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왕내제

外王內帝

1 개요

외왕내제는 대외적으로는 왕을 칭하지만 내부적으로는 황제를 칭하는 체제이다. 대외적으로는 중국과 같은 화이론이 강한 국가의 체제를 따르지만 내부적으로는 황제를 칭하거나 황제에 준하는 칭호나 체제를 갖추는 것을 뜻한다.

이런 특이한 체제가 등장한 이유는 중국이라는 강대국의 어그로를 끌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본래 황제라는 호칭이 중국에서만 사용하는 호칭이었고, 중국은 조공, 즉 자국이 주변의 국가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전제로 외국과 교역을 했기 때문에 중국과 교역하는 다른 국가들은 자신의 군주를 이라는 호칭으로 불러야 했기 때문이다. 원, 건국초의 청을 제외한다면 조공 무역은 사실 조공국에게 꽤나 짭짤한 거래였다. 제국의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 조공받은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의 선물로 돌려줘야 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신의 조카가 생일 선물로 500원 짜리 수첩을 줬다고 자신도 조카의 생일 선물로 같은 걸 주기엔 체면이 서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때문에 조공국은 조공을 더 하려고 하고 세배 받으셔야죠, 삼촌! 중국을 이를 막으려 하기도 했다. 아까 했잖아;; 슈퍼을의 갑질

청나라도 본격적으로 중원 왕조가 된 이후로는 다른 중국 왕조 같이 했다. 중국에 세워진 여러 왕조들은 주변 독립 국가들에게 조공에 대한 회답이란 명분으로 선물을 주는 거래를 하여 명목상의 제후국으로 두어 제국으로서의 자존심을 굳건히 하고, 주변 국가들은 적절히 조공을 통한 무역을 해가는 미묘한 계약 관계였다. 송나라 때처럼 중국보다 주변 국가들이 더 강성한 경우에는 중국이 제국으로서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어거지로 제후국으로 책봉하는 적도 있었다.

자신들이 제후국이라고 부르는 나라들이 내부적으로는 황제에 준하는 체제를 갖춘 사실을 중국이 알고 있는 경우도 많았다. 물론 중국 쪽에서도 어지간하면 태클을 걸지 않고 못본 척 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워낙에 거리가 멀어 군사적으로 태클을 걸기 어려운 경우도 있고, 어쨌든 중국과 확고한 우호관계에 있는 우방국을 고작 쓸데없는 명분 문제 하나로 잃을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문제가 되어 외왕내제를 폐지한 것은 몽골과의 전쟁에서 패배해서 사실상 속국이 되었던 고려 정도이다.

그런데 외왕내제라는 것이 확고한 시스템처럼 정형화된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가 중국 못지 않다는 자존심 내세우기가 절반이라면, 나머지 반절은 유교의 예법이 확고하게 정착되지 못한 상태에서 제후국과 황제국의 용어 및 예법을 섞어서 사용하는 상황에 가까웠다. 특히 당나라 이전의 이민족 국가들이 그러했다. 오호십육국시대의 여러 이민족 왕조들은 명목상으로는 왕을 칭하면서도 연호를 제정하고 황제식 용어를 사용하는가 하면, 즉위하는 군주마다 왕, 황제, 천왕 등 제각기 다른 칭호를 사용하는 등 혼돈 그 자체였다. 한국의 경우 발해가 자국의 임금을 왕(王)이라고 칭하면서도 자국만의 연호를 사용하고 신하가 왕을 부를 때 '황상(皇上)'이라는 황제에게만 쓰는 존칭을 사용했는데 외왕내제 체제를 고수하기 위함인지 아니면 북방 유목민 국가의 경우와 같이 유교식 예법이 완전히 정착되지 않아서 그랬는지는 불분명하다. 몇몇 학자들에 의하면 고구려 등 삼국시대 한국문명권의 나라에서 칭한 걸로 여겨지는 왕은 본래의 뜻[1]대로, 중국 주나라때의 용례와 마찬가지로 "천자"를 의미했던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왕이라는 칭호외에 태왕 등 한국말로 임금을 뜻하는 한자어가 여러 가지로 중복되어 사용되고, 또한 연호를 같이 사용했기 때문이다.[2]

서양에서는 조공 무역관계는 없어도 명분 문제 때문에 비슷한 일은 많았다. 동로마 제국이 곧 로마 제국이었던 고로, 황제를 자칭해도 일단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앞에서는 자세를 낮추었다. 대신 동로마의 황제가 바실레오스 칭호를 허락해주는 등 좀 더 유연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서양에서 더 이해하기 쉬운 개념일수도 있다. 동로마 제국은 대대로 유럽 국가들에게 대접을 받아왔으며 주변국들은 제국에게 황제 칭호를 수여받기를 열망했다. 중세에도 제후들 사이에서는 로마 제국만이 유일한 제국으로 인정받았다. 물론 여기에 열등감을 느낀 서유럽 군주들이 콘스탄티노플의 제국을 '그리스인들의 제국'이라고 깐 적도 있긴 하지만... 신성로마제국도 동로마의 황제가 바실레오스 호칭을 허락한 다음에야 자신 있게 제국을 칭할 수 있었던 경우기도 하고. 이와 마찬가지로 중국도 유일한 제국으로 불리고 싶어했다고 생각하면 상황이 매우 비슷하다.

2 예시

2.1 한국

2.1.1 고조선

삼국지 위략에 따르면 전국시대인 기원전 4세기 후반에 연나라가 왕을 자칭하자 조선후도 왕을 자칭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진시황이 황제라는 단어를 만들기 전이었으므로 황제라는 단어가 없었고 대신 왕이라는 단어가 천자 혹은 황제를 뜻했다. 즉 당시 고조선은 스스로를 천자의 국가로 칭한 것이다.

단군조선 이후의 위만조선에서는 국왕의 후계자를 황제의 후계자를 칭하는 용어인 태자라고 불렀고 "비왕"이라는 제후왕 혹은 왕작(王爵)이 존재했다.

2.1.2 고구려

내부적으로 '태왕(太王)', '성왕(聖王)', '호태왕(好太王)', '호왕(好王)', '호태성왕(好太聖王)', '상호왕(上好王)'같은 독자적인 칭호와 "영락(永樂)"같은 독자적인 연호를 쓰고 신하를 왕이나 제후로 봉하는 등 황제국의 모습을 표방하면서 외부적으로는 중국의 왕조와 조공관계를 맺으며 고구려왕 혹은 고려왕을 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전형적인 외왕내제 체제이다.

초대 임금 동명성왕은 비류국의 왕 송양을 '다물후'[3]로 봉했고,

송양이 나라를 가지고 고구려에 항복하니, 그를 봉하여 다물후(多勿侯)로 삼았다. 고구려의 말에 ‘구토(舊土)를 회복하는 것을 다물(多勿)이라고 한다’ 하였다.

동국통감 삼국기 고구려 시조 2년 여름 6월

제 3대 임금 대무신왕부여를 공략해 임금 대소를 죽이고 그의 동생에게 '낙(絡)'씨 성을 주어 왕으로 봉하였다.

대소(帶素)의 종제(從弟)가 나라 사람에게 이르기를,

“우리 선왕께서 자신이 망하고 나라는 멸하여 백성이 의지할 곳이 없으며, 왕의 아우는 보존을 도모할 생각도 못하고 도찬(逃竄)하여 밖으로 나가서 갈사수에 도읍하였다. 그리고 나 역시 불초하여 흥복(興復)시킬 길이 없다.”
하고, 이에 1만여 인과 더불어 고구려에 투항(投降)하니, 왕은 그를 봉하여 왕으로 삼고 연나부(椽那部)에 두었으며, 그의 등에 낙문(絡文)이 있다고 하여 낙씨(絡氏)란 성(姓)을 내렸다.
ㅡ동국통감 삼국기 대무신왕 5년 가을 7월

제 20대 임금 장수왕중원고구려비에서 태자 '공'과 함께 신라의 매금[4]에게 옷을 내려주고 신하로 봉해 고구려의 일부로 삼았다고 기록돼 있다.

장수왕은 삼국사기에서 백제 개로왕을 죽이고 백제의 왕을 '노객(老客)'으로 삼아 신하로 두고 역시 고구려의 일부로 삼았다는 자료가 남아있다.

또한 동국통감과 삼국사기에선 신라가 고구려를 '대국(大國)'이라고 부르는 장면이 있다.[5]

신라 박제상이 왜(倭)에 갔다가 죽고, 왕의 아우 미사흔이 왜에서 돌아왔다. 처음에 복호가 돌아옴에 왕이 박제상에게 말하기를,

“내가 두 아우를 좌우의 팔과 같이 생각하다가 이제 단지 팔 하나만 얻었으니, 어떻게 해야겠는가?”
하니, 박제상이 말하기를,
“신이 비록 노둔한 재주나마 몸을 이미 나라에 바쳤으니, 어찌 감히 사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고구려는 큰 나라(大國)로서 임금 또한 어질어서 신이 한마디 말로 깨우치게 하였습니다만, 왜와 같은 경우는 마땅히 모략(謀略)으로 속여야 하고 말로는 깨우칠 수 없습니다. 신이 죄를 지어 도망한 것과 같이 할 것이니, 신이 길을 떠나거든 청컨대 신의 가속(家屬)을 가두소서.”...(이하 생략)
-동국통감 삼국기 눌지왕 2년 가을

. . .춘추가 말하였다.

“지금 백제는 무도한 뱀과 돼지처럼 되어 우리의 영토를 침범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임금이 대국의 병사를 얻어 그 치욕을 씻고자 하여 저로 하여금 대왕께 명을 전하도록 하였습니다.”. . .
. . .春秋進言曰 今百濟無道 爲長蛇封豕 以侵軼我封疆 寡君願得大國兵馬 以洗其恥 乃使下臣致命於下執事. . .
- 삼국사기 제 5권 신라본기 제 5

임금의 정처를 왕후(王后)라 불렀고 어머니를 왕태후(王太后)라고 불렀다. [6] 그 대표적인 예로 동천왕의 사례가 있는데

(생략)......어머니는 주통촌(酒桶村) 사람으로서 산상왕의 소후(小后)가 되었으나, 역사에는 그의 가족과 성이 나타나 있지 않다. 임금은 전왕 17년에 태자로 세워졌고 이때에 이르러 왕위를 이었다. 임금은 성격이 너그럽고 인자하였다. 왕후가 왕의 마음을 시험해 보기 위하여, 왕이 유람하러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사람을 시켜 임금이 타는 말의 갈기를 자르게 했다. 임금이 돌아와서 말하였다.

“말이 갈기가 없으니 가련하구나.”
왕후가 또 모시는 사람을 시켜 밥상을 올릴 때 일부러 임금의 옷에 국을 엎지르게 하였는데, 역시 화내지 않았다.
......母酒桶村人 入爲山上小后 史失其族姓 前王十七年 立爲太子 至是嗣位 王性寬仁 王后欲試王心 候王出遊 使人截王路馬鬣 王還曰 馬無鬣可憐 又令侍者進食時 陽覆羹於王衣 亦不怒

2년(서기 228) 봄 2월, 임금이 졸본에 가서 시조묘에 제사 지내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3월, 우씨(于氏)를 왕태후로 책봉했다.
二年 春二月 王如卒本 祀始祖廟 大赦 三月 封于氏爲王太后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동천왕조

고구려는 또한 동맹, 수신, 교제(郊祭) 등 여러 천제[7]를 지냈는데, 천제는 황제국만 할 수 있던 것이었기 때문에 조선 성종대에 편찬된 동국통감에선 이것을 매우 깠다.[8]

5세기에도 덕흥리 고분에서 제후라는 표현이 등장하며 장수왕이 고구려로 망명한 북연 황제 풍홍을 '용성왕 풍군' 으로 낮춰 부른 용례가 확인된다.

26년(서기 438) 봄 3월, 처음 연나라왕 풍홍이 요동에 당도했을 때, 임금이 사신을 보내 위로하여 말했다.

“용성왕 풍군(馮君)이 이곳에 와서 야숙을 하고 있으니, 병사와 말이 피곤하겠소.”
풍홍은 부끄러워하면서도 분노하여, 법도를 들먹이며 임금을 꾸짖었다.
二十六年 春三月 初 燕王弘至遼東 王遣使勞之曰 龍城王馮君 爰適野次 士馬勞乎 弘慙怒 稱制讓之
-삼국사기 제18권 고구려본기 제6(三國史記 卷第十八 高句麗本紀 第六) 장수왕(長壽王)

이후 풍홍은 계속 장수왕에게 마치 자신의 하인를 대하듯이 굴다가 남송으로 도망칠려했고, 그것을 눈치챈 장수왕이 군사를 보내 죽여버린다.

일본의 헤이안 시대에 작성된 신찬성씨록은 고구려에 제후왕이 있었음을 드러낸다.

  • 고려국 원라군 저왕(元羅郡 杵王)의 9세손 연노왕(延孥王)
  • 고려국 안류왕(安劉王)
  • 고려국 능기왕(能祁王)
  • 고려 안악상왕(安岳上王)
  • 고려국 장왕 주(長王 周[9])
  • 고려국 구사기왕(久斯祁王)
  • 고려국주 추모왕의 20세손 여안기왕(汝安祁王)
  • 고려국 복귀왕 일사(福貴王 溢士[10])
  • 고려 대방국주 지한법사(高麗 帶方國主 氏韓法史[11])
  • 고려국 보륜왕(寶輪王)
  • 고려국 수모기왕(須牟祁王)

등이 신찬성씨록에 적혀져 있는데 고구려의 제후국이나 왕족의 이름이 보인다.

건국 초에는 군주호로 부족장을 통칭하는 몇 가지 용어가 사용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자세한 점은 군주의 칭호 항목 참조. 왕호에서는 명왕(明王)이나 성왕(聖王), 대왕같은 미칭 역시 확인된다.

그밖에 "성상" 등의 제국의 황실에서 사용하는 예법 용어도 사용한걸로 보인다.일단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문헌 기록에 고구려 사람들이 왕을 일컫어 '성상' 이라 칭했던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안악 3호분의 고분 벽화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대행렬도에 그려진 깃발에 성상번(聖上幡)이라는 글자가 쓰여져 있음을 통해 당시 고구려인들이 왕을 높여 부르며 성상이라 불렀을 것이라 여기는 추측이 존재한다 .[12] 성상이란 용어는 이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기록을 보면 왕을 높여 부르며 성상이라 부른 사례를 자주 발견할 수 있다. 본래 성상이란 용어는 제후국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칭호이다.

고구려가 나당동맹에 패한 후 당나라에 자발적으로 간 몇몇이 있는 반면, 고을덕처럼 고구려의 존재를 잊지 못하는 자들도 있었는데, 고을덕의 묘지명을 해석해보면 고구려의 관직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당나라를 서조(西朝)라고 부르고, 영류왕을 건무태왕(建武太王)이라고 칭하는 등 고구려의 자주성을 볼 수 있다.[13] 여기서 당나라를 서조라고 부른 것은 당나라가 천하의 중심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 같은 고서나 광개토대왕비같은 비석, 모두루 묘지명같은 고구려인들의 무덤에는 고구려 임금을 '황천지자(皇天之子)'나 '일월지자(日月之子)', '하백지손(河泊之孙)'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각각 하늘의 아들, 해와 달의 아들, 물의 신 하백의 손자라는 뜻으로 모두 고구려의 군주가 하늘의 화신(化神)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런 미칭들로 고구려가 하늘의 후손을 자처했다는걸 알수있다.[14]

...주몽이 강을 향해 말하였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가는데 뒤쫓는 자들이 다가오니 어찌해야 하는가?”...
...告水曰 我是天帝子 河伯外孫 今日逃走追者垂及如何...
삼국사기 제13권 고구려본기 제1(三國史記 卷第十三 高句麗本紀 第一) 시조 동명성왕(始祖 東明聖王)

생각컨데, 옛날 시조 추모왕(始祖 鄒牟王)이 이 땅에 (나라를) 세웠으니, 출자(出自)는 북부여(北夫餘)인데, 천제의 아들(天帝之子)이요, 그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었다. 알을 부수고 세상에 강림하셨으니, 태어나면서 성스러움이 있었다. …(5자 불명) 길을 떠나 순행하니 남쪽으로 내려가 부여 엄리대수(奄利大水)를 지나치게 되었다. 왕이 나룻터에서 말하기를 "나는 황천의 아들(皇天之子)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신 추모왕이다....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出自北夫餘天帝之子母河伯女郎剖卵降世生而有聖▨▨▨▨▨▨命駕」
巡幸南下路由夫餘奄利大水王臨津言曰我是皇天之子母河伯女郎鄒牟王爲我連葭浮龜應聲卽爲」...
- 광개토왕릉비 제 1면 비문 중 발췌

(생략)...하박(하백)의 손자(河泊之孫)요, 해와 달의 아들(日月之子)이신 추모성왕(鄒牟聖王)께서 북부여(北夫餘)에서 태어나셨다. 천하사방이 이 나라 이 고을이 가장 성스러움을 알지니…(결락) >(생략)...河泊之孫日月之子鄒牟聖王元出北夫餘天下四方知此國郡最聖▨▨▨

- 모두루 묘지명에서 발췌

수서 고려전에는 고국원왕이 '소열제'로 기록돼있지만 이 기록은 '위서'의 내용을 오독하여 잘못 베낀 것이라는 주장이 지배적이라서 외왕내제의 예로 인정하지 않는다. 소열제라는 칭호는 유명한 그 삼국지의 '한소열제' 유비를 뜻하는 것이다.

2.1.3 백제

중국과 조공 책봉 관계를 맺었지만 내부적으로는 황제국처럼 왕족이나 공을 세운 신하들을 제후인 왕과 후로 봉하기도했다. 우리측 사서엔 기록된 것이 없지만 중국 25사송서, 위서, 남제서에 자세하게 기록돼있다. 왕이나 후로 봉작받은 자들 중 (부)여씨성[15]이 많은데 이는 백제왕이 왕족들을 통해 귀족을 누르고자 했기 때문이다.

...... 이에 행관군장군(行冠軍將軍) 우현왕(右賢王) 여기(餘紀)를 관군장군으로 삼았다. 이에 행정로장군(行征虜將軍) 좌현왕(左賢王) 여곤(餘昆)과 행정로장군(行征虜將軍) 여훈(餘暈)을 모두 정로장군으로 삼았다.......

......仍以行冠軍將軍右賢王餘紀爲冠軍將軍. 以行征虜將軍左賢王餘昆·行征虜將軍餘暈並爲征虜將軍.......
ㅡ송서 이만열전 백제조

..."영삭장군(寧朔將軍)·면중왕(面中王) 저근(姐瑾)은 두루 보좌하며 정사를 훌륭히 하였고, 무공(武功) 또한 나란히 견줄만 하니, 이제 임시로 관군장군(冠軍將軍)·도장군(都將軍)·도한왕(都漢王)으로 삼았습니다. 

건위장군(建威將軍)·팔중후(八中侯) 여고(餘古)는 약관(弱冠)의 나이에 (국정을) 보좌(輔佐)하니, 충성을 다함이 일찍이 드러났으므로, 이제 임시로 영삭장군(寧朔將軍)·아착왕(阿錯王)으로 삼았습니다.
건위장군(建威將軍) 여력(餘歷)은 본디 충성함이 있었으며, 문무(文武)에 모두 뛰어나므로, 이제 임시로 용양장군(龍驤將軍)·매로왕(邁盧王)으로 삼았습니다.
광무장군(廣武將軍) 여고(餘固)는 충성을 다하고 정사를 훌륭히 하여 국정(國政)을 밝게 빛내었으므로, 이제 임시로 건위장군(建威將軍)·불사후(弗斯侯)로 삼았습니다." 하였다.......
......"이제 임시로 사법명(沙法名)을 행정로장군(行征虜將軍)·매라왕(邁羅王)으로 삼았으며,
찬수류(贊首流)를 행안국장군(行安國將軍)·벽중왕(辟中王)으로 삼았으며,
해례곤(解禮昆)을 행무위장군(行武威將軍)·불중후(弗中侯)로 삼았는데,
목간나(木干那)는 이전에도 군공(軍功)이 있었고 또한 대방(臺舫)을 쳐서 빼앗았으니, 행광위장군(行廣威將軍)·면중후(面中侯)로 삼았습니다.".....
ㅡ남제서 만동남이열전 백제국조

미륵사 사리함기에는 백제 무왕이 신하들로부터 "대왕 폐하(大王 陛下)"라고 불려진 것과 국왕의 정실을 왕비와 황후를 조합한 '왕후(王后)'라고 불렸음이 확인된다.[16]
삼국사기에는 근초고왕이 열병식 때 중국의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황색 기를 사용했다는 기록과 개로왕 등 여러 임금을 대왕이라고 부른 기록이 있다.

무령왕릉매지석에서는 무령왕의 죽음을 황제의 죽음을 비유하는 단어인 "붕(崩)"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또 한편으론 "어라하", "건길지" 등의 백제만의 왕칭도 같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백제인 미군묘지명(彌軍墓誌銘)을 보면 백제 의자왕이 "'참제(僭帝)'[17]하였다." 라고 쓰여있다.

백제 임성태자의 후손인 오우치 가문의 족보에는 백제 국왕을 '백제국 마한 황제 제왕(百濟國 馬韓 皇帝 濟王)' 이라 부르고 있다.

백제는 또한 고구려, 신라와 비슷하게 천자국만이 한 수 있던 천제(天祭)를 지냈다.

『책부원귀(冊府元龜)』에 “백제는 사계절의 가운데 달마다 왕이 하늘과 5제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도읍에 시조 구태(仇台)[18]의 사당을 세우고 해마다 네 번 제사를 지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이하 생략)

冊府元龜云 百濟每以四仲之月 王祭天及五帝之神 立其始祖仇台廟於國城 歲四祠之......
삼국사기 제32권 잡지 제1(三國史記 卷第三十二 雜志 第一)

2.1.4 신라

중국 국가들에게 조공을 바쳤음에도 법흥왕대부터 진덕여왕대까지 100여년이 넘는 기간 동안 총 7개의 연호를 사용했다.

고구려 보장왕의 아들 안승이 신라로 도망쳤을 때 괴뢰국 "보덕국"을 만들어 그 나라의 왕으로 책봉하거나, 원성왕김주원을 "명주군국"의 "명주군왕"으로 책봉하는 등 자국 휘하에 제후국을 둔 황제국 체제를 지향했다.[19]

왕을 가리켜 황제처럼 폐하라고 불렀는데 이는 삼국유사 문무대왕조나 고려시대 문집 '보한집'에서 그 사례가 나온다. "대왕"이나 "태왕" 같은 호칭도 사용하여 대부분 군주들이 대왕이라고 불렸고 법흥왕진흥왕이 태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해 당시 자국만의 천하관을 지닌 고구려와 동등한 위치에 서려 하였다. 유리 이사금 이후로 내부에서 (朕) 같은 황제의 자칭도 사용하였으며[20] 또 신라 국왕 아래에는 갈문왕이라는 특수한 작위가 있었다.

34년(서기 57) 가을 9월, 임금이 병환이 나자 신하들에게 말했다.

“탈해는 신분이 임금의 친척이요,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고, 여러 번 공을 세웠다. 짐(朕)의 두 아들은 재능이 그를 따르지 못한다. 그러므로 내가 죽은 뒤에는 탈해를 대위(大位)에 오르게 하리니, 나의 유훈을 잊지 말라.”
三十四年 秋九月 王不豫 謂臣寮曰 脫解身聯國戚 位處輔臣 屢著功名 朕之二子 其才不及遠矣吾死之後 俾卽大位 以無忘我遺訓
- 삼국사기 제1권 신라본기 제1(三國史記卷第一 新羅本紀 第一) 유리 이사금(儒理尼師今)

대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1년째에 붕(崩)[21]하셨다. 유언에 따라동해 바다 가운데의 큰 바위에 장사 지냈다. 왕은 평소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늘 이렇게 말하였다.

“짐(朕)은 죽은 후에 나라를 지키는 큰 용이 되어서 불법을 받들고 우리나라를 수호하겠소.”
그러자 법사가 말하였다.
“용은 짐승의 응보인데 어째서 그러하십니까?”
“나는 세간의 영화를 싫어한 지 이미 오래되었소. 만약 추한 응보로 짐승으로 태어난다고 해도 짐이 바라던 바와 맞는다오.”
大王御國二十一年 崩 遺詔葬於東海中大巖上 王平時常謂智義法師曰 朕身後願爲護國大龍 崇奉佛法 守護邦家 法師曰 龍爲畜報何 王曰 我厭世間榮華久矣 若麤報爲畜則雅合朕懷矣
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三國遺事 卷第二 紀異 第二) 문무왕 법민(文武王 法敏)

(생략)...왕이 하루는 배다른 동생인 차득공(車得公)을 불러 말하였다.

“네가 총재가 되어 모든 관리를 두루 다스려서 온 나라를 태평하게 하라.”
차득공이 말하였다.
“폐하(陛下)께서 만일 소신을 재상으로 삼으신다면, 신은 나라 안을 몰래 다니면서 백성들의 부역의 과중함과 세금의 가벼움과 무거움, 그리고 관리의 청렴과 부패 등을 보고 난 후에, 그 관직을 맡았으면 합니다.”...
王一日召庶弟車得公曰 汝爲冢宰 均理百官 平章四海 公曰 陛下若以小臣爲宰 則臣願潛行國內 視民間徭役之勞逸 租賦之輕重 官吏之淸濁然後就職
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三國遺事 卷第二 紀異 第二) 문무왕 법민(文武王 法敏)

…… 8월 21일 계미(癸未)에 진흥태왕(眞興太王)이 관경(管境)을 ▨▨하였으니, 돌에 기록을 새긴다.

…… 세상의 도리가 참됨에서 어긋나고, 덕화(德化)가 펴지 못하면 간사한 것들이 서로 다투게 되니 ……(이에) 제왕(帝王)이 연호를 세웠으며 스스로를 닦아 백성(百姓)을 편케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나 짐(朕)태조(太祖)의 기틀을 이어서 왕위를 찬승(纂承)하여 몸가짐을 조심스럽게 하고, 스스로 삼가면서 ……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천은(天恩)을 입어 운기(運記, 운수)을 열어보았으니 어두운 와중에도 신기(神祇)에 감응하여 …… 사방(四方)으로 탁경(託境)하여 민토(民土)를 널리 얻어서 인국(隣國)들이 신의를 맹서하고[誓信], 화의를 맺고자 하는 사신들[和使]이 교통(交通)하는도다.
八月廿一日癸未眞興太王▨▨管境刊石銘記也世道乖眞𣅀化不敷則耶爲交競▨▨帝王建号莫不脩己以安百姓然太祖之基纂承王位兢身自愼恐▨▨▨▨蒙天恩開示運記冥感神祇應四方託境廣獲民土隣國誓信和使交通府
- 황초령 순수비 비문

"대왕"이나 "태왕" 같은 호칭도 사용하여 대부분 군주들이 대왕이라고 불렸고 법흥왕진흥왕이 태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해 당시 자국만의 천하관을 지닌 고구려와 동등한 위치에 서려 하였다.

포항 냉수리 신라비(迎日冷水里新羅碑)에서는 법흥왕대에 화백회의에 참가하는 모든 귀족들을 왕이라고 불러서 신라 국왕 아래에 제후왕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통일 이후에도 당나라와의 사대적 외교 때문에 소극적으로 바뀌지만 외왕내제 체제를 계속 유지했고, 나당전쟁 승리이후 발해일본을 자신의 번국 취급하기도 했다. 대조영을 신라의 관직인 '대아찬'으로 봉하고, 왜국에 보내는 사신은 스스로 왕성국(王城國)에서 왔다고 칭했다. 신라가 왕성국이라면 왜는 번국이라는 뜻. 이에 분노한 왜국은 무례하다고 사신을 쫓아 버렸다.

신라는 유교를 수입하면서 오악을 정하고 유교식 제사인 종묘를 세웠는데, 종묘의 제도는 비록 제후가 사용하는 오묘제를 썻지만 모순되게도 태조, 태종과 같은 황제의 묘호를 사용했다.[22][23] 당나라도 신라의 묘호 사용을 모르지 않아서 당 중종 때 신문왕에게 구두로 묘호를 쓰지 말라고 조칙을 내렸었지만 신문왕은 조칙을 따르기를 거부했다.

12년(서기 692) 봄, 당나라 중종(中宗)이 사신을 보내 조칙을 구두로 전하였다.

“우리 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는 신묘한 공과 성스런 덕이 천고(千古)에 뛰어났으므로, 황제께서 돌아가신 날 묘호를 태종이라 하였다. 너희 나라의 선왕 김춘추(金春秋)도 그것과 같은 묘호를 쓰니 이는 매우 분수에 넘치는 일이다. 빨리 칭호를 고치도록 하라.”
임금이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고, (사신에게)대답하였다.
“우리나라의 선왕 춘추의 시호가 우연히 성조의 묘호와 서로 저촉되어(같게 되어) 이를 고치라는 칙명을 내리니, 어찌 감히 명을 따르지 않으리오. 그러나 생각해보니 선왕 춘추는 자못 어진 덕이 있었고, 더욱이 생전에 훌륭한 신하 김유신을 얻어 한마음으로 다스려 삼한을 통일하였으니, 그 이룩한 공적이 적다고 할 수 없다. 그가 돌아가셨을 때에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슬퍼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추존한 묘호가 성조와 서로 저촉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을 것인데, 지금 교칙(敎勅)을 들으니 두려움을 이길 수 없다. (사신에게)삼가 바라건대, (그대가) 대궐의 뜰에서 복명할 때 이대로 아뢰어 주시오.”
그 후에 다시는 별다른 칙명이 없었다.
十二年春 唐中宗遣使口勑曰 我太宗文皇帝 神功聖德 超出千古 故上僊之日 廟號太宗汝國先王金春秋 與之同號 尤爲僭越 須急改稱王與群臣同議 對曰 小國先王春秋諡號 偶與聖祖廟號相犯 勑令改之 臣敢不惟命是從 然念先王春秋 頗有賢德 况生前得良臣金庾信 同心爲政 一統三韓 其爲功業 不爲不多 捐館之際 一國臣民不勝哀慕 追尊之號 不覺與聖祖相犯 今聞敎勑 不勝恐懼 伏望 使臣復命闕庭以此上聞後更無別勑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문왕조

즉 신문왕은 태종 무열왕흥무대왕과 함께 삼국 통일을 이뤘으므로 그 공이 너무 커 묘호를 썼으니 당나라가 양보해달라고 전했고, 신라를 무시할 수 없던 당은 그걸 받아들인 것이다. 삼국통일 후 신라의 자존심과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여름 4월, 대신을 보내 조상묘에 제사를 올렸다. 제문에 아뢰었다.

“왕 아무개는 머리를 조아리고 재배(再拜)하며 삼가 태조대왕(太祖大王)진지대왕(眞智大王)문흥대왕(文興大王)[24]태종대왕(太宗大王)문무대왕(文武大王) 영전에 아룁니다.......(이하 생략)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문왕조

이 제문에선 아직 알려지지 않은 신라 태조가 등장한다.
이외 흥덕왕릉비 등 금석문에서도 신라의 '태조 성한'이 등장한다. 성한왕 문서 참조. 신라에서 일부 왕에게 내제의 상징인 묘호를 올렸고, 실체가 모호한 태조의 존재 기록을 볼 때 태조와 태종 이외에도 기록에서 누락된 묘호가 더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25]

삼국사기에 있는 문성왕의 유언에는 헌안왕을 '선황(先皇)의 영손'이라고 부르고 있다. 여기서의 선황(先皇)은 원성왕으로 추정된다. 갈항사석탑기에는 원성왕의 어머니를 조문황태후로 기록하고 있고, 개선사석등기에는 경문왕의 부인을 문의황후라고 부르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문무왕의 어머니가 문명황후로 기록돼 있는 등 신라 왕후를 '황후'로 기록한 경우가 종종 보인다. 월광사원랑선사비를 보면 경문왕이 재위 시절에 황제와 왕의 복합어인 황왕(皇王)이라고 불리기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29대 태종대왕(太宗大王)의 이름은 춘추(春秋)이며 성은 김씨이다. 용수(龍樹)[용춘(龍春)이라고도 한다.] 각간으로 추봉된 문흥대왕(文興大王)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진평대왕(眞平大王)의 딸인 천명부인(天明夫人)이다. 왕비는 문명황후(文明皇后) 문희(文姬)로, 곧 김유신(金庾信)공의 막내 동생이다.

-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 태종 춘추공

위에 적힌 것들 말고도 신라 외왕내제 체제의 증거들을 더 알고 싶다면 해당 링크 참조#

후삼국시대 왕건견훤이 왕이라고 자칭했음에도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겸어사중승상주국한남군개국공식읍이천호라는 관직을 사용해 신라 왕실의 신하를 자처한 것은 이러한 신라의 외왕내제 체제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2.1.5 발해

대외적으론 당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았지만 건국 초기부터 독자적으로 연호를 사용했다. 제 2대 임금 문왕부터 제 11대 왕 대이진이 사용한 연호들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초대 임금 고왕(高王)대조영의 연호는 '천통(天统)'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사에는 없고 태씨 족보에만 남아있어서 신빙성이 떨어진다.

정혜공주 묘비와 정효공주 묘비에서 당시 국왕이었던 문왕을 '황상(皇上)'이라고 칭하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는 신하들과 황족들이 황제를 부를때 쓰던 용어이다.

2005년에 중국 길림성에서 발견된 유적에서는 발해 국왕의 정실아내가 황후라고 기록되어 있다. 제 3대 임금 문왕의 정처 '효의황후(孝懿皇后)', 제 9대 임금 간왕의 정처 '순목황후(順穆皇后)'이다.

함화 4년명 불비상에는 '허왕부'라는 관청이 기록돼있는 것으로 보아 발해왕이 황제처럼 '허왕'이라는 제후왕을 봉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황제국에서 사용하는 3성6부제를 실시했다.

발해의 부흥국들이 부흥 운동 시 한결 같이 자국의 군주를 황제라 칭한 것을 보아 발해의 국왕은 내부적으로 '성왕', '가독부(可毒夫)', '기하(基下)'[26] 외에' 황제 폐하'라고도 불렸을 가능성이 있다. 가독부, 기하, 성왕 등 단어들은 유득공의 '발해고'에서 찾아볼 수 있다.

2.1.6 후삼국

  • 태봉 - 임금이 황제처럼 연호를 사용했다.
  • 후백제 - 국왕연호를 사용했다. 삼국사기를 비롯한 문헌자료에는 기록이 없고 전북 남원 실상사 인근의 조계암 터에 있는 편운 화상 부도에 '정개(正开)'라는 연호가 적혀 있다. 당시 그 어떤 나라도 이 연호를 쓰지 않았기에 의 연호라는 것이 확실하다.

2.1.7 고려

한국 역사상 외왕내제를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한 왕조이다. 나라 밖에선 고려국왕, 나라 안에선 해동천자를 자처했다. 고려사 악지 풍입송조에서 그 예가 나오는데, 풍입송은 원래 송나라의 노래인데 고려가 수입해서 가락은 바꾸지 않되 가사는 고려인이 개사한 노래이다.

해동[27]의 천자는

지금의 부처님[28]으로.
하늘을 보좌하여 교화(敎化)를 펴러 오셨네.
세상을 다스리시는 은혜가 깊음은
원근(遠近)과 고금(古今)에 드물다네.
외국에서 몸소 달려와서 다 귀순하매
사방의 변경이 편안하고 깨끗해져서 창과 깃발을 없애게 되었으니
융성한 덕망은 요(堯)임금과 탕(湯)임금도 견주기 어려우리.

바야흐로 태평시절을 즐기느라고
이곳에서는 악기소리가 솥에서 물이 끓는 듯하네.
또 음악이 가득하고
집집마다 기쁘게 비느라고
옥 같은 향다발을 뽑아 향을 피우네.
오직 우리 임금님의 수명이 만세에 이르러
길이 큰 산과 하늘의 끝과 같기를 바라네.
사해가 태평하고 덕행을 지니심이
모두 요임금 때보다도 낫네.
변경(邊境)과 조정(朝廷)에 아무 사고도 없으니
장군은 보검을 다시 휘두르지 않네.

남만(南蠻)과 북적(北狄)이 스스로 내조(來朝)하여
온갖 보물을 우리 임금님의 궁전[29]에 바치네.
금으로 만든 계단과 옥으로 지은 전각에서 만세를 외치면서
우리 임금님께서 길이 보위(寶位)에 계시기를 바라네.
이러한 태평시절을 만나
음악과 노래 소리가 아름답네.

임금님은 성스럽고 신하는 현명하니
황하수 맑아지고 바다가 잔잔한 때를 만나네.

이원의 제자들은
예상우의곡을 우리 임금님 앞에서 백옥 퉁소로 연주하네.
뜰에 가득한 신선의 음악이 모두 음률에 맞으니
임금과 신하가 태평시절의 잔치에서 함께 취하네.
임금님의 마음이 기쁘니
오늘은 누호(漏壺)를 재촉하여 자주 전하지 말라.

문무 관료들이 절하면서 축하를 드리고
모두 임금님의 장수를 비네.

천자께서 옥연(玉輦)을 타고 돌아가시면
채색한 궁궐과 누각에는 상서로운 연기가 감도네.
미녀들이 성하게 천 줄로 늘어섰는데
음악은 맑고 밝아 모두 신선들이네.
환궁악사(還宮樂詞))를 다투어 노래하여
성수만세(聖壽萬歲)를 알려 주네.

이 노래는 고려국왕을 과장되게 찬양하고 있으며 고려의 황제국 체제를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이다.

고려는 내부에서 영락 없는 황제국으로 황제에게만 올리는 묘호를 국왕에게 올렸고, 폐하태자, 의 호칭을 사용했으며 국왕, 왕태자, 왕후의 생일을 '~~절일(節日)'이라고 명칭을 붙이고 명절처럼 축하 하였다.

(왕을) 종(宗)이라 칭하고 폐하(陛下)·태후(太后)·태자(太子)·절일(節日)·제(制)·조(詔)를 칭한 따위는 비록 참람된 일이라고 하겠으나 여기서는 당시 칭한 바에 따라 기록함으로써 당시의 기록을 존치시켰다.

凡稱宗, 稱陛下太后太子節日制詔之類, 雖涉僭踰, 今從當時所稱, 書之, 以存其實.
『고려사』 찬수 범례(高麗史 纂修 凡例)

왕의 생일을 천춘절(千春節)이라 했으니, 절일(節日)의 명칭은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以王生日爲千春節, 節日之名, 始此.
성종 원년(982) 임오년 여름 6월 갑신일.

황족의 생일에 이름을 붙이는 제도는 황실에서만 할 수 있는 특권이었고, 그렇기에 조선은 왕의 생일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30]

종묘엔 두가지 제도가 있는데 천자의 칠묘제, 제후의 오묘제가 있고 묘호는 천자의 종묘에서만 사용되는 것이었다. 고려 성종은 처음 종묘를 세울 때 오묘제를 택했지만 종묘에 안치된 임금들에게 묘호를 올렸고, 이후 의종 때 칠묘제로 바꾸면서 완전한 천자의 종묘를 세운다.

고려국왕은 노랑색 곤룡포[31]를 입었는데 이는 고려 왕조의 대왕이 마치 중국 왕조의 황제처럼 천하의 중심에 서 있다는 뜻을 표출한 것이다.

건국 초기에 자황포(柘黃袍)를 제정하여 사용하였다.

-고려사: 지 관복 시조지복(視朝之服)

문종(文宗) 12년(서기 1058) 4월. 예사(禮司)에서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어복(御服) 가운데 의례를 갖출 때에는 마땅히 홍색과 황색을 입어야 한다고 하였으나 그 나머지 색도 입을 수 있는지 예전의 문헌을 널리 살펴보고 보고하라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이제 살펴 보건대, 『율력지(律曆志)』에서는, ‘황색은 중앙을 상징하는 색으로서 왕의 의복 색이라.’고 기록하였고, '당사(唐史)'에서는, ‘천자는 적황색을 입는다’ 라고 기록하면서 사서(士庶)들에게는 삼황색(三黃色)의 사용을 금지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또 ‘강사의(絳紗衣)는 초하루 날 조회(朝會)를 받을 때에 착용한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개원례(開元禮)』에서는, ‘황제가 원구(園丘)에서 풍년 비는 제사를 지낼 때에는 강사포(絳紗袍)를 입는다’고 적었으며 또 『고사(古史)』에서는, ‘한 번 염색한 것을 강(絳)이라 하였는데 그 주(註)에 강(絳)은 전홍(縓紅)이다’라고 적었습니다. 기록들이 이러하니 제왕의 의복은 예절을 갖출 때에는 황(黃), 자(赭), 강(絳)의 3색으로 하고, 연향과 같은 작은 모임인 경우에는 편리한 대로 취할 수 있는 것이니 지금 입으시는 홍색과 황색 이외에는 따로 쓸 만한 색이 없습니다.
-고려사 지 관복 시조지복(視朝之服)

고려는 또한 수도인 개경을 '황도(皇都)', '황기(皇畿)', '제도(帝都)'라고 불렀다. 고려인의 묘지명에서도 그 사례가 나온다.

광종(光宗) 11년(서기 960)에 개경을 황도(皇都)로 고쳤다.......(이하생략)

- 고려사: 지 왕경 개성부(王京 開城府)

(생략)...왕욱은 이런 시를 지어 전송하였다.

그대와 같은 날 황기(皇畿)[32]를 떠났건만
그댄 먼저 돌아가고 나만 못 돌아가네.
여함(旅檻)에선 사슬에 매인 듯한 원숭이 신세 탄식하고
헤어지는 정자에선 나는 듯 달려가는 말이 부럽기만 하네.
제성(帝城)[33]의 봄 그리는 마음은 꿈속에만 오가고
해변 고을 풍광에 눈물 옷깃에 가득하여라.
성주(聖主)의 한 말씀 응당 바뀌지 않으리니
설마 어촌 갯가에서 평생 늙게 하시리오....(생략)
...郁贈詩曰, ‘與君同日出皇畿, 君已先歸我未歸. 旅檻自嗟猿似鏁, 離亭還羨馬如飛. 帝城春色魂交夢, 海國風光泪滿衣. 聖主一言應不改, 可能終使老漁磯.’...
-고려사』권90, 열전3 종실(宗室)1

고려시대 비석문과 사료에는 '황상', '황후' 등의 호칭이 매우 많이 나온다. 조선 성종 시절에 편찬된 동문선의 고려 시대 작품 속에서도 '황자(皇子)', '천자(天子)' 등의 단어를 발견할 수 있다.

...(전략)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황상 폐하께옵서는 하늘이 낸 성지(聖智)이라, 총명을 자부하시와, 옛날의 성현(聖賢)으로써 묵은 자취로 삼으시고, 당세의 보필들로써 관원의 수효을 채운 것으로 여기시며, 밤낮으로 옛을 상고하는 근로가 없으시고, 궤연(几筵)에는 어진 이를 맞아들이는 일이 없으시고, 안으로는 종실의 반석처럼 굳건한 세력이 없고, 밖으로는 사직을 호위하는 심복(心腹)의 충성이 적으며, 오직 항상 친압(親押)하는 무리와 복예(僕隸)의 무리로 더불어, 공교한 말을 되풀이하여, 화(禍)의 터전을 만들 따름이십니다. (후략)...

- 동문선 제41권: 청연방조신표(請延訪朝臣表)

...(생략) 육악(六樂)이 다 법부(法部)에 벌여 있고, 구빈(九賓)이 모두 명정(明庭)에 벌여 서서 잔치하며 놀매, 뭇사람과 더불어 같이 즐겨합니다. 공경히 생각하옵건대, 성상 폐하께옵서는 예지(睿智)가 멀리 순(舜)ㆍ우(禹)를 따르시고, 문장(文章)은 한(漢)ㆍ당(唐)보다 뛰어나시어...

- 동문선 제104권: 함녕절[34] 어연의 치어[咸寧節御宴致語]

......삼가 생각하옵건대, 황상(皇上)께옵서, 오직 슬기로우시와, 성인(聖人)을 지으시고, 기(幾 형태로 나타나기 전)을 앎이 그 신과 같사오니, 도(道)가 큼에 무어라 이름할 수 없사와......

- 동문선 제104권: 서경 대화궁 연회의 치어[西京大花宮大宴致語]

천자(天子)의 기상을 바라보오니, 붉은 문이 후번(侯藩)[35]에 환히 열리옵고, 옥신(玉宸)[36]의 거처에서 나옵시니, 누런 일산이 천천히 연로(輦路)에 움직이옵니다. 부노(父老)들은 오히려 뵐 수 있음을 기뻐하옵고, 멀고 가까운 사람들이 서로 즐겨하지 아니하는 이가 없사옵나이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성상 폐하께옵서는 슬기롭고 밝으심이 하늘로부터 받으시었고, 문장은 옛것을 법하였사옵니다.(생략)
- 동문선 제104권: 진강후 저택에서 성가를 맞을 때 교방의 치어[晉康侯邸迎聖駕次敎坊致語]

삼가 생각하옵건대, 성상 폐하께옵서는 덕이 백왕에 뛰어나시고, 공이 삼대(三代 하(夏)ㆍ는(殷)ㆍ주(周))보다 높으시오이다.(생략)

- 동문선 제104권: 황자와 공주를 책봉하는 연회 때 교방의 치어[皇子公主封冊宴禮敎坊致語]

...삼가 생각하옵건대, 왕태자 전하께옵서는, 용과 봉의 자질을 지니시오니, 진실로 천년에 한번 탄생하는 운기에 맞으시옵고, 홍(鴻)과 곡(鵠)이 날개를 폄과 같아 힘들이지 아니하시어도 사해에 높이 나시옵니다. 북극의 통한 은혜를 메시고 구리쇠 문지게를 여시와, 잔치를 베푸셨나이다.(생략)

- 동문선 제104권: 동궁의 입부 연회 때 교방의 치어[東宮立府宴禮敎坊致語]

경종 연간에 새겨진 것으로 보이는 광주 교리 마애약사불좌상의 비문으로 경종의 연호인 태평[37]이 나오고 임금을 황제로 칭했다. 연호를 제정하긴 했지만 실제로 독자적인 연호를 제정한 적은 몇 번 안 된다. 태조 때의 '천수'와 광종 때의 '광덕', '준풍'이 전부다. 이런 연호와 묘호를 사용한 것도 황제국만이 가능한 것이며 고려의 관료 체계인 2성 6부제 역시 황제국의 관료 체제인 3성 6부제에서 가져온 것이다.

황제국의 제도인 봉작제오등작를 시행했고 왕족이나 오등작을 사여받은 신하들을 제왕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궁궐의 대문을 5개로 만든 것[38]도 황제국의 예법이다.

고려는 성종때 유교의 진흥을 위해 왕실에서 유교적 제사를 장려했는데, 이 중 황제국에서만 지내던 제사인 원구단(圜丘壇)을 설치하고, 토지의 신에게 올리는 제사인 방택(方澤)을 실행하였다. 이 중 원구단은 고려국왕이 하늘의 신 상제(上帝)와 오방제(五方帝)[39], 건국군주 태조 신성왕(太祖 神聖王)에게 제사지내는 것으로 그 격이 아주 높은 제사다.

국왕신하에게 조칙(詔勅)[40]이나 제(制)[41]를 내렸고, 신하들은 왕에게 표문(表文)[42]을 올리고, 왕태자에게 전문(箋文)[43]을 올렸다.

조칙이나 제, 표문은 모두 황제국 체제이다. 이런 체제는 고대 삼국도 사용했다. 하지만 후대의 조선은 교지(教旨)[44], 전문같은 제후국 체제를 사용했다.

팔관회나 연등회같은 불교식 행사를 통해 하늘, , , 오악, 산천의 신에게 제사지냈고, 이러한 국가적 행사를 통해 국왕황제와 동일시 하였다. 이런 예로 고려사 예지에 보면 충렬왕대에 몽골에 패한 고려는 제후국의 체제를 따르기 위해 팔관회의 여러 가지를 고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고치는 과정에서 우리는 고려의 외왕내제적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충렬왕 원년(1275) 11월 경진일. 국왕이 본궐(本闕)에 행차하여 팔관회를 열었다. 궁전 마당에 설치한 금오산(金鼇山) 모형의 편액(扁額)에 쓰인 ‘성수만세(聖壽萬歲)’ 4자를 ‘경력천추(慶曆千秋)’라 고치고 그 중 ‘한 명에게 경사가 있으면 온 세상 나라(八表)[45]들이 궁정에 모여들고(來庭)[46] 천하가 태평해진다.’ 등의 글자도 모두 다 고쳤다. 또한 ‘만세(萬歲)’라 외치던 것을 ‘천세(千歲)’로 고쳐 외치게 하고 어연[47]이 가는 길을 황토(黃土)로 포장하는 것을 금지했다.

여기서 우리는 고려가 자국의 국왕을 온 세상의 군주로 표현하고, 황제에게만 쓸 수 있던 ‘만세(萬歲)'를 사용하고, 임금이 다니는 길을 황토, 즉 황제의 색깔로 포장해놓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992년 북한의 현릉에서 발굴된 고려 태조 왕건 동상의 모자는 황제만이 착용한다는 "통천관(統天冠)"이다. 제왕운기에서는 '대금황제가 고려황제에게...'라는 기록이 있는 걸로 보아 고려에게 조공을 바치던 여진족이 금나라를 건국하고 초기에 고려왕을 황제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황제국을 자처했을 뿐만 아니라, 고려 초중기에는 여진 부족과 탐라에서 조공사절이 오기도 하는 등 한반도 내에서는 천자국인 것처럼 행동하였다. 이런 상황을 볼 때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때 칭제건원하자는 주장은 대외적으로도 황제라 하고 연호를 정하자는 것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고려 초기에 이렇게 황제국 체제를 표방한 것은 단순한 자존심 이상의 의미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거란과 적대하고 있는 입장에서는 거란과 대등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표방하여 한반도 북부의 여진 부족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황제를 자처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고려는 임금이 죽은 뒤 왕에게 올리는 시호에는 '황제(皇帝)'가 아니라 '대왕(大王)'이라고 했다. 아울러 고려 역시 최승로김부식같이 중화사상을 숭상하던 세력이 집권할 때에는 외왕내제를 하지 않고 제후국을 자처하기도 했다.

이 외왕내제 체제는 중국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고려 초중기에는 송나라-거란(-서하)이 서로 견제하고 있었던 데다가 현종 때에는 고려가 송나라도 쩔쩔매는 거란을 쳐발라버린 사례가 있기에 동아시아 외교에서 차지하는 입지가 매우 높아서, 송나라나 거란은 이를 알고도 그냥 못 본 척 하고 넘어갔다. 송 휘종, 고려 인종 때 고려에 온 송나라 사신 서긍이 쓴 기행문 고려도경에서는 고려의 절에 걸린 기원문에서 '황상 폐하'라는 글을 보고 고려 임금을 가리키는 것이라곤 생각 못하고 송 휘종을 가리키는 것으로 오해한 기록은 있다.

금나라는 고려와 군신관계를 맺었지만 고려의 외왕내제 체제는 존중해주었다. 그러다가 원나라의 속국이 되면서 참람한 칭호를 쓸 수 없다 하여 모든 칭호가 제후국에 걸맞게 격하되어 없어졌다.

이후 공민왕이 반원 개혁을 할 당시 외왕내제 체제를 살리려고 했다. 대표적으로 오등작 부활, 12장 면류복 제정, 신하들이 공민왕을 '주상 폐하(主上 陛下)'라고 부르는 등의 조치다. 그러나 고려가 원나라의 간섭을 벗어나긴 했어도 필요 이상으로 원나라나 명나라를 자극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하여 취소했다. 이상 위 두 단락은 고려사에 나온다.

현재 남아있는 태조 왕건의 초상화들을 고려 황제국 체제의 증거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그 초상화들은 고려 당대가 아닌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진다.

2.1.8 조선

조선 왕조는 성리학을 이념으로 삼아 제후국임을 자칭했고, 유교 시스템이 완전히 자리잡으면서 제후국의 예법을 완전히 받아들여 황제국 황실의 용어나 예법을 사용하는 경우가 사라졌고 외왕내제 체제가 없어진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의 곤룡포에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상징인 오조룡(五爪龍)을 사용하였다. 당장 중국의 제후왕 곤룡포에는 사조룡을 사용하였다.

황제의 곤룡포에 칠조룡을 사용하고 왕의 곤룡포에 오조룡을 사용하는것으로 아는 경우도 있지만 대한제국 황제의 황룡포를 보면 명의 황제와 같은 오조룡이었다. 명의 역대 황제 초상화나 채용신의 고종 어진의 용보를 보면 오조룡의 용보를 사용하였다 .

조선에서 신하가 왕을 부르는 명칭엔 주상, 금상, 성상 등이 있었는데 그 뜻이 황제를 부를 때와 그 의미가 비슷하다.

주상(主上) - 조선에서 신하들이 조선 왕에게 주상 전하라고 호칭해서 주상이란 용어를 제후국 왕한테만 사용하는 용어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주상 또한 금상, 성상처럼 황제에게도 사용한 기록이 있다. 그 예로

제갈량이 탄식하며 말했다, “법효직이 살아 있었다면 능히 주상(主上)을 제지해 동쪽으로 가시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동쪽으로 가셨다 하더라도 필시 경위(傾危-형세가 위태로워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촉서 법정전
소정방이 정지절에게 말하였다 군사를 출동시킨 것은 도적을 토벌하려고 한 것인데 지금 마침내 스스로 지키면서 앉아서 스스로 곤혹스럽게 지치고 있으니 만약에 도적을 만나면 반드시 패배할 것이며 나약하고 겁을 먹은 것이 이와 같으니 어떻게 공로를 세웁니까? 또한 주상(당 고종)은 공을 대장으로 삼았는데, 어찌 다시금 군부를 파견하여서 그 호령을 오로지할 수가 있겠으며...
자치통감 당기 16 고종 현경 원년(656)
완안광이 '남조(南朝, 송나라)에서 그자(한탁주)를 쫓아내는게 가능하겠나?'라고 물었다.왕남이 답하기를 주상(主上)의 영단(英斷)으로 어찌 어렵겠습니까?'라고 하자, 완안광이 도리어 웃었으며 비로소 강화가 성립되었고 왕남이 돌아오면서 한탁주의 수급을 금나라로 보냈다
송사기사본말(宋史紀事本末) 83권
여진주(女眞主아골타)가 무리를 모아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며 하는 말이 비로소 너희들과 기병(起兵)하니 글단(契丹/거란,계단)이 잔인함이 오래 되어서 스스로 나라를 세우고자 한다 지금 주상(主上/요 천조제)이 친정하니, 어찌 하겠는가? 사람이 죽음으로써 싸우지 않는다면, 능히 당해낼 수가 없다. 만약 나의 일족을 죽이지 못하겠다면, 너희들은 항복하고 영접하여, 전화위복(轉禍為福)하라
요사(遼史) 천조제(天祚帝) 천경(天慶) 5년 (1115년) 국역

지금 주상(主上/ 금 애종)이 채주(蔡州)에서 수위(受圍/포위를 받음)하니, 공창(鞏昌)으로 천도(遷都)를 의(擬/헤아림)하는 것이다.

금사 곽하마(郭蝦蟆) 열전 국역

금상(今上) - 지금의 임금'이라는 뜻이다 조선왕조 실록을 보면 명나라 황제를 금상황제(今上皇帝)라고 칭하는 기록이 있다 .

성상(聖上) - 집권 중인 황제나 왕을 높여 부르는 존칭으로 정유재란 때 명나라의 정응태가 조선이 일본과 손잡고 명을 치려한다고 조선을 모함할 때 증거로 든 것 중 하나가 묘호의 사용과 왕에게 성상이란 용어를 사용한다는 점이었다.

또 태조·세조·열조(列祖)의 성상(聖上)을 참칭(僭稱)하여 감히 천조의 칭조(稱祖)·존상(尊上)과 같이하였으니, 저들이 2백년 간 공순(恭順)한 의리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선조실록 104권, 선조 31년 9월 21일 계묘 3번째 기사 해당기사

이렇게 조선에서도 황제에게 사용할 수 있는 용어를 사용했고 묘호도 사용하여 황제국을 미약하게나 표방했다.

또한 왕비의 경우, 황후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호칭인 중궁(中宮)이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사후 시호에는 생전에 쓰던 비(妃) 대신 황후에게만 쓸 수 있는 후(后)를 붙여 왕후라는 시호를 사용했다.

신하들도 생전에는 군(君)이라는 제후국의 작위를 주었지만 죽고나서 시호를 내릴 때는 일괄적으로 공(公)의 작위를 내려 봉작제도 일부 시행했다.

조선에서는 왕세자에게 동궁(東宮)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는데 중국 왕조도 황태자에게 동궁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동궁(東宮)이 9촌 5푼, 친왕(親王)이 9촌 2푼 5리, 세자는 9촌, 군왕(郡王)은 세자와 같으니라'는 내용이 있는 걸 보면 중국 내에서는 황태자에게만 동궁이란 호칭을 사용하였고 세자에게는 동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김약로는 말하기를, ‘삼가 《주례》를 상고하건대 공(公)은 환규(桓圭) 9촌(寸)이요, 후(候)는 신규(信圭), 백(伯)은 궁규(躬圭)인데 모두 7촌이며, 자남(子男)의 곡벽·포벽은 모두 경(經)이 5촌이며 명(明)나라의 규제(圭制)는 동궁(東宮)이 9촌 5푼, 친왕(親王)이 9촌 2푼 5리, 세자는 9촌, 군왕(郡王)은 세자와 같으니, 황태자(皇太子)에서부터 군왕에 이르기까지 모두 9촌의 규를 사용하였으나 특별히 분수(分數)의 구별이 있었던 것입니다.

영조실록 영조 26년 12월 19일 무자 1번째기사해당기사

또 왕의 적녀를 공주로 봉하였다. 중국에서는 황제의 딸만을 공주로 봉하지 친왕(親王)의 딸은 군주(郡主)로 군왕(郡王)의 딸은 현주(縣主)로봉한다.

게다가 왕의 무덤을 원(園)이 아니라 능(陵)이라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사전의 설명에 의하면 유교 예법에서는 능이라는 용어는 오직 천자(天子) 및 그 정실 배우자가 죽으면 묻히는 무덤을 능(陵)이라고 하였는데 조선은 명목상 중국 왕조의 제후(諸侯)국임에도 왕의 무덤을 능이라고 했다.

조선 초기엔 제후는 하늘에 제사 지낼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태조 이성계환구단의 명칭을 원단으로 고치고 명나라 몰래 천제(天祭)를 지내다가 세조 대에 이르러 다시 환구단으로 고치고 제사를 지내며 소격서를 설치해 도교식 천제도 지내다가 중종 시기에 전부 없어진다.

명나라 멸망 이후 조선 후기에 소중화 사상이 강해지자 영조 때에 황제 칭호를 쓰자는 상소도 있었지만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48].

고종 시기에 있던 갑오개혁, 을미개혁 때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제후국 용어인 '전하'라는 호칭을 버리고 황제국 용어인 '폐하'도 사용하기 시작했다[49]. 다만 이때는 아직 완전한 황제국을 표방한 건 아니라서 '대군주 폐하(大君主 陛下)'라는 애매한 호칭을 사용했다. 이후 대한제국이 개창되면서 고종이 칭제건원하여 완전한 황제국 체제를 사용한다.

2.2 그 외 아시아 지역 국가들

2.2.1 일본

외부에서는 일본 국왕이라는 호칭으로 교역을 했고, 내부에서는 덴노(天皇)라는 황제의 호칭이 있었다. 단, 명-무로마치 막부 시기에 사용된 '일본 국왕'은 덴노가 아니라 막부쇼군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조선의 경우에는 이러한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으며, 때문에 덴노를 따로 왜황(倭皇) 등으로 호칭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입장에서 직접적으로 마주치는 대상은 결국 실권자인 쇼군(조선 측에선 '일본국 대군' 혹은 '일본 국왕')인지라 이에 대해서 큰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2.2.2 베트남

외부에서는 안남왕, 내부에서는 대월국 황제로 외왕내제 끝판왕이다. 한국 왕조들도 내부적으로는 황제국으로 행세하긴 했지만 100% 황제국 체제를 가진 건 아니었다. 가장 황제국처럼 행세한 고려도 시호에는 대왕을 썼다. 반면 베트남은 외부적으로는 중국에 조공을 바쳤지만, 내부적으로는 완전한 황제국을 칭했다. 명나라 멸망 전까지는 명나라의 눈치를 보느라 황제 칭호를 쓰는 데 조심스러웠지만 명나라 멸망 이후 청나라가 들어서자 조선과 같이 소중화 사상이 강해지면서 대내적으로 공공연하게 쓰게 되었다. 이쪽은 심지어 피휘에 트집 잡히지 않으려고 본명 외에 중국과 대외관계 나설 때 쓰는 이름을 따로 만든 경우까지 있다.

3 유사사례

서양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공국이라는 형태 자체가 사실상 독립국이면서도 의 호칭을 쓰기 힘들어서 만들어진 국가 형태이다.

신성로마제국이 세워질 시기 영국과 프랑스, 에스파냐에서는 종교법 학자들을 동원해서 "왕은 그의 왕국에서는 황제다"라는 식의 이론을 펼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권위를 부정하지는 않되, 자기 나라에 그 어떤 영향력을 끼치는 것도 막아낸 사례도 있다.

프로이센의 경우 프리드리히 대왕 이전까지는 King in Prussia(프로이센에서의 왕)(프로이센 내에서만 왕, 대외적으로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겸 프로이센 공작)의 호칭을 사용하다가 1772년 이후 King of Prussia(프로이센의 왕)의 호칭을 사용했다. 프리드리히 2세가 대왕으로 인정받는 이유 중 하나. 폴란드 분할을 주도하면서 중세 시절 프로이센 공국에 대한 폴란드 국왕의 종주권도 날려 버렸다. 또한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를 차지한 오스트리아와 같이 분할에 나서면서 제국 안에서 황제의 우위를 인정하는 대신 그동안 묵시적으로만 사용했던 왕 칭호를 공개적으로 사용한다. 사실 7년 전쟁 후부터 타국에서도 그냥 왕으로 불렀기에 실력으로 이미 따낸 것을 추인받는거나 다름없었다. 황제가 사용을 거부했건 말건 이미 영국을 비롯한 타국에서 당당한 왕국 취급이라서.

러시아의 경우 모스크바 대공국루스 차르국으로 바뀌면서 차르의 호칭을 사용했으나 러시아 제국이 성립되기 전까지는 외국에서는 차르의 호칭을 인정받지 못하고 모스크바 대공으로 불렸던 적이 있다.

근대 불가리아 왕국 국왕은 불가리아 제국이 사용하던 '차르', 그리스 왕국 국왕은 비잔티움 제국이 사용하던 '바실레우스' (Βασιλεὺς)칭호를 사용했으나, 이들 모두 영어로는 King이라 번역된다.

창작물에서는 묵향에서 크라레스가 원래는 제국이었지만 동맹국인 코린트에게 뒤통수를 얻어맞고 쪼그라들어 외부적으로는 왕국이라고 불렸으나 내부적으로는 여전히 제국이라 자처하며 왕 대신 황제라는 칭호를 썼다.
  1. 원래는 천자를 왕이라고 했다. 제후는 공(公)이라고 했고. 진시황이 자신은 여태까지의 왕과는 차원이 다른 임금이므로 왕을 대신하여 자신을 칭할 새로운 이름을 만들라고 하기 전까진 본래 왕의 의미가 천자였다. 제(帝)는 현대 중국어의 상제(上帝, 기독교의 하나님)의 용례에서 알 수 있듯 본래 신(神)을 뜻하던 말이었는데 진시황이 스스로를 일컫는 말로 황(皇)이라는 글자와 합쳐 사용하면서 의미가 변질된 것이다.
  2. 도올의 중국일기 참고
  3. 일설에는 다물왕
  4. 신라 고유의 왕호이다.
  5. '대국(大國)'은 보통 천자국을 지칭하는 다른말이었다.
  6. '왕태후'라는 칭호는 황제국의 '황태후(皇太后)'라는 칭호에서 가져온 것으로 제후국은 왕대비(王大妃)라는 칭호를 사용해야 했다. 조선이 후자를 사용했고, 그 이전의 국가들은 전자를 사용했다.
  7. 天祭, 하늘에 제사지내는 것
  8. 위 여러 단락의 모든 자료들은 동국통감 삼국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중원 고구려비에서 인용했다.
  9. 장왕의 이름
  10. 복귀왕의 이름
  11. 대방국주의 이름
  12. [1]참조
  13. 다만 고을덕 묘지명은 현재 위작 논란이 있는 상황이다. 건무(建武)는 영류왕의 이름인데, 당대인이 자국 왕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은 상당히 불경한 일이다. 하지만 광개토대왕릉비나 신라, 백제의 자료엔 임금의 이름을 그대로 부르기 때문에 쉽게 판단할 수 없다. 때문에 일각에선 건무(建武)를 영류왕의 연호로 보기도 한다. [2]참조.
  14. 이규보동명왕편이색부벽루를 통해 고려에서도 고구려 임금에 대한 찬양을 엿볼 수 있다.
  15. 백제의 국성은 부여씨이다.
  16. 제후국 국왕의 정실은 '비(妃)'라고 불러야 한다. 조선은 생전에는 '비', 사후 '후(后)'로 명칭을 정했다.
  17. 사사로이 황제라고 칭함
  18. 원문에선 백제 시조는 동명성왕이라고 정정하고 있다.
  19. 삼국사기, 동국통감 참조
  20. 신라인이 직접 남긴 기록인 황초령비/마운령비나,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리 이사금조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21. 황제의 죽음을 비유하는 단어이다.
  22. 묘호는 천자의 종묘에서만 쓰는 것이다.
  23. 종묘의 제도에 있어 고려는 황제국이 사용하는 칠묘제를 사용했고, 조선은 세종대왕 시기에 조선의 고유한 방식을 만들었고 대한 제국의 칠묘제가 섞어 들어갔다. 그게 지금 존재하는 종묘의 정전과 영녕전이다.
  24. 김춘추의 아버지
  25. 고려조선에서는 폐위된 왕을 제외한 모든 왕에게 묘호를 올렸지만, 원래 중국에서도 수당시대 이전까지는 업적이 많은 주요 왕에게만 묘호를 올리는 게 보통이었다. 예를 들면 전한 문서의 역대 황제 목록을 봐도 묘호가 있는 건 초대, 5대, 7대, 10대, 11대, 12대, 14대 뿐이다. 신라가 묘호를 사용했더라도 고려나 조선과 달리 일부 중요한 왕에만 묘호를 올렸을 가능성은 있다.
  26. '폐하(陛下)'나 '전하(殿下)'처럼 신하가 임금을 부를 때 쓰던 용어로 추정한다.
  27. 바다 건너 동쪽 나라. 즉 고려를 의미
  28. 원문은 제불(帝佛)이라 되어 있는데 부처님을 뜻함.
  29. 원문은 천지(天墀)라고 되어있는데 황제 궁전의 대계(臺階)를 의미함.
  30. 대한제국이 개창되고 나서 고종의 생일을 '만수성절(萬壽聖節)', 순종 황제의 생일을 '건원절(乾元節)'이라고 정했다.
  31. 혹은 단령
  32. 개경, 제국의 수도를 뜻함
  33. '황제가 계시는 성'이라는 의미지만 이 시에선 개경을 뜻한다.
  34. 고려 예종의 생일이다.
  35. 제후의 영지를 이름. 즉 진강후의 집을 의미함.
  36. 임금의 거처
  37. 송나라 태종의 연호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경종과 같은 시기 즉위했던 송태종의 첫 연호가 '태평흥국'이기 때문이다.
  38. 천자 5문, 제후 3문. 조선은 3개
  39. 오방신장(五方神將)·오제(五帝)라고도 하며, 동방의 천신으로 봄을 맡은 청제(靑帝), 남방의 천신으로 여름을 맡은 적제(赤帝), 중앙의 천신으로 땅을 맡은 황제(黃帝), 서방의 천신으로 가을을 담당하는 백제(白帝), 북방의 천신으로 겨울을 맡은 흑제(黑帝)를 말한다.
  40. 조서(詔書)와 같은 말. 황제의 명령을 일반에게 알릴 목적으로 적은 문서
  41. 황제의 명령
  42. 표(表)와 같은 말로 마음에 품은 생각을 적어서 황제에게 올리는 글
  43. 제후, 태자에게 올리던 글
  44. 제후가 내리는 명령
  45. 팔표 : 팔극(八極)·팔굉(八紘)·팔방(八方)·팔황(八荒)이라고도 하며, 팔방의 넓고 먼 범위로, 온 세계를 의미
  46. 내정 : 국왕을 접견하기 위해 조정으로 들어오는 일, 또는 조정에 들어와서 국왕을 알현하는 것
  47. 임금이 타는 가마
  48. 이상 모든 자료는 조선왕조실록 참조
  49. 고종실록 1894년 12월 17일(기미) 1번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