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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前 한국프로야구 구단
250px[1] | |
MBC 청룡 | |
MBC Chungyong | |
창단년도 | 1982년 1월 26일 |
매각년도 | 1990년 1월 18일 |
모기업 | 문화방송 |
연고지 | 서울특별시(1982~1989)[2] |
홈구장 | 동대문야구장(1982년) 잠실 야구장(1982년~1989년)[3] |
구단명 변천사 | MBC 청룡(1982~1989) LG 트윈스(1990~ ) |
1.1 소개
MBC 청룡 - LG 트윈스 프랜차이즈 역사 | |||||
한국프로야구 출범 | MBC 청룡 (1982~1989) | → | LG 트윈스 (럭키금성그룹 인수) |
KBO 리그 원년 시즌 첫 날 삼성 라이온즈와 함께 서막을 열었던 팀.
KBO 리그 역사상 1호 승리구단.[4]
1982년 서울을 연고로 하여 창단된 한국프로야구 구단. LG 트윈스의 전신이며, 모기업은 MBC. 또한 한국프로야구 출범을 주도한 팀이기도 하다.[5] 팀의 상징색은 파란색이다.
1.2 홈구장
창단 초기에는 동대문야구장을 임시 홈구장으로 사용하다가, 세계선수권대회가 끝난 후 잠실 야구장에서 경기를 하게되었다. 정확히는 세계선수권대회때문에 임시 홈구장을 사용한것. 이는 삼미 슈퍼스타즈가 도원야구장을 쓰지 못하고 춘천 등에서 경기한것과 같은 이유이다. 당시 세계선수권대회의 경기장은 잠실, 동대문, 숭의야구장이었다.
1.3 창단과 매각
초대 감독은 백인천으로, 프로야구 원년에 한국 야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감독 겸 선수'로 활동했다[6]. 또한 백인천은 89년 시즌이 끝난 후 다시 MBC의 감독으로 선출되어 LG 트윈스의 초대 감독이 되었다. 즉 MBC 청룡의 처음과 마지막 감독이라는 소리.[7]
프로야구 원년에는 화려한 멤버를 앞세운 강력한 우승후보였다. 프로야구 공식 개막전이 MBC 청룡 대 삼성 라이온즈였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두 팀이 시즌 전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였기에 그런 대진을 짠 것. 이 개막전에서 이종도의 끝내기 만루홈런이 나오면서 한국프로야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다들 알다시피 이 해 청룡은 우승에 실패한다. 1983년엔 김동엽감독을 사령탑에 앉혀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나 선수들이 리그 우승 보너스 문제로 불만을 가져 거의 태업하다시피 하며 패퇴한다. 그 이후 거의 리그의 하위권을 도맡아 한다. 1986년에 신인왕 김건우와 구원왕 김용수의 황금계투를 앞세워 포스트 시즌에 진출할......뻔 했으나 실패한다. 이듬해는 김건우가 교통사고로 중상을 당하면서 팀은 에이스를 잃게 되고 88년과 89년까지 암흑기를 맞는다. 결국 지속되는 성적부진으로 홍보효과가 떨어지면서[8] 매각순위 1순위가 되었고 결국 럭키금성 그룹에 매각된다. 이 과정에서 럭키금성 그룹은 야구단 운영권만 넘겨받았고 MBC 청룡은 존속법인으로 1993년 6월까지 유지되었다.
수도에 있는 야구구단+경기호황시대에 맞춰 급격한 수익을 얻고 있던 방송국이라는 메리트가 있었지만 실상은 운영이 개판 of 개판이었다. 우선 KBO 규약에 프로야구팀은 '자본금 2억이상의 상법상의 주식회사' 여야 한다는 규약이 있었는데, 다른 5개 팀은 이미 창단년도인 82년에 맞춰 주식회사로 전환시킨 상태였지만 MBC 혼자만 86년까지 밍기적 대다 겨우 독립법인화 되었다.
애초에 MBC 청룡은 3S정책으로 대표되는 프로야구 출범에 맞춰 방송사가 참가해야 프로야구가 활성화된다는 이해관계를 통해 창단된 팀[9]이라는 한계가 있었던데다가 MBC는 공식적으로 딱히 누구의 소유권이 있는 기업[10]이 아니었기 때문에 감독은 '사장'이 모셔온 전문가라는 인식도 못받았던데다 그냥 '특정 부서의 長' 정도로만 여겨지는 바람에(...)[11] 야구 좀 본다 싶은 사람들이 개나소나 다 운영에 대해 태클을 걸었다고 한다.
일례로 백인천 감독은 윗선에 전지훈련때 쓸 배트와 공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공은 일단 1다스만 쓰고 있어라. 모자라면 그때그때 보급해 주겠다. 배트도 한두자루 서로 돌려가며 쓰면 될 것 아니냐.' 라는, 지금와서 보면 웃음도 안나오는 개소리를 답변이라고 내놓았다. 이런 집단에서 야구단을 제대로 운영할리가 있나... 당시에도 고교야구와 중학교 야구에서도 개인배트를 썼었고 훈련할 때 공 몇 박스씩 쌓아두고 훈련했다.
거기다 선수단의 파워도 다른 구단에 비해 센 편이었는데, 선수단의 항의에 의해 감독이 잘려나간 게 3번이었다. 좋은 성적을 냈던 김동엽은 1983년엔 이해창의 내부 고발, 1987년엔 선수단 투표로 인해 해고당했고, 1989년도 감독인 배성서[12]는 정삼흠 항명사건 등 불화 끝에 퇴진했다. 그런 전통(?)이 현재도 이어져있다 카더라.
연고지, 홈구장, 기존 MBC 청룡의 팬과 MBC 청룡이 점유하고 있던 모든 권리가 인수 과정에서 그대로 LG 트윈스로 이어졌기에 넓게 생각하면 LG (MBC) 역시 원년구단이다.
1.4 유명 선수들
백인천, 이종도, 하기룡, 김재박, 이해창, 이광은, 김용수, 정삼흠, 김태원, 김건우 등의 스타플레이어들이 활약하였으며, 1990년에 럭키금성그룹에 인수되고, 신생팀 LG 트윈스로 이어지게 된다.
MBC 청룡 | |||
No.2 백인천 | No.5 이종도 | No.34 하기룡 | |
No.7 김재박 | No.1 이해창 | No.41 김용수 | |
No.1 정삼흠 | No.35 김태원 | No.28 김건우 |
1.5 기타
- 원래 이 팀의 이름은 MBC 드래곤즈가 될 뻔 했다. 이유인즉슨... 창단 직전에 팀명 공모를 했는데 '드래곤즈'라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았다는것. 그러나 당시 정서상 지나친 외래어 사용을 지양하자는 분위기가 있었고 이웃나라 리그에 같은 이름을 쓰고 있는 팀이 있다는 이유로 드래곤즈 대신 '청룡'이라는 이름을 쓰게 된다.[13] 더불어 이 당시 MBC의 사옥이 있던 중구 정동[14] 이 과거부터 '용마루'라고 불렸다는 점 때문에 팀 이름으로 '청룡'이 선정됐다고 한다. 그에 대한 배경 설명.
- 팀 자체의 승률을 떠나서 드래곤 간지 때문에 해태 타이거즈와 함께 그 당시 국민학교 학생들이 제일 좋아하는 팀이기도 했다. 나일론으로 만든 싸구려 청룡 윈드 브레이커를 국딩들한테 자주 무료배포했던 이유도 있다.
같은 용 종류인지는 모르겠지만(...) 또롱뇽이 이 팀의 바람막이를 입었다.
- 당연하지만 문화방송에서는 MBC 청룡 경기를 무지하게 자주 중계해주었다. 그래서 MBC는 KBS에 비해 1980년대 프로야구 중계 영상자료를 많이 보유하고 있다. 그 덕에 자회사인 엠스플에서 1980년대 프로야구 프로그램을 때만 나면 잘 틀어준다.
- MBC가 중계할 때는 'MBC 청룡'이라는 풀네임을 자유롭게 언급했지만 KBS가 중계할 때에는 그냥 '서울 청룡'이라는 식으로 명명했다.[15] 공통적인 것은 '청룡'이라는 명칭이 강조됐다는 점. 더불어 연고지인 서울을 적극적으로 많이 내세웠는데, 원정 유니폼 가슴에 '서울'을 한글과 영문으로 박았는가 하면, MBC의 M과 서울의 S를 겹친 캡로고를 썼다.
- 역대 한국 프로야구 팀명 중에서 유일하게 팀명(스폰서명 제외)이 영어가 아닌 한문인 팀이기도 하다. 순우리말로는 WKBL의 춘천 우리은행 한새와 V리그의 서울 우리카드 한새가 있고, 당대 프로축구 팀가운데서는 국민은행 까치, 현대 호랑이, 유공 코끼리, 럭키금성 황소, 일화 천마 등이 있었다.
- 자사 야구팀이라 그런지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 나온 야구광 캐릭터가 응원하는 팀으로도 나온적 있다.(...) 심지어 MBC 내부의 직장인 야구단 명칭도 MBC 청룡이라고 한다.(...)
- 1982년 4월 15일 광주 무등야구장에서 해태 타이거즈를 상대로 1경기 7실책을 저질러 KBO 흑역사의 한 귀퉁이를 차지했었다. 이 흑역사는 32년 후 SK 와이번스에 의해 희석된다.
- LG 트윈스구단은 MBC 청룡 관련 이벤트를 거의 하지 않는 편이지만 개별적으로 청룡 유니폼[16]을 구입하여 직관하러 오는 팬이 아직도 상당수 있으며 MBC 청룡의 흔적은 사라진 지 27년이 지난 지금도 잠실야구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니까 올드 유니폼 데이 좀 하자고 구단놈들아
- 1983년 후기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해 1983년 한국시리즈에 나가기도 했다.[17]
- 서울특별시라는 최대 규모의 연고지와 서울 출신의 많은 스타들을 보유했으나, LG로 바뀌는 1990년까지 포스트시즌은 1983년 단 1회에 그쳤다. 1983년 한국시리즈에서는 1무 4패로 패했기 때문에 mbc-LG 프랜차이즈의 한국시리즈 첫 승은 1990년 삼성전 1차전이다.
1.6 유니폼
유니폼 변천사는 여기로.
1.7 역대 성적
| 우승 |
| 준우승 |
| 포스트시즌 진출 |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 |
연도 | 정규시즌 순위 | 최종 순위 | 팀이름 | 경기수 | 승 | 패 | 무 | 승률 |
1982 | 3위/6팀[18] | 3위 | MBC 청룡 | 80 | 46 | 34 | 0 | 0.575 |
1983 | 1위/6팀[19] | 준우승 | 100 | 55 | 43 | 2 | 0.561 | |
1984 | 4위/6팀[20] | 4위 | 100 | 51 | 48 | 1 | 0.515 | |
1985 | 5위/6팀[21] | 5위 | 110 | 44 | 65 | 1 | 0.404 | |
1986 | 3위/7팀[22] | 3위 | 108 | 59 | 41 | 8 | 0.590 | |
1987 | 5위/7팀[23] | 5위 | 108 | 50 | 51 | 7 | 0.495 | |
1988 | 6위/7팀[24] | 6위 | 108 | 40 | 64 | 4 | 0.385 | |
1989 | 6위/7팀 | 6위 | 120 | 49 | 67 | 4 | 0.423 | |
이후 역사는 LG 트윈스로 |
2 1번 항목을 소재로 한 노래
락밴드 타카피의 경쾌한 펑크 록이다. 노래 가사에 MBC 청룡의 OB(김재박, 이종도, 하기룡, 유승안[25])가 언급된다.
MBC 청룡은 어디로우승 한번 못하고 어디로 사라졌는가
딱 달라 붙는 파란 유니폼
우리 청룡을 찾아주세요김재박은 정말 빨랐지 이종도는 정말 잘 쳤어
끈질긴 투지와 근성으로 무장한 우린 MBC 청룡 (가자~)청룡은 어디로 청룡은 어디로 우린 지금 어디로
누구 본 사람 여기 있나요
청룡은 어디로 청룡은 어디로 우린 지금 어디로
우린 어디로 가고 있는가하기룡은 정말 잘 던져 (잘 던져~)
유승안이는 정말 잘 받지 (정말로 잘 받지~)
끈질긴 투지와 근성으로 무장한 우린 MBC 청룡 (가자~)청룡은 어디로 청룡은 어디로 우린 지금 어디로
누구 본 사람 여기 있나요
청룡은 어디로 청룡은 어디로 우린 지금 어디로
우린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린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린 지금 어디로 가나
어쩐지 이 노래는 박민규의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과 주제가 상통하는 듯 하다.[26]
- ↑ 1982년 출범당시 디자인이며 1986년에 청룡 문양 형태의 엠블렘으로 변경되었다. 폰트 역시 1986년 MBC CI 변경에 맞춰 이른바 문화방송체로 변경되었으며 이 서체는 당시 유니폼의 선수들 이름에까지 사용된다. 1986년 엠블렘 디자인이 삽입된 로고볼.
- ↑ OB 베어스보다도 먼저 서울에 터를 잡은 최초의 서울 연고 구단이다. 이점에 대해서는 LG 트윈스 팬들이 상당한 자부심을 갖는다.
황족부심서울부심 - ↑ 세계야구선수권대회로 인해 1982 시즌 초에는 사용하지 못하고 1982 시즌 말미부터 사용했다. 이후 LG 트윈스로 이어진다.
- ↑ 야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1982년 3월 27일 동대문 삼성전 승리. 이종도의 역전 끝내기 만루홈런에 힘입어 11-7 승리를 거뒀다.
- ↑ 네이버 스포츠 박동희 칼럼 매거진S 하일성-허구연 대담 "마이크가 나를 불렀다." #
- ↑ 코치 겸 선수는 몇 명 더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선수로 출장한 것은 몇 타석 안 돼서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 ↑ 거기에 더해 백인천은 한국 프로야구에서 유일무이한 4할 타자이기도 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초대 타율왕.
- ↑ 경영난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지만, 당시 MBC 매출이 서울올림픽과 경기호황에 따라 매년 급속히 늘어 수백억원의 흑자를 내고 있던 상황이 펼쳐지던 상황이었다.(애시당초 당시엔 광고판매율이 거의 100%에 달하던 상황이었다.) 1989년에 벌어졌다던 MBC의 총파업도 경영난 때문이 아닌, 오히려 민주화 이후 공정언론보도를 쟁취하기 위한 파업이었다.
- ↑ 한국프로농구에서도 비슷한 취지로 생긴 팀이 있었다. 바로 안양 SBS 스타즈. 다만 SBS는 이미 실업농구 시절부터 팀을 운영했다는 점에서 MBC 청룡과 다르다.
- ↑
당시의 뉴스 프로그램들을 보면 믿겨지지 않겠지만일단 당시 MBC가 공식적으로 KBS(88년 이후에는 방송문화진흥원)가 지분의 다수를 차지한 (준)공영방송이었기 때문. 딱히 주인이 없다는 점은 후에 창단된 kt도 마찬가지여서 이런 사정을 알고 있던 전문가나 팬들이 불안해하기도 했다. - ↑ 즉, 높으신 분들 시선으로 봤을땐 인사부장, 운영부장, 영업부장 정도로만 봤다고 생각하면 쉽다.
- ↑ 빙그레 이글스 초대 감독이었다.
- ↑ 공교롭게도 이 팀의 후신인 LG 트윈스와 주니치 드래곤즈는 훗날 자매결연 구단 관계가 된다. 청룡 시절에 결연을 맺었다면 용-용 동맹이 됐을 수도.
- ↑ 현재의 경향신문 사옥. 1970년대 경향신문과 MBC가 한 식구였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때 쓰던 사옥이다.
- ↑ SBS는 MBC 청룡이 LG 트윈스로 바뀐 이후에 생겼기에 청룡 경기를 단 한 번도 중계한 적이 없다.
- ↑ 1986-89 유니폼이 대부분
- ↑ MBC/LG 프랜차이즈의 첫 번째 한국시리즈
- ↑ 전기 3위, 후기 3위
- ↑ 전기 3위, 후기 1위
- ↑ 전기 3위, 후기 3위
- ↑ 전기 5위, 후기 6위
- ↑ 전기 4위, 후기 3위
- ↑ 전기 5위, 후기 4위
- ↑ 전기 7위, 후기 6위
- ↑ 창단 멤버긴 하지만 정작 MBC에서 뛴 건 2시즌 뿐이었고 보통은 빙그레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평가받는 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래에서 언급되는 건 이후 MBC의 역사에서 프랜차이즈 스타라고 할만한 포수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심재원은 이미 롯데에서 우승을 맛본 선수였고, 김동수가 혜성같이 나타났을 때는 이미 MBC 간판이 내려간 뒤였다.
- ↑ 삼미는 성적이 형편없었고, 그것을 '잡을 수 없는 공은 잡지 않고, 칠 수 없는 공은 치지 않는다'라며 '느림의 미학' 비슷하게 서술한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