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3대 왕 유리왕(儒理王) 박유리에 대해서는 유리 이사금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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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 유리명왕(琉璃明王) / 유류왕(儒留王)[1] | |
성 | 고(高) / 해(解) | |
휘 | 유류(儒留) / 유리(榴璃) / 유리(類利) / 유류(孺留) / 누리(累利) / 노려해(奴閭諧) | |
생몰년도 | 음력 | 기원전 38년 ~ 서기 18년 10월 (56세) |
재위기간 | 음력 | 기원전 19년 9월 ~ 서기 18년 10월 (36년 1개월) |
1 소개
고구려의 제 2대 임금.
전해지는 이름엔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 출처는 다음과 같다.
- 유류(儒留): 광개토대왕릉비
- 유리(榴璃):
- 누리(累利): 삼국유사
- 유류(孺留): 삼국사기, 삼국유사
- 유리(類利): 삼국사기
중국측 사서에는 노려해(奴閭諧)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다.[2]
삼국유사 왕력 유리왕 부분에 유리왕이 성은 해씨(解氏)이다.라는 기록도 있다. 동명성왕은 고씨이고, 유리왕은 해씨이므로 동명왕과 유리왕은 혈통이 다르다는 견해가 있다. 이건 해씨 고구려설 참조.
사냥을 좋아했고, 재위 중 한나라, 선비, 부여와 계속해서 대립해온 임금이다. 또한 거의 없는 고구려의 시조 황조가를 지은 사람이기도 하다.
2 부여 시절과 태자 즉위
유리는 주몽이 부여에 있을 시절, 부인 예씨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다. 주몽은 유리가 태어나기 전에 부여를 떠났고, 유리는 아버지 없이 커왔다. 유리는 어렸을 적에는 장난꾸러기였었던것 같은데, 실수로 다른 사람의 항아리를 깨 부수고 그 사람한테 패드립을 먹은 뒤 아버지를 찾고 싶어하게 된다.
유리가 어릴 적에 길거리에서 놀다가 참새를 쏜다는 것이 잘못하여 물을 긷는 부인의 항아리를 깨뜨렸다. 그 부인이 꾸짖어 말하였다.“이 아이가 아비가 없어서 이처럼 노는구나.”
유리는 부끄러워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물었다.
“우리 아버지는 어떤 사람입니까?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어머니가 대답하였다.
“너의 아버지는 비상한 사람이라서 나라에 용납되지 못해서 남쪽 땅으로 도망하여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었다. 아버지가 가실 때 나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아들을 낳으면 내가 남긴 물건이 있는데 그것을 칠각형의 돌 위의 소나무 아래에 감추어 두었다고 말하시오. 만약 이것을 찾는다면 곧 나의 아들일 것이요.’라고 하셨다.”
이후 다들 아는 것처럼 유리는 그 물건을 찾다가 자신의 집 주춧돌 밑에 숨겨저 있다는걸 발견 한 뒤, 동지들과 부왕을 찾아간다.
유리는 이 말을 듣고 산골짜기로 가서 찾았으나 얻지 못하고 지쳐 돌아왔는데, 어느 날 아침 마루 위에 앉아 있다가 기둥과 주춧돌 사이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다가가서 보니 주춧돌이 칠각형이었다. 그는 곧 기둥 아래를 뒤져서 부러진 칼 한 조각을 찾아냈다. 마침내 그것을 가지고 옥지(屋智), 구추(句鄒), 도조(都祖) 등의 세 사람과 함께 떠나 졸본(卒本)에 이르렀다. 부왕을 만나 부러진 칼을 바쳤다. 임금이 자기가 가지고 있던 부러진 칼을 꺼내어 합쳐 보니 이어져 하나의 칼이 되었다. 임금은 기뻐하고 그를 태자로 삼았는데, 이때에 와서 왕위를 잇게 된 것이다.-삼국사기 제13권 고구려본기 제1
동명성왕과 재회한 유리는 자신이 부왕의 아들임을 확인하고 고구려의 태자가 된다.
3 치세
기원전 16년에 왕위에 오른 유리명왕은 재위 2년(기원전 18년) 가을 7월, 다물후(多勿侯) 송양(松讓)의 딸을 왕후로 삼는다.[3]
하지만 재위 3년 10월에 왕후가 죽었고, 임금은 다시 두 여자에게 장가를 들어 후실로 삼았다. 한 사람은 골천 사람 화희(禾姬)고, 다른 한 사람은 한나라 사람 치희(稚姬)다. 어느날, 왕이 사냥을 갔는데 두 여인이 크게 싸워 결국 치희가 돌아가 버린다. 이때 임금이 큰 슬픔을 느끼고 지은 시가 바로 황조가다.
“훨훨 나는 꾀꼬리는 암수가 서로 의지하는데,외로운 이내 몸은 누구와 함께 돌아가랴?”
翩翩黃鳥 雌雄相依 念我之獨 誰其與歸
3.1 외치
유리명왕의 치세동안 고구려는 주변국가와 크고 작은 전쟁들을 벌여왔다. 기원전 9년에 유리명왕은 선비(鮮卑)와의 전쟁을 벌이고 선비를 속국으로 만든다.
재위 11년 여름 4월, 임금은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였다.“선비(鮮卑)는 그들의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우리와 화친하지 않으면서, 이로우면 나와서 노략질하고 불리하면 들어가 지키니 나라의 근심거리로다. 만약 이들을 없애버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장차 그에게 큰 상을 줄 것이다.”
부분노(扶芬奴)가 나와서 말하였다.
“선비는 지세가 험하고 수비가 견고한 나라로, 사람들이 용감하나 어리석습니다. 힘으로 싸우기는 어렵지만 꾀로 굴복시키기는 쉽습니다.”
임금은 말하였다.
“그러면 어찌하면 좋은가?”
부분노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사람을 시켜 배반한 것처럼 해서 저들에게 보내 거짓말을 하되, ‘우리나라는 작고 군대가 약하므로 겁이 많아 움직이기 어렵다.’고 말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선비는 필시 우리를 쉽게 생각해서 대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그 틈을 기다렸다가 정예병을 이끌고 사잇길로 들어가 수풀에 숨어서 그 성을 엿보겠습니다. 이때 임금께서 군사를 그 성 남쪽으로 출동시킨다면 그들이 반드시 성을 비우고 멀리 쫓아올 것입니다. 그러면 신은 정예병을 이끌고 그 성으로 달려 들어가고, 임금께서는 친히 용감한 기병을 거느리고 양쪽에서 협공을 한다면 이길 수 있습니다.”
임금은 그 의견에 따랐다. 선비는 과연 문을 열고 군대를 출동시켜 뒤쫓았다. 이때 부분노는 군사를 거느리고 그 성으로 들어가니 선비가 그것을 보고 크게 놀라 되돌아 달려 들어왔다. 부분노는 성문을 지키며 막아 싸워 수많은 선비들의 목을 베어 죽였다. 임금은 깃발을 들고 북을 울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선비가 앞뒤로 적을 맞게 되자 계책이 없고 힘이 다해 항복하여 속국이 되었다. 임금은 부분노의 공을 생각하여 식읍을 상으로 주었으나, 부분노는 사양하면서 말하였다.
“이것은 임금의 덕입니다. 신에게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
그는 결국 받지 않았다. 그래서 임금은 황금 30근과 좋은 말 10필을 내려주었다.
十一年 夏四月 王謂群臣曰 鮮卑恃險 不我和親 利則出抄 不利則入守 爲國之患 若有人能折此者 我將重賞之 扶芬奴進曰 鮮卑險固之國 人勇而愚 難以力鬪 易以謀屈 王曰 然則爲之奈何 答曰 宜使人反間入彼 僞說 我國小而兵弱 怯而難動 則鮮卑必易我 不爲之備 臣俟其隙 率精兵從間路 依山林以望其城 王使以羸兵出其城南 彼必空城而遠追之 臣以精兵走入其城 王親率勇騎挾擊之 則可克矣 王從之 鮮卑果開門出兵追之 扶芬奴將兵走入其城 鮮卑望之 大驚還奔 扶芬奴當關拒戰 斬殺甚多 王擧旗鳴鼓而前 鮮卑首尾受敵 計窮力屈 降爲屬國 王念扶芬奴功 賞以食邑 辭曰 此王之德也 臣何功焉 遂不受 王乃賜黃金三十斤 良馬一十匹
한나라와도 불편한 사이를 유지했는데, 신나라를 세운 왕망이 강제로 고구려의 군사를 징발해 가려 하고 또 우리 측 장수를 죽이자 유리명왕은 한나라를 공격함으로서 대응했고 결국 양국의 관계는 파탄이 난다.
재위 31년(서기 12) 한나라의 왕망(王莽)이 우리 병사를 징발하여 흉노를 치게 하였다. 우리 병사들이 가려고 하지 않자 왕망이 강제로 보내니, 모두 변방으로 도망쳐 법을 어기고 재물을 약탈하는 도적이 되었다. 요서(遼西) 대윤(大尹) 전담(田譚)이 추격하다가 죽임을 당하자 한나라의 주(州)ㆍ군(郡)에서는 잘못을 우리에게 돌렸다. 엄우(嚴尤)가 왕망에게 아뢰어 말하였다.“맥인(貊人)이 법을 어겼으나 마땅히 주ㆍ군에게 그들을 위로하고 안도하게 하여야 합니다. 지금 그들에게 함부로 큰 죄를 씌우면 마침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렵습니다. 부여의 무리 중에 반드시 응하여 따르는 자들이 있을 것인데, 우리가 흉노를 아직 이기지 못한 터에 부여와 예맥이 다시 일어난다면 이것은 큰 걱정거리입니다.”
왕망은 이를 듣지 않고 엄우에게 공격을 명하였다. 엄우가 우리 장수 연비(延丕)를 유인하여 머리를 베어서 서울로 보냈다.[『한서(漢書)』와 『남북사(南北史)』에서는 모두 ‘구려후(句麗侯) 추(騶)를 유인하여 목을 베었다.’고 이른다.] 왕망이 기뻐하며 우리 왕을 하구려후(下句麗侯)라고 고쳐 부르고, 이를 천하에 포고하여 모두 알게 하였다. 이로부터 고구려는 한나라 변경 지방을 침범하는 일이 더욱 심해졌다.
三十一年 漢王莽發我兵 伐胡 吾人不欲行 强迫遣之 皆亡出塞 因犯法爲寇 遼西大尹田譚追擊之 爲所殺 州郡歸咎於我 嚴尤奏言 貊人犯法 宜令州郡 且慰安之 今猥被以大罪 恐其遂叛 扶餘之屬 必有和者 匈奴未克 扶餘 穢貊復起 此大憂也 王莽不聽 詔尤擊之 尤誘我將延丕 斬之 傳首京師[兩漢書及南北史皆云 誘句麗侯騶斬之] 莽悅之 更名吾王爲下句麗侯 布告天下 令咸知焉 於是 寇漢邊地 愈甚
재위 33년 가을 8월, 임금은 오이(鳥伊)와 마리(摩離)에게 명하여 병사 2만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양맥(梁貊)을 정벌하여 그 나라를 멸망시켰다. 계속 진군하여 한나라의 고구려현[4]을 습격하여 빼앗도록 하였다.三十三年 秋八月 王命烏伊 摩離 領兵二萬 西伐梁貊 滅其國 進兵襲取漢高句麗縣[縣屬玄菟郡]
유리명왕의 치세 동안 고구려는 부여와도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당시 고구려와 부여의 관계는 고구려가 많이 밀리는 편이었다. 유리왕 때의 고구려는 부여보다 약했기 때문이다. 부여는 고구려를 공격하기도 하고 인질을 요구하는 등 계속 압박해왔고, 이런 불편한 관계는 나중에 대무신왕이 부여왕 대소를 죽이면서 끝난다.
14년(기원전 6) 봄 정월, 부여왕 대소(帶素)가 사신을 보내 문안하고 인질 교환을 청하였다. 임금은 부여가 강대한 것을 꺼리며 태자 도절(都切)을 인질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도절이 두려워하여 가지 않자 대소가 화를 냈다.十四年 春正月 扶餘王帶素遣使來聘 請交質子 王憚扶餘强大 欲以太子都切爲質 都切恐不行帶素恚之
겨울 11월, 대소가 군사 5만을 이끌고 침략하여 왔으나 큰 눈이 내려 사람들이 많이 얼어 죽자 곧 돌아갔다.冬十一月 帶素以兵五萬來侵 大雪人多凍死 乃去
32년(서기 13) 겨울 11월, 부여 사람들이 침입하자 임금은 아들 무휼을 시켜 군대를 통솔하여 막게 하였다. 무휼은 병사가 적어서 대적할 수 없을까 걱정하여 기이한 계책을 썼는데,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산골짜기에 숨어 기다리는 것이었다. 부여 병사들이 곧바로 학반령(鶴盤嶺) 아래에 이르자 숨어있던 병사들을 출동시켜 불의에 공격하니, 부여군이 크게 패하여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무휼은 병사를 풀어 그들을 모두 죽였다.三十二年 冬十一月 扶餘人來侵 王使子無恤 率師禦之 無恤以兵小 恐不能敵 設奇計 親率軍 伏于山谷以待之 扶餘兵直至鶴盤嶺下 伏兵發 擊其不意 扶餘軍大敗 棄馬登山 無恤縱兵盡殺之
3.2 내정
태자가 두번이나 바뀌고, 아들을 자결시키고, 신하와 불화를 일으키는 등 전체적으로 유리명왕의 치세는 많이 혼란스러웠는데 이는 아직 강성하지 못한 고구려의 국력때문이기도 했고 또 유리명왕 본인의 잘못이기도 하였으며, 고구려 지배층의 분열 때문이기도 하였다.
19년(기원전 1) 가을 8월, 교제[5]를 지낼 때 쓸 돼지가 달아났다. 임금은 탁리(託利)와 사비(斯卑)를 시켜 쫓게 하였다. 그들은 장옥(長屋) 늪 가운데 이르러 돼지를 발견하고 칼로 그 다리의 힘줄을 끊었다. 임금이 이것을 듣고 노하여 말하였다.“하늘에 제사 지낼 제물에 어떻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가?”
임금은 마침내 두 사람을 구덩이 속에 던져 죽였다.
9월, 임금이 병에 걸렸다. 무당이 말하였다.
“탁리와 사비가 빌미가 되었다.”
임금이 그를 시켜 귀신에게 사죄하게 하니 곧 병이 나았다.
十九年 秋八月 郊豕逸 王使託利 斯卑追之 至長屋澤中得之 以刀斷其脚筋 王聞之怒曰 祭天之牲 豈可傷也 遂投二人坑中殺之 九月 王疾病 巫曰 託利 斯卑爲祟 王使謝之 卽愈
12월, 임금이 질산(質山) 북쪽에서 사냥하면서 5일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대보(大輔) 협보(陜父)가 간하여 말하였다.“임금께서 새로 도읍을 옮겨 백성들이 아직 안정되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부지런히 힘쓰고 치안 관련의 행정을 돌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말을 달려 사냥을 가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습니다. 만약 임금께서 잘못을 고쳐 자신을 새롭게 하지 않는다면, 저는 정치는 황폐하고 백성들은 흩어져서 선왕의 업적이 땅에 떨어질까 두렵습니다.”
임금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협보의 관직을 파면하고, 그에게 관청의 동산을 맡아보게 하였다. 협보는 분개하여 남한(南韓)으로 가버렸다.
二十二年 冬十月 王遷都於國內 築尉那巖城 十二月 王田于質山陰 五日不返 大輔陜父諫曰 王新移都邑 民不安堵 宜孜孜焉 刑政之是恤 而不念此 馳騁田獵 久而不返 若不改過自新 臣恐政荒民散 先王之業 墜地 王聞之 震怒 罷陜父職 俾司官園 陜父憤去之南韓
개국공신인 협보가 내쫓긴 것은 액면 그대로 유리명왕의 실수 때문일수도 있지만 고구려 지배층들 사이에 불화가 생기고 있다는 뜻일수도 있다.
유리명왕은 썩 좋은 아버지는 아닌 듯 한데, 첫번째 태자 도절이 죽어 아들 해명(解明)을 태자로 세웠으나 해명이 황룡국왕이 보낸 활을 바로 부숴버리며 황룡국왕을 부끄럽게 하자 분노하여 바로 그를 자결시킨다.[6] 비록 해명의 행위가 의도가 어쨌든 그가 한 국가원수가 보낸 선물을 바로 부숴버리는건 잘못되었으나, 그렇다고 하여 아들을 매몰차게 죽여 버린 아버지의 잘못 역시 크다 하는 사람들도 있다.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이를 두고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잘못했다며 비판했다.
사관이 논평한다.효자가 부모를 섬길 때는 마땅히 곁을 떠나지 않고 효를 다하여야 하는데, 문왕(文王)이 세자였을 때와 같이 하여야 한다. 해명이 따로 떨어진 도읍에 있으면서 용맹한 것을 좋아한 것으로 이름났으니 죄를 얻게 된 것은 당연하다. 또 전하여 오는 말에 ‘자식을 사랑하거든 의로운 방도로 가르쳐서, 사악한 길로 들어가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지금 임금은 처음부터 미리 가르치지 않다가 죄악을 짓게 되자 몹시 미워하여 죽이고 말았다. 이는 아비가 아비답지 못하였고 자식이 자식답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論曰 孝子之事親也 當不離左右以致孝 若文王之爲世子 解明在於別都 以好勇聞 其於得罪也 宜矣 又聞之 傳曰 愛子敎之以義方 弗納於邪 今王 始未嘗敎之 及其惡成 疾之已甚 殺之而後已 可謂父不父 子不子矣
4 최후
서기 18년, 재위 37년이 되던 해 4월에 유리왕이 총애하던 육남 여진(如津)이 물에 빠져 죽었고, 그에 왕은 애통해하며 사람을 시켜 시체를 찾으려 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이후에 다른 사람이 시체를 찾아냈고, 그에게 상을 준다.
여진의 죽음에 의한 충격 때문인지 1년도 안되서 두곡의 이궁에서 승하한다. 향년 56세. 두곡의 동원에 장사지내고 시호를 유리명왕(瑠璃明王)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5 평가
사냥을 지나치게 좋아했었던 듯 하고 또 자식에게는 좋은 아버지가 되진 못했으나, 빠르게 국내로 수도를 옮기거나 선비, 한나라와 같은 고구려의 적들을 과감하게 공격하고, 부여의 강성함을 알고 무리하게 공격을 시도하지 않는 등 정확한 결단을 내릴 수 있던 장점과 단점이 뚜렷한 임금이었던 것 같다.
사족으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민중왕은 유리명왕의 아들이고, 태조대왕은 유리명왕의 손자다. 이게 일반적인 사실로 알러져 있지만, 둘 다 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각 문서 참고.
6 삼국사기 기록
一年 유리명왕이 즉위하다
二年秋七月 왕후를 맞아들이다
二年秋九月 노루를 잡다
二年冬十月 신기한 참새가 궁궐에 모이다
二年冬十月 온조가 백제를 건국하다
三年秋七月 골천에 별궁을 짓다
三年冬十月 왕비 송씨가 죽어 새로 두 여인과 결혼하다
十一年夏四月 부분노의 계책으로 선비를 굴복시키다
十三年春一月 화성의 위치를 관찰하다
十四年春一月 부여가 인질 교환을 요청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다
十四年冬十一月 큰 눈으로 부여의 공격이 실패하다
十九年秋八月 제천용 돼지가 달아나다
十九年秋九月 질병에 걸리다
二十年春一月 태자 도절이 죽다
二十一年春三月 설지가 국내성으로 천도를 건의하다
二十一年夏四月 사냥을 하다
二十一年秋八月 지진이 일어나다
二十一年秋九月 국내성 지역에 가서 지세를 돌아보다
二十二年冬十月 국내성으로 천도하다
二十二年冬十二月 협보가 왕이 정치에 힘쓸 것을 건의하다
二十三年春二月 왕자 해명을 태자로 삼다
二十四年秋九月 날개가 있는 사람을 조정에 등용하고 우씨 성을 주다
二十七年春一月 황룡국왕이 보낸 활을 태자 해명이 부러뜨리다
二十七年春三月 태자가 황룡국왕을 만나고 돌아오다
二十八年春三月 왕의 명으로 태자 해명이 자살하다
二十八年秋八月 부여를 섬기라는 요구를 거절하다
二十九年夏六月 검은 개구리와 흰 개구리가 싸우다
二十九年秋七月 두곡에 별궁을 짓다
三十一年 왕망이 하구려후라 부르다
三十二年冬十一月 왕자 무휼이 부여의 침략을 물리치다
三十三年春一月 왕자 무휼을 태자로 삼다
三十三年秋八月 양맥과 한의 고구려현을 정복하다
三十七年夏四月 왕자 여진이 죽다
三十七年秋七月 별궁이 있는 두곡에 행차하다
三十七年秋冬十月 유리왕이 죽다
7 매체에서의 유리왕
- MBC 사극 주몽에서는 아역시절에 정윤석, 소년시절에 안용준이 역을 맡았다. 부여궁에서 도망쳐 나와 어머니 예부인과 개고생 하는 모습이 절절하게 나온다. 아버지를 원망했지만 실제로 찾아다녔다는 걸 알고 원망을 푼다.
- KBS 사극 바람의 나라에서는 정진영이 맡았다. 국력이 시원찮은 바람에 딸네미를 정략혼으로 보내고 아들네미 무휼은 저주받은 아이라 하여 죽은 걸로 위장해서 숨기고, 장남은 외교문제로 자결하고, 심지어 본인은 배신자인 배극의 칼을 맞고 죽으니... 그야 말로 비운의 아버지 역이다.
- KBS 사극 근초고왕에서는 백제 창건에 대해 다뤄질 때 부친을 찾아와 태자로 책봉받는 장면으로 잠깐 나왔다. 소서노가 "당신 아들은 부여궁에서 호의호식 할 동안 우리 아들은 칼침맞고 화살맞고 사선을 넘었음!"...이라며 폭발할때 대꾸조차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