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광제

남명의 역대 황제
17대 의종 숭정제 주유검18대 안종 홍광제 주유숭19대 소종 융무제 주율건
비정통 의종 주이해
묘호안종(安宗)
시호처천승도성경영철찬문비무선인광효간황제
(處天承道誠敬英哲纘文備武宣仁度孝簡皇帝)
연호홍광(弘光)
주(朱)
유숭(由崧)
생몰기간1607년 ~ 1646년
재위기간1644년 ~ 1645년

1 개요

남명의 초대 황제로 재위 기간은 1644년~1645년이다. 명나라 전체는 제18대 황제이며 묘호안종(安宗), 시호는 처천승도성경영철찬문비무선인광효간황제(處天承道誠敬英哲纘文備武宣仁度孝簡皇帝)이다. 연호가 홍광(弘光)이라 홍광제(弘光帝)라고 부른다.

만력제의 손자이자 복왕 주상순장남이며 숭정제사촌이다. 아버지 주상순은 만력제의 서자였으나, 그의 모친 정귀비를 총애하던 만력제는 태창제가 되는 장남 주상락을 제치고 주상순을 황태자로 세우려 했다. 그러나 신하들의 반대로 실패으며 그래도 복왕에 책봉되어 호화롭게 살았다. 그러나 1641년 이자성의 농민군이 영지인 낙양에 쳐들어왔을 때 무방비로 있다가 사로잡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이 때 주유숭은 어머니 추씨와 함께 극적으로 남쪽으로 피신하여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2 제위

그는 명나라가 망하자 명나라의 부흥을 선언하고 남쪽으로 가서 남명을 세웠다. 그는 정치적인 능력이 무능했으나, 단지 황족 생존자 중 서열이 높고 연령이 고령이라는 점이 감안되어 황제로 옹립되었다. 원래 숭정제의 황태자 주자랑이 있었으나, 이자성의 난 때 실종되었다가 전란 중에 살해되었다.[1] 어쨌든 주자랑이 부재한 상태이므로 홍광제는 일단 감국으로 있다가 머지않아 정식으로 즉위했다.

일부 신하들은 그가 인간적인 결함 7가지가 있다는 이유로 반대했으나, 그가 남경에 왔을 때 낡고 더러운 각건을 쓰고 부채를 부치는 모습이 마치 검소한 시골 부자 정도로만 보였다. 주유숭은 제위에 오르고 남경을 수도로 정했으며 관직 정비도 했지만 바로 본색을 드러냈다. 재위 기간 1년 내내 사치와 향락만 부렸으며 후궁들을 뽑는데 열을 올렸다. 그는 숭정제에게 의종이란 시호를 추서하고 그의 아들이자 황태자였던 주자랑에게도 도황제라는 시호를 추서하였으며 아버지 주상순도 공종(恭宗) 공황제(恭皇帝)로 추존하고 능호는 희릉(熙陵)이라 하였다. 뒤에 부친의 시호를 개시하여 공황제(共皇帝)로 했다가 다시 개시하여 최종적으로 모천수도정순숙철수문현무성경인의효황제(慕天敷道貞純肅哲修文顯武聖敬仁毅孝皇帝)라 하였다. 그러나 신하들은 그를 유비의 아들 유선과 비슷하게 취급하고 무시했다고 한다. 명나라를 멸망으로 몰고 간 동림당은 황제와 훈신들 탓만 하였으나, 홍광제는 피난조정에서 조차 당쟁을 일삼는 동림당원들 역시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1645년 청나라 정벌군과의 교전 중 패주하다 청나라로 투항한 황득공의 부하 장군 전유승(田維乘)과 마득공 등에게 체포되어 북경으로 압송되었다. 마침 남경이 함락된 이 날이 바로 그가 즉위한지 1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는 모반죄로 감금당했다가 1646년 5월 23일 참수되었다. 정달의 <야사무문>에 의하면 '전유승과 마득공은 그를 통나무에 묶어서 끌고갔는데 그는 울면서 살려줄 것을 호소하였으나, 무시당하였다. 화가 난 그는 전웅의 목을 깨물어서 피가 흘렀으나 무용지물이었다' 한다. 1646년 5월 명나라 부흥군은 그에게 성안황제(聖安皇帝)라 시호를 추서하고 묘호를 질종(質宗)이라 하였다. 이에 따라 최종 시호는 질종독천계도장민경숙소문강무혜도의효혁황제(質宗續天繼道莊愍敬肅昭文康武惠悼懿孝赧皇帝)라 하였다. 그 뒤 영력제 주유랑은 다시 묘호를 질종에서 안종(安宗)으로 고치고 시호는 처천승도성경영철찬문비무선인광효간황제(處天承道誠敬英哲纘文備武宣仁度孝簡皇帝)로 개시하였다.

평소에 술을 좋아했는데 재상 유종주는 그에게 술을 끊을 것을 권고했으나, 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황제로 추대되었지만 그는 정치적으로 무능했으며 안목이 좁고 식견이 짧았다는 평가가 있다. 그가 명나라의 부흥을 선언하자 조선의 유학자들은 청나라 연호 대신 그의 연호를 따서 사용하기도 했다.
  1. 이자성이 죽였다는 소리도 있고 남경으로 피난갔다가 정통성 문제를 우려한 홍광제에게 죽음을 당했다는 소리도 있고 전란 중에 피살되었다는 소리 등 말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