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개요
權臣
영어:an influential vassal, a powerful courtier
권세를 잡아 그것을 휘두르는 신하를 뜻한다. 단순히 권력이 많거나 직책이 높은 신하들을 칭하는 것이 아니라[1] 직책에 비해 가진 권력이 비정상적으로 크고 그 영향력이 군주의 권력까지 침해할 정도인 신하를 칭하는 편.
특성상 다른 사람들, 특히 간관(諫官)들에게 간신으로 낙인찍히는 경우가 많다. 권신들의 경우 절대 다수가 군주의 권력을 침해하고, 이에 따른 부작용이 생기기가 매우 쉽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든 권신=간신이란 공식은 곤란. 곽자의, 제갈량 처럼 유능한 명장이자 충신인자 권신인 경우도 있고, 유능한 군주의 신임을 얻어서 군주와 협력, 의욕적으로 국정을 추진하여 발전을 이뤄나가는 경우도 있기 때문인데, 대표적으로 관이오, 악의 등이 있다. 그렇지 않더라도 자신의 권력을 어느정도 절제할 줄 아는 권신들도 존재하고...
군주제의 특성상 외척 출신이 권신에 속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 경우에도 예외가 있는데 군주의 의도적인 외척 견제로 권좌에서 밀려나는 경우가 많이 존재한다. 그 외에는 김종서, 흥선대원군, 제갈량 같이 군주가 어려 선왕의 유탁을 받은 고명대신이나 왕을 대신해 섭정을 맡는 경우에도 권신으로 본다.
그 밖에는 개국공신이나 그 후손들이 권신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개국초기에는 왕조의 기틀을 다지기 위하여 대숙청이 일어나는 경우도 빈번하다. 한나라의 유방의 예가 유명하며 그 밖에도 월나라의 구천, 주원장도 유명하다. 확실히 왕에게 협력하여 충성을 바친 권신들도 없는 것은 아니나 장기적으로 볼 경우 강력한 기득권층이 되기 때문에 미리미리 싹을 잘라두는 것이다.
사극에서는 선역으로 나올 경우엔 주인공의 가장 큰 조력자나 조언자로[2], 악역으로 나올 경우엔 그야말로 최종보스의 위엄. 보통은 이미지상 악역으로 더 많이 나온다. 그리고 한국 사극의 경우 작품 속에서 권신들을 지칭하는 호칭으로 '합하'라는 호칭이 많이 쓰이는 경향이 있다.
2 역사 속 권신들
권신이면서 간신인 경우에는 강조 표시.
2.1 한국사 속 권신들
2.1.1 삼국시대~남북국시대의 권신
- 해구 : 백제 시대에는 해구란 이름을 가진 이름이 시대별로 3명이나 있었는데, 이 해구는 바로 백제 문주왕 ~ 삼근왕 시기의 권신 해구이다. 이 양반은 문주왕을 죽이고, 삼근왕 치세에서도 왕을 대신해 전횡을 일삼았다가 급기야 반란을 일으켰다가 토벌되었다.
- 연개소문과 아들들
- 김유신 : 장군으로서의 이미지가 워낙 강하지만 당시 중앙 정치 쪽에서는 최고 실력가로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태종 무열왕의 처남이자 문무왕의 외숙이었으니. 김유신이 가진 최고 직위인 태대각간은 17관등 중 최고 관등인 각간 위로 대각간, 그리고 거기서 다시 한 번 위로 태대각간으로 최고 관등으로 부터 무려 2관등이나 올린 파격적인 직위였다. 또한 이 직위는 김유신외에는 다시는 오르지 못했으며, 현재 그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은 왕릉의 형상을 하고 있다. 당시 김유신의 정치적 입지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는 사례다.
- 김흠돌 : 신라 문무왕 ~ 신문왕 때의 권신. 김유신 휘하에서 통일 전쟁에서 공을 세웠고 딸을 신문왕에게 시집보내 막대한 권력을 가졌다. 그러나 신문왕 대에 모반을 꾀하다가 발각되고 처형되었다. 김흠돌의 모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신문왕의 왕권 강화책에 반발하여 모반을 꾀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 다른 설로는 김흠돌의 반대세력이 그를 제거하기 위해 모반사건을 조작했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 김위홍 : 조카인 진성여왕과의 관계로 당시 대단한 권세를 가지고 있었다. 진성여왕이 남편이 없었고 당시 근친혼은 흔한 일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남편으로 봐야 한다는 의견 또한 있다.
2.1.2 고려시대의 권신
- 척준경 : 이자겸과 한패였을 때는 물론이고 이자겸을 축출한 뒤엔 더더욱 권세가 커졌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는 직접적으로 그가 '권력을 휘둘렀다'고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이후 그의 행적을 보면 과장됐을 가능성은 존재.
- 김부식 : 인종 시대 문벌귀족의 핵심인물.
- 기철 : 누이인 기 황후의 위세를 등에 업은 공민왕 치세의 간신. 결국 공민왕에게 숙청당한다.
- 신돈 : 초기에는 개혁에 앞장섰으나, 후기에는 타락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성계 일파가 창왕과 우왕을 내리 폐위시키며 폐가입진이란 논리를 내세웠기 때문에 신돈의 이미지를 왜곡했을 가능성이 있다.
- 최영 : 이성계에게 숙청당하기 전엔 고려 최고의 권신이었다. 다만 최영 자신은 자기 절제에도 충실한 케이스.
- 이성계 : 결국 조선의 국왕으로 즉위. 즉위하기 전에는 어쨌든 고려의 신하였으므로 고려의 권신에 포함.
- 정도전 : 급진파 신진사대부에 속하는 고려의 권신이었으며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하려 하였으며 그로인해 정몽주와 대립하였고 결국에는 이성계와 함께 조선을 건국한다. 조선이 건국된 후에도 권신으로 남았다.
- 정몽주 : 온건파 신진사대부에 속하는 고려의 권신이었으며 고려를 지키려고 하였고 그로인해 정도전과 대립하였고 결국에는 이성계의 아들인 이방원에게 암살명령을 받은 이방원의 부하 조영규에게 암살당한다.
2.1.3 조선시대의 권신
- 하륜 : 부정부패 때문에 간신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만큼 업적이 많아 능신의 요소도 있으며, 권신의 면모도 있지만 태종의 신뢰 하에서 왕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수준의 권력을 휘둘렀기 때문에 상당히 규정하기 애매한 인물.
- 이거이, 이저 부자 : 태종을 보필한 권신. 막강한 권력을 누렸으나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바람에 태종 치세의 공신 숙청의 일타를 찍고 만다.
- 이숙번 : 공신과 왕의 신임이란 요소로 권세를 마구 휘둘렀다. 물론 이걸 태종이 가만히 놔둘리 만무. 결국 숙청당하고 평생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다.
- 김종서, 황보인 : 단종 시기의 국정을 사실상 모조리 장악했었다. 이는 세조 일파[3]에게 그를 축출할 명분을 만들어 주었지만, 기록상을 보면 이들이 특별히 전횡을 저지른 기록은 없다. 최영과 마찬가지로 권신임에도 자기 절제에 충실한 케이스. 더군다나 이들 모두 세종 때의 북방 개척에서 활약했으나 무인이 아닌 문인이다.
- 한명회 : 훈구파 대신 No.1. 조선전기 전형적인 보스형 권신. 두 딸을 각각 예종, 성종에게 시집보냈으나 모두 일찍 죽었다. 비리와 축재가 많았기에 간신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하지만 그래도 국정은 무난하게 이끌었고, 북방 개척에서도 활약한 바 있다. 특히 김자점 같은 이에 비하면 일처리 능력 자체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다만 한명회를 비롯한 훈구파의 전횡이 조선 중기의 혼란에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
- 홍윤성 : 살인마 정승이라 불릴 정도로 개막장이었던 인물이었으나 세조가 즉위하는데 공을 세워 끝까지 보전되었다.
- 유자광 : 오랫동안 간신이라는 의견이 대세였지만 현대에 들어와서는 재평가되는 분위기도 있다. 게다가 유자광이란 사람 자체가 얼자 출신의 벼락출세한 사람이라서 생애에 걸쳐 왕의 총애를 받거나 큰 주목을 받은 일은 있어도 강력한 신하가 되어 일을 처리한 일은 사실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유자광의 리즈시절이 세조의 총애를 받으며 벼락출세하던 때인데 그때도 권력은 없었고 성종 치세에선 한명회를 탄핵하면서 존재감을 보이긴 했어도 소인 취급받으며 몰락해버렸다. 연산 때 다시 떠오르지만 연산이란 양반 자체가 권신을 용납하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오히려 임사홍이 성종조 중반에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바가 있다.
- 임사홍(?) : 일반적으로는 연산군의 큰 신임을 얻고 큰 권력을 가졌다고 알려져 있다. 단, 간신이라고 보기엔 좀 부족한 편이기도 하고[4] 실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성종 후반부터의 임사홍은 권신이라 하기도 부족한 감이 있다. 임사홍은 성종 때 사림에 의해 소인으로 낙인 찍인 후 연산 시대에도 아들 임숭재 덕택에 복권될 때까지 정계에서 그다지 힘을 쓰지 못했다. 애당초 연산 시대에 가장 강력한 권력을 자랑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연산군 본인이다. 그의 정치 철학 자체가 '신하가 임금을 만만히 보는 풍습[5]을 고쳐야 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권신'을 용납했던 왕이 아니다. 유자광이나 임사홍은 본인들의 권력이 막강했다기보다는 최강 권력자 연산군에 기생하여 권력을 누린 케이스에 가깝다. 물론 이와는 별개로 반정세력에게 절대적인 간신으로 낙인찍혀 살해당했다. 다만 성종조에는 왕실과 사돈관계를 맺는 등 승승장구했고 본인도 상당한 권세를 누렸지만 도승지 현석규를 씹은 일때문에 소인으로 낙인찍혀서 개발살난다.
- 신수근 : 누이(폐비 신씨)가 연산군의 중전으로 아버지는 전 좌의정인 신승선이다. 딸이 중종의 왕비(단경왕후)로 들어간 외척 중 최고의 권신이었다. 임사홍과 함께 중종반정 때 살해당했다.
- 임숭재 : 임사홍의 차남이자 연산의 총신으로 "아비는 큰 소인, 아들은 작은 소인이나 작은 소인이 더 악독하다"란 말을 들었을 정도로 연산의 총애를 받으면서 그의 비위를 맞추는데 천재적인 행보를 보였고 연산은 민가 사십여채를 허물고 그의 집과 궐을 잇는 길을 닦았을 정도였다. 연산이 쫓겨나기 직전에 죽었는데 죽을 때조차 "미인을 바치지 못하고 죽는 것이 한이옵니다."라고 아부를 하며 죽었고 연산은 그의 죽음에 매우 슬퍼했다 한다. 죽은 후에는 그 시체가 부관참시된다.
-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 중종반정 공신들 : 공신 버프로 전횡이 대단히 심각했다고 기록에 나와 있다. 헌데 이들은 모두 중종이 즉위한지 십년이 채 되기 전에 젊은 나이에 시름시름앓다 죽고 만다. 특히 박원종은 영의정이 된지 몇달만에 죽었는데 그의 나의 겨우 44세였다.
- 이행, 이항, 심정 : 남곤 사후 김안로가 대두하기 직전에 잠깐 집권한 삼인방, 욕심만 많은 간신들로 분류된다. 김안로와 적대했다가 김안로에 의해 처참하게 죽기 만다. 홍경주, 김극픽 등도 이 그룹에 포함되기도 하나 홍경주는 너무 일찍 죽어 권세를 누리지 못했고 김극픽은 존재감이 없다. 이행의 형 이기는 명종 시기에 권신이 된다.
- 김안로 : 조선 초기 최강의 권신+간신. 반대파를 경빈 박씨 일파, 이행, 심정, 이항 일파 등으로 몰아 참혹하게 죽였고 중종의 아들 복성군의 사사까지 주도한 공포정치의 상징이었다. 그의 지나치게 잔혹한 정치는 후대에서 이해하기 힘들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그의 양비양시론은, 훈구와 사림의 교체기에 권력의 정점을 향유한 인물다운 견해랄까. 나중에 중종의 아들인 복성군을 죽일 것까지 주도하면서 중종의 눈 밖에 나고 만다.
- 이기, 정순붕, 임백령, 최보한 : 윤원형과 함께 경원대군을 명종으로 옹립한 소윤의 실세들, 허나 이기를 제외하곤 거의다 요절하여 권력을 제대로 누려보진 못했으나 살아남은 이기 만큼은 77세까지 장수하며 윤원형에 맞먹는 세도를 구축했다.
- 이량 : 잘 알려지지 않은 조선사의 권신이자 간신. 윤원형에 맞먹는 세도를 구축했으며 한때는 윤원형을 뛰어넘는 권세를 누리기도 했다. 명종의 외척으로 명종이 윤원형을 견제하기 위해 각종 요직에 두루 앉히면서 밀어주었으나 윤원형을 견제하라는 할일은 안하고 다른 외척인 심씨가를 모함하고 전횡이나 일삼다가 명종의 눈밖에 나서 전격적으로 숙청되었다.
- 이준경 : 명종 말 선조 초의 영의정으로 을묘왜변에서 공을 세우는 등 나름 준수한 능력을 가진 재상. 형인 이윤경은 을묘왜변에서 활약한 명장이고 본인도 윤원형을 막지는 못했으나 그에게 영합하진 않았다고 나름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 선조 초의 기대승 일파의 탄핵에 맹렬히 맞서 싸우기도 했다. 사림을 숙청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윤원형 일파의 잔존세력의 요청을 거부하는 등 제2의 기묘사화를 일으키는 것을 막았고 야사에 의하면 선조의 즉위를 확정시켰다 카더라. 16세의 선조가 즉위한 후에 매우 믿고 신임했던 재상인데 몇년 안 있어 죽었다. 죽으면서 붕당의 폐해에 대해 충고하고 죽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붕당이라도 만들 거란 소리냐?'라고 불쾌해했고 이이는 "사람이 죽을때는 그 말이 선해진다던데 이준경은 죽으면서 어찌 말이 악해지냐?'라고 깠다.(...)
- 이이 : 권력하고는 인연이 없어보이는 이이지만 선조의 신임 아래 10개월 정도 조정을 주도한 바가 있으나 반대파들의 미움을 사서 왕을 능멸했다는 모함을 당했고 선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낙향해버렸고 49세를 일기로 얼마 안 가 숨지고 만다.
이준경 깔 때만 해도 자기가 이런 꼴이 될 줄은 몰랐을 듯
- 정철 : 정여립을 개발살낸 후에 한동안 서슬퍼런 권력자로 조정에서 군림했으나 건저 사건이 계기가 되어 개발살난다. 선조는 한마리의 독수리와 같다고 정철을 칭찬했으나 그가 1593년에 죽고 난 후에 임진왜란이 끝나고 "한뭉치 독기로 사람을 해친 천하의 개쌍놈"이라고 욕을 퍼부었다.
- 기록상 정적을 가혹하게 숙청하는 독선적인 성격이었고
애널써킹을 예술의 영역으로 승화시켰다는 평을 받는, 그리고 고등학생들이 정말 싫어하는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등의 작품으로 선조에게 아첨과 아부를 하는 작품들이 있어 간신으로 보는 경우가 많지만, 원칙에 충실하고 신념을 굽히지 않는 자신 나름대로의 소신을 가진 인물이었다는 반론도 있다. - 일례로 명종 21년의 기록을 보면 종친인 경양군이 처가의 재산을 빼앗으려고 서얼 처남을 꾀어 죽인 뒤 강물에 던져버린 사건이 있었다. 당시 국왕 명종은 자신의 종형이 간여된 일이므로 이를 조용하게 넘기려고 정철을 설득시켜 논박을 중지하도록 하였지만 정철이 명종의 요청을 거부해 명종의 눈 밖에 나서 파면되고 한직을 전전하게 된 적이 있었고 선조에게도 아무리 청천벽력과 같은 진노가 계시더라도 신의 말씀은 다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해 분노한 선조에 의해 삭탈관직당한 적 또한 있기때문이다.
- 이산해 : 건저사건으로 정철을 실각시키고 한동안 잘 나갔다.
- 유성룡 : 임진왜란 당시의 전시수상이자 남인의 수장으로 명나라의 외교 등을 담당하며 선조의 신임을 받았으나 선조와 조선왕실을 모함하는 보고서가 명나라 조정에 올라간 일을 해명해줄 것을 요청하는 선조의 요청을 부득불 거절하여 선조의 미움을 샀고 이이첨 등의 탄핵으로 권력에서 물러난다.
- 유희분, 박승종 콤비 : 유영경이 숙청된 직후 이이첨이 부상하기 전까지 소북 정권을 운영하면서 권세를 누렸다. 특히 유희분은 광해군의 처남으로 외척이라 탁소북 출신인 박승종도 그와 손잡아 무사할 수 있었다. 봉산옥사 이후 이이첨과 함께 삼창이라 불렸으며 폐모에는 반대했으나 후금과의 외교 문제로 둘은 엇갈린다. 이이첨은 오랑캐 사신의 목을 치라고 강하게 주장했고 유희분은 거기에 좋다고 응했는데 박승종이 "유희분의 분 자는 똥 분냐?" 비웃으면서 이 점에 있어서는 완전히 틀어진다. 인조반정 이후 유희분은 아우 유희발과 함께 목이 잘렸고 박승종은 아들과 함께 자결했다.
- 김류 : 반정의 4대장 중 이서, 신경진은 무인이라 천대받고 이귀는 성질이 더러워서 왕의 눈 밖에 난 가운데 인조의 총애를 받으며 잘 나갔으나 정원군의 추숭에 반대하고 강빈 사사에 반대하면서 인조의 눈밖에 났다.
- 김자점 :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김육 : 효종의 적극적인 후원아래에 영의정이 되어 대동법 확대 등에 힘쓴 명재상. 충청도와 전라도의 대동법 확대를 주도했고 화폐 유통에도 힘을 썼다.
- 송시열 : 조선 후기 최강의 권신. 세도정치가 들어서기 전까지 그의 권세의 크기를 따라갈 사람은 없었다. 아니, 명성 면에선 세도 정치 시기의 권신들조차 감히 따라가지 못할 지경. 그마나 충문공으로 추숭되고 엄청난 예우를 받은 김조순 정도가 그에 비견할만하다.
- 허적 : 현종, 숙종조의 재상으로 적절한 과단성, 신중한 처신과 일처리로 현종과 숙종의 신임을 모두 한몸에 받았다. 탁남의 영수이자 오랫동안 영의정을 지냈으며 강력한 외척인 김우명, 김석주 등과 연계했고 자신과 적대적인 김만기, 김만중 형제에게도 손을 내밀었으나 거절당했다. 허나 말년에 자신의 서자인 허견을 관리하지 못하다가 허견이 복선군 등과 역모를 꾀하는 바람에 세트로 처리당한다. 야사에선 숙종의 허락도 받지 않고 함부로 유악을 썼다가 나가리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록에는 관련 내용이 없으며 그가 처형될때 읊어주는 죄목에도 없었다.
- 김석주 : 인조, 효종조의 명재상 김육의 손자이자 효종, 현종조에 왕의 신임을 받은 대신인 김좌명의 아들이며 숙종의 외삼촌으로[7] 2차 예송논쟁에서 송시열과 서인을 실각시켰다가, 권력을 잡은 남인을 치기 위해 다시 서인과 손잡는 등의 행보로 권력을 유지하였다. 그는 숙종 10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숙종의 역사상 행적을 볼 때 더 오래 살았으면 험한 일을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기사환국으로 공신호를 추탈당했다가 나중에 복구되었다. 그런데 이 사람 할아버지는 조선시대 최고의 명재상 중 하나인 김육. 참고로 초상화에 묘사된 생김새가 굉장히 독특하다.
- 민암 : 숙종 치세, 남인의 2차 집권기 당시의 최고 실세로 남인의 영수였다. 숙종이 장희빈에게 서서히 질려가면서 숙빈 최씨를 총애하는 것을 보고 한중혁, 함이완 등의 모의를 고변하여 남인 정권을 탄탄히 하려다가 숙종의 주특기인 환국에 휘말려서 죽고 만다.
- 장희재 : 장희빈의 오빠로 여동생의 위세를 등에 업고 남인 영수 민암의 우대를 받으며 안하무인으로 행동했다고 한다. 하지만 장희빈이 죽을 때 같이 개발살난다. 영의정 남구만은 세자의 얼굴을 봐서라도 장희재를 살려줄 것을 청했으나 옹호할 게 따로 있지 저딴 놈을 옹호하냐고 엄청난 비난을 받았고 정작 인현왕후를 복위하려던 한중혁 등에게는 가혹하게 군 것도 서인의 심기를 건드렸고 거기에 소론의 박세채가 남구만을 비판하며 장희재를 죽일 것을 청하자 이에 탄복한 많은 소론들이 장희재의 엄벌을 청한 노론으로 전향하는 계기가 되었다. 어쨌거나 끔살.
- 남구만 : 숙종 치세의 명재상. 서북인의 차별을 언급하며 서북인 등용을 주장했으며[8] 북방 방어선에 대한 남다른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안용복의 행위를 쾌거라고 칭찬했으며 소론의 영수이면서도 중립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그런데 성이 남씨라서 그런지 자꾸만 리그베다 위키에는 남인이라고 적는 오류가 보인다.(...)
- 이이명, 김창집, 조태채, 이건명 : 숙종 말엽에서 경종 초의 노론 영수들로 4대신이라 불렸다. 실로 막강한 권세를 자랑했으며 숙종과 야합하여 경종을 페세자하려고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섣불리 경종 길들이기에 나섰다가 삼수의 옥 사건으로 모조리 죽음을 맞는다. 이중 김창집과 이이명의 권세가 가장 강력했으며 김창집의 아버지는 숙종, 현종 조의 재상이자 송시열의 애제자인 김수항인데 김수항 역시 환국으로 사사된다.
- 홍봉한 : 사도세자의 장인으로서 영조 시대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 영조 때에는 홍봉한 외에도 그의 동생인 홍인한을 비롯한 풍산 홍씨 자체가 득세했다. 아래에 있는 홍국영 역시 홍봉한과 같은 풍산 홍씨.
- 홍인한, 정후겸 콤비 : 풍산 홍씨와 경주 김씨가 서로 싸우다 지쳐 나가떨어진 틈을 타 영조 말년을 지배한 실세, 겁도 없이 정조를 어떻게 해보려다가 정조의 교묘한 대응에 박살났으며 정조 즉위 후에 모두 사사된다.
- 김조순, 김좌근을 대표로 하는 세도정치 시기의 세도 가문의 실세들. : 김조순은 강직하고 올곧은 성격이긴 했지만 막강한 권력을 가진 점에선 권신에는 속하나 간신으로 보기는 좀 애매하다.[9] 그리고 김좌근, 김홍근, 김유근 등을 비롯한 그 후손들의 막장짓들로 조선은 뿌리가 거의 뽑힐 지경에 이른다. 그외에 풍양 조씨의 조병헌, 조병구, 조득영, 조만영, 조인영 등이 득세했으나 안동 김씨의 수준을 넘어서진 못했고 철종 조에 이들이 대거 자연사하면서 풍양 조씨 권세는 사실상 끝난다.
- 흥선대원군 : 섭정이고 고종의 생부이지만 형식적으로는 어디까지나 아들 고종의 신하였다. 이는 '대원군의 가마 논쟁'에서 드러난 것인데 본래 조선의 예법에 종친들은 여덣 명이 드는 '팔인여'를 타고 정승급 대신들은 4명의 가마꾼이 드는 교자를 타는 것이 예법인데 안동 김씨 일파는 대원군에게 종친의 예를 적용하려 했으나 대원군은 끝내 대신들처럼 교자를 타고 다녔고 조대비 역시 대원군에게 교자를 타도록 했다. 본래 종친은 정치 참여를 하지 못하는 게 원칙이므로 안동 김씨가 대원군에게 오히려 더 사치스런 팔인여를 타게 하려고 했던 것. 하지만 고종이 20세가 넘어서 성인이 된 이후에도 조정을 장악하려고 한 것은 얄짤없는 권신의 모습이다. 단적으로 고종이 15세가 되자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완전히 뒤로 물러난 것이나, 최익현이 고종이 20세가 되었으니 친정을 해야한다고 주장한 것을 처벌하려고 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후 실권에서 밀려난 대원군은 고종을 밀어내고 다른 아들들을 왕위에 올리려고 죽을 때까지 시도하다가 실패를 반복한다.
- 고종 대의 민씨 척족 : 흥선대원군이 물러난 이후의 주도세력으로 꼽힌다. 하지만 고종 항목이나 명성황후 항목을 참고하면 알 수 있지만, 민씨 척족은 말할 것도 없고 명성황후의 권력이 실제로 얼마나 되었을지도 의문이라는 것이 현재 학계의 평가이다. 물론 고종의 친위세력 확보 과정에서 민씨 일족이 관직에 오르기도 하였으나, 대놓고 이름을 대지 못하고 민씨 척족이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딱히 이거다 싶은 권력자는 없다. 그나마 튄 인물이라고 해도 임오군란에서 배후로 언급된 민겸호, 급진개화파였다가 온건개화파로 전향한 덕분에 악당취급당한 민영익, 민영익과 함께 민씨일족의 신진으로 유명하였던 민영환 정도다. 이들을 간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차처[10]하고, 권신이라고 불러도 되는지는 상당히 의문스럽다.
- 김홍륙 : 함경도 출신의 천인이나 러시아어에 매우 능통하여 역관 출신으로, 춘생문 사건에 참여하면서 고종의 신임을 얻었다. 하지만 지난친 관직 남용과 러시아와 고종의 관계가 악화되는 국제정세 속에서 친러파인 김홍륙의 입지는 점점 약해졌다. 개빡친 그는 너무 열받아 맛이 갔는지 고종의 커피에 아편을 타라는 대책없는 지시를 내렸으니 이것이 김홍륙 독다사건이다. 이 일로 인해 훗날 순종이 되는 태자는 거의 저승길 문턱까지 밟았으며 이로 인해 바보가 됐다는 소문이 조정에 파다하였다. 어쨌거나 사건의 정황은 곧 밝혀졌고 김홍륙은 갑오개혁으로 모두 폐지된 옛 법의 연좌제에 따라서 가족들까지 죄다 끌려나와 처참히 고문당한 다음에 처형됐고[11] 시체를 저잣거리에 던져 군중으로 하여금 갈기갈기 찢게 만들었다. 다만 김홍륙의 경우는 대단히 짧은 시기에, 그것도 고종의 신임으로 잠깐 측근이 되었다가 바로 외부 사정으로 실각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권신으로 보는 것은 상당히 의문스럽다. 애초에 김홍륙의 직위는 권력을 휘두를 위치에 있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2.2 중국사 속 권신들
- 환현
- 왕승변
- 우문호
2.3 일본사 속의 권신들[14]
- 모노노베 모리야
- 소가노 우마코, 소가노 에미시, 소가노 이루카 : 백제 도래인 출신으로 덴노 가문과 혼약을 맺어 정계에 진출한 소가 가문의 수장들. 우마코는 기존의 토착 호족 가문인 모노노베 일가를 척살하고 정권을 장악했으며, 사위인 쇼토쿠 태자를 내세워 개혁을 주도했다. 다만 정권을 장악하였지만 권세를 휘두르지 않고 막후정치를 행사하여 국정을 어지럽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들인 에미시와 손자 이루카는 관직을 독식하고 덴노 일족을 위협하는 등 패악질을 부리는 바람에 나카노오에 황자와 나카토미노 가마토리에 의해 척살당했다. 그리고 나카토미노 가마토리는 소가 일족을 척살한 공로로 후지와라 성씨를 하사받는다. 사실상 후지와라 일가의 선배들.
- 헤이안시대 후지와라가의 권력자들: 덴노 가문과의 혼사를 놓치지 않으며 대를 이어가며 셋쇼와 간파쿠 직을 독식했다. 이들의 정치를 '섭관정치'라고 부를 정도. 대표적인 인물은 11세기 초반의 권력자이자 겐지모노가타리의 주인공인 히카루 겐지의 모델이라는 설도 있는 후지와라노 미치나가.
- 호조 도키마사를 비롯한 호조 가문의 싯켄들
- 다누마 오키츠구
2.4 기타 지역 권신
- 요압 - 이스라엘 : 다윗 왕의 조카이자 군사령관. 다윗의 정복전쟁을 성공적으로 지휘하고, 압살롬과 세바의 반란을 진압한 당대의 명장. 그러나 골수 유다 민족주의자 성향을 지녔기에 다윗과 종종 대립각을 세웠으며, 실제로 다윗의 정치기반이라 할 수 있는 유다 지파에 대한 막대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보다못한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 때 자신의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요압의 직위를 해제시키고 다른 사람을 군사령관으로 삼았으나 요압은 그를 죽여버리고 스스로 자신의 지위를 되찾아버렸다. 이때문에 다윗은 살아생전에 요압을 제거하지 못했고 아들인 솔로몬이 즉위하고 나서야 간신히 그를 제거할 수 있었다.
- 알 하지브 알 만수르 - 후우마이야 왕조 : 10세의 어린 칼리프 히샴 2세를 끼고 재상이 되어 권력을 행사했다. 가혹한 통치를 펼치고 기독교를 탄압했으나 군사적 능력이 뛰어나 에스파냐 일대에 할거하던 기독교 왕국들과의 전투에서는 연전연승했다. 기록에는 20여년간 집권하면서 기독교 왕국과의 전투에서 57회의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 포티우스, 아칠라스 - 이집트
- 악셀 옥센셰르나 - 스웨덴
- 암네리스 - 이집트
- 노섬벌랜드 공작, 버킹엄 공작 - 영국
- 오스테르만 백작 - 러시아
- 아사프 칸 - 인도
3 창작물 속의 권신
가상 역사극 속의 인물이나 이름이 바뀌어 등장하는 경우도 여기에 포함. 여기서도 권신 겸 간신은 굵은 글씨 표시.
-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즉위 전), 클라우스 폰 리히텐라데, 문벌대귀족 - 은하영웅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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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파-슈퍼 마리오 시리즈(...):버섯왕국 국민 주제에[16] 공주인 피치공주를 틈만 나면 납치하는 버섯왕국 최강 권신
4 권신 역을 주로 맡는 배우
당연하지만 카리스마 있는 중견 배우들이 맡는 경우가 절대 다수이다. 다만 가끔은 젊은 배우들이 맡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엔 대부분 '권세만 믿고 날뛰는 찌질이' 역으로 나온다(…).
- 김갑수
- 김응수 : 다만 실존인물 권신보다는 가공의 권신 역을 자주 맡는다.
- 박근형 : 주로 악의 최종보스 역으로 많이 나온다. 현대물에서도.
- 박영지 : 이분은 중간보스 정도, 찌질찌질한 역으로 나오실 때도 많고.
- 서인석
- 이덕화
- 이재용
- 임혁
- 정동환
- 조경환
- 전국환 - 목소리 톤 때문인가 높으신 분들 중에서도 악역을 많이 맡는편.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최영역을 맡기도 했다.
- ↑ 가령 조선의 의정부 3정승-영의정,좌의정,우의정-들은 모두 국정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지만 법제상 권력이 보장된 자리이므로 3정승 모두를 권신이라고 지칭하지는 않는다. 또 단지 직책만 높을 뿐 실권은 적은 경우도 많았다.
- ↑ 보통은 몰래 비공식적으로 지원을 해주다가 후반부에 정체를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 ↑ 이 일파에는 세조를 포함한 종친들은 당연하고 이후에 사육신에 포함되는 집현전의 신진관료들까지 모조리 포함된다. 간단하게 말해서 진급 불만이다. 어린 왕 주변을 세종 시기부터 활동하던 노 대신들이 둘러싸고 있으니 그 이하층에서는 불만이 쌓일 수 밖에 없다. 자세한 것은 계유정난 참고.
- ↑ 성종 때는 바른 말 잘하기로 유명했으며, 권신 중의 권신인 한명회를 탄핵한 적도 있다.
- ↑ 연산 본인의 표현을 빌리면 "위를 능멸하는 풍습"
- ↑ 이 개혁정책이 적당하냐 아니냐는 별론으로 하고.
- ↑ 정확히 말해서는 그의 삼촌인 김우명이 바로 숙종의 장인이다. 따라서 엄격히 말하면 삼촌은 아니다.
- ↑ 뒷날 홍경래의 난이 터지면서 그의 주장은 예언이 되었다.
- ↑ 물론 위선적인 행동으로 보는 것도 설득력이 있지만 적어도 간신으로 보일 만한 행동은 겉으로는 저지르지 않았다.
- ↑ 이전 항목에는 흥선대원군이 그나마 살려놓은 조선의 국력을 다 뭉갰다고 하는데, 민씨일족이 일반적이 여론만큼 악행을 했느냐는 차처하고 대원군 시기에 조선의 국력이 그만큼 회복되었는냐도 의심스럽다. 이것도 흥선 대원군 항목 참고.
- ↑ 이걸 반대한 것이 독립협회이다. 김홍륙과 독립협회는 친러파와 친일친미파라는 입장의 차이는 있었지만, 연좌제 부활시키면 안된다고 주장했다. 물론 대놓고 암살당할 뻔한 고종에게는 씨알도 안 먹혔다.
- ↑ 정확히 말하면 단순한 간신보다는 위선자로 보는게 맞는 경우다.
- ↑ 난세에 능력을 바탕으로 공을 세워서 출세후 권신화, 그러면서도 끝까지 국가를 배신하거나 말아먹지 않음, 물러나야 할 때 잘 물러나서 천수를 누림, 후세의 평가까지 좋음
- ↑ 이전 문서에서는 쇼군을 군주로 봐야 한다는 의견이 서술되어 있었는데 쇼군과 군주의 공통점은 권력과 지위를 세습한다는 것 뿐이며 군주 이외에 권신이 지위와 권력을 가족에게 세습한 사례는 차고도 넘친다.
근데 암군 항목에는 쇼군들이 올라와 있다. - ↑ 단, 이 사람은 일본사 속의 다른 권신들과는 달리 덴노였던 히로히토의 전폭적인 신임 덕에 권력을 유지했고 신임을 잃은 뒤 실각했다는 점이 다르다.
- ↑ 정확히 말하면 용암지대(?)의 영주로 추정. 다만 원래부터 세력은 막강했던듯. 슈퍼마리오 3에서의 일로 중앙정부와 다른 영주들에게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물어주고 초콜릿섬도 뺏겼지만 공군력만 약화된채로 그 후속작인 슈퍼 마리오 월드에서 또 피치 공주를 납치해갔다. 가지고 있는 영토 역시 여전히 무지막지하게 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