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의 역대 황제 | |||||
25대 질제 유찬 | ← | 26대 위종 환제 유지 | → | 27대 영제 유굉 |
묘호 | 위종(威宗)[1] | |
시호 | 효환황제(孝桓皇帝) | |
연호 | 건화(建和, 147년 ~ 149년) 화평(和平, 150년) 원가(元嘉, 151년 ~ 152년) 영흥(永興, 153년 ~ 154년) 영수(永壽, 155년 ~ 158년) 연희(延熹, 158년 ~ 167년) 영강(永康, 167년) | |
성 | 유(劉) | |
휘 | 지(志) | |
생몰기간 | 132년 ~ 168년 1월 25일 | |
재위기간 | 146년 8월 1일 ~ 168년 1월 25일 |
桓帝 132~167. 재위 146∼167.
후한의 11대 황제로 장제의 증손자로 하간효왕(河間孝王) 유개(劉開)의 손자이며 여오후(蠡吾侯) 유익(劉翼)의 아들이다. 유익은 아들 덕분에 효목황제로 추존되었고 그의 아내이자 환제의 모친 조씨도 효목황후로 추존되었다.
즉위 서부터도 즉위할 자격이 없던 것[2]을 조등의 도움으로 간신히 즉위했다. 환제가 즉위할 당시 조정은 간신이자 권신인 양기가 떡 주무르듯 하고 있었는데, 당장 전임 황제인 질제마저 양기가 한 방에 독살시킨 것이라 그 힘이 막강하였다. 환제의 즉위 자체도 양기와 양기의 여동생인 양태후의 뜻으로 이뤄진 것이라 환제는 그걸 거스를 수 있는 힘이 없었고 양기는 권세를 마음껏 자랑할 수 있었다.
양기의 부인인 손수의 외삼촌 중에 양기(梁紀)[3]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양기의 부인인 선(宣)씨에게는 이전의 남편과의 사이에서 만든 딸인 등맹(鄧猛)이라는 아이가 있었다. 얼굴을 보고 괜찮다고 생각한 손수는 등맹의 성씨를 양(梁)씨로 바꾸고 환제의 후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입막음을 위해 남편 양기를 시켜 선씨를 죽이게 했는데, 어찌된 것인지 선씨는 살아서 궁궐로 달려갔다.
사정을 다 들은 환제는 화가 나기도 하고, 황제를 능멸한 죄도 있으니 이것이 기회다 싶어 환관인 선초(單超)등과 손을 잡고 한번에 들이닥쳐 다 박살을 냈다. 양기의 집은 포위되었고, 양기와 손수는 절망해서 자결하였다.
이렇게 양기를 처리하는데 성공한 환제였지만, 환관들의 도움을 받은 것 때문에 이번에는 환관들의 세력이 막강해져버렸다. 그들은 막강한 권세를 바탕으로 전횡을 일삼았고, 내정에 간섭하고 자기들의 일족을 지방으로 파견시켜 토지겸병(土地兼倂)을 벌였다. 이에 청류파들은 나서서 환관들을 비난하였다. 위기를 느낀 환관들은 환제에게 거짓말을 해서 이들을 청류당의 이응(李膺)을 비롯한 200여 명을 잡아들였다.
헌데 재판이 시작되었을 때 청류당은 저마다 입을 모아 환관의 죄상을 폭로하는 법정진술을 택해서 환관들을 물먹였다. 그대로 놓아두면 진짜로 큰일이 나겠다 싶었던 환관들은 외척 두무(竇武)등이 상주하여 간한 것을 기회로 청류당에게 금고형을 내렸다. 이것을 당고(黨錮)의 옥(獄)이라고 한다.
이렇게 환제는 환관이 비정상적인 권력을 가지게 만들어 후한의 쇠퇴를 초래하였다. 양기에게 망하나 환관에게 망하나 다음 황제가 유능하여 이걸 수습했으면 좋았겠지만 그 황제가... 결국 당고의 금이 터지고 정권은 십상시가 잡게 되고, 이제 시대는 영웅들의 시대로 바뀌게 된다.
환제는 재위 20년 만에 죽었는데 아들이 없어 5촌 조카 유굉이 뒤를 이어 영제로 즉위했다. 문제는 영제도 문제라서 '환령'으로 같이 까인다.[4]
여담으로 환제는 딸만 세 명 있었는데 그 중 장녀였던 양안장공주[5]는 불기후 복완에게 시집갔다. 그러나 복완의 딸이자 헌제의 황후였던 복황후는 그의 소생이 아니라 복완의 다른 아내인 영(盈)의 소생인 듯 하다.
- ↑ 190년 좌중랑장 채옹의 건의로 취소되었다.
- ↑ 전대 황제인 질제의 재종숙(再從叔, 재당숙(再堂叔)이라고 하며 아버지의 육촌 형제이다.)이라, 항렬을 거스르는 즉위가 된다.
- ↑ 남편인 양기는 梁冀
- ↑ 참고로 정사에서 쓰는 호칭이다.
- ↑ 이름은 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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