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상

1 皇上

황제와 동일한 표현. 집권중인 황제를 뜻하는 말이다. 흔히 조선시대를 다룰 때 대비나 대왕대비가 왕을 부르는 표현인 '주상'(主上)의 황제국 버전…[1] 태황태후, 황태후 같은 가족관계에서는 윗사람인 이들이 현임 황제의 이름을 부르기는 뭐하고 신하들이 쓰는 폐하라는 호칭도 쓰기 뭐하니 이렇게 쓴 것.

하지만 중국사 내내 황상이라는 표현은 자주 쓰였다. 심지어 명나라가 되면서부터는 폐하라는 표현을 덜 쓰고 황상을 쓰는 빈도가 매우 높아져서 이때와 뒤의 청나라를 다루는 중드에선 황제를 부를 때 '황상'이라고 한다.[2]

한국사에서는 (빈도는 적지만) 고려와 발해의 왕에게 사용한 기록이 있다.

원칙상 황상 뒤에는 폐하를 붙이지 않는게 맞지만 동문선에 나오는 고려시대 표문이나 승정원일기에 나오는 대한제국시대 표문을 보면 황상폐하라고도 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왕에 대한 정식 호칭이 성상 폐하, 간섭기 이후 고종갑오개혁이전까지의 조선의 왕에 대한 정식 호칭이 주상 전하 였음을 본다면, 의례적으로 황상 폐하라고 칭한듯 하다.

한때 도태된 말이었으나 지금은 우스갯소리로 미국을 천조, 미국 대통령을 황상이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2 皇象

생몰년도 미상

삼국시대 오나라의 관료이자 서예가. 자는 휴명(休明).

광릉 강도 사람으로 어려서 서법에 뛰어났고 두도 등에게서 서예를 배웠으며, 진양보와 함께 능서라 칭해졌다. 황상은 그 둘의 장점을 융합해 하나의 풍격을 이루어 신묘함을 얻어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다고 했으며, 그의 장초는 두도를 본받아 바둑의 엄무, 그림의 조불흥 등과 함께 팔절(八絶)이라 불렀다.

황상은 산 아래 음지에서 화융의 조부에게 빌붙어 산 적이 있고 이 때 장온이 찾아와 황상에게 배우면서 집을 얻기를 원했다. 그는 시중, 청주자사로 역임하다가 생을 마감했으며 그가 쓴 문무첩에 따르면 청주자사가 되어 아랫 사람을 현지로 보내어 업무를 보게 했다고 한다.

절석강의 큰 비석이 셋으로 쪼개졌고 그 비석에 황상이 글을 썼다고 하며, 능서인명록에 따르면 초서에 능해 세상에서는 침착하고 통쾌하다고 칭찬했다. 원앙은 그 서법을 노랫소리가 높고 낭랑하게 선회하면서 오래도록 그치지 않는 듯 해 거문고를 타는 사람들은 기러기발을 버렸다고 했다.

당시에 진량보는 동떨어짐이 한스럽고 장초는 엄함이 한스러웠지만 황상이 그 사이를 적절히 고려해 그 오묘함을 크게 얻어서 중국에서 글씨를 매우 잘 쓰는 이도 미칠 수 없었다고 한다.

동진갈홍은 그를 서성(書聖)이라 불렀으며, 당나라의 두기는 예스러운 정감은 참됨을 탐구하기 어려워 배워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용과 자발레가 움츠렸다가 나오고 펼치고 서리면서 다시 가는 것 같다고 했다. 선화서보에는 형식이 화려하지 않으면서 내용이 야하지 않다고 했으며, 장회관은 그의 장초를 형상이 많았지만 형태는 하나라서 만자(萬字)가 그 정점을 이뤘다고 하면서 신품, 팔분은 묘품, 소전은 능품으로 평가했다.

그의 작품은 천발신참비, 문무첩, 급취장, 문무장대첩 등이 있으며, 서론으로는 논초서가 있다. 급취장은 고대 식자의 교과서 같은 것인데, 그가 만든 사본이 현존하는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그와 동시대 사람인 진국 사람인 하원공(何元公)이 초서를 잘 썼다고 한다.
  1. …이긴 한데 외왕내제 항목과 주상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 주상 또한 황제에게 사용하는 존칭이다.
  2.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아랫사람들이 황상 호칭을 쓰는 작품들에서 태후 등 윗사람은 그냥 대놓고 '황제'라고 부르는 걸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