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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기본 정보
본명 정주일(鄭周逸)
출생 1940년 10월 24일, 강원도 고성군
사망 2002년 8월 27일, 경기도 고양시
직업 코미디언, 국회의원
가족 배우자 제화자, 슬하 1남 2녀
특이사항 5대독자
2 소개
"여기에는 나보다 더 코미디를 잘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4년 동안 코미디 공부 많이 하고 갑니다." - 국회를 떠나 방송계로 복귀하면서 했던 명언.
대한민국 코미디의 황제[2]
대한민국의 코미디언 본명은 정주일[3]. 가천대학교 경영대학원 졸업. 코미디계의 전설로 남은 사람.
어려웠던 80년대, 국민들에게 웃음을 안겨주는 전설적인 인물로 기억되고 있으며 사후에는 국민훈장 모란장이 추서되었다. 그런데 그 이유인즉, 코미디언으로서의 업적을 인정해서가 아니라, 금연운동에 기여한 공로(...) 어쨌건 이주일의 메시지는 역대 금연 광고 중에서도 가장 높은 효과를 냈다고.
최불암과 동갑이다. 둘 다 1940년 생. 또한 이소룡과 척 노리스 역시 이 두사람과 같은 나이인 1940년 생이다.
3 생애
3.1 데뷔와 악단 사회자 시절
1940년 10월 24일 강원도 고성군에서 태어나 춘천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경원대학교(現 가천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춘천고 재학 시절 축구선수로 제법 활약을 보였고, 친구 박종환과 함께 경희대학교에 진학할 예정이었지만, 고향에서 보내 준 대학 등록금을 섯다판에서 털리는 사고를 쳤고(...), 결국 이주일은 도피처로 군 입대를 선택했다.
1960년 현재의 국방홍보원 홍보지원대에 해당하는 문선대에 뽑히면서 처음 코미디를 시작한 이주일은, 1965년부터는 샛별악극단 사회자로 연예계에도 진출한다. 하지만 그는 1971년 베트남 파병 병사들을 위한 위문공연 길에 지원하여 조금 이름을 알린 것을 제외하면 10여년 동안 무명의 코미디언의 설움을 겪으면서 상당히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가 일어났는데 당시 아이돌급 인기를 얻고 있었던 하춘화가 출연하는 극장의 사회를 맡고 있던 이주일은 극장 천장이 붕괴되어 거기서 떨어지는 벽돌에 머리를 맞아서 후두부가 함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춘화에게 "내 머리를 디디고 내려와라!"라고 외치며 하춘화를 업고 병원으로 전력질주하여 하춘화를 구해내었다.[4] 이것이 인연이 되어 하춘화는 항상 자신이 공연하는 쇼의 사회자는 "이주일이 아니면 안된다"고 공연 관계자들에게 강력하게 주장하기 시작했고 이주일은 하춘화의 전속 사회자가 되어 얼굴을 알리게되었다. 이 때문에 이주일은 "길거리에 나앉을 수 밖에 없었던 내가 하춘화 덕분에 우리집을 샀다"면서 하춘화를 자신의 은인이라 생각하며 존경했다고 한다.#
3.2 TV 진출과 전성기
1979년 이주일은 하춘화의 도움으로 MBC의 웃으면 복이와요에 출연하면서 처음 TV 무대에 데뷔하게 되었다. 참고로 당시 방송에 출연하던 코미디언 중 유일하게 서영춘 만이 방송국 대기실에서 이주일을 처음 보고 '저 친구 TV에 나오면 분명 뜬다' 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주일의 재능을 간파했다고 한다. 그러나 먼저 TV에 출연하고 있던 선배 코미디언들의 견제와 뭐 저렇게 못생긴 놈을 내보내느냐는 시청자들의 불같은 항의가 쏟아져서 이주일은 한큐에 잘리고 만다.
<웃으면 복이와요> 출연이 단 1회로 끝나버린 후, 이주일은 한국 코미디계의 대부 김경태 PD에게 발탁되어 TBC 코미디 프로그램 '토요일이다 전원출발'에 출연을 하게된다. 이주일이 맡은 역할은 당시 청춘스타로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던 가수 윤수일이 타잔 흉내를 내면서 줄을 타고 공개홀 한가운데 만든 연못을 가로지르는 콩트에서 무대 뒷편에 서있는 단역이었다. 여기서 너무 긴장한 이주일은 조연출자의 큐사인을 보고 무대로 올라오라는 줄 알고 그대로 무대 중앙으로 올라가버렸고 결국 줄타고 내려오던 윤수일과 부딪쳐서 연못 속에 빠져버린다. 한 술 더떠서 이주일은 당황한 나머지 연못에서 그대로 얼굴을 들며 멍하게 카메라를 쳐다봤다... 그것도 생방송에서... 이날 방청객들은 물에 빠진 ET꼴이 된 이주일을 보고 저게 뭐냐면서 왁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고.
일반적으로 보면 당연히 두 번 다시 TV 무대에 얼씬도 못할 수준의 방송사고였지만, 이 때 빵 터진 시청자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재차 출연하게 된다. 이 때 맡은 배역은 의사였는데, 환자 역할을 맡은 코미디언 최용순[5]의 눈을 까뒤집어 보고는 "문명운명하셨습니다"라고 한마디 할 뿐인 단역이었다. 그런데 너무 긴장한 나머지 병실에 뛰어들어 오자마자 "운명하셨습니다!" 라고 외쳤고, PD가 카메라 뒤에서 '환자 눈이라도 까뒤집고 대사를 쳐야 할 거 아니냐?' 라는 신호로 눈을 까뒤집는 시늉을 하자 이 동작을 본 이주일은 그만 자기 눈을 까뒤집어 보이며 '운명하셨습니다'를 읊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생방송에서... 이 애드립 아닌 애드립에 방청객들은 물론 출연자, 방송 스탭 모두 그 자리에서 배를 잡고 뒹굴어야 했다.
지금도 전설로 회자되는 이 프로 '토요일이다 전원 출발'에는 당대 최고의 코미디언 서영춘을 비롯 기라성 같은 유명 코미디언들이 출연하고 있었는데, 이후 대부분의 코너가 이주일을 전면에 내세우는 코너로 바뀌게 된다.
2번의 방송 출연에서 이처럼 엄청난 임팩트를 선사한 코미디언의 이름이 궁금해진 시청자들은 TBC에다 문의 전화를 계속해서 걸기 시작했고 이와 같은 반응을 본, 아직 정주일이라는 본명으로 활동하고 있던 그는 딱 2주일만에 떴다는 뜻에서 이주일로 예명을 정하게 된다.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여러분! 제가 얼핏 보면 못생겼지만 자세히 뜯어보시면... 더 못생겼습니다"라는 대표적인 유행어도 이 직후에 나왔다.
이후 1980년 이상해 [6] 와 콤비를 결성한 이주일은 판토마임[7]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수지 큐(Susie Q) 음악에 맞춰 엉덩이를 씰룩거리는 독특한 춤은 이주일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이 춤의 인기가 어느정도였는지는 당시 한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의 증언에 따르면 "애국조회 마치고 '교실로 갓!'이라는 구령이 나오면 천 명에 가까운 전교생이 동시에 수지 큐 춤을 추면서 교실로 들어갔다니까"(티비에서 방영한 이주일 추모 다큐멘터리 중) 이후로도 따지냐~?, 콩나물 팍팍 무쳤냐?, '등의 유행어를 선보이면서 최정상의 인기를 구가하게 된다.
이렇게 글로 써 놓으면 이주일의 탁월한 연기력이 사실 잘 드러나지 않아 최근 세대들은 '저게 뭐가 웃기지?' 하는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 이주일식 코미디의 백미는 저 문장들을 더듬거리며 말하는 와중에, (시청자의 예상을 뒤엎는 타이밍에) 실없는 소리를 툭 하고 던져서 의표를 찌르는 것이기 때문. 구봉서와의 콤비 개그를 보면 잘 나타난다.
그리고 이주일의 이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이주일은 결국 청보식품 라면 CF를 무더기로 촬영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어떻게 보면 이주일이 라면덕후를 넘어서 라면광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3.3 방송출연 중단
하지만 이러한 전성기 시절에도 너무 못생겼고, 저질이란 시청자들의 어처구니 없는 항의를 계속해서 받았고 결국 해당 사유로 1981년 방송에서 퇴출되었다가 전두환 정권 말기인 1986년부터 다시 방송에 복귀했다.[8] 이주일이 방송에서 퇴출되기 직전에는 영화에도 출연했는데, 그 영화에서는 바지사장으로 사기당하는 시골 총각으로 등장한다. 제목은 리빠똥 사장#.
하지만 이는 표면적인 이유이고 사실은 아마 전두환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로 여겨진다. 그 당시 이주일 외에도 대머리였던 연예인들이 방송에 거의 나오질 못했다. 덧붙이자면 그 사람을 닮은 배우 박용식은 그 사람을 닮았다는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한동안 방송을 쉬어야만 했고, 방앗간을 운영하며 참기름을 팔아 근근히 생활하였다고 한다. 아이러니한 건 이후 MBC의 정치드라마 제4공화국에서 그 사람의 연기를 맡게 된다.
일단 명목상 대머리라서 잘린 건 아니지만... 전두환 관련 조크 가운데 이주일에 얽힌 것이 많긴 하다. 대표적인 것으로 전두환이 미국 순방을 갔는데, 마중 나온 교포 가운데 한 어르신께서 반갑게 악수를 하며 "어이쿠! 이주일씨, 먼길 잘 오셨습니다!" 했다던가? 아이고 어르신! 코렁탕 한사발 대접해드릴까?
일부 증언에 의하면 그 사람 정권 초기에 사회 분위기를 휘어잡는답시고 시범 케이스로 언론탄압을 하던 와중에 이주일에게 '저질 코미디언' 딱지를 붙여 퇴출시켰는데, 정작 전두환 본인은 이주일이 자취를 감추자 "아니, 그 웃긴 양반 요즘은 왜 안 나와?"라면서 의아해했다고(...) 한다. 전두환이 작정하고 내막을 파악했다면 알아서 긴 담당자는 모가지 이후 춘천고 동기생인 박종환 감독을 통해 전두환과 친분을 쌓게 된다. 이유는 그 사람이 축덕이었기 때문이다.
방송에 나오지 못하는 동안에는 극장식당 무랑루즈, 초원의 집 등의 밤무대 에서 활동했는데, 지금보다 밤무대가 훨씬 비중도 크고 돈도 많이 벌던 시절이라 그의 코미디계 원톱 지존 자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빈말이 아니라 진짜로 밤무대의 제왕이었다. 1980년대 초 전속금 1억[9], 연예인 납세 1, 2위를 다툴 정도. 쉽게 말하자면 80년대를 풍미한 트로이카 유지인, 정윤희, 장미희급이나 가왕 조용필 정도는 되어야 이주일이 돈 버는 정도로 엇비슷하게 벌었다. 이 기간동안 이주일을 TV에서 볼 수 있는 건 농심그룹을 비롯한 식품 회사의 광고들 뿐이다. 이 때의 유행한 유행어가 "일단 한번 드셔 보시래니깐요~!"
당시 밤무대에서 활동하던 이주일의 개그를 직접 목격한 어르신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주일의 진짜 지존 개그는 방송에서 보여주는 그런 건전개그가 아니라 밤무대에서만 볼 수 있는 EDPS(...)." [10]
3.4 전두환과의 관계 그리고 축구
자서전인 "인생은 코미디가 아닙니다"에서 자신이 전두환 전 대통령을 풍자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정작 자신은 전두환 전 대통령을 경애하며 그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하는 부분이 있다. 그 이유는 전두환과 이주일이 축구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주일은 춘천고 시절 축구선수로 뛰었으며, 춘천고 동창생이 바로 1983년 멕시코 U-20 월드컵 대회에서 4강 신화를 이룬 빠따박종환 감독이다. 박종환 감독과 인연으로 전두환과 만났고, 이후로도 줄곧 막역한 사이로 지냈다. 그것 말고도 방송출연 금지 크리를 맞기는 했지만 그 때문에 당시로서는 방송출연보다 벌이가 좋은 밤무대에 전념할 수 있었고, 생계에 지장은 커녕 방송에서 얻은 지명도와 방송에서는 볼 수 없다는 희소성이 상승작용을 일으켜 경제적으로는 윤택해졌기 때문에 전두환의 조치에 불만을 크게 가질 이유가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실제로 예능 프로에서 최병서가 이주일과 함께 술을 마시다 뜬금없이 '전두환 대통령님께 억울함을 호소해야겠다.'며 오밤에 집에 찾아갔더니 흔쾌히 맞이하며 술상도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왔다고 하는 일화를 밝히기도 한 걸 보면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듯 하다.
그밖에 잔디구장 건립기금으로 1천만원을 내기도 했고, 연예인 축구단인 무궁화 축구단 단장을 지낸 바 있으며, 상기했듯, 2002년 월드컵 당시 투병 중인 몸을 이끌고 직접 경기를 관람하기도 하였다.[11]
3.5 정주영과의 관계
그는 현대그룹 명예회장인 왕회장으로 불렸던 아산 정주영과도 친분이 있었다. 같은 강원도 영동지방 출신이었던데다가[12] 1915년생인 왕회장보다 나이가 30살이나 어렸지만 의형제로 보일 정도로 친분을 가졌으며 이같은 인연으로 정치에 발을 들여놓는 계기가 되었다. 이주일에게 정치 한 번 해보는게 어떴냐고 제안하던 사람 역시 왕회장이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1984년 미국 LA에서 이루어졌는데, 당시 LA에서 올림픽이 열리고 있던 때였고 다음 개최지가 서울이었기 때문에 왕회장은 1988년 서울올림픽 홍보를 위해서 LA에 방문하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 고로 그는 왕회장이 창당한 통일국민당에 입당하여 당원으로 활동하고 1992년 14대 대선 때 왕회장의 유세를 지원하고 상대방 후보로 있던 김영삼, 김대중을 강도높게 비난하기도 하였다. 그 당시 왕회장은 특히 김영삼을 강도높게 비난하였던 편으로 이주일이 개인적으로 김영삼을 비난한 것이 아니라 왕회장의 뜻이 그렇고 왕회장 지원유세로 나왔던 입장에서 나온 것이라 개인이 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3.6 구봉서와의 관계
대략 이걸로 설명이 가능하다. 물론 구봉서가 진짜로 일진 날깡패였다는 건 아니고 그 정도로 이주일이 구봉서에게 쩔쩔맸다. 그것도 평생동안!
구봉서가 독실한 개신교 신자에 인격이 온화해서[13] 이주일이 구봉서 때문에 심한 고생을 하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지만 그래도 같은 코미디언이라는 직업에 나이는 14살 차이, 데뷔는 4년 차이[14]라는 만만치 않은 선배인지라 절대로 가벼울 수가 없는 상대였다. 코미디언의 군기가 얼마나 악랄한지 생각해보면 눈조차 함부로 마주칠 수가 없었다.
그래도 구봉서가 이주일에게 선배로서는 그나마 잘 대우해준 편이다. 주병진이 이경규에게 대한 태도보다 강도가 약했던 것은 확실하고 김형곤의 경우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서세원양원경은 뭐...
하지만 구봉서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으니 정말로 가는 데에는 순서가 없다.
구봉서 때문에 이주일은 큰형님이 될 수가 없었다.
3.7 국회의원 출마
1992 |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구리) | 통일국민당 | 25,751 (45.3%) | 당선 (1위) | 1993 탈당 1995 민주자유당 입당 |
1992년 14대 국회의원으로 진출하기도 했다. 고(故) 정주영 회장이 대통령이 되기 위해 통일국민당을 결성하였을 때 처음에는 참가할 듯하다가 마음이 심란해져서 홍콩을 다녀온 이후[15] 국회의원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그러자 정주영 회장은 노구를 이끌고 그 날 이주일이 게스트로 출연한 SBS 본사 앞[16]에 가서 10시간을 기다렸다. 이주일이 기자들을 피하기 위해 방송이 끝나자마자 홀연히 뒷문으로 빠져나간 뒤인지라 정주영 회장은 헛걸음한 셈이 되었지만, 국민들에게 '정주영은 아직 늙지 않았다'는 믿음을 퍼뜨린 사건이었다. 결국 이주일은 왕회장의 노력을 차마 못 본 체 할 수 없는지라 출마를 결정하게 되었고 당당히 경기도 구리시 지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다들 아시다시피 국민당은 '당원이 1000만인데 득표수가 400만에 못 미치는' 기현상[17]과 함께 푸시식 가라앉았고, 도중에 민주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긴 이주일은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정치판과의 인연을 끊었다. 이 당시 연예계에 복귀하며 뱉은, "여기에는 나보다 더 코미디를 잘하는 사람들이 많다. 코미디 공부 많이 하고 떠난다"는 말은 전설로 남았다.
이주일은 후일 정치인 시기를 회고하면서 역시 여당이 좋더라라는 말을 남겼다. 정주영 정계은퇴 후 본인도 국민당을 탈당하고 정치에 의욕을 잃어가면서 지역구인 구리에 뭐 하나 제대로 해준 게 없었는데 마침 안정의석 확보에 나서던 집권여당 민주자유당이 입당을 제의하자 (어차피 정치에 뜻을 잃어 다음 선거 불출마할거니 지르고 보잔 식으로) 구리에 실내체육관 하나랑 구리여고에 강당 좀 지어주소라고 조건을 내걸었더니 바로 조건을 콜했고, 예산이 반영되어 체육관과 강당이 지어졌다고.(...) 또한, 이주일은 국회의원 세비도 반납하는 등 차별화된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시대를 앞선 세비 반납 때문에 동료 의원들로부터 왕따를 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1996년, SBS에서 방영을 시작한 이주일의 투나잇 쇼로 다시 연예인으로 돌아온 이주일은 확실히 국회에서 코미디를 제대로 배웠는지 복귀 뒤에는 꽤 수위 높고 풍자성 강한 개그를 선보였다. 너무나 강렬해서 방송심의위원회에서 경고를 수 차례 받았을 정도. 하지만 흑역사도 있었으니... 링크
3.8 흡연, 그리고 사망
"담배 맛있습니까? 그거 독약입니다. 저도 하루에 두 갑씩 피웠습니다. 하… 이젠 정말 후회됩니다.""흡연은 가정을 파괴합니다. 국민 여러분. 담배, 끊어야 합니다."
원래부터 애연가였지만, 1991년 11월 7대독자였던 외아들이 갑자기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더더욱 담배가 늘었다. (그의 장례식에는 사위가 상주로 나와야 했다.) 그러나 장례식이 끝나고 3일 후 SBS 개국특집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여러분 죄송합니다. 여러분께 깊은 사과의 말씀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그동안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씨와 박철언 씨의 관계 개선을 해내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말로 태연하게 청중을 웃긴 일화는 유명하다.
결국 90년대 후반부터 갑자기 방송에서 자취를 감추더니 폐암 투병생활을 하기 시작했고, 2002년 1월부터 금연 광고를 하기 시작하여 "담배 맛있습니까? 그거 독약입니다. 저도 하루에 두갑씩 피웠습니다"라고 호소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금연하도록 권장하였으며, 살아있을 때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팀이 활약하는 걸 꼭 보고 싶다며 몇 달만 더 살고 싶다고 염원했으며 적어도 2002 한일월드컵은 휠체어를 타고 관람하여 그 바람은 이룰 수 있었다.
그리고 2002년 8월 27일 결국 폐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3.8.1 이주일의 사망 원인은 흡연이 아니다?
병석에 누워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방송국에서 찾아가 인터뷰를 했고, 당시 이주일은 내 병은 담배와 관련이 없다는 말을 했으며, 사후 이주일의 사인이 "선암"(폐에서 발생하는 암의 일종)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KT&G 관계자 및 골수 애연가들은 "죽기 전에 좋은 일 하겠다는 뜻은 알겠지만, 안 그래도 무시당하는 우리까지 물고 가느냐"며 고인에 대해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잘 알고 있으면 좀 끊기라도 하던가..
그러나 이는 의학적 지식이 잘못 알려진 것인데, 폐암은 주로 네 종류(소세포암, 편평세포암, 큰세포암, 선암)가 있고, 이 중 선암은 80년대 말까지 다른 폐암에 비해 여성/아동에서 많이 발생해서[18] 흡연과 무관하지 않느냐는 말이 의학적인 통설이었다.
선암은 국내에서 가장 많이 발생하는 폐암이었기 때문에, '한국인은 흡연을 해도 폐암에 잘 안 걸린다'라는 미신까지 흡연자들 사이에서 만들어진 상황이었다. 그러나 90년대 초 국민 보건 사업을 위한 암발생 실태 조사에서 국내의 선암 역시 흡연과 아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는 것이 밝혀졌고, 동시에 미국와 유럽에서도 선암과 흡연의 발생 메커니즘에 대한 연구가 나오면서 선암은 흡연과 무관하다는 것은 완전히 헛소리가 되었다. 즉 고 이주일씨와 선암을 둘러싼 논란은 일단락 되었다.
4 기타
- 90년대까지만 해도 코미디언들의 세대 구분법은 이주일과 코미디를 해 본 사람과 안 해 본 사람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2010년대 현재, 희극계에서 고참급이라고 불리는 이들 중, 이주일과 같이 코미디를 해 본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
- 이주일이 엄청 고참 코미디언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평생을 걸쳐 어려워하고 무서워한 선배가 있다. 바로 구봉서다. 이주일은 환갑이 되도록 구봉서를 보고 벌벌 떨었다. 개그계의 선후배란 이런 거다.
- 이주일은 이덕화, 조용필, 최병서와는 분야와 나이를 모두 초월한 절친이었다[19] 미국에서 후배들과 순회공연이 끝나고 기념으로 사진을 찍으려고 하던 중 사진기가 없어서 근처 상점에 들렸을때 이주일이 최병서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야 카메라가 영어로 뭐냐?"
알면서 그렇게 캐므러?이덕화는 이주일이 죽기 직전에 시한부 인생인 이주일에게 가발을 맞춰주기까지 했다.
- 정치인 이회창과 목소리가 굉장히 흡사하다.
- 걷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다고 한다. 심지어 거리가 50m를 넘어가는 곳이라면 자동차를 이용했다고 한다.
- 방송에 안 나올 시절에도 라면 광고는 꼭 출연했을 정도로 엄청난 라면 광이었다고 한다. 최전성기 때 농심그룹의 전속모델로 활동했으며, 1985년에 청보식품[20][21]이 런칭될 때 청보식품에서 전속모델로 모셔가기도 했다.
그러나 라면맛이 좆망인데다 이주일은 컬트적인 광고만 나와 그야말로 고통받았다.
- 자유북한방송에서 내놓은 만화 김정은에 의하면 남한방송을 즐겨보던 김정남이[22]어렸을 때 이주일을 데려오라고 땡깡을 부려 측근들이 충공깽에 빠진 적이 있다고 한다. "이주일은 남조선에 있으니 못 데려 온다"고 아무리 설득해도 "남조선이든 달나라든 그건 내 알바 아니니 데려오라!"고 들어먹질 않아서 김일성에게 보고하니 "알아서 해라"라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명령이 내려왔다고. 결국 양강도에서 이주일하고 가장 닮은 농민을 찾아내서 분장/연습시켜 제법 비슷하게 따라할 정도가 되자 김정남 앞에 데려가 공연했다고 한다. 김정남은 20분 동안 말없이 공연을 보더니 "연극 하느라 수고 많았다"라고 가짜 이주일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도 칭찬하고 그 농민에게 술과 양복을 내렸다 카더라. 이 증언은 황장엽의 자서전에도 나오며 김정남의 이종사촌인 탈북자 이한영[23]씨의 증언과도 일치한다. 다만 결말은 다른데 칭찬한 위의 서술관 달리 이한영은 김정남이 가짜라면서 마구 땡깡을 부렸다고 한다.
- 1991년 7대독자 아들인 정창원 씨를 잃었다. 선보러 가는 길에 그만 교통사고로 변을 당하고 만 것이다. 그것 때문인지 훗날 수양아들을 두 명 두었다고 한다.
- 성우 박일이 이 분의 성대모사를 무척 잘한다. 미중년 전문 성우이기는 하지만, 의외로 정말 싱크로가 좋다. 박일은 격동 50년, 배한성, 배칠수의 고전열전 삼국지에서 방통 역할로 이주일의 성대모사를 제대로 선보였다.[24]
- 못생긴 외모로 괄시아닌 괄시를 받던 이주일에게도 외모로 이긴 상대가 있었으니 바로 가수 조영남이었다. 한번은 그가 야간업소(당시엔 가족들이 같이 외식하면서 유명 연예인들의 공연을 볼 수 있는 극장식당이 성행했다.)에 출연했는데 조영남도 같이 출연했다. 그런데 관객들 중 어린이 한명이 조영남의 얼굴을 보곤 울음을 터뜨렸는데 이유인즉 험상궂은 조영남의 얼굴모습 때문이었던 것. 그걸보고 이주일이 날린 촌철살인 코멘트,
"그래도 전 애가 울어버리는 참사는 발생하지 않습니다. 제 얼굴이 아무리 못생겼다지만 조영남이 보단 잘생겼습니다. 절 너무 괄시하지 마십쇼. 전 정말 조영남이 하나 바라보고 삽니다."
- ↑ 1992년 국회의원으로 활동한 적이 있고, 대선 당시 정주영(우리가 아는 그 현대그룹 회장 맞다.) 후보 지원유세를 했음.
- ↑ 현재 12년 넘게 전무후무할 정도로 예능/코미디계 압도적 원톱을 유지하고 있는 그 유재석을 올타임 넘버원으로 뽑기 힘들게 만드는 몇 안되는 인물이다. 그만큼 이주일은 80년대 한국인들에게는 전설 그 자체이며 60~70년대 서영춘, 구봉서, 배삼룡 이 세명이 삼분하던 한국 코미디계에 갑자기 나타나서 혼자 그 인기를 대체해버린 거물이었다. 마치 70년대 남진, 나훈아로 양분되던 가요계를 혼자서 대체하여 원톱을 유지한 가왕 조용필과 같다. 실제로도 이주일과 조용필은 절친이었다.
- ↑ 이 이름으로 검색해도 이 문서로 들어올 수 있다.
- ↑ 하춘화는 경상에 그쳤지만 정작 이주일 본인은 후두부가 함몰되는 중상을 입어 수 개월동안 입원해야 했다.
- ↑ 한국에서 백금녀(주로 서영춘과 콤비를 이루어 공연했다)의 뒤를 이어 여자 뚱보 컨셉을 내세운 코미디언. '뚱순이'라는 별명으로 유명.
- ↑ 초반에는 선배 코미디언 후라이보이 곽규석 과 콤비였으나 4,5회 방송후 이상해로 교체
- ↑ 사실 이 판토마임은 일본의 유명 코미디그룹 더 드리프터즈 소속의 시무라 켄과 가토 챠 콤비가 1979년 <8시다 전원집합>에서 선보인 코너 "수염댄스"를 표절한 것이었다.
- ↑ 방송 복귀는 TBC의 후신격인 KBS2가 아닌 MBC의 일요일 밤의 대행진으로 복귀했다.
- ↑ 이 돈은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이 당시 주택복권 1등 당첨금이 이 액수였다. 지금으로 따지면 로또에 혼자서 1등 당첨되었을 때 받는 액수와 느낌이 비슷한 돈이다.
- ↑ 약한 예를 들자면, 수캐가 소변을 볼 때 한 쪽 발을 드는 이유는? 뭔가 보여주기 위해서.
- ↑ 다만 그 이전 히딩크 감독을 꽤 까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박종환이나 다른 축구인들도 엄청나게 까던 일이라서 그를 비난할 건 못된다. 정확히는 "히딩크란 사람 하나에 너무 의존한다. 그에게 줄 돈으로 유망주 발굴을 해야할 거 아니냐? 감독 하나 바꿔서 월드컵 얼마나 잘하겠느냐?" 인터뷰했는데... 막상 월드컵 4강이란 신화를 실현시켰으니(...) 아니, 유망주 발굴 운운하면서, 국제 무대에서 활약할 인재는 해외에서 뛴 지도자를 빼놓고는 대다수가 무시한 것은 2002 월드컵 전까지는 우물 안 개구리처럼 몰랐지만...
- ↑ 아산 정주영은 강원도 통천 출신으로 이주일의 고향인 강원도 고성과 가까운 곳에 있는 지역이다.
- ↑ 90살 이상 장수하는 사람들의 인간성을 분석해보면 보통 이런 사람들이 오래 산다. 화를 잘 내는 성격이면 그 때문에 평균수명이 온화한 성격을 가진 사람보다 짧다.
- ↑ TV방송 데뷔 차이일뿐이지 구봉서, 서영춘, 배삼룡을 비롯한 1세대 희극인들은 TV 방송이 존재하기 전인 40~50년대 부터 만담꾼, 희극단을 전전하며 이미 TV방송 출연 전부터 희극인으로서 경력이 수십년 쌓인 베테랑이였다. 그러니 60년대 중후반에 데뷔하고 70년대 후반에서야 유명해지기 시작한 이주일이 40~50년대부터 활약한 한 세대 전 인물인 구봉서에게 쩔쩔맨것도 당연. 쉽게 비유하면 이경규 - 박명수의 관계와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 ↑ 다만 홍콩 방문에 대해선 누군가가 손을 써서 출마를 막으려고 한 일이란 설도 있다.
- ↑ 당시에는 영등포구 여의도동에 있었다.
- ↑ 국민당 당원수에 허수가 많았다는 뜻. 이웃, 친척, 친구가 국민당 입당신청서에 그냥 이름만 올려달라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허락한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사실 이건 요즘도 비슷하다. - ↑ 그러나 선암만 놓고보면 가장 많이 발생하는 건 노년 남성이다.
- ↑ 특히 조용필과는 둘도 없는 술친구였다고. 두 사람 다 주량이 가공할 만한지라 주사도 끝내줬다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이주일: "용필아, 네가 스타냐?", 조용필: "그러는 형님도 스탑니까?").
- ↑ 오뚜기 라면 사업부의 전신격 업체이다.
- ↑ KBO 리그 삼청태현 프랜차이즈 청보 핀토스의 모기업 풍한방직의 자회사.
- ↑ 원래 김씨 일가들은 남한 방송 정말 좋아했다. 김정일도 술만 취하면 나훈아, 이미자 등의 남한 노래를 불러댔고 누가 북한 노래 부르면 재미 없으니 여기선 부르지 말라고 핀잔을 주었다고 한다.
- ↑ 김정남의 어머니 성혜림의 언니 성혜랑의 아들로 탈북하여 남한에 정착했다가 간첩으로 추정되는 자에게 살해당했다.
- ↑ 참고로 김현정이 달려라 하니에 등장하는 고은애 성대모사도 엄청난 싱크로를 자랑하는데 박일이나 김현정이나 둘 다 실제 목소리는 상당히 매력적이며(당장 직업부터가 하나는 정상권에 오른 성우, 또 하나는 정상권에 오른 솔로 가수이다. 목소리가 나쁠 수가 없다.) 그 성대모사는 자신의 목소리를 뭉개서 만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