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제

명의 역대 황제
4대 인종 홍희제 주고치5대 선종 선덕제 주첨기6대 영종 정통제 주기진
묘호선종(宣宗)
시호헌천숭도영명신성흠문소무관인순효장황제
(憲天崇道英明神聖欽文昭武寬仁純孝章皇帝)
연호선덕(宣德)
주(朱)
첨기(瞻基)
생몰기간1399년 2월 25일 ~ 1435년 1월 31일(37세)
재위기간1425년 6월 27일 ~ 1435년 1월 31일
역대제왕묘 배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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宣德帝
1399~1435(재위: 1425~1435)

나라 제5대 황제. 홍희제의 장남으로 휘는 첨기(瞻基), 묘호는 선종이다.
존호 및 시호는 헌천숭도영명신성흠문소무관인순효장황제(憲天崇道英明神聖欽文昭武寬仁純孝章皇帝).

황제의 평균 퀄리티가 낮은 편이었던, 주원장, 영락제 이후의 명나라 황제들 중 그래도 명군 축에 들어가는 인물로 어린 시절부터 똑똑하고 과감했으며 무예에도 소양이 있었는지 할아버지 영락제의 총애를 받았다. 특히 잦은 원정을 벌였던 영락제가 어린 선덕제를 원정에 자주 대동할 정도였다고. 그에 비해 아버지 홍희제는 문(文)에 치우쳤던 스타일이라 영락제는 홍희제보다 손자 선덕제를 더 후계자로써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한다. 선덕제가 황태손으로 책봉되었기에 황태자였던 홍희제의 제위가 보장된 것으로 보일 정도.

1424년 영락제가 죽고 홍희제가 즉위했으나 이듬해 바로 죽는 바람에 27세의 나이로 명나라 5대 황제에 올랐다. 그런데 선덕제가 즉위한 이듬해 숙부였던 한왕 주고후[1]가 반란을 일으켰다. 주고후는 한 때 병약한 홍희제 대신 새로운 황태자가 될 뻔한 인물로, 성격이 너무 난폭해서 무산되었다고 한다. 자칫하면 건문제 시즌2를 맞을 뻔했으나 선덕제는 이 숙부의 반란을 친히 진압하고 사로잡은 후 자금성 안에 소요성이라는 건물을 짓고 유폐시켰다. 이후 선덕제는 숙부를 만나러 이곳에 행차했는데 이 개념을 상실한 숙부가 조카를 발로 걷어차서 넘어뜨렸다. 이에 목숨 살려줬더니 걷어차인 빡친 선덕제는 근위병들 시켜 개념상실한 숙부를 붙잡아서 구리 항아리에 가두었는데, 인간흉기 급으로 힘이 장사였던 숙부가 이 항아리의 뚜껑을 밀어내자 결국 다시 집어넣고 항아리를 장작더미에 달궈 통구이로 만들어버렸다.(...) 그와 동시에 주고후의 열 아들들도 모두 죽였다.[2]

이때 죽은 한왕 주고후의 아들은 다음과 같다.

세자(廢世子) 첨기(瞻圻)[3]
세자 첨탄(瞻坦)
제양왕(濟陽王) 첨자(瞻垐)
임치왕(臨淄王) 첨역(瞻域)
치천왕(淄川王) 첨역(瞻墿)
창악왕(昌樂王) 첨성(瞻垶)
제동왕(齊東王) 첨평(瞻坪)
임성왕(任城王) 첨도(瞻壔)
해풍왕(海豐王) 첨장(瞻㙊)[4]
신태왕(新泰王) 첨방(瞻垹)

결혼하여 자손을 남긴 자들도 있지만 아들은 두지 않았기에 그들의 자손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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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제의 그림)

재위 초반에 저런 막장 드라마틱한 사건이 있었으나 나름대로 나라를 잘 이끌어 나갔다. 당시에 '3양'이라 불렸던 양사기, 양영, 양부를 필두로 한 명신들을 중용했고 중국 황제치고는 대단히 검소하여 궁을 화려하게 꾸미거나 지나친 진상을 금지했다. 외정 면에서는 올량합 부족의 침공을 격퇴했으나 영락제와는 달리 대대적 대외정책은 쓰지 않았다. 이런 선정으로 전임 홍희제의 묘호인 '인종'과 선덕제의 묘호인 '선종'을 따서 이 시대를 '인선의 치(仁宣之治)'라 부르며 명나라 최고의 전성기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예술감각이 뛰어나 글씨와 그림에 두루 능했고 특히 그림은 나라 휘종에 비견될 만큼 뛰어났다고 한다.[5][6] 그런 만큼 명의 문화 발전에도 기여했다.

그러나 환관을 교육시키는 내서당을 설립해 권한을 강화했고 이는 명에서 환관들이 나라를 좀먹게 되는 한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또 사냥과 더불어 귀뚜라미 싸움을 워낙 좋아하여 싸움 잘하는 귀뚜라미를 찾으라고 내시들을 전국 각지로 보내 이들에게 특혜를 준 탓에 각지에서 횡포가 심했다.

특히 조선으로써는 그다지 좋게 봐줄 수 없는 황제인데, 사냥 마니아였던 그는 조선의 토종 매인 해동청을 줄기차게 요구하여 해동청빠 선덕제 치세에 조선은 명에 조공 셔틀하기 바빴다. 여담으로 이때 조선 국왕은 세종대왕. 세종도 불평을 하긴 했지만, 현실 여건상 열심히 조공했다. 자세한 건 항목 참조. 선덕제 사후인 세종 중반에는 이런 불공평한 조공 행태가 많이 개선되었다.

또한 선덕제는 조선 여자를 후비로 들였는데, 이 때 후비로 들어간 공신부인 한씨는 한확의 누이동생이다.

어쨌든 명을 잘 이끌어 나갔으나, 1435년 재위 10년만에 향년 36세로 아직 창창한 나이일 때 죽었다. 그가 죽은 후 명나라는 어린 정통제가 즉위하고 토목의 변을 겪게 되면서 파란만장한 명 황실의 역사가 시작된다.(...)이상하게도 명나라의 명군들은 죄다 임기나 수명이 짧다. 반대로 암군들은 임기나 수명이 길고[7]

이 황제도 할아버지 영락제처럼 무협지에 자주 등장하고, 즉위 초에 반란을 일으켰던 한왕 주고후 역시 무협지에 등장하는 일이 잦다.

  1. 영락제의 차남
  2. 원래는 아들이 11명인데 장남 의장세자(懿莊世子) 첨학(瞻壑)이 요절해서 3남 주첨탄(朱瞻坦)이 한왕 세자로 책립되었다.
  3. 홍희 원년에 폐세자가 되어서 종실본관인 봉양(鳳陽)의 능묘지키게 되었다.
  4. 土+長이며 뜻은 마당, 묏자리로 가는 길에 제사를 하다, 신을 모시는 곳이다. 아래아 한글에서는 쓰여지지만 여기서는 안 쓰인다.
  5. 선덕제의 글씨와 그림은 지금도 남아 있는데, 거기 보면 선덕제가 '모월 모일 심심해서 한번 끄적이다.' 아니면 '모월 모일 심심해서 그려보다' 이런 식으로 적어 놓곤 했다. 즉 선덕제 본인은 자신의 작품을 단순한 낙서라 생각했는지도 모르는 대목.(...)
  6. 참고로 휘종은 예술에 심취해서 송나라를 말아먹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더욱 고평가받는다.
  7. 다만 천계제는 암군이면서도 임기와 수명이 짧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