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서노

召西奴

(기원전 66 ~ 기원전 6)[1]

1 개요

고구려를 건국한 추모성왕의 아내이며, 또한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어머니이기도 하다.

한국사에서 보기 드문 희대의 여걸로, 고구려와 백제 등 두 나라의 건국에 기여하여 한국 고대사에 큰 영향을 남긴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남아있는 소서노에 대한 기록은 양이 적을 뿐더러 그 내용조차 엉망인지라 두서가 없고 상당히 뒤죽박죽하다. 때문에 남아있는 기록만으로는 소서노의 삶에 대해서 자세히 알기는 힘들다.[2]

이처럼 사서에서는 기록이 적어서 어떤 인물이었는지 알기 어렵다. 그래서 고구려백제의 건국에 관여한 역사의 위인임에도 불구하고 남성우월주의 사회의 영향으로 인하여 역사 속에서 매장당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2 생애

2.1 출신과 초기일생

삼국사기 온조왕 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추모성왕이 처음 부여에서 도망쳐나와 졸본에 이르어서 졸본왕의 3명의 딸 중 차녀와 결혼했다가 졸본왕이 죽자 왕위를 이었고 그 사이에 온조와 비류를 낳았다. 이게 온조를 백제의 시조로 하는 건국신화이다. 여기서는 소서노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같은 온조왕 본기에 실린 또다른 기록에 따르면 소서노는 졸본 사람인 연타발(延陀勃)[3]의 딸로, 추모성왕과 결혼하기 이전에 북부여의 왕 해부루의 아들인 우태(優台)와 혼인하였다고 한다.

이때 소서노는 두 아들인 온조와 비류를 얻었다. 그러나 남편 우태가 일찍 죽는 바람에 과부가 된 소서노는 졸본으로 돌아와 살았다. 즉 이 기록에 따르면 본래 온조와 비류는 동명성왕의 아들이 아닌 우태의 아들인 것이다.

또다른 기록에는 주몽이 졸본에 이르어 월군녀를 아내로 삼아 두 아들을 얻었다고도 하였는데 무엇이 사실인지는 알기 힘들다.

그리고 한국사에서 무시당하고 있는 삼국사기 3번째 건국설[4]에 따르면, 대방고지에서 일어난 구태가 한나라 요동태수 공손도의 딸과 결혼하여 백제를 건국했다고 기록되고 있다. 본래 백제는 동명성왕을 시조신으로 모셔 제사지냈으나 후기로 넘어가면서 시조신을 구태(仇台)로 바꾸었는데 사실 이 구태가 우태와 동일인물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문제는 이 제3의 건국자가 사서에서는 부여왕 위구태尉仇台라는 것이다. 이는 백제가 성왕시대 남부여를 자칭하면서 부여와의 연결고리를 강조한 결과물로 추정되거나 혹은 중시조인 고이왕을 강조한 것으로 보는데, 이러면 문제는 소서노와 결혼한 우태의 정체가 확실해지는 대신에 소서노의 의미가 이상해진다. 중국 쪽 사서의 인용이라는 점에서 이쪽 건국설에 대한 연구는 좀 빈약한 편.

2.2 추모성왕과 혼인하다

이후 부여에서 대소왕의 위협으로부터 도망쳐 나온 추모성왕이 기원전 37년 2월에 졸본 남쪽에 도읍을 정하고 고구려를 건국하자 소서노는 추모성왕과 혼인하게 되었다.

소서노는 추모성왕이 처음 고구려를 건국하고 창업의 기반을 열 때 내조하며 이를 도왔다. 같은 기록에서 온조와 비류가 나눈 대화에 따르면 소서노의 집안에는 많은 재물이 있었는데 이를 이용해 고구려의 건국에 크게 기여한 듯 하다. 이 때문에 동명성왕은 소서노를 극진히 아껴주며 후히 대접하였고, 그녀의 두 아들이었던 온조와 비류 또한 친자식처럼 아꼈다.

그러나 이후 기원전 19년 4월에 부여에 남겨두고 왔던 아내인 예씨의 아들인 유리명왕이 찾아 오자 추모성왕은 결국 유리명왕을 태자로 삼고 왕위를 물려주게 되었다.

2.3 백제를 건국하다

왕위를 유리명왕에게 빼앗기고 하루아침에 버림받은 신세가 된 비류와 온조는 절망에 빠졌다. 게다가 그해에 동명성왕이 죽으니 소서노와 비류, 온조 등은 순식간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 더이상 고구려에서 세력을 뻗칠 수 없는 기경에 이르었다.

이후 비류와 온조는 서로 의논한 끝에 어머니 소서노를 모시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두 강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갔다. 이후 맏아들인 비류는 미추홀(彌鄒忽)에 이르러 도읍을 정했다가 망했어요 둘째인 온조는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를 건국하니 그가 바로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이었다.

2.4 죽음과 사후

이후의 소서노의 행적은 알 수 없다. 온조왕 본기에 따르면 이후 기원전 6년(온조왕 13년) 2월에 호랑이 5마리가 도성안으로 들어오더니 왕의 어머니가 61세의 나이로 죽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 '왕의 어머니'가 소서노가 맞다면 기원전 6년에 죽은 셈이다.

그해 5월에 온조왕은 백제의 동, 서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늘 강토를 침략하므로 편안한 날이 없고 더욱이 최근에 요망한 징조가 여러번 나타나고 국모(國母)가 돌아가시는 등 정세가 불안하다며 도읍을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이후 기원전 2년 4월에 온조왕은 묘사(廟社)를 세우고 국모를 제사지냈다.

3 관련 기록

다른 기록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주몽은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그 왕에게 아들이 없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범상치 않은 사람인 것을 알고 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왕이 죽자 주몽은 왕위를 이었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동명성왕 원년 출처

백제(百濟)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은 그 아버지는 추모(鄒牟)인데 혹은 주몽(朱蒙)이라고도 하였다. 주몽은 북부여(北扶餘)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다. 부여 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혹은 『주몽이 졸본에 도착하여 월군(越郡)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하였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 유류(孺留)가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 마침내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10명의 신하와 더불어 남쪽으로 갔는데 백성들이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들은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가 살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고자 하니 열 명의 신하가 간하였다.
"이 강 남쪽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를 띠처럼 띠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으니 이렇게 하늘이 내려 준 험준함과 지세의 이점(天險地利)은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여기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鄒忽)로 돌아가 살았다. 온조는 하남 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10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이 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기원전 18)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 없어서 위례(慰禮)에 돌아와보니 도읍은 안정되고 백성들도 평안하므로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가 죽으니,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에 귀부(歸附)하였다. 그 후 처음 올 때 백성(百姓)들이 즐겨 따랐다(百姓樂從)고 하여 국호를 백제(百濟)로 고쳤다. 그 계통(世系)은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扶餘)에서 같이 나왔기 때문에 부여(扶餘)를 씨(氏)로 삼았다.
-삼국사기:백제본기:온조왕 원년 출처

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조 비류왕(沸流王)은 그 아버지는 우태(優台)로 북부여 왕(北夫餘王) 해부루(解夫婁)의 서손(庶孫)이었고,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로 졸본(卒本) 사람 연타발(延陀勃)의 딸이었다. 소서노는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은 비류라 하였고 둘째는 온조라 하였다.
우태가 죽자 소서노는 졸본에서 과부로 지냈다. 뒤에 주몽이 부여(扶餘)에서 용납되지 못하자 전한(前漢) 건소(建昭) 2년(기원전 37)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소서노를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주몽은 그녀가 나라를 창업하는 데 잘 도와주었기 때문에 그녀를 총애하고 대접하는 것이 특히 후하였고, 비류 등을 자기 자식처럼 대하였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에게서 낳은 아들 유류(孺留)가 오자 그를 태자로 삼았고, 왕위를 잇기에 이르렀다. 이에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말하였다.
"처음 대왕이 부여에서의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도망하여 오자 우리 어머니께서 재산을 기울여 나라를 세우는 것을 도와 애쓰고 노력함이 많았다. 대왕이 세상을 떠나시고 나라가 유류(孺留)에게 속하게 되었으니, 우리들은 그저 군더더기 살(疣贅)처럼 답답하게 여기에 남아 있는 것은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땅을 택하여 따로 도읍을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
드디어 동생과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두 강을 건너 미추홀(彌鄒忽)에 이르러 살았다.』
-삼국사기:백제본기:온조왕 원년 출처

3.1 기록의 문제점

고구려 본기의 기록은 간략하며, 백제본기의 소서노에 대한 언급도 간략하다.

'소서노'라는 이름이 등장하고 그녀에 대한 기록이 그나마 가장 자세한 것은 백제본기에 "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로서 인용되는 수수께끼의 문서다.

이 두 기록은 다음과 같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1. 비류, 온조 형제의 혈통이 다르다.

백제본기는 비류와 온조가 모두 주몽의 아들이라고 기록한다.
소서노가 언급된 문헌에서는 비류와 온조가 북부여 왕 해부루의 서손인 우태의 아들이며, 주몽은 양아버지일 뿐이라고 기록한다.

2. 백제본기는 온조를 시조왕으로 기록한다.

소서노가 언급된 문헌에서는 비류를 시조왕으로 기록한다.

3. 백제본기에는 10명의 신하가 언급되며, 도읍을 정하는데 그들의 발언이 기록되는 만큼 그들의 비중이 크다.

소서노가 언급된 문헌에서는 남하를 주도하는 것은 비류로 되어 있으며, 10명의 신하는 언급되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비류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 백제본기는 소서노의 이름도 기록되지 않으며, 그녀는 단순히 졸본부여의 왕으로부터 주몽으로 왕권을 이어주는 매개체로만 등장한다.

소서노가 언급된 문헌에서는 소서노가 자신의 재산을 이용해 주몽이 나라를 세우는 것을 도왔다고 하여 실질적인 역할을 가진 인물임을 강조한다.

5. 백제본기는 형제의 남하 시점이 아직 주몽이 왕이고 유류가 태자가 되었을 때라고 서술한다.

소서노가 언급된 문헌에서는 남하 시점이 주몽이 죽고 유류가 왕위를 계승한 이후의 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6. 백제본기는 형제의 남하만을 언급한다. 다만 이후에 '왕의 어머니'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 만큼 함께 남하했다고 추측할 수는 있다.

소서노가 언급된 문헌에서는 형제와 함께 소서노도 남하했다고 명시적으로 언급한다.

적어도 삼국사기가 기록될 무렵에는 백제 초기에 대해서 상당한 견해 차이가 있는 두 종류의 문헌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전반적으로 전자의 문헌은 온조와 10명의 신하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으며, 후자의 문헌은 비류와 소서노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시조설화의 차이에 근거하여 일부 사학자들은 백제의 건국집단을 2개 이상으로 가정하기도 하며, 극단적인 경우 비류를 시조로 하는 별개의 국가(비류백제라고 가칭됨)가 존재했을 것이라는 가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3.2 죽음

13년(서기전 6) 봄 2월에 서울[王都]에서 늙은 할멈[老嫗]이 남자로 변하였고, 5마리의 범이 성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죽었는데 나이가 61세였다. 여름 5월에 왕이 신하에게 말하였다.

“우리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영토를 침략하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 하물며 이즈음 요망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국모(國母)가 돌아가시니 형세가 스스로 편안할 수 없도다. 장차 꼭 도읍을 옮겨야 하겠다. 내가 어제 순행을 나가 한수(漢水) 남쪽을 보니 땅이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곳에 도읍을 정하여 길이 편안할 수 있는 계책을 도모하여야 하겠다.”
가을 7월에 한산(漢山) 아래로 나아가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들을 옮겼다. 8월에 사신을 마한에 보내 도읍을 옮긴 것을 알리고 마침내 강역을 구획하여 정하였는데 북쪽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렀고, 남쪽으로는 웅천(熊川)을 경계로 하였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고,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다. 9월에 궁성과 대궐을 세웠다.
삼국사기:백제본기:온조왕(13년)출처

일부에서는 "늙은 할멈이 남자로 변하였다."를 늙은 할멈=왕의 어머니=소서노로 보고 남자로 변하였다=남자의 영역, 즉 권력을 차지했다로 보아 소서노가 실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고 보기도 한다. "5마리의 범이 성안으로 들어왔다."는 정변이나 쿠데타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고, 그래서 이 기록을 온조왕 측과 대립하던 소서노가 온조왕 측에 의해 살해당한 것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만, 어디까지나 근거가 없는 상상의 영역.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이런 생각도 더러들 하나보다...' 하는 식으로 이해하도록 하자.

4 대중 매체에서의 모습

최근의 여러 역사 소설에서는 막강한 재력을 갖추고 있어서, 고구려 건국에 막대한 공을 세웠다고 설정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삼국사기에서 비류가 "우리 어머니께서 재산을 기울여 나라를 세우는 것을 도와 애쓰고 노력함이 많았다."고 말한 것에 바탕을 둔 것으로, 극단적인 경우 고주몽은 바지사장일 뿐이고, 실질적으로 소서노가 여왕이었다고 주장하는 경우까지 발견할 수 있다.

다만 이런 해석의 논리적인 오류로는, "소서노 집단"이 그 정도로 강력한 세력이었다면 밀려날 이유가 없다는 점일 것이다. 대체로 소설 등에서는 쓸데없는 다툼을 피하기 위해 대인배인 소서노가 물러났다는 식으로 극히 미화하지만.

물론 유류왕이 전(前) 비류국왕이었던 다물도주 송양의 딸과 혼인하여 그 쪽의 후원을 받았을 가능성은 있으며, 추모왕의 정복사업 결과 고구려의 영토가 팽창하여 상대적으로 유류왕 시대에 본래의 "소서노 집단"은 그 세력이 미약해졌을 가능성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성향을 가진 작가들이 쓰는 소설에서는 주몽(추모왕)이나 유류왕의 비중을 깎아내리고 때로는 악당급으로 묘사하기 일수인데 특히 유류왕은 완전히 악당화 시킨다.

MBC 판타지 사극 주몽에선 연예인 한혜진이 연기했다. 일본에서 주몽의 소서노 담당 성우는 사카모토 마아야. 참고로 주몽 담당 성우는 미야노 마모루.오란고교 고구려부 여기서는 마지막에 유리와 예씨 부인을 위해 스스로 황후 자리에서 물러나 남쪽으로 떠난다.고구려 편향

KBS사극 근초고왕에서는 정애리가 주몽 역의 이덕화와 함께 특별출연하였다.
건국 초기까지만 해도 사이가 좋았지만, 유리가 부여에서 귀환하자 후계자 문제로 대립한다. 주몽이 유리를 태자로 삼으려하는 찰나, 책봉식장에 난입해 주몽이 유리에게 건네준 활을 빼앗아 바닥에 던져버리고 비류와 온조의 웃옷을 벗겨 전장에서 얻은 상처를 보여주며 주몽에게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삼으라고 요구하지만 주몽은 오히려 소서노에게 파혼을 선언하며 혼인 예물을 바닥에 던져 박살을 내버린다(...) 이에 질세라 소서노도 주몽이 자신에게 준 혼인예물을 내팽개쳐버리고 주몽과 유리에게 자신의 후손들이 반드시 당신들의 고구려를 짓밟고 일어설것이라 차갑게 내뱉고는 자신이 거느리는 소노부의 신하들과 백성들을 데리고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한다. 여러모로 MBC의 주몽의 소서노와 대조되는 모습이다. 백제 편향

  1. 다만 이 생몰년대는 온조왕 13년에 죽은 '왕의 어머니'가 소서노 본인이 맞을 경우를 가정한 것이다.
  2. 보다 자세한 내용은 삼국사기나 저자 김부식 항목을 참조 할 것.
  3. 혹은 연타취발
  4. 수서와 북사를 인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