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가요대상 대상 | ||||||
남진, 김상희 마음이 고와야지 참사랑 (1971) | → | 하춘화, 나훈아 물새 한 마리 고향역 (1972) | → | 하춘화, 남진 영암 아리랑 그대여 변치마오 (1973) | ||
하춘화, 김세환 난생 처음 옛 친구 (1974) | → | 김세환, 이수미 사랑하는 마음 내 곁에 있어주 (1975) | → | 하춘화, 김훈 대관령 아리랑 나를 두고 아리랑 (1976) | ||
MBC 가요대상 대상 | ||||||
남진 그대여 변치마오 (1973) | → | 하춘화 난생 처음 (1974) | → | 송창식 왜 불러 (1975) |
1 기본 정보
이름 | 하춘화(河春花) |
출생 | 1955년 6월 28일, 전라남도 영암군 |
데뷔 | 1961년 '효녀 심청 되오리다' |
신체 | 162cm, 50kg, A형 |
직업 | 트로트 가수 |
자녀 | 없음 |
2 개요
가요계의 영원한 마님
70년대 가요계를 대표하는 여가수
대한민국의 원로급 가수.
1955년 6월 28일생. 하춘화가 대단한 이유는 데뷔년도가 7살 때인 1961년 인지라, 2015년 기준으로 나이는 환갑인데 가수 경력은 55년차라는 점이다. 이는 조르디가 4살때 가수로 데뷔하기까지 최연소 가수데뷔 기록이기도 하다. 참고로 하춘화가 데뷔한 해는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그 해이다. 처음 데뷔했을 때 엄청난 인기를 모으고 있었는데, 엘자 렁히니나 다코타 패닝 저리가라 급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다만 엘자 렁히니와의 차이점은 어른이 되어서 인기가 죽어버린 엘자 렁히니와는 달리 하춘화는 늙어도 인기가 변함이 없다는 점이다. 대한민국 가요계에서 남자 가수로서 레전드가 조용필이라면 여자 가수로서 레전드는 하춘화였던 것이다.
이빈 작가의 안녕 자두야를 보면 당시 후덜덜했던 하춘화의 인기를 알 수 있다.
3 생애
하춘화의 재능을 알아본 하춘화의 아버지는 그녀를 서울 동아예술학원에 다니게 했고 거기서 8개월 동안 노래를 배우게 한 뒤 가수로 데뷔시켰다. 이후 1966년 '아빠는 마도로스'라는 노래를 발표해 크게 성공하면서 하춘화의 인지도가 생기기 시작했다. 음반은 1971년에 처음으로 냈는데 이 음반의 노래인 '물새 한마리'가 히트하면서 꽤 많이 팔렸고 1971년 고봉산과 '잘했군 잘했어'를 듀엣으로 불러서 이걸로 TBC에서 4년 연속 여자가수상을 수상해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선배 가수였던 이미자, 패티김, 김상희, 문주란과 함께 대한민국 대표 정상급 여가수로 성장했다.
하춘화는 성격이 굉장히 대인배였는데, 보통 어린 나이에 이 정도로 성공하면 안하무인인 경우가 많았지만 하춘화는 전혀 그렇지 않았고 오히려 너무 못 생겼다는 이유로 연예계에서 소외받고 있던 당시 무명 코미디언이었던 이주일을 보더니 자신의 공연에 "이 사람이 아니면 내 공연의 사회자를 시킬 수가 없다. 꼭 이주일 이어야만 한다."라고 말하며 이주일을 자신과 같이 일하게 했다. 훗날 이주일은 이런 하춘화를 대단히 고마워하며 "길거리에 나앉을 수 밖에 없었던 내가 하춘화 덕분에 우리집을 샀다"고 말하며 하춘화를 평생의 은인으로 여기며 존경했다.
그 뒤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가 발생할 때 하춘화는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 했지만 이 때 이주일이 하춘화를 구출하여 병원까지 업고 뛰어가서 무사할 수 있었다. 오히려 하춘화를 구한 이주일이 두개골이 함몰되는 전치 4개월의 중상을 입었다고. 이 때의 충격 탓인지 하춘화는 그로부터 2년 후인 1979년에 돌연 학업 및 결혼준비를 이유로 전남대학교에 입학한 뒤 은퇴를 선언했다.
그러나 1981년에 다시 가수로 복귀해서 '우리 사랑 가슴으로', '연인의 부르스' 등의 노래를 히트시켰으며 1983년에는 자신이 아끼는 무대의상 150벌을 후배 가수들에게 나눠줬다. 1985년에는 남북 예술인 교환공연으로 대한민국과 북한에서 각각 최고의 가수들을 상대방에게 파견하여 공연을 하기로 했는데 이 때 하춘화가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 자격으로 평양에 가서 3박 4일 동안 공연을 했다.
1989년에는 '날 버린 남자'[1]가 국민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며 다시 각광받기 시작하고 1991년에 총공연 횟수 8,000회를 기록하였고 최다 개인 공연으로 기네스북에 등록되었다. 이후 하춘화는 2002년에 댄스 리듬의 트로트'연하의 남자'를 부르면서 자신만의 춤 실력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로서 하춘화는 춤에도 뛰어난 재능이 있음을 증명했다. 학업을 위해 잠시 은퇴하기도 했으나 2007년에 다시 복귀하여 현재는 '나이야 가라'라는 노래로 왕성하게 활동 중.
4 학업
이 와중에도 하춘화는 공연과 학업을 병행함에도 불구하고 학업에도 열중하여 1994년에 고려대학교 자연자원대학원 최고 정책과정을 수료한 후 1998년에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 가정관리학과를 졸업하였다. 2000년에는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가요의 원류와 변천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으로 공연예술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2006년 8월 25일에 성균관대학교에서 현대 대중가요 역사를 주제로 한 논문으로 예술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면서 박사학위를 소지한 최초의 대한민국 가수가 되었다.
5 기록
- 하춘화는 2011년에는 57살의 나이로 데뷔 50주년을 맞아 '하춘화와 함께하는 콘서트'를 개최하였으며 이 콘서트에서 벌여 들인 200억 원을 불우 이웃 돕기에 기부하여 화제를 낳기도 했다.
- 2015년 현재 기준으로 하춘화의 총 공연횟수는 8,500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