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제(삼국지)

후한의 역대 황제
26대 위종 환제 유지27대 영제 유굉28대 소제 유변
시호효령황제(孝靈皇帝)
연호건녕(建寧, 168년 ~ 172년)
희평(熹平, 172년 ~ 178년)
광화(光和, 178년 ~ 184년)
중평(中平, 184년 ~ 189년)
유(劉)
굉(宏)
생몰기간156년 ~ 189년 5월 13일
재위기간168년 2월 17일 ~ 189년 5월 13일

1 개요

靈帝

생몰년 156년 ~ 189년. 재위 기간 168년 ~ 189년.

후한의 제12대 황제. 한마디로 이름은 영재(英材) 같으나 하는 짓은 영구였던 황제.[1]

시법에 의하면 靈자 자체가 혼군에게 주는 시호다.

본명은 유굉(劉宏), 는 대(大)[2]로 그의 아들들인 소제와 헌제동탁, 이각&곽사, 조조에게 실권을 빼앗겨 자신들의 뜻대로 나라를 다스리기 못했기 때문에 사실상 후한의 마지막 황제라고 할 수 있다.

영제는 장제의 현손, 하간효왕 유개(劉開)의 증손, 해독정후(解瀆亭侯)인 유숙(劉淑)[3]의 손자, 해독정후인 유장(劉萇)[4]의 아들이다. 환제의 5촌 조카로 환제가 후사없이 사망하자 그에게는 배후 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환관들과 권력 다툼을 하던 대장군 두무와 두태후의 옹립으로 13세에 즉위한다. 그러나 머지않아 두무는 당고의 금 때문에 깔끔하게 정리되어버린다.

1.1 매관매직의 선두주자

원래는 황실과는 거리가 있어 집안이 가난하여 장사꾼이 돼서 큰 돈을 벌려고 했으나, 열세살의 나이에 갑자기 황제 자리에 올랐다. 이렇게 가난한 시절에 하던 장사가 몸에 배어있었기 때문에 황제가 되어서도 오직 돈벌이만을 생각하였다. 즉위 때는 돈을 실컷 쓸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으나 이미 부정부패로 막장테크를 타고 있던 한나라에는 국고가 비어 있었다. 마음 먹은 대로 돈을 쓸 수 없게 되자 아예 모든 벼슬에 정가를 매기며 매관매직에 황제 자신이 직접 나섰다. 매관매직이 이미 환관들로부터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매관매직에 나선 황제는 전무후무하다. 수익은 개인 금고나 국고에 충당했다. 심지어는 벼슬을 외상으로 파는 짓까지 했는데, 그야말로 전무후무.

정치에는 관심이 없어 재위 내내 십상시의 간신질에 놀아나고, 직언을 하는 신하들을 내쫒거나 죽였다. 여색은 기본이고, 스프링쿨러로 도로를 청소하는 첨단 설비를 만들어놓고 즐거워하거나, 스스로 장군 복장을 하고 무상장군이라 칭하며 군대를 사열하면서 놀거나, 작은 모의시장을 만들어 스스로 대신 당나귀 마차를 타고 장사놀이를 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당나귀를 타는 것이 유행이 되어 당나귀 값이 말보다 비싸졌다는 해프닝도 있다. 후한서에 나오는 영제가 타고 다닌 흰 당나귀는 바로 은거하는 자의 상징이 되었다.

관리들은 황제에게 진 빚을 질질 끌 수 없으니 백성들에게 온갖 탈법, 불법 행위를 자행하여 돈을 긁어모았고, 이는 황제가 시킨 것이나 다름 없어 이러한 부정부패가 만연했으며 그 자신도 매관매직과 가렴주구를 하여 이러한 현상을 더욱 조장하였기 때문에 황실의 부정부패는 막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말 그대로 대신들이 모두 벼슬하는 도둑놈들이라 불리던 것이다. 황건적의 난이 괜히 일어난 것이 아니다.

덕분에 선황제였던 환제와 함께 세트로 엮여 아예 '환령(桓靈)'이라는 합성어가 만들어졌다. [5] 어찌되었든 이후 환과 영이라는 시호 모두 어리석은 임금에게 주는 시호가 되었고, "환령"은 암군의 대명사가 되어 자자손손 대차게 까이게 된다. 서진 무제 사마염은 사예교의 유의에게 환령보다 못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왜냐하면 환제와 영제는 매관매직을 해서 국고를 채웠으나, 진무제는 매관매직해 자신의 살림만 채웠기 때문이다.

1.2 환관과 척신이 설치고 난세가 시작되다

영제는 황후였던 송씨를 내치고 하씨를 황후로 앉히고 하씨의 오빠 하진을 대장군으로 삼자 하진은, 매관매직을 일삼고 전권을 휘두르던 십상시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명문가 출신 원소의 지지를 받았다. 이에 하진과 십상시와의 대립은 깊어져 갔다. 동시에 하황후와 영제의 친어머니인 동태후 사이의 갈등도 깊어졌다.

188년 영제는 서원팔교위(西園八校尉)를 설치했는데 황실 정예병이었지만 사실은 십상시들의 사병과 다를 바가 없었다. 십상시 중 하나인 건석서원팔교위 수장인 상군교위를 맡았으며 이하 중군교위 원소, 하군교위 포홍, 전군교위 조조, 조군좌교위 조융, 조군우교위 풍방, 좌교위 하모, 우교위 순우경(淳于瓊)이 통솔했다.[6] 또 영제는 그해 유언의 제안을 받아들여 목 제도를 부활시켰다.

원래 25년 후한이 건국된 이래로 주의 장관을 자사로 부르다가 야심을 품은 유언의 제의로 188년부터 일부 자사를 목으로 바꿔 불렀다. 이때 목은 주의 관원들을 감독하는 감찰관일 뿐 아니라 주 전체를 다스리는 수장으로, 목이 되면 한 주의 군사력과 인력, 재력을 한손에 거머쥐게 되어 후한의 지방자치화, 다르게 말하면 후한의 사분오열을 가속화시켰다.

황건적의 난이 진압되었지만, 난을 진압한 제후들이 후한의 분열을 이끌고 있었고, 이미 이 때 후한은 국가 멸망 테크의 본 궤도로 들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제는 이러한 혼란 속에 중병에 걸려 34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주색에 빠져서 몸에 많이 해를 끼쳤기 때문에 그 영향으로 일찍 사망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어머니는 동씨인데 바로 하진, 하태후와 대립하던 동태후 되시겠다. 동태후는 삼국지연의에서는 독살, 정사에서는 갑자기 죽었다고 하거나 병사했다고 하는데 정황상 독살당한 듯하다. 그의 죽음에 뒤이어 일어난 십상시의 난동탁의 집권은 한나라를 끝장내버렸다.

1.3 가족 관계

1.4 평가

자치통감에선 토로교위 갑훈에게 연습한 무예를 자랑했는데, 갑훈이 '무사를 더럽혔을 뿐!'이라고 꾸짖자 "그대를 늦게 본 것이 한스럽구나! 많은 신하들이 애초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반성하고 갑훈은 원소에게 "황상은 매우 총명하신데 다만 좌우 사람들에게 가려졌을 뿐입니다."고 말하는 일화가 나온다. 이 일화에서 보듯 본디 영제는 총명했고, 마음만 먹었다면 환제 때의 적폐를 청산할 능력이 충분했다. 그러나 후계자 교육을 받지 못한 탓인지, 스스로 매관매직에 나서고 환관과 외척을 가까이 하는 등 그야말로 암군의 전형이 되어버렸다.

1.5 미디어 믹스

이문열 평역 삼국지에서는 주름, 노망, 노환 등의 표현을 써서 이 사람을 노약자로 표현했다. 그래서 늙어 죽은 영감처럼 표현했지만 상술했던 것처럼 3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죽었다.주색에 찌들어 조로한 듯

창천항로에서는 찌질이 중에 상찌질이로 나온다.[7] 결국 검열삭제 중 하태후의 슴가에 눌려 질식사한다. 원작에서는 그냥 와병 중에 하태후가 고의적으로 슴가로 질식사시킨다. 현실적에서도 적용될 뻔한 살인 방법이다.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에서도 등장하며 애니메이션 성우모리카와 토시유키다. 여기서는 젊은 미남이지만 여전히 방탕하고 무능한 암군으로 등장한다. 성우가 성우다보니 쓸데없이 목소리가 멋지다. 목소리 못지 않게 외모 역시 멋지기는 한데 기존의 이미지와 비슷한 방탕한 생활이 나오며 얼마가지 않아서 사망한다.

삼국지 12,13

삼국지 시리즈 중 몇 개의 게임 시리즈에서는 영제를 옹립하면 혜택을 볼 수 있기는 하다. 삼국지 6에서는 장각이 이끄는 황건 세력조차 장군직을 임명해 지휘병력 수를 늘리려면 영제를 옹립해야만 하는 어이없는 상황도 나왔으나, 이후에는 황건 세력으로 플레이해서 영제가 있는 도시를 점령하면 자동으로 폐위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그리고 하진 이외의 세력으로 옹립하여 플레이하기에는 하진의 장수진이 빵빵하다. 조조, 원소, 유표 등이 하진의 수하장수이다.올스타 물론 삼국지 10 이후 시리즈부터는 손견, 유비, 유언, 동탁이 종속되어 있지만 독립 세력으로 등장하면서 떨어져 나간다. 그래도 나머지 부하들은 건재해서 장수진이 좋은 편이다. 영제를 옹립하기도 쉽지 않은 편인 데다가 삼국지 시리즈는 3탄이 189년에 시작하는 정도를 제외하면 무조건 184년부터 시작하여 영제의 혜택을 받을 기회가 5년밖에 안되므로 소제에 비하면 그나마 덜하지만 외면받는다.

삼국전투기에서는 하진의 죽음과 동탁의 낙양 입성으로 시작하는 고로 이 인물은 언급만 된다.

삼국지 가후전에서 등장한다. 자세한 내용은 영제(삼국지 가후전) 항목 참조.

  1. 배철수의 만화열전에서 나온 평이다.
  2. 복후(伏侯)의 《고금주》(古今注)에서 인용한 후한서 효영제기의 주석.
  3. 손자가 황제가 된 후 효원황제로 추존되었고 그의 부인 하씨도 효원황후로 추존되었다.
  4. 익주목 유언의 아들 유장(劉璋)과 동명이인이다. 아들이 황제가 되자 그는 효인황제로 추존되었고 그의 부인 동씨도 효인황후로 추존되었다.
  5. 시법에서는 '국토를 개척하고 먼 곳을 복속시킨 것을 '환(桓)'이라고 하며, 어지럽지만 해를 끼치지 않은 것을 '영(靈)'이라고 했다. 그래서 '환'이라는 시호는 제나라 환공, 오나라 장사환왕 손책의 경우처럼 정말로 영토를 넓혀 국력을 향상시킨 군주가 받았던 반면, 영이라는 시호는 춘추시대 (晉)나라 영공처럼 무도한 임금에게 내리는 시호였다.
  6. 이 중 원소, 조조는 후한에서 삼국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이끌 주역이 되어 적수가 되었으며 순우경은 원소의 부하가 되었다.
  7. 그나마 한 순간이지만 맨정신이 들 했던 때가, 당고의 금에 대해 조조가 올렸던 상소를 받고 고심하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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