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창식(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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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가요대상 대상
하춘화
난생 처음
(1974)
송창식
왜 불러
(1975)
송대관
해뜰날
(1976)

1 기본정보

이름 송창식(宋昌植)
출생 1947년 2월 2일(음력)[1],인천광역시 중구 신흥동
가족 1남 1녀 중 첫째, 슬하 2남 1녀(아들 송결)
본관 진천 송씨
직업 가수, 기타리스트
학력 서울예술고등학교 중퇴

2 소개

김현식과 더불어 한국에서 가장 대중음악에 통달한 위치에 서 있는 가객.

가왕 조용필의 맞은편 봉우리를 이루고 있는 단 한명의 가수.

기성세대들의 국민가수

한국 가요사에서 단 한명의 천재를 뽑으라고 하면 '단연 송창식'이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음악평론가 강헌이 말하길 가왕 조용필의 맞은편 봉우리를 이루고 있는 단 한명의 가수라 부를 수 있겠다.

세시봉 출신으로 70-80년대 포크송계를 주름잡던 가수. 원래는 윤형주와 함께 듀엣 트윈폴리오로 데뷔했다가 윤형주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1970년에 솔로로 전향. 특유의 "대~충"부르는듯 하지만 절대 대충 부를 수 없는 창법이 특징. 마치 해탈한 도인이 너털웃음을 짓는 듯 한 가창을 하는데, 다른 사람이 따라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아닌게 아니라 음악으로 득도한 천재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고아 출신이기도 하다.아버지가 일찍 죽고 어머니도 가출하여 친척집도 여기저기 다니고 어릴적에 참 고생했다고. 90년대 뭐 언론이 어머니를 뵈실 생각이 있냐니까 잊었다고 했다. 하긴 그 언론도 수소문했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다고.

윤형주는 경기고 출신 연세대 의대생[2]의 엘리트 이미지라면, 송창식은 서민적인 이미지로 대변된다. 윤형주가 특유의 맑은 미성과 (수백곡의 CM송을 작곡한 데서 알 수 있듯) 대중친화적인 작곡 능력을 바탕으로 진정한 의미의 '팝(popular)' 음악을 선보였다면. 송창식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유니크한 톤의 보컬과 한국적인 정서를 담은 작곡을 통해 송창식 특유의 예술세계를 담은 음악을 선보였다. 어째 폴 매카트니존 레논이 생각난다.

사실, 보컬로서 노래실력뿐만 아니라 기타리스트로서도 상당한 스킬을 가지고 있다. 세시봉 중에서는 독보적인 수준이고 전문가 중에서도 보컬보다 기타 실력을 더욱 부각해서 보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참고로 송창식의 예술성이 어느 정도 깊이인지를 좀 더 느껴보고 싶다면, 월간 객석[3]에서 클래식 신예 바이올리니스트인 조진주가 그와 나눴던 인터뷰(2015년 8월호)를 일독하길 바란다. 일반인이 보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조차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어렵고 심도깊지만, 그가 음악에 대해 어느 정도로 연구하고 어떤 철학을 가지며 연습하고 있는지를 느끼는 것은 충분할거다.

이는 물론, 윤형주에겐 예술성이 부족하고 송창식에겐 대중성이 부족하다는 중2병스러운 비교가 아님을 밝힌다. 각기 다른 음악의 방식으로 일가를 이룬 두 거장들을 비교해서 누가 더 낫다 아니다를 따지는 것은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유념하자. 그리고 그런 비교는 어차피 사실도 아니다. 무슨 나는 가수다도 아니고

하지만, 금전 관리가 철저했고 사업 관념이 있었던 윤형주는 많은 재산을 축적해 재산가가 된 반면[4] 사람이 너무 좋아 보증도 서 주고 돈도 꿔 달라는 대로 꿔 주던 송창식은 많은 재산을 잃었다. 물론 송창식이 돈을 잘 벌던 시절 알랑대며 돈을 꿔 간 사람들 중 제대로 갚은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다고 그가 빈털터리인 것은 아니고, 2012년 현재까지도 공연일정이 한가득이기에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전혀 없다고 한다. 그냥 일단 놀구먹어도 저작권료로만 매해 7,500만원의 고정 수입이 있다고# 하지만 그냥 쓸만큼 있으면 된다는 사고방식이라 그 시절 돈을 꿔가고 보증선 사람들을 원망하는 것도 없다고 한다. 윤형주와는 트윈 폴리오를 하기 전 부터 절친한 사이였고 지금까지도 그 관계는 이어지고 있다.

예전에 세시봉 멤버들이 나와서 토크할때 송창식씨의 가난하던 시절 회상하는 부분에서는 찢어지게 가난한 것을 넘어서 달랑 기타 하나를 들고 노숙하면서 지내고 노래 불러주고 밥얻어먹고 이 집에서 며칠 저 집에서 며칠 하는 식으로 생활했을 정도로 가난했다고 한다.

그의 최종학력은 서울예고 중퇴. 동창으로는 금난새가 있다. 금난새가 학창시절을 회상하며 "음악에 정말 천재였던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가난해서 매일 수돗물로 배를 채우던 기억이 난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친구가 바로 송창식. 애초에 오케스트라 지휘자를 꿈꾸는 클래식 전공자였으나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사정 때문에 중도 포기했다. 이후 방황하다가 클래식 창법으로 대중가요계에 등장한 조영남을 만나면서 가수로 데뷔했다. 이후 세시봉과 오빈스캐빈에서 윤형주, 이장희, 김세환, 김민기, 양희은 등 당대 최고의 뮤지션들을 만났고 특히 윤형주와 트윈폴리오를 하면서 만개했다.

3 활동


소름돋긔

대표곡은 한번쯤[5], 가나다라, 담배가게 아가씨[6], 고래사냥, 왜불러[7], 병사의 향수[8], 피리부는 사나이, 참새의 하루 등. 서정주 시인의 시 "푸르른 날"에 곡을 붙인 노래, "사랑이야" 등의 서정적인 노래도 일품이다.

수많은 히트곡과 자신의 감정을 배제하며 그것을 음악으로 승화시키는, 맑고도 힘있는 가창력으로 양희은, 어니언스등과 함께 70년대 한국 포크락을 주도한 한국 가요사에 남을 위대한 가수다. 세시봉-청개구리로 대표되는 초창기 포크음악에서, 싱어로는 유이하게 아마추어를 완벽히 탈피했다는 평을 받는다(다른 하나는 물론 양희은).

놀러와 세시봉 특집에 나와서 변치않는 가창력을 보여주었다. 그가 입을 열때마다 유재석이 진심으로 감격하는것이 보일 정도. 프로그램에서 CM송을 딱 하나 만들었다고 했는데 그게 빙그레 투게더 (엄마, 아빠도 함께~♪) 이후에 참붕어빵도 만들었다.

원래는 정확한 음정, 발음을 구사하고 부드러운 느낌으로 부르는 미성이었는데, 트윈폴리오 끝무렵부터 창법이 변하였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가사를 발음하는 것이 아니라 어울리는 소리를 내고 여기에 가사를 맞추는' 것이라 하며, 특유의 웅얼거리는 느낌이 완성되었다.

항상 기타한대 둘러메고 개량한복을 입고서는 밝은 얼굴에 미소를 지으면서 낙천적인 인상으로 노래한다. 왠지 기인같은 도인분위기도 풍긴다. 평소에 개량 한복을 입고 다니기 때문에 더 그렇게 보이기도 하다. 실제 70년대부터 친분이 있던 조영남의 회고로는 같이 술마시다가 뜬금없이 '형 지금 어깨에 귀신이 붙어있어'같은 소리도 하곤 했다고.(...) 조영남-송창식은 희한한 놈 그 종잡을 수 없는 조영남이 이런 얘길 할 정도면 어떤 사람이라는 걸까


오페라 넘버인 '남 몰래 흐르는 눈물'의 짤막한 피로. 오페라 창법이라기보다 평소 하던 송창식의 발성 그대로인데 기막히게 어울린다! 현장에서의 감탄이 괜한 것이 아니다(...).

2012년 1월 28일 방송된 불후의 명곡 2에서 전설의 가수로 송창식이 초대되었다. 그가 나온다는 소식에 참여자들이 두배는 많이 모여 부득이하게 2주 연속으로 진행하게 되었다.


제12회 한국대중음악상에서 공로상을 수상하셨다.

4 여담

컴퓨터를 6대나 사용하는 고수, 아들 송결[9]엔씨소프트 게임 기획자.일간스포츠 기사

그리고 최근 대머리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것을 몰랐던 사람들에게는 꽤나 충격으로 다가왔다. 위 사진은 가발을 착용한 것이다. 동명이인 야구선수에게도 똑같은 현상이...
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 열린음악회에 이미 상당히 탈모된 상태로 나왔다. 이때는 가발을 쓰지 않았다.

아침이슬로 유명한 김민기가 78년 살벌한 유신시대 '공장의 불빛'이란 음반을 녹음할때 녹음실을 내준게 송창식이었다고 한다.

만약 누군가 밀고했더라면 송창식도 얽혀서 치도곤을 맞을 상황이었다는걸 생각하면 대인배라고 아니할 수 없다.
  1. 양력 2월 22일
  2. 음악활동을 하느라 의예과까지만 마치고 중퇴, 나중에 경희대로 편입한다.
  3. 대중음악 잡지가 아니라 무려 객석이다. 이 잡지는 클래식이나 연극, 무용, 뮤지컬 등 순수 공연예술을 다루는 잡지이다. 대중음악 기사도 극히 드물게 실리기는 하지만, 그역시도 단순한 인기 보다 음악사적으로 볼 때 충분히 가치있을 수준의 가수들이 등장하는 정도이다.
  4. 윤형주가 돈을 많이 번 이유는 CM송 때문이기도 했다. 약 1400곡을 작곡했다고.
  5. 이 곡으로 동양방송의 가요대상을 타기도 했다. 그의 인생 유일한 대상이다.
  6. 윤도현 밴드가 커버하기도 했으며, 브라운 아이드 소울이 리메이크 하기도 했다.(정엽 솔로곡). 그리고 들어보면 알겠지만 가사도 기타반주부분도 전혀 촌스럽지않고 옛날곡이라고 생각되지 않을정도다.
  7. 박정희 정권 시절의 영화<바보들의 행진>(1975)의 OST이기도 했는데, 영화에서 머리 긴 청년들이 장발단속을 피해 달리는 장면에서 쓰였다. 그러니까 청년들이 달아나면서 경찰들에게 "왜 불러"라고 놀리는 의도로 삽입된 것이 이 노래였는데, 덕분에 당시 공권력을 조롱했다는 이유로 금지곡명단에 오른 곡이다.
  8. 고향의 향수라는 이름으로 군부대에서 비공식적으로 군가로(!) 불리고 있다. 너무 슬퍼서 금지곡이였다 카더라
  9. 표면적인 기록상으로는 만 1세가 되기전에 무슨 능력인지 작곡을 한 곡이 있다. 다만 그냥 아들 탄생 기념으로 송창식이 작곡자 부분에 자기 이름 대신 올린 것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