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정제

명의 역대 황제
16대 희종 천계제 주유교17대 의종 숭정제 주유검남명 18대 안종 홍광제 주유숭
묘호의종(毅宗) / 사종(思宗) / 위종(威宗) / 회종(懷宗)
시호순천수도경검관문양무체인치효장렬민황제
(順天受道敬儉寬文襄武體仁致孝莊烈愍皇帝)
연호숭정(崇禎)
주(朱)
유검(由檢).
생몰기간1611년 ~ 1644년 (34세)
재위기간1627년 10월 2일 ~ 1644년 4월 25일 (16년 206일)
역대제왕묘 배향자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태창제의 5남으로 천계제의 이복 동생이다.

1 인간상

비록 성질이 급하고 의심이 많고 남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통찰력이 있고, 신중하며, 주도면밀하고 부지런하다는 장점 역시 갖고 있어서 만약 다른 시대에 태어났으면 명군으로 칭송받는 군주가 되었을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결국에는 여러 큰 실책을 범해 명나라의 멸망에 그가 기여한 것도 사실이다.[1] 잘못한 부분이 있으면 바로 모가지가 날아가고 전투에서 패배한 장수가 있으면 바로 목을 베는 등. 하지만 사실 명나라 자체가 이미 막장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고, 그렇게 해야 관리의 기강을 바로 잡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반론도 만만찮다. 사실 이 세상 어느 나라든 만력제나 천계제 같은 무능한 황제들이 연속으로 이 지나간 시대와 비슷한 상황을 거쳤다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2][3] 숭정제 자신의 업무능력과 근면함은 명 역사상 비슷한 황제를 찾아보기가 힘들었을 정도이고 그 정도로 부지런한 황제는 중국사 전체를 통틀어도 별로 많지 않다. 오죽했으면 그의 소매가 다 닳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자기 잘못을 솔직하게 고백하기도 했는데 1637년에 발표한 '죄기조'에서 그는 자신이 다스린 나라의 부패한 현실을 남김없이 솔직하게 지적하고 있다.

"지금 벼슬하는 자들은 오로지 제 몸을 가지고 일을 꾀하는데, 관직을 장사처럼 생각하여 한껏 차지하고도 더 욕심을 부린다. 심지어는 파면을 당하고도 명령을 어기고 마구 긁어모으고 기회만 생기면 배를 채운다. 또 공신이나 척족들도 만족을 모르고 서울과 지역 땅을 탐욕스럽게 사 모은다. 지방관들은 지역 방어의 본분을 잊고 마을을 침탈하는데, 무뢰배들을 수족으로 삼고 간악한 자들을 받아들인다. 못난 관리들은 세력가들이 두려워 꼬리를 치며 아부한다. 악이 쌓여 관아를 좀먹으니 빌미만 생기면 낚아챈다. 오호라! 연약한 백성들이 어찌 편히 발을 뻗고 쉬겠는가!"

그는 불쌍하고도 암울한 말제였을 뿐이었지 능력은 결코 나쁘지 않았다. 형인 천계제와는 달리, 천계제가 동생인 그에 대한 교육에는 꽤 신경을 쓰기도 했다. 이제 막 글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 형 천계제가 황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즉위 초에는 간신들을 제거하기도 했고, 황제 자신이 상업적 수완을 발휘해 수만냥을 국고에 보태기도 했으며, '죄기조'에 따르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내 백성들에게 잠시 1년만 폐를 끼치겠다"며 세금을 올리겠다고 호소하면 모두들 허리띠를 졸라매고 불평불만 없이 묵묵히 받아들였을 정도로 백성들이 숭정제를 믿고 따랐다고 한다. 또, 후금의 침략에 맞서 서양의 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데 힘을 쏟았다.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양식 화기 공장을 설치하기도 했으며, 황제 자신이 직접 아담 샬과 함께 명의 과학기술을 이끌고 있던 서광계에게 서양학 수업을 받기도 했다. 또한 그간 명이 사용해온 역법이 맞지 않는걸 알고 서양식 역법을 도입, '숭정력'을 만들기도 했으나 결국 명의 멸망으로 시행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역법은 청대에 '시헌력'으로 완성되었으므로 아주 헛수고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2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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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결국 이자성의 난으로 수도 북경이 포위되면서 명나라의 몰락을 실감하게 된 숭정제는 조회를 열었다. 그러나 대신들은 자기 살 길을 궁리하거나 도망치는 바람에 아무도 오지 않았다. 결국 자신의 최후를 각오한 그는 자신을 수행하는 환관 왕승은 한 명만을 뒤따르게 하고[4], 자신에 도포에 '짐이 등극한 지 17년, 역적이 경성을 핍박하니 짐의 보잘 것 없음과 박덕함을 하늘조차 꾸짖는구나. 선조들이 이룩한 나라를 내가 부덕하여 이런 지경으로 이끌었으니 죽어 지하에서 조상을 뵐 면목이 없으니 짐의 의관을 벗겨 얼굴을 가려라, 명의 백성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명에 대한 그대들의 분노는 나의 시체에만 풀어주길 바란다'는 글을 남기고 회나무에 목을 매 자살했다.[5] 이때 자신을 따르던 환관 왕승은도 같은 방식으로 그 뒤의 나무에 목을 매달고 자살했다. 이때 그의 황후 주씨도 자결했는데 북경에 입성한 이자성은 숭정제와 주씨의 합장묘를 만들고 왕승은의 무덤도 만들어 주었다.

숭정제는 자결하기 전에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태자 주자랑을 포함한 세 아들들을 여장을 하고 외갓집 전씨에 가서 숨어 있도록 탈출시켰다.[6] 그의 태자 주자랑은 동생들과 함께 이자성에게 붙잡혀 있다가 전란 중에 모두 살해되었다. 그는 나중에 남명 정권에서 홍광제에 의해 순종 도황제로 추존되었고 그의 부인 태자비 영씨는 살아남아 청나라 예친왕 도르곤에게 바쳐졌으나, 수절했으며 머지않아 병사했다.

3 평가

부국 강병을 추구하기 위해
서양 학문을 용감하게 나라 안으로 들여왔네.
죽는 순간까지 백성을 생각한
그의 유서 한 장이 마음을 깊이 울리는구나!
황제는 신종희종의 뒤를 이어 씩씩하게 일을 해 나갔다.

즉위 초 침착하게 기회를 엿보다 과감하게 홀로 간신배를 제거했고 천하는 평화롭게 다스려지는 듯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대세가 기울고, 만회하기 힘들 정도로 폐단이 쌓여 있었다.
조정에서는 서로 싸웠고, 변방의 장수는 교만하고 병졸들은 게을러 사방에서 문제가 터지고 도적이 만연했다.
그리하여 도저히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썩고 무너졌으니 불행이라고 할 수 밖에!
- 명사 장열제

간단하게 말해서 중국에서 사랑받는 황제 중에서 유일한[7] 망국의 황제. 일반적으로 망국 군주들이 대차게 까이는[8] 중국에서 이례적으로 숭정제는 까이지 않고 광범위하게 동정을 받는다. 북경에 입성한 이자성은 숭정제와 주씨의 무덤을 개장하여 역대 명 황제들의 묘역에 이장했으며 장례까지 황제의 예로 치뤄주고 장렬황제라는 존호까지 내렸다.[9] 숭정제 자체가 암군이 아니었을 뿐더러, 애초에 청군이 북경에 진입한 명분이 "숭정제를 죽게 만든 반란군 수괴 이자성의 목을 따서 중원을 평안케 하겠다!" 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재위 17년은 분명 실책도 있지만, 재위기간 동안 제대로 된 정치를 했기에 만일 국가가 멸망하지 않았더라면 성군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앞에 깔린 전임 황제들이 암군들인지라 나라를 철저하게 망쳐놓았던 탓에 불운한 마지막 황제가 되고 말았다. 시대를 완전 잘못 탔다. 이것이 일반적인 평가. 안습. 또한 가장 오래 사용된 연호를 가진 주인공이기도 하다. 보통 조선에서는 중국 황제의 연호를 사용했는데, 심지어 숭정제가 죽은 뒤 수백 년이 지난 뒤에도 연도를 셀 때 계속해서 숭정이란 연호를 사용했다. 청나라를 인정하지 않고 우리는 여전히 명나라를 받들겠다는 표현. 물론 청나라가 알게 되면 아작내려는 터라 몰래 했지만. 병자호란 이후에 100여년이 지난 18세기까지 숭정 연호를 사용한 비석이나 문집이 발견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숭정 144년(1770) 이런 식. 혹은 60간지를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숭정기원후2경인년은 숭정 원년 이후 두번째 경인년이라는 의미로 똑같이 1770년을 의미한다. 물론 조선 국내에서만 숭정 연호를 쓴 것이고, 청나라로 보내는 국서나, 상황에 따라서 청나라가 볼 가능성이 큰 공문에는 부득이 청나라 연호를 썼다. 그런데 간혹 국내 공문 중에 일부러 받는 사람의 반청 정서를 존중하여 아예 연호를 빼고 간지로만 연도를 표기한 예도 있다. 송시열은 워낙 권위 있던 유학자였기 때문에 국왕이 그에게 보내는 각종 공문에 일부러 (청나라한테 태클 걸릴 위험을 감수하고) 간지만 표기하기도 하였다. 송시열에게 보내는 공문에 청나라 연호가 적혀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송시열 반대파가 정권을 장악한 상황에서 송시열의 의사를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편 지금도 몇몇 전통 있는 집안에서는 숭정 연호를 사용한다고 한다. 비슷하게 일제시대 만든 비석 등에 융희(순종) 연호를 쓰는 경우도 있다.

존경받는 최후의 황제라는 점에서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1세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둘 모두 성군이 될 자질을 갖고 있었지만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

다만 나름대로 열심히 하기는 했으나 성격이 지나치게 의심많고 너그럽지 않았다는 게 큰 문제였다. 숭정제의 재위기간인 17년동안 나라가 막장상황인데도 관리의 실책을 지나칠 정도로 가혹하게 물어 지방 관리 뿐만이 아니라 중앙 정부의 신하들 역시 수시로 갈아 치우거나 죽였다.[10] 이러다보니 신하들이 황제를 두려워하여 따를리가 없었고 아예 청으로 넘어간 사람들도 많았다.[11]

본래 이 항목에는 숭정제가 죽인 총독이 11명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으나 그것은 김용의 <원숭환 평전>에서 나온 것을 답습한 잘못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숭정 연간에 사망한 총독은 정숭검, 원숭환, 유책, 양일붕, 웅문찬, 범지완, 조광변까지 모두 7명이다. 또한 50명의 재상을 갈아치웠다고 하지만 명대 내각에 있던 대학사를 모두 재상으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며 명대에 재상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은 수보(首輔) 뿐이다. 숭정 연간의 수보는 숭정 원년에 임명된 이국부터 북경이 함락되었을 때 사망한 마지막 수보 위조덕까지 해서 모두 18명이다. 또한 온체인이 8년이나 재임한 재상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온체인이 수보로 있던 기간은 1633년부터 1637년까지 모두 4년이다. 그러나 이렇게 수정된 수치를 받아들이더라도 사람을 자주 갈아치우고 많이 죽이는 와중에 무능한 간신인 온체인이 오랫동안 중용되었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게다가 여전히 환관을 신임하여 숭정제가 중용한 환관들의 감시와 횡포로 신하들이 업무를 똑바로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환관을 잘 다루거나 사람 보는 눈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나중에 그가 믿었던 환관들도 숭정제를 배신하고 이자성 편이 되었다.

또한 마지막까지 남경으로 천도하지 않고 북경을 지킨 것에 대해서도, 원래 황태자를 남쪽으로 보내 대비하게 할 생각이 있었지만 당현종처럼 권력을 빼앗길 것을 염려하여 그만두었다고 한다. 어차피 남명도 망했으니 별 차이가 없었을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남명이 무기력하게 무너진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황제가 무능한데다 여러 황제가 병립하며 서로 싸우는 막장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정통성 있고 유능한 황태자가 남명에 합류해서 즉위했을 경우 역사가 달라졌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물론 황태자가 딱히 유능했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평균적으로 보더라도 주유숭보다는 나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어떤 의미로 조선 선조보다 무능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일단 조선 선조는 성격에 문제가 있었지만 사람 보고 다루는 눈 하나는 제대로 된 편이었다. 또한, 이순신을 시기하고 견제를 심하게 하기는 했어도 적어도 이순신을 죽이지는 않았고 나중을 위해 살려는 두는 센스라도 있었다. 반면 숭정제는 인재를 잘 다루기보다 그냥 조인트를 까고 목을 날리는 것이 주였다.

또, 조선 선조가 겪은 왜란은 굳이 선조가 아니라 당시 조선과 일본의 전반적인 국력을 보더라도 확실히 조선이 혼자서 감당하기는 어려운 감이 있었다 볼 수 있지만.[12] 명나라가 처한 청나라 문제와 농민 반란의 경우, 청나라는 절대 자력으로 산해관을 넘지 못했으며, 농민 반란 역시 홍승주 등이 이끄는 진압군 고영상 등을 처형했고, 한 때 이자성의 수하에 7명만 남아 있었을 정도로 전세가 압도적이었다. 거기에 더해 비록 덜 매력적이기는 하나 조선 선조는 적당히 도망을 칠 줄 알아서 수명을 연장한 반면, 숭정제는 남경 등지로 도망을 치지 못했다. 이게 아니라도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고 분조를 나누는 것과 같이 국가의 생명 연장을 위한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으며, 이는 안정적인 미래를 준비하지 못하여 남명 정권 분열과 그에 따른 패망과도 관계가 있다 볼 수 있다. 남명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도망쳐서 후일을 도모 한다면 이 당시의 명나라는 망명해서 남송을 세운 송나라 때보다도 좋은 준비와 조건이 있었다.[13] 결국 이러한 점 때문에 조선 선조는 비록 후대에 들어 가열차게 욕을 들어먹지만 어찌되었던 살아남았으며 왕조를 보존했다. 반면, 숭정제는 사람들의 동정을 샀지만 망국의 군주가 되었다. 상황 판단력과 성과 등을 볼 때 숭정제는 조선 선조보다 그닥 뛰어나다 보기 어렵다.

3.1 원숭환처형 논란

3.1.1 비판

영원성 전투에서 누르하치홍타이지를 물리친 산해관의 명장 원숭환을 청태종의 모함(그리고 내부의 적인 간신 온체인이 개입되어서)에 넘어가서 처형하는 등, 무능한 면모도 자주 보이기 때문에 과연 무작정 옹호할 수 있는가라는 말이 많다. 원숭환을 처형한 것은 특히 대표적인 실책으로 손꼽히며 도광제와 함께 청렴하지만 무능한 군주의 대표 케이스로 까이기도 한다. 혹자는 숭정제가 원숭환을 처형했기 때문에 명나라가 멸망했다고 하는 극단적인 주장을 펴기도 한다. 또는 원숭환의 처형이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더라도 요동 지역에서 명나라가 힘을 못쓰고 결국은 청나라가 산해관을 넘어 들어올 수 있게 만든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원숭환을 능지처참이라는 끔찍한 형벌로 처형하니 원숭환의 부하들이 분노하여 명을 배신하고 청에 투항한다.[14] 이는 산해관을 보호하는 중요한 요새 중 하나인 영원성까지 청나라한테 넘어가니 명의 전력에 큰 타격을 주었다.

3.1.2 반론

그러나 원숭환 처형 건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도 있다. 숭정제는 요동 지역을 지키는 장군으로 간 원숭환과 모문룡 둘에게 황제의 보검인 상방보검을 내려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둘은 사실 상하관계가 없는 황제의 직속 장수로 동급인 관계였다. 그런데 원숭환은 자기 독단적으로 모문룡을 불러들이고 결국 그를 죽여 버렸다. 그러나 자기 부하도 아닌 다른 일군의 장수를 황제의 허락도 없이 죽였다는 것은 팀킬 숭정제 입장에선 황제를 무시한 처사로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15] 더욱이 숭정제도 청태종의 반간계에 넘어갔다고는 해도 원숭환을 바로 처단한 것도 아니었고 몇 개월 지켜보다가 참형에 처했다. 이런 이유로 원숭환 처형 건은 숭정제의 잘못 이전에 원숭환이 먼저 화를 자초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또한 원숭환청태종의 반간계에 의한 것인지 그 근거 역시 분명하지 않다. 원숭환의 죽음은 어디까지나 모문룡의 죽음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지 그 뒤에 청태종이 있다는 주장은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뒤에서야 나온 것이다. 그리고 원숭환이 죽은 다음에 14년이나 지난 뒤에 명나라가 멸망했는데, 원숭환이 죽어서 명나라가 멸망당했다고 한다면 원숭환이 2년 수비한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고[16] 그 뒤에 멀쩡히 잘 버틴 14년의 무게는 너무 가볍게 보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숭정제 혼자에게 잘못을 묻는 것 보다는 당대 명나라의 문화를 짚고 넘어가야만 하는데... 명나라는 정말 극단적인 군사 실무자 견제 국가였다. 여러가지 예가 있는데. 예를 들어 전쟁을 한다면 총병은 당연히 무관, 부총병도 무관 하는 식으로 전문가에게 맡겨야 하는게 보통일텐데 언제나 주요직에 문관을 참여시켜서 서로 견제시켰다. 즉 총병이 무관이면 부총병은 문관. 심지어 사르후 전투 같은 경우에는 총사령관인 양호가 문관이기 까지했다. 더구나 보통 장군의 경우 승진 또한 문관보다 느렸으며. 중앙직이 아닌 변방직에 앉혔고.

무엇보다 군사담당자가 정말 조금만 실수해도 벌을 주거나 사형에 처했다. 즉 총병 이여송이건 좋은 예지만 같은 경우 열심히 싸우지 않는다며 탄핵당했고, 누르하치의 발호에 군사요청을 하고 상급자인 장승음이 패배하고 전사 하니까 막상 원군을 요청한 이유한에게 그 책임을 물어서 사형. 누르하치에게 요동을 빼았긴 왕화정을 사형시키고 왕화정을 막았던 웅정필도 책임을 물어서 처형. 양호도 사르후 전투에서 졌다고 처형... 승패는 병가지상사인데 한번 졌다고 삭탈관직시키고 유배를 보내면 고마운 수준이고, 걸핏하면 사형에 쳐하고 가족들까지 연좌시켜 버리니까. 명/청 교체기에는 이영방/손득공/홍승주/모문룡의 의형제였던 공유덕, 경중명, 상가희/심지어 원숭환이 잡히자 원숭환의 부하 등등 수도 없이 많은 장수들이 명을 배반하거나 청나라로 항복해버렸다... 즉 숭정제가 특별히 의심이 많고 그랬다기보다는 명나라의 문화 자체가 주원장때부터 의심이 많고 장군들을 극도로 견제하였다는 것.

이건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부터 이랬다. 시조부터가 유능한 신하,그 중에서도 장수들이 반란을 벌일까 두려워 견제라고 죄를 뒤집어 씌워 죽이거나 작은 실수로 처벌을 가했으니.

무엇보다도 명나라는 산해관이 뚫려서 멸망한 게 아니라 농민반란으로 망한 것이며, 명나라가 멸망하고 이자성이 북경을 점령한 순간까지도 청군은 산해관을 넘지 못했다.[17] 숭정제가 명나라 멸망에 책임이 있다면 그것은 농민반란을 막지 못한 쪽이지, 산해관 방어를 잘못한 쪽은 아닐 것이다.

3.2 숭정제의 자린고비 논란

3.2.1 비판

숭정제에게도 비판적인 시각 중 가장 큰 것은 지나치게 자린고비였다는 것. 이자성의 군대가 처들어오는데도 군대에 내탕금을 풀지 않고 돈이 없다고 버텼다는 주장이 있다. 자세한 건 이 글을 참조.강산보다 돈을 중시한 수전노 황제

3.2.2 반론

하지만 숭정제의 내탕금이 3천만냥이었다는 기록은 야사에나 나오는 것이지 그런 돈이 실제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황실의 내고는 황제를 제외하면 극히 제한된 사람만 알 수 있기 때문에, 그 안에 돈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진짜 까봐야 그제서야 알 수 있을 뿐이다. 물론 할아버지 만력제가 재위기간동안 축재에 열심이라서 내탕금이 국고금보다 훨씬 많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숭정제의 내탕금이 정말로 텅 비었다는 가장 큰 증거는 이자성이 북경을 점령한 이후를 보면 찾을 수 있다. 이자성은 "숭정제가 갖고 있다는 3천만 은량을 내가 너희들에게 나누어 줘서 평생 편안하게 살 수 있게 해주겠다" 라며 부하들을 설득해 북경까지 진군했다. 하지만 북경에 도착했는데도 약속을 지킬 수가 없었고, 때문에 북경 성내를 약탈하고 고관대작의 집을 습격해서 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전까지 이자성의 군대는 "약탈을 하지 않고 재물을 나누어준다." 는 명성을 얻고 있었다. 하지만 북경에 도착한 다음의 이자성은 약탈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숭정제가 내탕금을 모두 군비로 써서 정말로 돈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만약 숭정제에게 돈이 남아 있었다면 이자성이 이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자성은 숭정제의 돈을 풀어서 선심쓰듯 부하들에게 나누어줬을 것이고, 북경을 약탈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북경의 구 명나라 관리들을 적으로 돌리지 않았을 것이고 오삼계와 싸울 때 신사들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자성은 그전까지 쌓았던 명성을 모조리 무너뜨릴 수밖에 없었고, 결국 아무데도 의지할 곳이 없었기 때문에 오삼계와 청나라 연합군과의 싸움 한방에 무너진 것이다. 숭정제가 자린고비여서 내탕금을 내놓지 않고 3천만냥을 쌓아두었다는 낭설을 반박하는 가장 큰 증거이다. 말년에는 신하들보고 국고에 돈 좀 기부하라며 닦달을 할 정도였다. 여담이지만 이떄 돈 내놓지 않고 구두쇠 노릇을 한 명나라 신하들은 이자성 때 약탈당하는 등 제대로 업보를 받았다

4 미디어 속에서의 숭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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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풍우정>의 주요 인물들. 맨 앞 가운데 백발을 휘날리는 사람이 숭정제다.)

중국 드라마 <강산풍우정>의 주인공으로 명나라의 재건을 위해 분투하나 결국 좌절하는 모습이 잘 나타난다. 중국배우 이강이 열연. 마지막에 백발을 휘날리며 자살하는 모습은 정말 인상 깊다. 그외에 숭정제가 등장하는 중국 드라마에서는 대다수 열심히 노력했지만 좌절해서 망가지는 모습이 많다. 다만 본인의 큰 단점인 의심많고 성급하며 작은 잘못도 용서하지 않는 포용력 없는 성격이 큰 문제라 이로 인해 화를 자초한 것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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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하려는 숭정제

그런데 사실 이 사람 사망할 당시 나이가 만 서른 셋... 어? 좌절해서 조로해버렸나..

그런데 중국 드라마 '천하'에 등장하는 숭정제는 아주 매력적이고 강렬한 이미지를 가진 젊은 황족이다. 제위에 등극하기 이전에 위충현, 동창과 맞서 명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고군분투한다. 상당히 계략도 잘 짜고 정치판에도 익숙한 것을 보면 툭하면 신하들 의심하고 적의 속임수에 넘어서 엄한 장수나 죽일 것 같지도 않다. '천하'에서는 주유검이 황위에 등극하는 것으로 끝난다. 제위에 등극할 때 손수 동창건물을 폭파시키며 군왕의 포스를 보여준다. 하지만 실제 숭정제와 같이 의심많고 너무 주도면밀해서 주변인들의 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마침내는 그간 가장 큰 힘이 되어주었던 진가의마저 암살하려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는 등 참 입체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여담이지만 '천하'의 주유검을 다른 명말기의 드라마 배경에 투입한다면 반정부군도 만주족도 다 쓸어버리고 몇 년만에 명나라의 안정과 전성기를 되찾을 것 같다. 어쩌면 난징으로 천도할지도 모른다 지금까지의 중국 드라마에 등장하는 숭정제 캐릭터 중에서 가장 매력적이다.

  1. 명나라가 멸망한 원인들 중 가장 큰 부정부패를 끝내 척결하지 못했고, 왜 이러한 부정부패가 일어나는지에 대한 통찰력 또한 부족했다. 설령 통찰력이 있어서 해결하려고 해도, 부정부패는 전대의 무능한 황제들의 통치시절을 거치며 구조적으로 고착화되었기 때문에 부패한 관리들을 제거하는 방법으로는 개선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낮았지만. 대표적으로 즉위하자마자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환관 위충현을 숙청했으나 관료사회에 암약한 부정부패는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2. 명나라를 멸망시킨 주요 원인은 농민 반란이다. 하지만 농민 반란의 초기 형태는 이미 만력제 후반기에 본격적으로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관중 지방(현재 섬서 성)은 중국 역사 내내 군사적으로 요충지였으나 송과 원을 지나면서 생산력이 급감하는데, 명나라 중기 이후로 관중 지방에 주둔한 군대의 식량을 보급해주는 행정체계가 붕괴하고 군대뿐만 아니라 농민들도 굶어 죽게 되면서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매한가지였던 탈영병들과 농민들이 유민이 되고 무장을 갖추며 정부에 항거하기 시작한 것.
  3. 농민 반란도 정부군의 적극적인 진압으로 1637년에는 거의 사그라들었지만, 하필이면 그 때 청나라의 북방 방어선 공격으로 농민 반란군을 완전 진압하기 직전에 정부 진압군을 북방 방어선으로 돌려야 했다. 그리고 1639년부터 자연재해 크리로 농민반란 대폭발. 실로 절묘한 타이밍의 결합으로 명나라는 멸망한다.
  4. 그런데 다른 기록에선 마지막으로 혈전을 벌이고자 궁궐 내 싸울 수 있는 이들은 따르라고 했지만 죄다 달아나고 왕승은 홀로 남아있자 주저앉으며 이대론 싸울 수도 없구나라며 자결하겠다는 것도 있다.
  5. 북경을 함락한 농민 봉기의 수령 이자성도 이 유서를 읽고서 감탄했다고 하며, 숭정제가 자살한 그 나무는 청나라도 건드리지 않고 되려 작게나마 제사를 지내 넋을 위로하게 하며 기려 명나라 잔존세력을 회유하는데 이바지하기도 했다. 조선 유생들도 여기와서 제사에 참여하며 통곡하기도 했는데 청도 이건 눈감아줬다고 한다. 그러나 문화대혁명 때는 전제 봉건왕조의 우상을 숭배한다는 이유로 가차없이 잘려나갔다. 현재 남아있는 나무는 1983년에 다시 심은 거라고 한다.
  6. 태자가 16세였고 그의 동생들도 모두 10대들이었다. 하지만 결국 이자성에 군대에 의해 잡혔다. 딸은 2명이 있었는데 장평공주와 소인공주 모두 "너는 황가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이라고 외치면서 자살 직전에 숭정제가 직접 죽였다. 일설에는 큰 딸 장평공주는 팔 한 쪽만 잃고 운 좋게 살아남았다고 하기도 한다. 김용선생이 이 설을 받아들여 녹정기에 장평공주를 구난이라는 여승으로 등장시킨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아니며 죽은 것은 소인공주였다. 장평공주는 아버지한테 죽지 않으려고 멀쩡한채로 미리 탈출했다. 탈출해서 숨어살다가 1646년에 스스로 관아에 나아가 청나라 관리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힌뒤 용서를 빌었다. 이에 청나라 조정에서는 큰 위협이 될것 없다고 판단하여 장평공주를 용서해주었고, 그녀는 평민출신 남자와 결혼해서 평범하게 살다가 천수를 누렸다.
  7. 진나라의 자영 역시 망국의 군주로서 사랑받는 인물이지만 어디까지나 진왕으로서 즉위하고 죽었기 때문에 황제로만 한정 지어 보면 숭정제가 유일하다고 볼 수 있다. 군주로 확장지어서 보면 자영까지 포함해서 두 명이다.
  8. 예외가 진나라 자영이나 금나라 애종 정도. 이 둘도 선대에 싸지른 똥을 치우려고 본인들 나름대로 노력은 했지만 전자는 본인이 뭘 할래야 할 수가 없었는데다가 제위 기간이 짧았고 후자는 본인 능력이 암울한데다 이민족 출신이기에 나름 대로 동정은 받아도 인기는 없다.
  9. 다만 부장품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묘의 규모가 상당히 작다. 이 무덤은 원래 몇년 먼저 사망한 전귀비의 무덤으로 쓰려고 만든 것이다. 이자성이나 청나라에서 새로 만들어주지는 않고 그냥 여기에 숭정제와 주황후를 합장시킨 것이다. 일반적으로 역대 황제들은 재위 기간에 자기 무덤을 만들었지만 숭정제는 공사다망한 통치에 신경쓰느라 미처 만들지 못했다.
  10. 17명의 상서(尙書)를 처형하거나 유배시켰고, 7명의 총독(總督)과 11명의 순무(巡撫)를 처형했다.
  11. 실제로, 주로 명-청(후금)전쟁에서 대치했던 명나라 장수,관리중 적지않은 수가 귀순, 전투중 항복을 했는데 이는 명나라의 내부사정과 숭정제의 실책으로 인한 상황이 막장이었다는 반증이다.
  12. 인구를 보더라도 학자들 추계에 따르면 통상 조선은 1100만 안팎을 찍는다, 반면 왜란 당시 일본은 적게 잡아도 1200만, 많게 잡으면 1700만 가량 나온다. 무엇보다 임란 때 일본군의 총 수효는 대략 15만~20만인데 이정도 규모는 임란 이전 일본사를 통틀어도 유래가 전혀 없었다.
  13. 비슷한 예로 거란 침입때 고려의 상황도 있다. 거란의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는 와중에도 강감찬의 재안으로 현종을 피난가게 하고 요나라 성종을 적당히 속인 뒤 물러 가게한 후, 단단히 준비한 고려는 귀주대첩으로 재침입 한 거란을 박살 내버린다.
  14. 원숭환은 명나라와 황제를 위해 필사적으로 산해관을 방어했지만 돌아온 것은 끔찍하게 처형당한 것이니 평소에 원숭환을 따르던 부하들이 이런 황제를 좋아할 턱이 없었다.
  15. 비유하자면, 오늘날의 국방부장관이 자기 멋대로 합참의장을 사형시켜버린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당신이 그 소식을 들은 대통령의 입장이라면 과연 어떤 생각이 들까? 그리고 국방부장관을 잡아들여서 바로 처형한 것이 아니라 원숭환을 체포해서 구금, 조사, 죄목을 발표할 때까지 1년이 걸렸다. 원숭환이 죄를 지은 단계부터 따지면 기간은 훨씬 길다.
  16. 원숭환의 영원전투는 1626년의 일이다. 원숭환이 방어선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총사령관이라고 할 수 있는 계요독사에 임명된 1628년 이후의 일이며, 원숭환이 모문룡을 죽인 일 등의 이유로 하옥된 것은 1629년이다. 때문에 원숭환의 재임 기간은 2년으로 봐야 한다.
  17. 물론 홍타이지가 뇌출혈로 급사하면서 황위를 둘러싼 내전이 일어난 원인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