합하여 하나의 위격을 형성함(one conjunct hypostasis, one conjuct qnoma) 이다.
- C.단성론(유티케스派)[3] : 하나의 인간 존재(one prosopon) 속에 2가지 본질이 융합되었으며, 인성은 마치 포도주가 바다에 빠지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듯이 인성도 신성에 흡수되어 하나의 본성(신성)만이 남은 하나의 위격(one hypostasis)
- D.합성론(치릴로派 일부) : 하나의 인간 존재(one prosopon) 속에 2가지 본질이 어우러져서 새롭게 만들어진 하나의 본질 (신성과 인성이 혼합된 새로운 성격, two nature mixed into one new mixed nature, miaphysis)로 만들어진 하나의 위격(one hypostasis)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라는 하나의 존재 내에 2개의 본성(신성과 인성)이 존재하며, 이 2개의 본성은 각기 다른 2개의 격(신격과 인격)을 이루고 있으며, 동시에 2개의 격은 서로 연합하여 함께 작동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네스토리우스의 신학은 하나의 존재 안에 2개의 위격이 서로 연합한 것이 그리스도로 규정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한 알렉산드리아 주교인 성(聖) 치릴로[4] 사상은 하나의 존재 내에 2개의 본성(신성/인성)이 서로 결합된 하나의 위격을 이룬다고 주장하였다.

네스토리우스의 발언은 단지 성모 마리아 문제가 아니라, 그 전까지도 계속해서 논쟁되어 왔던 그리스도론 문제로 이어졌다. 당시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가장 명망이 높은 신학적 중심지는 이집트알렉산드리아시리아의 안티오키아로, 이 두 학파 간의 입장은 이전 아리우스파 논쟁과 삼위일체론을 통해 불거져 나오기도 했다.

이에 대해 치릴로는, 요한 복음서에 있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라는 말을 인용하며 정면으로 반박하였다. 그의 주장의 골자는 바로 '사람이 되신 하나의 본성'이라는 것으로 설명된다. 즉, 하느님으로서의 예수와 인간으로서의 예수는 분리되는 것이 아닌 총체적인 하나의 인격으로써 설명되어야 하며[5], 따라서 신성과 인성이 하나의 위격으로 공존하는 예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에게는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가 합당하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네스토리우스는 안티오키아 학파의 입장을 바탕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쳤는데, 안티오키아 학파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역사적 존재로서의 실체를 강조했다. 이 입장은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치릴로와 그가 이끄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큰 반발을 샀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성서를 해석하는 데에 있어 비유적 의미를 고려할 것을 강조했다.[6] 또한 그들은 전통적으로 하느님의 말씀, 즉 로고스로서의 그리스도의 신성을 내세웠다.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양 위격(인격과 신격)을 강조하며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를 강조했다. 반면 치릴로는 예수 안에 두 본성이 한 위격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입장에서 출발하여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이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논쟁은 마리아론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론이다. 인간이자 동정녀인 마리아가 하느님을 낳았다는 명제를 예수 입장에서 풀면, 예수는 하느님이면서 사람(마리아의 아들)이다. 즉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모두 인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네스토리우스는 이러한 명제가 그리스도의 인성을 훼손할 여지가 있으며, 마리아에게 신성을 부여하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이를 막고자 동정녀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육체를 낳았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의도는 좋았을지 몰라도 마리아가 그리스도가 가진 인간으로서의 페르소나(인격)만을 낳았다고 말하는 순간, 네스토리우스 자신은 신성과 인성이 연합한다고 주장할지언정, 그리스도가 가진 신으로서의 페르소나(신격)가 필연적으로 분리되는 논리적 약점이 있었다. 치릴로는 이 약점을 파고들어서 네스토리우스를 공격했다.

2.2 에페소 공의회

파일:에페소 공의회.jpg
에페소 공의회 묘사(프랑스 노트르담 대성당)

한편 당시 서방교회(로마)에서는 치릴로를 옹호했으며 동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테오도시우스 2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제3차 공의회를 431년 에페소에서 개최했다. 평생 수도자로 살았던 네스토리우스에 비해 정치적으로 좀 더 노련했던 치릴로가 이 공의회의 주도권을 잡았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주교들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들의 동의표를 얻어 성모 마리아가 테오토코스임을 재확인하고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이 양성론으로서 이단임을 천명했다. 때문에 네스토리우스는 이후에 에페소 공의회를 '치릴로의 공의회'라며 씹었으며, 자신의 파벌 나름대로 회의를 소집하여 치릴로를 축출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러자 계속되는 논쟁에 빡친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가 치릴로와 네스토리우스를 둘다 체포하였다. 편집제한 하지만 교황대사가 와서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공의회의 결정이 올바르다고 전하자 치릴로는 무혐의로 석방되고, 마침내 그는 이 기나긴 논쟁의 최종 승자가 된다. 2년 후 안티오키아 주교들을 대표하는 요한 총대주교와 치릴로는 위의 단죄를 인정하는 동의안을 결의하는데 도달하였고, 네스토리우스는 강제로 유배되었다.

2.2.1 번외편: 칼케돈 공의회오리엔트 정교회

참고로 그리스도론 논쟁에 대하여 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면, 네스토리우스파는 정통 교회 안에서 축출이 되었으나 이번엔 승자들 내부의 의견 정리가 남아있었다. 즉 네스토리우스를 단죄하면서 '그리스도는 하나의 위격을 가진다'는 결론은 명백하게 내려졌지만, 그 하나의 위격이 어떤 본성으로 이루어져있는지는 에페소 공의회에서 명확히 나오지 않았기에 의견을 정리해야 했다. 사실 양성론, 합성론, 단성론은 모두 에페소 공의회에서 네스토리우스에게 맞선 치릴로의 사상에 그 근본을 두고 있었는데, 정작 가장 중요한 사람인 치릴로 자신은 떡밥이 폭발하여 한참 키배가 벌어지는 이 시기에는 이미 사망하여 있었다(...) 결국 칼케돈 공의회가 소집되어 단성론은 이단으로 단죄되었다. 양성론과 합성론은 단성론을 단죄한다는 데에서는 의견이 일치하였으나, 정통교리를 정식화하는 데에서 잡음이 터졌고, 합성론은 오리엔트 정교회로 떨어져나갔다.

3 중세

네스토리우스의 파벌은 이후 페르시아인도에 전파, 심지어 중국에까지 흘러들어가 경교(景敎)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3.1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정통파 신학을 거부한 네스토리우스파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동로마 제국 안에서는 거의 절멸하였다. 네스토리우스파가 로마 제국 내부에서 쫓겨난 뒤에 동방 선교를 개시했고 파르티아에서 성공을 거두었다는 말이 있지만 네스토리우스파가 이단으로 정죄된 시기는 431년의 에페소 공의회 때이고 파르티아의 멸망은 225년으로 시기상 전혀 맞지 않는 일이다.

기독교인들은 1~2세기에 아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북쪽 지역에 공동체를 형성했으며 로마 제국의 박해를 피해 점차 많은 이들이 파르티아의 영역으로 이주하여 교회를 형성했다. 전승에 따르면 예수의 제자인 토마와 성 아다이, 성 마리가 기독교를 전했다고 한다. 그외에도 샤푸르 1세는 발레리아누스 황제를 무찌르고 7만에 달하는 로마군 포로와 시리아, 로마령 메소포타미아, 킬리키아, 카파도키아를 유린하며 잡아온 로마 시민들을 메소포타미아와 중앙아시아의 국경으로 보내 도시를 개발하고 살게 했는데 이들 중에는 기독교인들이 많았고 기독교가 중앙아시아 지역까지 전파되는 원인이 되었다.

파르티아와 그 뒤를 이은 사산 왕조는 이들에게 특별히 위해를 가하지 않았으나 270년대에 한 차례 박해를 가했고 샤푸르 2세부터 본격적으로 박해를 하기 시작했다. 로마 제국에서 콘스탄티누스 1세그리스도교를 공인하고 페르시아의 샤푸르 2세에게 페르시아에 기독교도들이 있다니 기쁘고 그들을 보호해 달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낸 뒤로 사산 왕조의 왕중왕 샤푸르 2세는 기독교도들을 로마의 간첩으로 의심했고 조로아스터의 사제들은 그 의심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샤푸르 2세는 318년부터 박해를 시작했고 339년부터는 더 크게 박해했다.(339 ~ 379) 샤푸르 2세는 먼저 기독교도들은 군역을 지지 않는 대신 세금을 2배로 내라는 칙령을 내렸고 조로아스터교로 개종시키려는 시도도 했다. 제국의 중심지 중 하나인 수사에서 시작한 박해는 2주 이상의 학살로 이어졌고 다른 도시들로도 퍼져나갔다. 어떤 교회 사가는 죽은 이들 중에 이름이 알려진 신자만 1만 6천이었다고 하니 많은 숫자가 기독교도란 이유로 학살당했음을 알 수 있다.

샤푸르 2세의 박해가 끝난 뒤에 교회는 잠시 안정을 되찾았지만 바흐람 5세가 즉위하자 다시 박해를 받았다. 살갗을 벗기거나 몸을 묶은 뒤 쥐들이 들끓는 구덩이에 던지거나 신체를 절단해 죽이는 일들이 빈번했고 바흐람 5세 뒤에 즉위한 야즈데게르드 2세의 박해는 446년 카르카에서 10명의 주교[7]와 15만 3천명의 교인들이 학살당하는 최악의 박해였다. 지금도 그곳의 교인들은 9월 25일에 모여 순교자들을 위해 그 날을 기념하고 있다.

이렇게 심하게 박해를 받았지만 기독교는 사산 제국 내에서 살아남았고 이 박해를 피해서 5세기경 중앙 유목민 사회에 전파되고, 8세기 초 이슬람 세력이 북상할 무렵 중요 도시에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특히 학교와 수도원이 결합된 제도로서 흩어져 있던 네스토리우스 신자들에게 어려운 환경에도 생존할 수 있는 지식과 신앙심을 부여하고 공동체적 연대의식을 가지게 해 주었다고 한다.

페르시아 교회 사람들이 네스토리우스파를 받아들인 이유로는 페르시아 교회는 안티오키아 학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네스토리우스를 동정했었다. 박해와 관용을 번갈아 하는 변덕스러운 페르시아 제국의 왕중왕들은 페르시아 교회의 기독교도들을 로마 제국의 간첩으로 여길 대가 많았기 때문에 로마에서 이단시하는 네스토리우스파를 받아들이는 것은 왕중왕의 박해를 피할 좋은 기회였다.

그렇기 때문에 에페소 공의회로 네스토리우스파가 이단으로 정죄되고 동로마 제국 황제 제논의 칙령으로 네스토리우스파의 중심지 중 하나였던 에데사의 페르시아 신학교가 문을 닫고 추방령이 내려진 뒤에 로마 제국 내의 네스토리우스파가 페르시아의 니시비스로 이주하여 니시비스 신학교를 열자 페르시아 교회 사람들은 네스토리우스파와 연합했다. 그 결과가 497년의 셀레우키아-크테시폰 공의회로서 페르시아 교회는 네스토리우스의 사상에 대한 지지를 공식적으로 표명하고 서방교회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3.2 당나라로 전파

width=50%

7~8세기경 중국에 전래된 경교의 전례(성지주일을 묘사한 것)

당시 국제상인인 소그드인의 개종에 따라서 7세기 초반 당나라의 수도 장안까지 네스토리우스교가 전파되었다. 머리는 불교처럼 밀지만 수염은 기르는 방식의 현지화에 성공했다고 전한다. 또 경교는 의료 행위를 통해 중국인들의 지지와 관심을 얻으려했다. 원래가 그리스-로마와 페르시아의 의학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교회를 세운 지역에서는 아픈 이들에게 의학적 봉사[8] 를 하면서 지지를 얻어나갔기 때문에 중국에서도 똑같이 한 것인데 대표적인 사례가 경교 선교사이자 의사인 숭인이 당현종의 맏형 이헌치의 난치병을 치료한 것이다. 또 경교의 의사가 의료 행위를 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사례로는 구당서 고종기에 시의 진명학이 당 고종의 실명 증상을 백회를 찔러 치료한 기록이 있는데 진명학의 이 방법이 히포크라테스의 방법과 유사하고 백회를 찔러 실명 증상을 치료하는 것은 당시 중국에는 없던 치료법[9]으로 그리스와 아랍에서 쓰던 치료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치료법을 알고 있던 진명학을 로마에서 온 경교도이며 성씨인 진이 로마를 뜻하는 대진을 뜻하는 것으로 보는 의견이 있다.[10] 그외에도 경교의 사원은 병을 치료하는 직책과 치료 역할을 맡은 승려가 있었고 사원은 배고픈 이들에게 식량을 주고 병든 이들은 치료하며 시신을 염하는 일을 했다. 이후로는 곽자의 등의 유력무장의 후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8세기를 전후로 이슬람이 부흥하고 실크로드가 절단되면서 외부에서의 유입이 끊겨 점차 쇠퇴하였고, 삼무일종[11]의 법난에 휘말려 된서리를 맞은 후 황소의 난에서 다시한번 대거 학살[12]당하며 소멸하였다. 그러나 어쨌든 중앙아시아 일대에서는 국제상인인 소그드인의 도움으로 큰 세력을 펼치면서, 10세기 이후 중국 본토에서 경교는 멸하지만 중국 외곽에는 큰 영향을 펄치고 이는 중국에서 나온 경교인들의 영향도 있었다.

3.3 몽골 제국에서의 관계

width=80%width=80%
몽골 제국 시기 네스토리우스 유물

한편으로 소그드의 상인들은 유목민들에게도 전파, 수령의 결정에 따라서 집단적 개종을 하여, 케레이트나이만, 웅구트 같은 유목집단이 대거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이것이 서구에서 사제왕 요한의 전설을 가져오게도 하였다.

그 중 세력이 큰 것이 케레이트로서 13세기까지 그 세력이 남아있었다. 칭기즈 칸은 그 지배자 옹칸에게 혼인 요청이 거부된 후 전쟁을 벌이나 처음에는 패배하고 이후 다시 승리하여 세 딸을 자신과 큰아들과, 막내아들의 부인으로 삼았다. 이중 막내아들 툴루이의 부인은 소르칵타니 베키라는 이름을 가졌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알려져 있다. 그녀에게 네 아들이 태어났는데, 첫째 몽케와 둘째 쿠빌라이 칸은 4대, 5대 대칸이 되었다. 소르칵타니 베키는 1252년 사망하지만, 그녀의 명성은 그치지 않고, 마침내 몽골인에게는 일종의 성녀로서 숭배와 제사의 대상으로까지 승화되었다. 이렇게 몽골 제국은 그리스도교에 우호적인 면을 보는데 사실 몽골인들은 모든 종교에 다 관대했다.

중동의 상황을 보면 중동의 지배자 일 한국의 창시자는 소르칵티나 베키의 셋째 훌라구로서 그는 케레이트 옹칸의 손녀 도쿠즈 카툰를 첫째 아내로 삼아 기독교에 관대한 면을 보였다. 그의 후계자 아바카는 동로마의 황녀를 부인으로 맞아 들이기까지 했다.

3.4 탄압과 쇠퇴

하지만 아바카 사후 그의 동생 테구테르는 어머니의 영향에도 불구, 이슬람을 신봉하고 기독교를 탄압하였고[13], 이후 중동에서 네스토리우스교는 탄압의 나날을 겪게 된다. 특히 서구 교황과의 연대가 이루어지지 않고, 중동의 지배자인 몽골인들에게 기독교가 멀어지게 되자 (또 이슬람에 가까워지자) 무슬림들의 극단성이 폭발하게 되고 이는 대학살을 가져오게 된다. 특히 1297년 이르빌에서 벌어진 대학살이 좋은 예로, 이는 시내의 쿠르드족 무슬림교회를 파괴하자 그곳에 주둔하던 몽골계 병사가 무슬림을 활로 쏴죽인 것이 발단으로, 무슬림들은 그리스도인들이 거주하던 지역을 포위하고 이르빌의 대주교와 사제들은 붙잡아 살해했으며 수많은 신자들이 학살되거나 노예로 팔려갔다.

총주교 야발라하가 1317년에 죽은 후 네스토리우스교는 최후의 보호막마저 잃어버리고 14세기 말까지 끝없는 쇠망과 추락의 연속의 역사를 겪고, 14세기 말 티무르의 서아시아 침공과 무차별적 주민 학살로 거의 끝장나게 된다.

즉, 네스토리우스교가 몰락한 근본적 원인은 지배층의 이슬람으로의 경도와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해서 보호장치가 사라져 버린 것이라 볼 수가 있다. 16세기 중반이 되면 동아시아와 몽골 초원에서도 사라지게 된다.

4 근세

티무르의 침공 이후, 14세기 말 티무르의 공격으로 힘들어진[14] 신도들은 현재 이란, 이라크, 터키 3개국 국경인 하카라 신지로 피했는데, 이들의 대다수는 쿠르드족[15]으로 주변이 온통 무슬림인 적대적인 환경이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네스토리우스 교단에게 닥친 절체절명의 과제는 생존이었고, 교단에서는 결속력을 유지하고 구심점인 총대주교의 사도 전승을 보존하려는 의도로서 총대주교를 선출에서 특정 가문에서 세습하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총대주교는 혼인이 불허된 자리였기 때문에 숙질계승이라는 독특한 제도가 도입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계승을 둘러싼 암투를 야기했고 그 결과 교단은 분열의 운명에 처했다.[16]

16세기 초 교단은 총대주교직 계승 문제로 인하여 둘로 분열되어, 한쪽은 자파의 위상을 강화하기 위해서 로마 교황청의 우위를 인정하고 교황으로부터 총대주교 임명장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교황청과 연맹을 추진하는 신파와 전통적인 교단의 독립성을 고수하는 구파가 대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17세기 전반과 중반, 구파의 총대주교들은 상대방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가톨릭 교의를 받아들이고 그들 역시 교황의 임명장을 받게 되자 이번엔 신파가 다시 반가톨릭으로 선회했다. 이렇게 해서 구파는 동방 가톨릭 교회의 일원인 칼데아 가톨릭이 되었고 신파는 아시리아 동방교회로 이어지고 있다.

5 현대

500px-Syriac_Christian_Churches.svg.png

주도권 장악을 둘러싼 치열한 내분으로 교단 지도층이 분열과 대립을 거듭하는 동안 교도들의 상황도 날로 악화되어 갔다. 특히 1843년 쿠르드족과 충돌이 벌어지면서 대학살극으로 10만으로 추정되던 전체 신도 중 2만이 사망했던 것이 가장 악영향을 미쳤다.

신자들은 제1차 세계대전 중 쿠르드족과 오스만 제국 정부의 탄압으로 4만의 신도들이 이라크 북부 모술평원으로 이주해야 했다. 그들은 독립국 건설의 희망을 가지고 오스만 제국과 싸웠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1933년 영국의 신탁통치가 끝난 후 독립한 이라크 역시 그들을 인정하지 않자, 일부 무장 신도가 시리아 입국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들 역시 거부당하고 귀환 도중 이라크 정부군, 쿠르드족, 베두인들의 공격으로 거의 몰살당하고 독립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5.1 현대의 네스토리우스 종파

신자 수는 칼데아 가톨릭이 50만, 아시리아 동방교회가 40~50만, 古동방교회가 10만 정도로 추정된다. 해당 항목을 참조바람.

6 특징

아시리아 동방교회는 위의 근세사 단락에서 언급한 역사적 이유로 인해 십자고상을 포함한 성상이나 이콘을 쓰지 않고 십자가 도안만을 사용한다.(출처)[17] 다만 십자가 자체가 이콘과 비슷한 대접을 받는다는게 개신교와의 차이점이다.(참조1, 참조2) 또한 예전에 쓰는 기도문오리엔트 정교회동방정교회등 다른 동방교회와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반면 칼데아 가톨릭 교회는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는 관계로 성상, 십자고상, 이콘을 모두 인정한다.

7 신라 전래 떡밥

파일:경주 돌십자가.jpg파일:경교 십자무늬장식 경주.jpg
경주 돌십자가십자무늬장식

초기 경교 유물로 '추정되는' 신라 유물이 발견되기도 했다. 1967년 경주시에서 십자가가 발견되고, 성모상과 비슷한 보살상이 발견되었다고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숭실대기독교박물관에 소장중인 이 '유물'(동십자가 문양, 성모상)은 학술적 발굴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일단 발견자가 우연히도 개신교 목사 김모 씨다. [18] 그가 경주시불국사에서 땅 위에 드러난 십자가성모상을 발견했다고 주장한 1967년 당시에 이미 학계와 타종교계로부터 헛소리라는 욕을 들어먹었으며, 그 여파로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이 한동안 문을 닫기도 했다.

김 목사가 돌십자가를 발견(발굴이 아니다)한 장소도 처음에는 어느 곳의 암석 위였다가 나중엔 (신라 불교의 상징이자 심장인) 불국사 대웅전 석등 밑으로 바뀌기도 했다. 즉 우연히도 개신교 목사우연히도 경주시에서 우연히도 불국사 대웅전 앞 석등 밑에서 1,500여년 동안 아무도 몰랐던 기독교의 유물을 우연히 발견했다는 기적의 결과가 신라시대 기독교 유물인 것이다.
우연히가 왜이리 많냐??

아울러 어쨌거나 신라시대 유물로 인정하여 네스토리우스교가 9세기 이전에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떡밥이 돌지만, 이것이 종교로서 전래되었다고 볼 수 있는 증거는 없다. 정말 기독교 계통 유물이라 해도 단순히 '외국의 장식품'으로서 생각해서 물건만 들여온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경주에서는 신라 황금보검이나 여러 유리공예품 등등 유럽에서 만들어 실크로드아라비아 상인의 바닷길을 따라 신라로 전래된 유물은 이미 많이 발굴된 바 있으며, 비슷한 예로 북유럽에서도 불상이 발견된 전례가 있지만, 바이킹이 교역품으로 가져온 것으로 추측할 뿐 불교북유럽에 도입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바이킹 불자설 게다가 십자가 '문양'이 곧 기독교 유물이고, 아이를 안은 어머니 상이 곧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상이라고 보기도 힘들다. 불교에서도 모자(母子) 불상이 있으며 대지모신, 풍요, 다산, 자애를 의미하는 모자상은 고대에 특정 종교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
  1. 개신교의 경우 테오토코스 개념 자체를 우상숭배라고 부정하는 부분은 네스토리우스의 주장과 유사하나, 이와 별개로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이 완전한 하나라는 것은 인정한다.
  2. 후에 칼케돈 공의회에서 정통으로 확정된다.
  3. 이쪽도 넓게 보면 치릴로派의 일부이다.
  4. 축일은 6월 27일이다.
  5. 그러나 이 주장은 후에 단성론 논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6. 이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에 큰 영향을 끼친 교부인 오리게네스의 영향이다. 오리게네스는 성경에 알레고리적 해석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교부이다.
  7. 411년에 36명의 주교가 모인 회의가 있었다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교회를 구성하는 핵심 인사들의 상당수가 처형당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 중동의 역사. 문명 탄생의 요람(스테판 버크)
  8. 자그로스의 어느 기독교인 성자는 무슬림 토후의 말을 치료해주었다 수도원에 대한 특권을 받은 적도 있다. 출처 : 기독교 세계의 등장(피터 브라운)
  9. 담빈록을 보면 백회와 뇌호 두 혈을 찔렀다고 나오는데, 상세한 내용을 보면 백회를 찔러 피를 내겠다는 진명학의 말을 듣고 측천무후가 격노하여 '저 자의 목을 베라! 천자의 머리 위가 어떻게 피가 나오는 곳이냐?!' 라고 말했는데 신성한 천자의 신체, 그것도 머리에 피를 내겠다는 것도 그렇거니와 아예 들어보지 못한 치료법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고종이 고통을 호소하며 찌르라고 명했고 치료가 효과를 보이자 측천무후는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고 진명학에게 큰 상을 내렸다.
  10. 출처 : 중외의학문화교류사(마보영), 실크로드학 사전(정수일)
  11. 987년의 어느 수도자가 한 보고에 따르면 중국 교회는 완전히 사라졌으며 845년에 황제가 가한 탄압이 원인이라고 한다.
  12. 아부자이드의 동유기에 당희종 건부 5년에 황소가 광주를 공격, 함락했을 때에 12만의 무슬림, 유태인, 조로아스터, 마니교, 기독교도들이(상호:商胡라고 하는 외국인 상인들이었다) 피해를 입었다는 기록이 있다.
  13. 이는 현지화를 위해서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14. 티무르의 서아시아 침공으로 네스토리우스파 교회의 기반이 파괴되었고 학문적 손실과 함께 수도원들도 위기 상황에 직면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시리아 정교회도 예외가 아니었다. 출처 : Oxford Handbook of Christianity in Asia
  15. 마르코 폴로의 기록에 따르면 그 당시 쿠르드족들은 다수가 시리아 정교와 네스토리우스 교회의 신자들이었고 일부가 무슬림이었다고 한다. 출처 : 실크로드학 사전
  16. 오스만 제국이 딤미들에게 요구하는 높은 세금 때문에 어려움을 겪다보니 이런 숙질 계승은 바꾸기가 어려웠다. 출처 : Oxford Handbook of Christianity in Asia
  17. 19세기에 이들과 접촉한 유럽 선교사들은 깊은 산 중에 숨어살고 교회당은 매우 소박하고 안전을 위해 입구가 매우 낮고 내부에는 십자가 외에는 아무 장식이 없었다는 기록을 남겼다. 십자가 외의 다른 장식이 없었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이들을 성상 파괴주의자들로 여겼다.
  18.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citation_needed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제공한 텍스트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