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보

陜父

(? ~ ?)

고구려의 인물.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부여에 살았던 시절부터 오이, 마리 등과 더불어 그의 친구였다고 전한다.

이후에 부여왕자 대소에게 위협을 당하던 동명성왕이 오이, 마리 등과 함께 부여에서 탈출할때 동행하였으며, 훗날 고구려 건국의 주역중 한명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함께 동명성왕을 따라 나섰던 친구인 오이나 마리 등과는 달리 전쟁에 참전해서 활약한 기록이 전무하며, 때문에 장수였던 오이, 마리 등과는 달리 무관이 아닌 행정관료나 학자로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동명성왕이 죽고 유리왕이 왕위를 이어받은 후에도 관료로의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유리왕대에는 아마도 내정을 관장하는 대보의 직위까지 오를 정도로 큰 비중을 지닌 인물이었다.[1]

그런데 서기 3년(유리왕 22년)에 협보가 유리왕에게 "정사를 소홀히 하니 바로잡으소서"라고 간하자 분노한 유리왕이 협보를 대보에서 파하고 관원(官園)[2]의 일을 보게 했다고 나온다. 이와 같은 모욕에 분개한 협보는 그대로 고구려를 떠나서 남쪽의 삼한땅으로 가버렸다고 전한다. 이후의 행보는 기록에 없어 정확히 알 수 없다.

유리왕이 아버지인 동명성왕의 오른팔이라고 할만한 협보를 내정의 중요직에서 관청의 정원 관리인으로 강등시킨걸로 보면 유리왕과 협보사이에 상당히 험악한 기류가 흘렀던것으로 보이고 이후 협보는 고구려에 실망해 그대로 고구려를 떠나 남쪽의 삼한으로 이주한걸로 보인다. 고구려 건국 이후 체제를 굳혀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지배계층간의 갈등을 상징한다고 보기도 한다.

사극 주몽에서도 등장한다. 배우는 임대호. 오이와 마리 등과 함께 부여에서 무뢰배 생활을 하다가 주몽과 의형제를 맺고 고구려 건국의 공신이 된다. 작중에서는 삼국지연의의 장비를 오마쥬한 듯 산적처럼 험악한 외모의 장사로 묘사되었지만 정황으로 본다면 협보는 오히려 문관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재미있게도 작중에서 소서노의 심복인 행수 사용과 동성연인으로 묘사되는데, 코믹하면서도 애잔한 묘사 덕분에 당시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왔다(...).

환단고기에는 협보가 다파나국을 세웠다고 나와있다.

  1. 중국의 벼슬로 치면 재상에 해당하며 대보는 이들 재상들 중에서도 우두머리격인 인물로 중국 사극에서 왕 바로 밑의 벼슬이라 할 수 있는 승상에 해당하는 매우 비중있는 것으로 같이 건국 주역인 오이, 마리가 장수,장군의 기록은 있어도 무장을 아우른다는 기록은 없기 때문에 다른 친구들보다 더 높은 벼슬에 올랐다고 보면된다. 협보 개인의 능력이 매우 비범했으이라 짐작되는 부분이다.
  2. 관청의 동산을 말하는 것으로, 요즘으로 치면 국무총리에게 정원사 일을 보게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