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전뉴스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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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이 "하... 이거 하기 싫다" 라고 말해주는것 같다 (근데 안하면 뒈지니까...)
사진 속의 인물은 박종세 아나운서.[1] 참고로 1961년 5.16 군사정변 방송도 박종세 아나운서가 했다. 위 이미지의 내용을 방송한 TBC는 이후 전두환이 진행한 언론통폐합으로 KBS에 강제로 매각되어 KBS 2TV, 2FM, 3라디오가 된다.[2][3]

뚜- 뚜- 뚜- 땡- 전두환 대통령은 오늘...

텔레비

전두환 당시, 뉴스 시보를 알리는 "땡~ 소리" 직후에 "두환 대통령은~" 으로 시작되는 뉴스라고 이런 이름이 붙었다. 6월 민주항쟁 이후 대한민국에서 민주주의가 발전하게 된 지 불과 30년도 안되었다. 그만큼 과거에는 대한민국도 북한이나 중국과 마찬가지로 독재정권에 시달렸다는 증거다.

한국 언론사의 흑역사. 이 덕분에 명목상으로는 공영방송이던 KBS와 MBC는 5공 때엔 실질적으로는 국영방송의 색채를 띠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특히 보도 프로그램을 본다면) 사실상 국영방송이긴 했다.

이름의 유래는 제5공화국 당시 방송국(언론통폐합 이후에는 KBSMBC 뿐이지만)이 거의 매일 동시에 무슨 일이 있던 필수적으로 9시 종이 땡~ 울리자마자 "두환 대통령은..." 또는 "오늘 두환 대통령..."으로 시작하는 뉴스를 내보냈기 때문에(본뉴스 시작시에는 앵커의 인사말 후) 땡전뉴스라 불린다. 또한 시보 후[4]에 주요 뉴스 배경음이 나왔기 때문에 "뚜뚜전 뉴스"라고 하기도 했다. 당시 양 방송사의 땡전뉴스 경쟁이 심해서 KBS에서는 전두환 영상만 취급하는 전용 편집실을 두고, 뉴스 편집 데스크와 청와대 담당 기자만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하여 계속 땡전뉴스를 보도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경쟁 방송사인 MBC도 땡전 뉴스 전용 편집실을 만들게 되었다. 한편, 어느 날 전두환 동정 영상이 9시가 되도록 도착하지 않자, 결국 전두환 소식을 MBC 뉴스데스크 첫번째 소식에 담지 못하고 겨우 두번째 소식에 담게 되었는데, 이는 중대한 방송사고로 처리되어 당시 관련 기자는 3개월 감봉과 청와대 출입이 교체되는 중징계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이 있었던 1983년 9월 1일자, 소련군이 자국 비행기를 격추시켜 250여명이 사망한 중대한 사고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날 KBS 뉴스 9, MBC 뉴스데스크의 시작도 "오늘 전두환 대통령은"이었다.[5]

이어 전두환이 서울 어느 거리에서 빗자루를 들고 환히 웃으며 조기 청소하는 장면이 비춰졌다. 자국민이 수백 명이 죽었으며 전세계 외신에 대서특필되었으며, 우리나라 현대사에서도 손꼽히는 대사건이었지만, 전두환이 조기 청소하는 뉴스가 그날 톱 뉴스로 나온 것.

이러한 행태 덕분에 전두환이 자칭하던 호는 일해(一海)였으나, 항간에서는 전두환의 호가 오늘(...)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유행할 정도. 그리고 전두환의 소식 뒤엔 항상 "또한 이순자 여사는..." 혹은 "한편 이순자 여사께서는.."과 같이 또한/한편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영부인 이순자의 소식을 전했기 때문에 당시 이순자의 호가 또한/한편이라는 농담도 돌았다. 그래서 그런지 그때 그 당시에는 전두환과 이순자를 9시 탤런트라 비꼬아서 불렀다고 한다. 땡전뉴스가 나왔던 당시 대중가요로 인기 있던 노래 중에 가수 이선희의 'J에게'가 유행이었는데 데모 군중들은 "Jeon[6]~ 아홉시 뉴스에~"로 시작하는 노래마저 불렀을 정도. 그리고 오후 9시부터 9시 10분까지의 전국 수도 사용량이 최고로 집계되었다고 하는 소문이 있었다. 왜냐하면 어차피 9시 뉴스 초반은 볼 필요가 없으니 이때 주부들이 설거지를 시작하기 때문이라나... 믿거나 말거나.

2 관련 영상

땡전 뉴스를 직접 보고 싶은 사람들은 아래 충격과 공포의 동영상을 감상해 보자. MBC에서 제공되는 20년 뉴스 보기에서 1987년 2월-1988년 2월 뉴스데스크 자료를 참고해도 좋다. 단, 전반적으로 땡전뉴스가 나오지 않는 주말뉴스는 권장하지 않는다. 어째 아래에 있는 동영상 중 하나를 빼면 전부 MBC 뉴스 같지만 넘어가자

관련 다큐멘터리다. 초반만 봐도 충격과 공포 북한 방송 특유의 표현과 억양만 없지 너무 비슷하잖아... 47초에 나오는 영상을 보고 누군가가 생각이 났다면... 참고로 2분 27초 쯤에 저 위의 캡처 화면도 등장한다. KBS의 NHK 표절은 덤이다 영상 중후반에는 전두환이 가는 곳마다 비가 오거나 날씨가 맑아진다며 하느님도 전두환을 돕는다고 전두환을 준신격화시키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엔젤두환 전두환 예수설

MBC 땡전뉴스 모음 마지막은 땡전아닌 땡전뉴스

1982년 8월 31일 뉴스데스크 영상.

[1]

1985년 뉴스데스크의 두 가지 영상. 여기는 시보음이 "뚜 뚜 삐~"가 아니란 점에 유의. 하지만 내용은 영락없는 땡전뉴스다. 아나운서는 이득렬 아나운서.

1986년 KBS 뉴스센터9의 영상. 아나운서는 김광일 아나운서. 변호사 겸 정치인 김광일과는 동명이인.

1982년 KBS 9 뉴스 영상. 남자 아나운서는 최동호 아나운서, 여자 아나운서는 신은경 아나운서.

그 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아침뉴스에서도 땡전뉴스가 나왔다(1). 1982년 9월 1일자 MBC 뉴스쇼 영상. 뉴스 진행 전에 독립기념관 건립 기금 모금 관련 안내부터 하는 것이 나왔다. 하지만 첫 소식이 전두환 대통령으로 시작하다보니 땡전뉴스이다. 땡전뉴스가 나오는 8월 31일자 뉴스쇼 영상이 또 있지만 전두환 관련 보도진행에서 화면이 잘린 것. 아나운서는 최우철 아나운서.

그 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아침뉴스에서도 땡전뉴스가 나왔다(2). 1985년 여기는 MBC 영상. 왼쪽은 최우철 아나운서, 오른쪽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 사람 맞다... 맞히면 최소 정치(혹은 방송)덕후...

심지어 작은 규모의 뉴스에서도 땡전뉴스는 나왔다. 1986년 MBC 생활뉴스 영상. 이 영상에 나오는 정구호 청와대 대변인이 이때 이후 땡전뉴스를 주도했던 KBS 사장으로 임명 되었다는 게 더 흠좀무 아나운서는 이은경 아나운서. 적응 안 되는 벨지움 심지어 EEC를 구주공동체라고 한다!-



라디오에서도 땡전뉴스는 나왔다. 1984년 MBC 라디오 녹음. 다른 방송사와 혼신되는 잡음도 있다. 아래 멘트는 영상 속에서 나오는 라디오 멘트.

(광고) 여자:방송 광고의 모든 것을 도와드리겠읍니다[7] 남자:한국방송광고공사(현 공익광고협의회)

시보멘트 : MBC, 여러분의 부산문화방송입니다. HLKU
시보광고 : 여름은 여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금성 전천후 냉장고
시보멘트 : 냉장고의 제3시대 금성 전천후 냉장고, 금성사 제공시보 6시를 알려드리겠읍니다.
시보음 : (정각 되기 몇초전의 멜로디) 뚜~♪ 띠또따또따뚜~♬[8] (정각이 되었을때) 땡~![9]
뉴스멘트 : MBC 6시 뉴스입니다. 두환 대통령은 오늘 오후 청와대에서 방한중인 쿠시아노비치 발데라마 감사원장을...[10]

3 언론들의 행적

실제로 전두환은 자신의 프로파간다를 매우 적극적으로 활용했는데, 조선일보 기자 출신인 허문도를 공보비서관에 임명하여 정책 홍보에 매우 요긴하게 써먹었고 자신의 해외 순방 때에도 몇 시간이나 방송 분량을 할양하여 생방송을 하게 하는 등 언론을 자기 입맛대로 요리하였다.[11]

특히 각 방송국들은 전두환의 해외 순방 비디오를 개인 소장용으로 따라 만들어 준다던지 전두환이 애청했던 '수사반장' 등의 드라마 녹화 테이프를 손수 조공해 갖다 바치는 등의 행태를 보여[12], 이 시기 언론이 얼마나 권력에 굴종적인지를 보여주었다. 일명 각하만을 위한 다시 보기 서비스. 더 알고 싶은 사람은 KBS 미디어 포커스가 6월 항쟁 20주년 특집으로 만든 전두환 정권, 그리고 방송을 참조. 그리고 방송사에서 그것도 모자랐는지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아예 정권홍보성 편파드라마를 15번에 걸쳐서 방영했으며 이는 KBS의 방만한 경영 태도와 가뜩이나 심각한 양 방송사의 편파보도에 불만을 가진 시청자들을 분노시켜 결국 남부지방의 농촌을 중심으로 조금씩 퍼져나가던 KBS 시청료 거부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데 크나큰 기여를 하게 된다. 사실 당시 정부 차원에서 이를 막기 위해서 대도시 지역에서도 통합공과금제를 도입하기도 했으나, 어차피 편파보도 문제를 제외하더라도 KBS도 광고 방송을 하고도 비싼 시청료를 거두었다. 신문사에서 전두환을 비판할 수 없어 TV 드라마나 오락 프로그램을 대신 까던 게 당대 풍토였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비싼 시청료를 거두면서 만화영화도 대부분 외제로 채운 점[13], 선정적이거나 폭력적인 외국 드라마도 상당수 편성했던 점 등은 엄연한 사실이었던지라[14], 반 정부적인 색채를 띠긴 해도 대놓고 잡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리고 87년 6월 항쟁 이후에도 KBS가 여전히(정확하게는 88년 상반기까지) 편파적으로 뉴스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시청료 징수율이 50% 밑으로까지 떨어졌다.

결국 1984년 1255억원으로 파크를 찍었던 KBS 시청료 수입은 1987년에 1000억원선을 밑돌았고, 1988년 789억원으로 급감했으며 반대로 올림픽, 3저호황의 영향으로 광고수요가 크게 증가함에 따라 1980년대 후반 KBS 재원구조는 상업 방송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급속히 상업화 되었다.

이는 지금까지도 텔레비전 수신료가 2500원으로 동결되는데 크나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직후, 시민운동가 출신 서영훈 사장이 부임해 한동안은 방송민주화, 제작자율화 바람이 불어 공영방송으로서의 모습을 보이는 듯 싶었다. 과거 흑역사를 스스로 반성하는 듯한 방송도 나오고 해서 시청자들이 이제 정신 차렸구나 싶었지만, 1990년 3당 합당으로 초거대여당인 민주자유당이 탄생하자 서영훈 사장은 바로 쫓겨났다.[15] 그를 대신해 새로 부임한 서기원 사장 하에서 이전처럼 특정 정권에 기생하는 국영방송과 같은 행보를 보이면서 공영 방송으로서의 명분을 다시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홍두표 사장하에서 보도국에 대대적인 쇄신을 가하고 1TV 광고를 폐지하고 나서야 겨우 나아졌다.

그리고 이런 과거는 2010년대 현재까지도 시청자들이 수신료 인상을 반대하는 가장 큰 근거로 작용하고 있다. 사실 기형적 재무구조, 비효율적인 인건비 지출 등 여러가지 문제점이 있기는 하지만, 이 땡전뉴스를 비롯한 '정권에 기생하는 더러운 놈들'이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가장 결정타로 작용하고 있다. 웬만한 시청자들은 이런 전력이 있는 방송사를 믿을 리가 없으니 "내가 뭘 믿고 니들한테 돈을 더 줘?", "그렇게 돈이 부족하다면 1TV 광고를 다시 하면 될 거 아냐?"라는 논리로 나오면, KBS 측은 반박할 거리가 없어지기 때문.

의외지만 한동안 MBC에서 땡전뉴스를 방영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 이는 1982년 6월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공보수석비서관 겸 청와대 대변인직에서 MBC 사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 이웅희가 전두환에게 TV뉴스 맨 앞에 항상 대통령이 나가는 걸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을 전두환에게 설득했는데 의외로 전두환도 이에 수긍은 해서 MBC에서 땡전뉴스가 나오지 않았다.[16] 하지만 1년 정도가 지난 1983년 경, 참모진의 말을 듣고 나서 생각이 바뀐 전두환은 이웅희를 부른 다음에 열심히 갈궜고 결국 MBC에서 다시 땡전뉴스가 나오게 되었다.[17] 망했어요

그리고 KBS 2TV에선 1TV에서 방영되는 땡전뉴스와 시간대가 겹치던 "생방송 오늘"[18]이 땡전뉴스를 피하려던 시청자들 덕분에 시청률이 높게 나왔는데[19][20] 당시 윗선에서 두번째 꼭지 부분을 재미 없게 해달라는 요구에 진짜로 두번째 꼭지 부분을 일부러 재미없게 만들었다는 얘기도 있고, 그래도 시청률이 높게 나오자 1987년 상반기에 아예 폐지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뭐, 위에서 까라면 까야 하던 시기였으니...

다만 의외로 일요일만큼은 땡전뉴스가 잘 방영되지는 않았는데[21] 이때 KBS와 MBC에서 평일뉴스와 별개로 심층 뉴스 프로그램[22]인 뉴스 파노라마-MBC 뉴스센터를 편성했기 때문. 하지만 충성 경쟁은 어쩔 수 없었는지 1984년 MBC에서 뉴스센터를 뉴스데스크로 통합시켰고, 동시기 KBS1에선 뉴스 파노라마를 8시로 옮기고 기존 뉴스 파노라마가 편성되던 시간대에 KBS 뉴스센터 9를 방영한 바 있다(...) 희대의 전파낭비 다만 KBS에선 1986년에 어찌된 모양인지 몰라도 다시 뉴스 파노라마를 복구 시켜놨다. 그러나 MBC에서 방영된 뉴스센터는 전두환 집권 기간이 끝난 1989년이 되어서야 부활했다.

후일담 아닌 후일담으로 1988년 4월 중순부터 1996년 9월까지는 KBS 뉴스 9와 뉴스데스크에선 주요 뉴스를 보내지 않고 바로 본방송을 시작했고[23] SBS도 비슷하게 평일 메인 뉴스도 마찬가지로 주요 뉴스를 내보내지 않고 바로 본방송을 시작했다는 흑역사가 있다.

그래서 당시 KBS 뉴스 9과 MBC 뉴스데스크 자료를 보면 "오늘의 주요 뉴스" 부분이 없었던 것.[24] 윗분들과 간부진이 문제인 거지 방송 형식이 문제인 건 아닌데...[25] 후발주자인 SBS는 1994년부터 KBS 뉴스비전과의 경쟁으로 주요뉴스부분이 도입되기는 했지만 개편때마다 사라졌다 재도입되었다를 반복하다 1997년 5월이 되어서야 완전히 정착되었다.

백괴사전땡전 뉴스 문서에서는 땡전 뉴스를 풍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예 시간 함수를 써서 매일 밤 9시부터 10시까지만 문서의 내용이 보이게 해 놓았으며, 로고도 29만원짜리 지폐와 대갈백과로 바꿔치기했다. 이 때문에 다른 시간대에 문서를 보고 싶으면 편집을 누르거나 해설을 봐야 한다.

4 관련 인물

  • 전두환 - 당시 대한민국의 대통령
  • 이광표 - 당시 문화공보부[26] 장관. 이후 연합통신, 서울신문 사장.
  • 허문도 - 당시 언론 통폐합 기획자. 이후 정무수석비서관. 국토통일원 장관.
  • 이원홍 - 1980년 8월-1985년 2월까지 KBS 사장 및 1985년 3월-1986년 8월까지 문화공보부 장관. 이후 대한무역진흥공사 이사장, 한국차문화협회 회장
  • 박현태 - 1985년 3월 ~ 1986년 8월까지 KBS 사장. 이후 민정당 국회의원, 동명정보대(현 동명대학교) 총장
  • 정구호 - 1986년 8월 ~ 1988년 11월까지 KBS 사장. 이후 청와대 공보수석비서관.[27]
  • 강용식 - 당시 KBS 보도본부장. 이후 문화공보부 차관.
  • 최동호 - 당시 KBS 9시 뉴스 앵커. 이후 KBS 부사장, 세종대 교수, 세종사이버대 총장.
  • 김광일 - 당시 KBS 9시 뉴스 앵커
  • 박성범 - 당시 KBS 9시 뉴스 앵커. 이후 KBS 보도본부장. 한나라당 국회의원.
  • 이윤성 - 1984년 11월-1985년 2월까지 KBS 주말 9시뉴스 임시앵커[28] 이후 한나라당 국회의원[29], 현 MBN 뉴스 앵커.
  • 이진희 - 1980년 7월-1982년 6월까지 MBC 사장 및 1982년 6월-1985년 2월까지 문화공보부 장관, 이후 서울신문 · 스포츠서울 사장
  • 이웅희 - 1982년 6월 ~ 1986년 2월까지 MBC 사장 및 1986년 8월-1988년 2월까지 문화공보부 장관. 이후 한국반공연맹 이사장, KBO 2대 총재, 한국신문협회 회장.
  • 황선필 - 1986년 2월-1988년 8월까지 MBC 사장
  • 이득렬 - 당시 MBC 뉴스데스크 앵커[30]. 이후 문화방송 사장, 한국관광공사 사장.
  • 강성구 - 당시 MBC 보도국장, 해설주간, 뉴스데스크 앵커[31] 이후 1993년~1996년 문화방송 사장을 거쳐 새천년민주당/한나라당 국회의원[32]
  • 최우철 - 당시 MBC 뉴스쇼 및 여기는 MBC 앵커. 이후 아주대학교 교수, 대한방송언어연구회 회장.
  • 김기도 - 당시 MBC 출입기자 및 청와대 방송담당 공보비서관. 이후 나사렛대학교 교수.
  • 하순봉 - 당시 MBC 정치부장. 이후 국무총리비서실장, 제11대 및 14~16대 국회의원, 경남일보 회장, 새누리당 상임고문.

5 과거의 유산?

군사독재가 종식되고 민주정부가 들어서면서 대통령에 대한 무분별한 찬양일색의 뉴스는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KBSMBC와 같이 정부의 입김이 강한 방송국에서는 아직까지도 언론 매체가 국가중대사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보다는 그에 따른 대통령의 행보를 위주로 편성되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땡전뉴스에서 비롯된 권위주의적인 인식의 유산이라는 견해를 내놓기도 한다. 물론 대통령은 분명 그 자체가 하나의 헌법 기관으로서 기능하기도 하고, 대통령제 국가인 대한민국에서는 여러 정치적인 사건들이 대통령을 중심으로 돌아가므로 이런 행보들은 언론에 보도되어야 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대통령 개인은 어디까지나 국가의 직무를 수행하는 일을 직업으로 가진 시민의 하나일 뿐이므로 뉴스는 어디까지나 사건과 사실들을 중심으로 보도되어야 한다. 따라서 오늘날의 언론들도 땡전뉴스를 반면교사 삼아 언론으로서의 사명감을 갖고 과거의 흑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6 각종 매체에서 땡전뉴스

  • 인디밴드 밤섬해적단이 땡전뉴스란 제목으로 곡을 썼는데 상관없다. 가사가 다음과 같다.
(틱,틱,틱, 땡!) "전두환 대통령께서는... 우람노ㅇ리ㅏㅈ보ㅓ허ㅗㅜ무ㄴ이ㅑ홉지허ㅚㅈ바어ㅗ해ㅗ혀몬여현ㅗㅂㅎ"

(틱,틱,틱, 땡!) "전두환 대통령께서는... ㄴ아허ㅣㅗ미마ㅣㅣㅑㅓㄱㅁ운히ㅏ버ㅚㅇ하ㅗㅓ미ㅏㄴ휘ㅏㅁ너무지ㅏ조햐ㅐㅕㅗ"

(...) 진짜다. 라이브 공연 영상을 참고. 밤섬해적단이 그라인드코어 성향의 밴드라서 가사 자체가 거의 안 들린다.
  • 트로피코 4에서 TV 황금시간대에 자신의 방송을 넣는 포고인 굿모닝 트로피코를 유저 한글화에서는 땡전뉴스로 번역했다. 심히 적절하다.
  1. 아이러니하게도 신군부의 언론통폐합으로 당시 몸담고 있는 동양방송의 고별방송에서 작별을 고해야만 했다...
  2. 해당 방송은 1980년 8월 31일 동양방송에서 방송된 '내가 본 전두환대통령'이라는 제목의 방송.
  3. 별도로 박종세 개인은 언론통폐합으로 언론인 933명이 해직되는 가운데서도 KBS 방송주간으로 자리를 옮겨 별 탈 없이 은퇴했다. 참고로 TBC 이전에 원래 KBS 출신 아나운서였고, 언론통폐합 당시 KBS의 사장이었던 이원홍이 공무원 기질 있는 오리지날 KBS 출신들보다 사기업 출신의 눈치 빠른 TBC 출신들을 더 좋아했다는 후문이 있다.
  4. 다만 KBS1에서 80년대 중반부터 89년까지 일일연속극(혹은 스포츠 중계, 주말엔 광고)이 끝나고 나서 ID가 나온 뒤에 바로 오프닝이 나왔다(90년~93년엔 9시 뉴스 오프닝 화면에 시보가 나왔다).
  5. 그 당시 정부에서는 얄짤없이 "전두환 대통령~"으로 시작하는 기사를 톱으로 내라고 지시했으며, 신문이었던 조선, 동아일보나 한국사진기자협회에서 발행한 간행본이었던 보도사진연감(1981년판부터~1987년판까지) 등도 1면으로 무조건 올려야 했다.
  6. 단, '전두환'의 로마자 표기는 영어식 발음에 의거하여 제멋대로 정한 'Chun Doo-hwan춘두우환'이었기에 'J'와는 맞지 않다. 매큔-라이샤워 식으로는 'Chŏn Tu-hwan촌투환'.현행 로마자 표기법으로는 'Jeon Duhwan'. 한국인 이름의 로마자 표기 항목도 참고하자. 가끔 현재까지도 그렇게 표기하긴 한다.
  7. 84년 당시니 읍니다가 맞다.
  8. 원래 음은 "시~라~솔~♪ 레솔(낮은)시(높은)레(낮은)솔시(높은)레~♪(또는 미~레~도~♪ (낮은)솔(높은)도(여기서부터 전부 낮은 음이다)미솔도미솔~♪)"이다. 이 시보음은 1982년 9월 4일에 박춘석, 길옥윤, 엄기돈, 정서봉이라는 작곡가가 작곡을 완료한 MBC 시보음으로 보이는데 1995년 7월 31일까지 사용했다. "뚜~♪ 띠또따또따뚜~♬" 표현은 강풀의 만화에서 나온 땡전뉴스 장면에서 따온 것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9. 1987년까지는 '시'에 가까운 정각 알람 소리를 썼으나, 그 다음 해부터는 높은 도에 가까운 정각 알림 소리를 1999년 상반기까지 썼다.
  10. 쿠시아노비치 발데라마는 1984년 당시의 페루 감사원장으로 1984년 3월에 방한했다.
  11. 참고로 허문도는 이후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어용 축제 국풍81을 기획·개최한다. 전두환의 군출신 측근인 허삼수, 허화평과 함께 속칭 '3허'로 불리면서 5공초기 그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는 막강한 권력 실세였다.
  12. 여담이지만 이후에 청와대에서 KBS로 이 자료를 이관했는데 오히려 당시 방송 프로그램 보존에 도움이 된 측면이 있었다고 한다(...) 왜나하면 198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프로그램에 대해 자산이라는 생각이 없었고, 보존을 한다 하더라도 주요 교양 프로그램이나 뉴스 프로그램 위주로 보존했기 때문이었다. 방송 자료를 전량 보존하기 시작했을 때가 86아시안게임서울 올림픽을 거치면서 자료 부족 문제를 깨달은 방송사에서 80년대 말부터 전량보존을 시작한 게 시초고, 그 전의 방송 자료는 테이프 돌려쓰기 때문에 보존되어 있는 자료가 많지 않다고 한다. 해당 사실이 언급된 미디어 포커스 2편에서도 5공 당시의 방송 자료가 여러가지 이유로 사라지는 일이 많았는데 이 이관된 자료가 당시 멸실된 기록의 빈 부분을 채워주고 있다는 멘트가 나왔다.
  13. 그러나 1980년의 폭력물 추방의 여파 때문인지 명랑물이 SF보다 우위를 점했다고 한다.
  14. 그러나 전두환 집권 초기인 1980년 8월에 국보위가 사회정화운동의 일환으로 폭력 프로그램 편성 금지 정책을 만들어서 단속하긴 했지만, 대중들의 욕망 때문인지 결국 실효를 보지 못했다.
  15. 이에 항의해서 벌어진 파업이 이른바 1990년을 풍미한 KBS 사태다. 물론 결과는 # 2012년 언론사 공동파업처럼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16. 그렇다고 이웅희가 MBC에서 전두환을 찬양하는 방송을 완전히 없앤 것은 아니었다. 그저 땡전뉴스만 없앴을 뿐 대신 이런식으로 연말특집 프로그램 등을 활용해 더 교묘하고 세련되게 전두환을 찬양하는 방송을 내보냈다. 단지 전두환의 취향에 완곡표현을 선호하는 이웅희 스타일보다 호탕하고 직설적인 이진희, 이원홍 스타일 쪽이 더 맞았던 것일지도. 이는 일제시대때 문화통치와 비슷한 맥락이라 볼 수 있다.
  17. 참고: 한국대중매체사 563p, 강준만 저.
  18. 방영 시간은 평일 20:50 - 21:25. 지금의 2TV 생생정보와 비슷한 성격의 프로그램이다.
  19. 다만 당시 시청률 조사 방식이 지금처럼 피플미터식은 아니고 전화, 설문조사 형식이었다는 건 감안하자.
  20. 그렇다고 땡전뉴스가 아예 방송되지 않지는 않았는데 9시 정각에 뉴스센터를 연결하고 간추린 소식이라 쓰고 땡전뉴스라 읽는 코너를 내보냈다(...).
  21. 간간히 땡전뉴스를 앞부분에 편성한 적은 있다. 그래도 평일에 비하면 사실상 없는 거나 마찬가지.
  22. 이 중 뉴스 파노라마는 뉴스 프로그램이라기 보다는 시사 프로그램의 형식을 띠고 있기는 한데, 사회고발적인 성격은 약했고(그런 건 추적 60분이 당담했다. 물론 당시 정치 상황상 한계는 많았지만) 계몽적인 성격이나 다큐멘터리적인 성격이 강했다.
  23. 다만 프로그램 예고를 내보내긴 했고, 1991년 MBC 뉴스센터도 주요 뉴스를 편성하고 나서 본방송을 시작했으나 몇 개월도 지나지 않아 흑역사化...
  24. 다만 본방 시작 직후에 앵커가 주요 소식 요약을 하는 경우는 있었다. 현재도 KBS 뉴스 5나 중국 CCTV신문연파에서도 방송 시작 직후에 앵커가 이런 식으로 주요 소식 요약을 한다.
  25. 참고로 당시 검열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시사 프로그램들 자료를 보면 (예시: 뉴스비전 동서남북, 기동취재 현장, 시사매거진 2580) 프로그램 맨 앞부분에 헤드라인을 보내고, 그 다음에 광고를 내보낸 다음에(KBS1 시사 프로그램은 해당되지 않는다. 스포츠 중계 프로그램과 특집 프로그램을 제외하면 몇 번의 블록 광고를 제외하고 광고 편성을 안했다) 본방을 시작했다.
  26. 현재의 문화체육부+방송통신위원회에 미래창조부의 일부 기능이 포함된 부서. 독재정권에서 주로 하는 일은 언론통제와 종교단체 관리였다.
  27. 덧붙여 1984년 경향신문 사장 시절 당시 사실상 전두환의 장기집권을 위해 <88년 평화적 정권교체를 위한 준비 연구>라는 보고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28. 그 전에는 보도본부 24시의 앵커를 맡았으며 임시앵커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KBS 뉴스센터 24시 - KBS 보도본부 24시의 앵커를 맡다가 1988년에 특파원으로 발령나고 1993년에 KBS 2TV 뉴스쇼의 앵커를 맡다가 그 해 7월 개편에 따라 KBS 뉴스 9의 앵커로 지냈다. 1995년에 민자당에 입당하면서 KBS를 퇴사했다.
  29.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직전 "또 하나 반가운 것은 10명의 기초단체장 가운데 옹진군은 무투표로 당선됐고 나머지 9군데도 좀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천안함 피격사건이 바로 인천 앞바다에서 일어났다"라는 망언으로 파문을 일으켰다.
  30. 1974년부터 1987년까지 13년간 MBC 뉴스데스크를 진행한 엄기영 앵커 다음 장수 앵커.
  31. 1987년 5월부터 1988년 11월까지 진행한 앵커. 내귀에 도청장치로 유명한 방송사고 뉴스 앵커로도 잘 알려져 있다.
  32. 2000년 새천년민주당 소속으로 당선되었으며 2002년 탈당 후에 한나라당에 입당했고, 2004년 총선에서 낙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