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로부터 오오사와 미키오, 아카사카 아키라, 사토 히로유키, 모로호시 카즈미, 사토 아츠히로, 야마모토 쥰이치, 우치우미 코우지
光GENJI 광겐지
역대 뮤직 스테이션 최다 출연자 부문 1위
80년대를 대표하는 남성 아이돌이자, 현재의 쟈니스 = 남자 아이돌의 공식을 완성 지은 전설의 아이돌
1 개요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활동했던 일본의 남성 아이돌 그룹이다.
쟈니즈 사무소 소속이며 1987년 光(히카루)와 GENJI라는 두 팀이 합체해 결성되었고, 1995년 해산하였다.
2 그룹명에 대해
그룹명은 겐지모노가타리의 주인공인 히카루 겐지에서 따왔다.
사무소의 쟈니 키타가와 사장이 그냥 아무 생각없이(…) 붙였다고 한다.
이에 멤버들이 '그룹명이 너무 예스럽지 않은가' 하고 제기하자, 겐지(源氏)를 영어로 하면 된다고 해서 光GENJI라는 이름이 탄생. 멤버 한 명 한 명에게 이미지 컬러를 부여해서 이는 후배 그룹인 SMAP에게도 이어지며, 연장자인 '光'과 연소자인 'GENJI' 유닛으로 나누어 연장자 그룹이 연소자 그룹을 끌어주는 형태가 후일 V6에게 이어졌다.
모로호시 카즈미는 자서전에서 원래 팀명은 라이트 엔 섀도우 (Light & Shadow)였으며, 멤버는 4명으로 리더인 타시 에이코와 사토 아츠히로, 사토 히로유키가 결정되고 마지막 한자리는 멤버들의 추천으로 자신이 들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타시 에이코가 나가고 야마모토 준이치와 아카사카 아키라가 들어오면서 GENJI로 바뀌었다고 한다.
3 활동 이력
1987년 데뷔 앨범 'STAR LIGHT'로 데뷔하자마자 바로 남성 아이돌 톱으로 군림하며 절대적인 인기를 얻었다. 롤러 스케이트를 신고 춤추며 노래하는 퍼포먼스로 유명하며 활동시의 반 누드나 반바지 등 파격적인 컨셉으로 사회현상이라고 불릴 만큼 큰 화제를 몰고다녔다.인기의 정점이었던 88년에는 싱글 '파라다이스 은하(パラダイス銀河)'PV 로 일본 레코드 대상을 받았다.
89년부터 90년에 접어들면서 아이돌 붐이 침체하였기 때문에[1]위와 같은 화제를 낳은 히카루GENJI의 인기도 식어가는 듯 보였지만 고정 팬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90년대 초반까지 안정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멤버들의 개인 활동이 늘어감에 따라 오오사와 미키오, 사토 히로유키가 탈퇴, 멤버들이 5명으로 줄어버리자 95년에는 '光GENJI SUPER 5'라고 그룹명을 개명. 그 해 마지막 콘서트를 열고 해산하였다.
4 멤버
히카루
- 우치우미 코우지(1968년생)
- 오오사와 미키오(1969년생)
GENJI
- 모로호시 카즈미(1970년생)
- 사토 히로유키(1970년생)
- 야마모토 쥰이치(1972년생)
- 아카사카 아키라(1973년생)
- 사토 아츠히로(1973년생)
5 기록
- 1988년 발매한 비디오 '太陽がいっぱい 光GENJI'가 약 30만 장을 판매. 당시 비디오 판매량으로써 최고 기록이었다.
- 88년 연간 오리콘 차트에서 'パラダイス銀河(파라다이스 은하)','ガラスの十代(유리의 십대)','Diamondハリケーン(다이아몬드 허리케인)'이 1, 2, 3위를 독점.
- 데뷔부터 90년까지 8곡 연속 오리콘차트 1위 달성.
- 데뷔부터 해산까지 CD와 비디오 총 판매량 1500만장.
- 팬클럽 회원수는 약 50만명.
- 아이돌 잡지 'Myojo'가 최고부수를 찍었을 때는 히카루GENJI가 활동하던 시절이다. 히카루GENJI의 전성기가 지나고 SMAP이 인기를 얻을 때까지 수난의 시대가 계속 되었다고한다.
6 에피소드
- 전국의 초중학생들에게 롤러 스케이트를 유행시켰다. '光GENJI ローラーパニック'이라는
쿠소게패미컴 게임도 출시되었었다. - 롤러 스케이트로 질주하는 컨셉이 이쿠사베 와타루와 카이저스의 레이카 브라더스 등에게 영향을 끼쳤다.
- 초기엔 격렬한 음악이 많았기 때문에 땀이 장난아니게 흘러 하루 2번은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고 한다… 응?
- 매년 발렌타인 데이가 되면 트럭으로 수십대나 되는 초콜렛이 보내졌다. 사무소에 트럭이 도착하는 영상은 당시 방송들의 큰 볼거리였다. 그 수는 4톤 트럭 38대 분이라고 한다. 흠좀무[2]
- 95년 해산 콘서트 티켓가격이 100만엔(우리나라 돈으로 1000만원 이상) 정도의 가격으로 암표상에게 팔렸으며 실제 그 가격으로 티켓을 구입한 사람이 수두룩하다고…
- 현재로 말하자면 사생팬들이 지금의 EXO 못지 않게 심하게 극성을 부려 멤버들은 물론이고 가족들까지도 사생활 보호가 전혀 되지 않았다. 한 멤버는 자신의 집이 무단으로 투어 여행의 관광 루트가 되어 "그런 짓은 그만둬달라"라며 괴로워했다.
- 88년 인기 정상의 가도를 달리던 시기 최연소 멤버 2명(사토 아츠히로와 아카사카 아키라, 당시 중학교 3학년)이 교토로 수학여행을 갔는데 그 곳까지 진을 치고있는 수백명의 팬들과 카메라맨들에 휩싸여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돌아오는 역인 도쿄에서도 엄청난 수의 팬들이 기다리고 있어 변장을 하고 거짓 정보를 흘리는 방법으로 그 자리를 탈출했다는 이야기가 유명.
- 93년 싱글 '용기 100%'가 애니메이션 닌타마 란타로 주제곡으로 93년부터 2002년까지 쓰였다. 이후 쟈니즈 후배인 Ya-Ya-yah가 리메이크.
- 멤버 중 가장 인기가 많았던 사람은 부동의 센터였던 모로호시 카즈미로, 당시 아이돌 잡지의 인기 투표에서는 팀의 전성 시절과 맞물려 1위를 도 맡았다. 잘 생기진 않았지만 행동이나 표정 등이 매력적이었고, 무엇보다 활력이 넘치는 팀의 이미지에 가장 적합했기 때문. 물론 '못 생겼는데 왜 인기가 많냐' '너무 깝치는 이미지' 등의 이유로 싫어하는 아이돌에서도 1위.
- 모로호시 다음으로는 막내들, 사토 아츠히로와 아카사카 아키라의 인기가 높았다.
- 80년대 초중반 쟈니스 계열의 아이돌(콘도 마사히코, 타하라 토시히고, 노무라 요시오, 소년대 등)과 맞장을 떴고, 실제로 인기와 음악적 성취도에서 우위였던 체커스의 리드 보컬 후지이 후미야는, 훗날 아카시야 산마가 진행하는 토크쇼에 나와서 "87년에, 2달 정도 영국에서 음악 작업도 하고 우리 밴드를 알리는 활동을 하고 돌아왔는데, 공항에 오니 잡지 표지에 모르는 애들이 있더라. 근데, 얘들이 거의 모든 잡지의 표지를 차지하고 방송국에 갔더니 이미 톱스타. 누군지 알아 보니 히카루 겐지였는데... 세상이 2달 만에 이렇게도 바뀌는 구나, 라는 실감을 했다"고 술회 한 바 있다.
- 당시 백댄서로는 현재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는 SMAP, TOKIO, KinKi Kids 등 쟈니즈 사무소의 후배들이 맡았다.
- 당시의 인기를 짐작케 하는 에피소드로, 공연을 위해 이동을 해야 하는데 시간에 못맞출 것 같자 JR에 연락해서 신칸센 발차를 정지시켜 버렸다. 즉 정시 출발해야 할 열차를 자기들 편하자고 우리 갈때까지 기다리라고 한 건데 그게 통할 만큼 인기가 있었다는 것.
이건 JR이 잘못한 거 아닌가? - 세타가야 '9'자 사건의 범인들의 가짜 협박장에서 목표대상이 된적도 있다. 그만큼 유명했단 뜻도 되겠지만…
-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에도 등장하는데 모든걸 버리고 폐인이 된 마츠코가 TV나 보며 뒹굴거리다가 히카루겐지(그 중에서도 우치우미 코우지)를 보고 빠지게 된다. 영화만의 오리지널 설정.
- 오오사와 미키오는 팀 해산 후 주로 연기자로 활동 중이다. 한국에서 가장 익숙한 모습은 백수전대 가오레인저 극장판의 레지스탕스 리더.
- 오오사와 미키오는 16년 전 여배우 키타지마 마이와 혼전 임신으로 결혼해서 아들을 하나 두었으나 이혼. 오오사와 미키오는 최근 재혼할 때까지 혼자 아들을 키웠는데 아들이 지적장애 및 망상증 등을 가지고 있어 상당히 고생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그런데 2013년 12월 이 아들이 DNA감정 결과 친아들이 아닌 것으로 알려졌다.
- 2014년 1월 6일 오오사와 미키오는 기자회견을 통해 보도가 사실임을 발표하였고 현재 변호사를 통해서 법률적으로 부자관계를 소멸하는 신청을 했다고 하는데, 일본법상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니더라도 결혼 후 200일이 넘어서 출생한 경우에는 가정내의 관계를 고려하여 위해서 친자와 동등한 관계라고 인정해주는 경우가 있기 떄문에 그 부분이 고려되는 게 아닌가 하는 얘기가 있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정확하게 결혼 200일째에 출생한 바람에 해당법률의 적용 여지는 없어졌고, 2015년 11월 20일에 열린 재판결과 정식으로 친자관계 없음이 인정되었다.
- 키타지마 마이 측은 보도가 나간 직후 왜 이제와서 이런 이야기를 기사로 나가게 만드는지, 어린 아이가 얼마나 충격을 받을 지 생각하면 화가 나서 견딜 수 없다며 적반하장의 코멘트를 내보냈다.
- 키타지마 마이는 결혼 전부터 남자 관계가 복잡한 것으로 유명했는데 아마 아이 아버지가 누군지 키타지마 본인도 모를 것 같다는 의견이 많다.
- 참고로 아들 측은 주간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자신과 아버지가 DNA검사 결과 99.9퍼센트 부자관계라고 적힌 서류를 봤다고 주장했는데, 오오사와 미키오의 말에 따르면 아들에게 검사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한 적이 없고 서류는 본인이 본 후에 회사 금고에 넣어두었기 때문에 아들이 볼 방법이 없다고 한다.
- 무엇보다 아들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 예전에도 친구집에서 물건을 망가뜨린 걸로 오오사와 미키오가 혼낸걸 가지고 "아버지가 날 죽이려 한다."고 경찰에 신고까지 한 전력이 있어 아들의 주장은 순전히 본인의 망상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