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의 역대 국왕 | ||||
3대 금와왕 | ← | 4대 대소왕 | → | 불명 |
시호 | 대소왕(帶素王) | |
성 | 해(解) | |
휘 | 대소 | |
생몰년도 | 음력 | ? ~ CE 22년 |
재위기간 | 음력 | BC 20년 ~ CE 22년 |
1 개요
금와왕이 낳은 7형제 중에서도 맏아들이었으며, 훗날 금와왕의 뒤를 이어 부여의 왕이 되었다.
고구려 초기에 고구려를 위협하였던 가장 위험한 세력 중 하나였으며, 동명성왕 때는 물론이고 그 뒤를 이은 유리명왕, 대무신왕 대에 이르기까지 무려 3대에 걸친 고구려의 숙적이었다.
2 일생
2.1 초기 일생
역사상의 기록에는 삼국사기 등에 기록된 고구려 건국 신화에서 처음 등장하며, 아버지인 금와왕이 유화와 그 아들인 주몽을 거두어 키울 때에 함께 어울려 놀기도 했다고 한다.[1]
처음에는 동명성왕과 어울려 놀았다는 기록도 있는 것으로 보아 애초부터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자신은 물론이고 자신의 형제들 중에서도 주몽의 재능을 따라갈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점차 주몽을 시기하였으며, 훗날에 부여에 위협이 될만한 인물이라고 여겼다.[2]
그래서 아버지인 금와왕에게 주몽을 제거할 것을 간하였으나 받아 들여지지 않자 신하들과 함께 몰래 계략을 꾸며서 주몽을 죽이려 했다. 이를 알게 된 유화가 주몽에게 경고하자 주몽은 부여에서 탈출하여 고구려를 건국하게 된다. 그리고 주몽은 고구려의 왕으로 즉위하여 동명성왕이 되었다.[3]
2.2 고구려와의 대립
이후로 대소는 동명성왕대의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다가 유리명왕대의 기록에 부여의 왕이 되어 다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때의 대소왕은 고구려를 사실상 속국으로 취급하며 침공하거나 인질 교환을 제안하는 등 허구한 날 괴롭혔다.[4]
기원전 6년에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어 유리명왕에게 인질 교환을 제안하였다. 유리명왕은 부여의 강대함을 두려워해서 태자인 도절을 인질로 보내려 하였으나 도절이 무섭다면서 이에 응하지 않아(...) 결국 인질 교환은 결렬되었다. 이에 화가 난 대소왕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같은 해의 겨울에 5만의 병력을 보내어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마침 큰 눈이 내리는 바람에 실패하고 돌아갔다.
그리고 서기 9년에는 고구려에 다시 사신을 보내어서 "너희 선왕이 우리 부여의 신하들을 꾀어서 달아나 세운 나라가 바로 고구려니 마땅히 부여를 섬겨야 한다."고 전하였는데, 즉 고구려를 속국으로 취급하려 한 것이다. 유리명왕은 이를 따를지 고심하였는데, 이때 유리명왕의 아들인 무휼이 나서면서 "우리 동명성왕이 당신들의 왕 때문에 부여에서 도망쳐 나와서 고구려를 세웠는데, 무슨 말도 안되는 억지를 쓰는 겁니까? 저희들에게 잘해주셔야 저희들도 당신을 섬길 것 아닙니까."라고 답하는 바람에 또다시 굴욕을 당했다(...).
서기 20년에는 어느 부여인이 머리가 하나이며 몸은 두 개인 키메라붉은 까마귀를 얻어 대소왕에게 바치며 "까마귀는 본래 검은 것이나 몸이 붉게 되었고 머리는 하나인데 몸이 두개이니 이는 곧 두 나라[5]가 하나가 될 징조입니다."라고 고하였다.
이에 대소왕은 이 까마귀를 고구려의 대무신왕에게 보내었다. 이를 받은 대무신왕은 대소왕에게 "검은 것은 본래 북방의 색이나 지금 변해서 남방의 색이 되었으며 붉은 까마귀는 상서로운 것이라 왕이 얻어서는 나에게 주었으니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습니다."라고 답하였다. 이에 대소왕은 까마귀를 보낸 것을 크게 후회하였다고 한다.
2.3 죽음
서기 22년, 마침내 고구려의 대무신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부여 남쪽 지방을 공격해왔다. 이곳에서 대소왕은 직접 대병력을 이끌고 대무신왕과 맞서려 하였는데, 마침 고구려 군은 평지 위에서 진영을 펼치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대소왕은 이 틈을 노려서 군사를 몰아 고구려 군을 공격하였으나, 너무 급하게 진군하는 바람에 진창에 빠져서 대군이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이때 고구려의 장수 괴유가 오도가도 못하는 부여 군을 향해 돌격하여 부여 군사들을 죽이고 급기야 대소왕마저 괴유의 칼에 목이 잘려 전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대소왕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여 군은 사기가 꺾이지 않았으며, 남은 부여의 병사들은 오히려 왕의 죽음을 복수를 하자는 일념하에 더욱 거세게 고구려군을 공격하였다. 결국 고구려는 참패하고 말았다.[6]
전쟁에서 패배한 고구려 군은 대소왕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군사와 물자를 잃은 채 돌아왔다. 대무신왕이 부여와의 전쟁 이후, 대소왕의 목을 베었다는 사실을 자축하면서도 너무 많은 군사를 잃었다며 제사 지냈다는 기록에서 이를 알 수 있다.
2.4 사후
대소왕이 전장에서 갑작스럽게 죽는 바람에 부여는 정치적 혼란에 빠졌던 듯 하다. 결국 부여는 이 뒤로 극심한 정치적 혼란과 내분으로 인해 전쟁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패한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 되었다.
대소가 죽은 이후로 곧 부여의 왕족들이나 지배층 사이에서도 내분이 일어나 점차 나라의 내부에서부터 쇠락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대소가 죽은 해인 서기 22년에는 대소의 아우가 따로 가족과 지지 세력을 이끌고 부여를 빠져나와 갈사국이라는 나라를 세웠던 일까지 있었으며, 대소왕의 사촌 동생이 고구려에 투항해 오기까지 할 지경이었다.
다만 부여가 대소왕이 죽은 후 한동한 혼란기를 겪었다고는 하나 완전히 쇠퇴한 것은 아니었다. 이후 3세기까지도 부여의 인구는 8만 호 정도로, 그 국력에 있어서는 인구 3만 호의 고구려를 압도하였다.
하지만 285년 선비족의 침략으로 1만 명이 포로신세, 이후 부여왕 의려의 자살로 국력이 쇠퇴하였다. 그리고 346년 전연의 침략으로 5만여 명이 포로로 끌려간 뒤 사실상 붕괴하였다.
잔존세력이 고구려의 양해 하에 책성 주변에 모여서 명맥을 이어갔으나 이마저도 광개토대왕의 동부여 원정으로... 이후 농안 지역에서 최후의 최후까지 부여의 명맥을 잇던 세력이 물길의 침략으로 완전히 박살나고 고구려에 투항, 흡수되면서 부여는 494년에야 완전히 멸망하였다.
3 그 외에
동명성왕의 아들인 유리명왕이 아직 부여에 머물고 있었을 때에도 죽이지 않는 등 의외로 따뜻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7] 다만 유리가 아버지를 모르고 자랐다는 언급을 보면 신분을 숨겼을 가능성도 있다.
동명성왕과 유리명왕이 죽은 후 대무신왕 대에까지 살아서 전쟁을 직접 지휘한 걸 보면 상당히 건강하게 오래 살았던 듯 하다. 대소왕이 동명성왕과 같은 나이대였다고 쳐도 80대는 되어있었을 때이다. 물론 동명성왕이나 유리왕 등이 모두 40대를 전후하여 사망하는 등 그리 오래 살지는 못한 탓도 있었겠지만 당시 시대를 고려해보면 엄청난 고령이었다.
그래서 '대소'라는 어휘가 그냥 부여의 왕을 뜻하는 것이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8] 다만 대소가 죽은 후에 부여에서 빠져나와 따로 갈사국을 세웠던 대소의 아우가 금와왕의 막내아들이라는 기록이 있어서 대소왕이 금와왕의 아들임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
4 대중 매체에서의 모습
얼마전까지만 해도 '대소'하면 고구려 건국 신화에서 묘사되듯이 늘 주몽과 그 자손들에게 털리는(...) 안습한 이미지였지만 최근에 사극인 주몽(드라마)과 바람의 나라에서 좀 더 새롭게 각색되어 등장하면서 관심을 아주 조금 더 받게 되었다.
주몽에서는 배우 김승수가 연기하며 메인 악역으로 등장한다.[9] 본작에서는 모든 방면에서 능통하는 그야말로 엄친아이며, 특히 검술은 부여에서 적수가 없다고 정평이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작중에서 너무 열폭하는 일이 많아서 약간 찌질해 보이는 장면이 좀 많다. 특히 주몽이 해모수를 만나면서 각성하자, 그 뒤로는 계속 주몽에게 털리는게 일이어서 굉장히 안습하다. 특히 대소도 나름대로 뛰어난 모습을 보이지만[10], 항상 주몽에게 약간씩 밀리면서 원통해하는 듯한 묘사가 많아 더욱 불쌍해 보인다(...). 소서노를 마음에 두었지만 현토군 태수 양정의 딸 설란과 혼인하면서 한나라의 힘을 등에 업은 것 까진 좋았는데, 이건 추후 한나라에 의한 부여의 내정간섭을 초래하면서 사사건건 발목이 잡히게 되는 원인이 된다. 한 때는 외가인 사출도와 처가인 현토군의 힘을 빌어 아버지인 금와왕을 유폐시키고 국왕 대리를 역임하기도 했지만, 날이 갈수록 폭정이 심해지는 대소의 실정에 실망한 대사자 부득불이 금와왕을 지지하면서, 금와왕의 친위 쿠데타로 인해 변방으로 쫓겨나는 수모를 겪기도 한다. 그러다 주몽이 다물군을 결성해 떠나고, 한나라에 볼모로 갔던 동생 영포 왕자가 친한나라 인물이 되어 금와왕의 신임을 잃으면서,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다는 식으로 후계자의 자리에 정식으로 책봉되고, 유화부인 사후 더 이상 옥좌에 미련이 없어진 금와왕에게 양위형식으로 왕위를 물려받게 된다. 그리고 얼마 뒤, 금와왕이 국경지대에서 한나라의 자객들에게 살해당하자, 한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고구려와 손을 잡고 한나라군에 맞서 싸워 대승을 거두는데 일익을 담당한다.
바람의 나라 드라마에서는 배우 한진희가 열연하였으며, 상당히 카리스마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강력한 권력을 지닌 노련하면서도 교활한 늙은 왕의 모습으로 묘사되며, 작중 상당한 포스를 발산하며 최종보스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였다. 특히 초반에 유리명왕을 멋지게 갈구는 장면이 일품. 그러나 후반부에 상황이 급반전되고 결국은 대무신왕에게 털려서 최후를 맞는다는 점은 변하지 않지만 실제역사처럼 괴유손에 죽지만 실제역사랑 다르게 굉장히 우아하게 죽는다.
- ↑ 부여 동명왕 전설에 따르면 천제 아들인 해모수가 해부루의 아버지이며 해부루의 아들이 금와, 금와의 아들이 대소이므로 해모수는 대소의 증조부가 된다. 또한 금와 재위시절 금와가 해모수의 미망인이자 해모수의 아이를 잉태한 유화를 거두어 낳은 아들인 주몽을 양육했다고 볼때 유화는 해모수가 노년에 거둔 첩이나 부인으로 짐작된다. 그렇게 보면 해모수의 증손자인 대소가 해모수의 아들인 주몽과 동년배 혹은 연상일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으며 삼국사기에서도 대소는 주몽보다 연상으로 기록되고 있다.
- ↑ 당장에 금와부터 해부루의 친자가 아닌 업동이이며 해부루가 금와를 태자로 삼은 것도 그 자신에게 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금와가 대를 이은 것이고 대소도 금와의 뒤를 이을 것이 자명한데 증조부 해모수의 아들이 태어나면 대소 자신의 입지가 매우 불리해지기 때문이다.
- ↑ 삼국사기에서도 부여를 떠날 것을 명령한 이는 유화였으며 이를 반문하는 주몽에게 대소 왕자와 다른 왕자들이 죽이려고 하는 것을 모르느냐는 내용이 있다. 해모수의 부인으로 살아온 세월만큼 정치적 계산이나 감각이 있었기에 아들 주몽을 재빠르게 피신시킬 수 있지 않았는가 추정된다
- ↑ 애초에 3세기 부여와 고구려는 국력차가 엄청났다. 8만호와 3만호라는 인구수의 차이를 보라.
- ↑ 부여와 고구려를 이르는 말
- ↑ 다만 기본적으로 부여의 국력이 명백히 우위에 있었기에 고구려 군을 물리치는 데에는 성공했다고 보는게 옳다는 시각도 있다.
- ↑ 실제로는 유리명왕이 한동안 금와왕의 보호아래 있다가 대소왕이 왕위에 오르자 부여를 탈출한 것으로 추정된다.
- ↑ 이집트 왕을 '파라오', 페르시아의 왕을 '왕중왕'(샤한샤)라고 칭했던 것처럼.
- ↑ 엄밀히 따지면 주몽의 친아버지인 해모수를 죽인 장본인으로서 주몽에겐 철천지 원수라고 할 수 있다.
- ↑ 양정과의 거래를 통해 부여의 교역 문제를 해결하고, 강철검의 제작에 성공했다. 또한 무예에서도 궁술은 밀렸으나, 검술에서는 호각지세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