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 자이언츠 No.79 | |
손상대(孫相大 / Sang-Dae Son) | |
생년월일 | 1954년 10월 20일 |
국적 | 대한민국 |
출신지 | 경상북도 안동시 |
학력 | 경북고 - 한양대 |
포지션 | 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82년 삼성 라이온즈 창단 멤버 |
소속팀 | 삼성 라이온즈 (1982~1987) |
지도자 | 삼성 라이온즈 배터리코치 (1990) OB 베어스 배터리코치 (1991~1998) 한화 이글스 1군 불펜코치 (2004) 한화 이글스 2군 감독 (2005) 한화 이글스 2군 배터리코치 (2006) 한화 이글스 잔류군 코치 (2006) 롯데 자이언츠 2군 감독 (2015~) |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28번(1982) | |||||
팀 창단 | → | 손상대(1982) | → | 홍승규(1983) | |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8번(1983) | |||||
정구왕(1982) | → | 손상대(1983) | → | 김성갑(1985) | |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37번(1984~1987) | |||||
→ | 손상대(1984~1987) | → | 김종갑(1989~1992) |
1 소개
前 야구선수. 삼성 라이온즈의 창단 멤버.
2 선수 시절
1970년대 초 고교야구를 휩쓸던 경북고 출신. 배대웅, 정현발, 천보성 등이 경북고 동기다. 한양대 졸업 후 실업 야구 팀 롯데 자이언트에 입단했다. 타자로서 일발 장타가 있었지만 포수로서 수비는 떨어졌다. 당시 실업 팀 최강의 멤버를 자랑하던 롯데의 유일한 약점.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며 연고 팀인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했는데, 서영무 감독이 갓 대학을 졸업한 이만수를 주전으로 낙점하며 백업으로 밀렸다. 그리고 손상대는 이만수를 빼고도 타격의 정확성으로는 박정환에게 밀렸고, 수비로는 손상득에게 밀리며 선수도 적던 시절에 팀의 4번째 포수가 되었다. 그리고 참고로 박정환, 손상득 둘 다 모두 그의 경북고 후배다. 안습.
때문에 프로에서는 별다른 활약 없이 1987년에 은퇴했다.
3 지도자 시절
1990년 삼성의 배터리코치로 삼성에 복귀했지만, 시즌 후 김명성, 김광웅 코치의 해임에 반발해 1991년 OB 베어스와 계약했다.[1] 1997년 말 OB와 계약이 종료되어 프로야구계를 떠났다.
2004년 오랜만에 프로야구계에 복귀해 한화 이글스 코치로 부임해 2006년까지 1군 배터리코치, 2군 감독, 2군 배터리코치, 재활군코치 등으로 있었다. 2006 시즌 후 내부 갈등으로 사표를 내고 코치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경동고 감독, 부경고 코치 등으로 아마야구계에서 후진을 영성했다.
2015년부터는 롯데 자이언츠의 2군 감독을 맡게 되었다.
4 여담
손상득과는 2살 차이에 같은 고교를 나와 형제로 오해받곤 하나, 형제가 아니다. 손상득은 '祥得', 손상대는 '相大'로 쓰는 한자가 다르다.
5 연도별 성적
역대기록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
1982 | 삼성 라이온즈 | 12 | 19 | .211 | 4 | 0 | 0 | 0 | 2 | 1 | 1 | |||
1983 | 10 | 8 | .125 | 1 | 1 | 0 | 0 | 0 | 0 | 0 | ||||
1984 | 4 | 3 | .333 | 1 | 0 | 0 | 0 | 1 | 0 | 0 | ||||
1985 | 5 | 1 | .000 | 0 | 0 | 0 | 0 | 0 | 0 | 0 | ||||
통산 | 31 | 31 | .194 | 6 | 1 | 0 | 0 | 3 | 1 |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