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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기다(PEGIDA: Patriotische Europäer gegen die Islamisierung des Abendlandes, 서방세계의 이슬람화에 저항하는 애국적 유럽인들)는 2014년 10월 독일 드레스덴 지방에서 조직된 반이슬람[1] 비영리 정치 조직.
같은 달 함부르크에서 벌어진 쿠르드족과 살라피스트 사이의 충돌에 반발하며 ‘독일 땅에서 종교전쟁에 반대한다’는 취지로 설립되었다.
본인들이 나치와 다르다는것을 보여주기위에 쓰레기통에 나치의 상징물[2]과 안티파마크를 둘다 던지는 그림을 현수막에 묘사하나 공공연히 켈트 십자가[3]나 속칭 비르머 십자기(wirmer-flagge)를 휘두르는 걸 보면 이들이 고인모독[4]까지 저지르는 얼마나 무식한 놈들인지를 알 수 있다. 심지어는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의 유명 구호인 우리가 그 국민이다(Wir sind das Volk)까지 아주 나쁘게 써먹고 있다!
2 활동 내용
2014년 12월 19개 강령을 모토로 내세웠다.
2015년 1월 12일 6가지 요구사항을 발표했다. 대량이민 통제, 이민자 의무 법제화, 극단주의 배제, 치안 강화 등 이민자에 의한 범죄 방지에 중점을 두었다.
같은 날 드레스덴에서는 시위 시작 이래 가장 많은 인원인 2만 5천명이 참가하였다. 하지만 그 밖의 대다수 지역에서는 반페기다 시위에 더 많은 인원이 참가하면서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여기에는 1월 7일 발생한 샤를리 엡도 총격 테러의 여파가 영향을 끼쳤다.
2015년 1월 21일 페기다 창시자이자 대표였던 루츠 바흐만이 과거 행적이 드러나자 사퇴하였다. 1월 28일 바흐만 사퇴 이후 대표 역할을 대행하던 카트린 오어텔 외 네 명의 부대표도 사퇴하면서 수뇌부가 와해되었다.
이후 2015년 2월 2일 오스트리아 빈, 2월 28일 영국 뉴캐슬 등 해외에서도 집회를 주최하였다.
2015년 2월 16일 드레스덴 시장 선거에 페기다 소속 후보를 입후보할 것이라 밝혔다. 선거 결과 페기다의 타티아나 페스털링(Tatjana Festerling) 후보는 9.6%를 득표해 낙선했다.
3 각계 반응
3.1 정치권
좌익 성향인 제1야당 독일 사회민주당은 "페기다는 애국자들이 아니라 인종차별자들"이라 비난한 반면, 우익 포퓰리즘 성향인 독일을 위한 대안은 "현 정부 이민 정책의 당연한 귀결"이라며 페기다를 지지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일관되게 페기다에 대한 반대 견해를 보였다.
- 2014년 12월 12일 "독일에 무슬림을 비롯해 어떤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도 설 자리는 없다."
- 12월 30일 신년 연설에서 "피부색이나 종교가 다른 사람들은 우리 중 일부가 아니라는 뜻으로 '우리가 국민이다'라는 구호가 사용되고 있다."
- 샤를리 엡도 총격 테러 직후인 2015년 1월 8일 "우리는 독일 내 이슬람의 압도적 다수와 잘 지내고 있다. 독일 사회에 분열은 없다"
- 2015년 1월 12일 아흐메트 다부토울루 터키 총리와의 면담에서 "이슬람은 독일의 일부이며 나는 독일의 총리다" 발언 후 다음날 정부 고위관료들과 함께 독일 무슬림 중앙위원회가 조직한 반이슬람 반대 집회에 참석
2015년 1월 25일 슈타인마이어 외무장관은 페기다의 반 이슬람 시위가 독일의 국가 이미지를 훼손하고 있다고 우려를 표명하였다.
3.2 학계
드레스덴 공대의 정치학 교수 한스 포어랜더의 연구에 따르면 페기다 시위 참가자들은 특정 종파나 정당에 편향되어 있지 않은 평균 이상의 교육을 받은 중산층이며, "이주민과 이슬람에 대하여 반대의 목소리를 낼수 없게 만드는 언론과 여론에 대한 비판"이 주요한 시위 참여 동기가 되었다고 집계되었다.
라이프치히대의 극단주의 연구자인 요한네스 키스는 공영방송 MDR과의 인터뷰에서 페기다 주최자 및 참가자의 관점은 극단적이고 비민주적이자 소수자를 경시하는 것이라 평가함과 동시에, 사람들의 공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것이 근거가 없음을 입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외국인과의 교류라는 문화적 변화가 선행되지 않는 한 페기다와 같은 현상은 언제건 재현될 것임을 경고했다. 이와 관련하여 작센 주의 주도인 드레스덴에서 시위가 발발한 것은 독일 내 다른 지역에 비해 작센 주의 외국인 비율이 낮아 외국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큰 것이 원인이라는 분석도 있었다.
4 평가
4.1 옹호론
2014년 12월 발표한 강령 기준 1항에서 페기다는 이민자 수용에 대해서는 인도적 차원에서 찬성하고 있다. 3항 이민자 분산 수용과 4항 EU 회원국의 고통 분담 등의 요구는 EU 내에서 독일이 가장 많은 이민자를 수용함에 따라 재정적 부담과 문화적 변화를 크게 겪고 있다는 문제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BBC 기사에 따르면 2014년 상반기 이민 신청자 수는 독일이 9만 4천명으로 2위(스웨덴, 4만 1천명)의 두 배를 넘고, 전체 이민 신청자의 70%가 독일, 스웨덴, 프랑스, 이태리에 몰려 있다. 결국 EU는 난민 수용 쿼터제를 제안하였고 영국, 아일랜드, 덴마크 등이 이에 반대하였다.
2014년 12월 15일 독일 국민을 대상으로 한 차이트지의 설문조사 결과 페기다의 주장에 대해 30%가 지지, 도합 49%가 공감한다고 응답하여, 부정적 의견을 밝힌 23%의 두 배를 초과하였다. 이 결과는 이상론을 주장하는 사회 지도층과 달리 일반인들은 이민자들로 인한 문제를 현실적으로 체감하고 있음을 입증한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들이 제시하는 해결방안들은 모두 정신이 나갔다.
4.2 비판론
2014년 12월 강령이 발표되기 전부터 페기다 시위의 본질은 무슬림 및 이민자에 대한 차별이라는 평가가 계속되었고, 강령이 발표된 뒤에도 마찬가지이다. 가디언은 칼럼을 통해 "세계화 등 사회 변화에 의해 삶이 힘들어지는 것에 대해 이민자수 증가를 탓하며 무슬림을 희생양으로 삼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명목상으로는 이민자에 의한 범죄가 우려된다고 하지만 창시자 루츠 바흐만 스스로가 폭행, 강도, 절도 등으로 실형을 산 범죄자라는 점에서 준법이라는 명분은 타당성을 잃었다. 결국 나치 추종 및 차별 발언 등 과거 행적이 드러나면서 페기다 시위의 본질이 나치즘이었음이 확인되었고, 과거 나치의 잘못으로부터 교훈을 얻은 독일 시민들은 등을 돌렸다.
페기다가 2015년 1월 요구한 6개항 중 이민자 의무 법제화에 대해서도 불평등 여지가 있다. 이민 자체가 해당 국가의 법에서 규정하는 의무를 준수한다는 것을 약속하는 것인데, 이민자에 대해서만 추가적인 의무를 부여하겠다는 것은 명백한 차별행위이다.
다수가 공감하거나 지지한다는 것을 이유로 페기다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견해가 있지만 다수라고 해서 옳은 것은 아님이 이미 나치 사례를 통해 확인된 바 있다. 더구나 샤를리 엡도 총격 테러 이후 각지의 페기다 대 반페기다 시위 참가자 수를 보면 반페기다 시위쪽이 압도적으로 많은 수를 보이고 있다. 이는 일방적인 이슬람에 대한 배척이 오히려 이슬람 극단주의에게 정당성을 부여한다는 우려에서 발현된 자정작용의 결과이다.
페기다 1주년을 맞이하며 부정적인 여론이 부쩍 늘었다. 그동안 가능한 중립적 태도를 유지해오던 ARD나 ZDF 등의 공영방송도 논설과 외부 전문가들을 생방송에 초빙해 인터뷰하며 집중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상황이다. [5] 독일 언론과 독일 관료(내부부, 법무부 장관)는 이제 대놓고 국민선동(Volksverhetzung), 국민현혹(Rattenfänger)[6], 허위주장(Parole) 등 기존 나치에 대응시키던 단어들을 직접적으로 페기다에 사용하고 있다. 이는 페기다가 스스로 자폭했기 때문인데, 1주년 시위를 한답시고 교수대 모형을 들고 총리와 부총리에게 '예약'되어있다고 하질 않나, 무대에서 연설하기로 초대받은 한 터키 출신 극우주의 작가가 '아쉽게도 이젠 강제수용소(KZ:Konzentrationslager)를 사용할 수 없다.' 같은 발언을 하는 등 말그래도 독일인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하였다.
나치 시대 때 수많은 정치범과 유태인, 집시, 성소수자, 외국인, 장애인 들이 수용소에서 죽었다는 점을 굳이 말을 해야하나. 특히나 독일 부총리인 지그마어 가브리엘은 사민당 소속이며, 나치에게 공산당과 더불어 가장 심하게 탄압받던 정당이다. 사민당 소속 전 독일 총리 빌리 브란트는 젊었을 적 나치의 탄압을 피해 해외 난민을 떠나야 했었다. 당시엔 사민당원 뿐만 아니라 해외 난민을 떠나는 독일인들, 독일에 살던 외국인(특히 유태인)들이 굉장히 많았다. 이런 상황이니 난민을 반대하는 페기다가 더 모순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당장 동독이 무너진 이유도 서독으로 넘어가던 탈동독인들(난민) 수가 너무 많아져서 라는 점을 잊지 말자. 당시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를 경유하여 서독으로 빠져나가는 동독 사람들이 제어불가능할 정도로 급증할 때 헝가리 정부는 쿨하게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을 열어 재끼며 동독 정부의 몰락을 앞당겼다.[7] [8] 2015년 난민사태에 헝가리 정부가 국경을 강화에 강경하게 시리아 난민들을 막는 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 또한 아이러니.
현재 페기다=나치3.0 이란 여론이 증가세.[9]
정작 이민자들 때문에 독일인들이 직업을 못찾아 돈을 잃는다고 주장하는 페기다 시위 때문에 드레스덴의 관광업이 큰 타격을 맞았다는 점은 굳이 설명이 필요할까?
5 사건 사고
2015년 2월 초 비엔나에서 500여명의 인원을 동원한 시위를 벌였는데, 결국 안티파 200명에게 포위당해서 패배했다.
2015년 8월 영국 내의 극우 단체 EDL(영국 방위 협회) 주선으로 이루어진 국제 집회에 네오 나치 단체들과 함께 초청돼서 시위에 참가했으나, 시위 자체가 이미 폭력사태를 준비하고 있다는게 SNS를 통해 적발되면서 안티파가 외곽을 막고있는 동안에 영국 경찰한테 진압당했다.
2015년 10월 페기다 1주년 시위의 중앙 무대 연설자로 나선 터키 출신 극우주의 작가 Akif Pirinçci의 30분에 걸친 연설은 그야 말로 독일 사회에 총공깽을 선사했다. 특히 그 중 'Es gäbe natürlich andere Alternativen, aber die KZs sind ja leider derzeit außer Betrieb.'(당연히 다른 대안이 있겠으나 현재 강제수용소(KZ)는 아쉽게도 사용할 수가 없다.)이란 발언은 페기다까지 같이 심해로 침몰시키는 중. Akif는 이 발언으로 당연히 검찰의 집중 조사를 받고 있으며, 최고형을 받을 시 터키로 추방될 예정이다. 웃픈점이라면 집시 다음으로 터키 출신 이민자들도 유럽내에서 천덕꾸러기 취급당했던 적이 있었다는 사실[10]..
2016년 5월 3일 루츠 바흐만의 페이스북 발언에 대해 인종 혐오 조장 혐의로 유죄 판결 및 벌금형이 언도되었다.
6 기타
참고로 드레스덴에서 열리는 페기다 시위는 거의 늘 젬퍼 오페라하우스 앞 광장에서 열리고 수많은 언론 사진에서 시위대 배경에 이 건물이 찍힐 수 밖에 없다. 젬퍼 오페라하우스는 이에 강한 불만을 가졌는지 1주년 시위에 앞서 건물 앞에 거대한 전광판을 세워놓고 '우리는 외국인 혐오의 배경무대가 아니다' 라는 대문짝 만한 글씨를 띄우며 시위대를 디스하였다.
6.1 지점
페기다는 드레스덴에서 조직되어 활동하나 이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독일 각지에서 비슷비슷한 똥을 싸두었다. 대표적으로 라이프치히의 레기다(LEGIDA)가 있으며, 도시(또는 주)별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라이프치히 (Leipzig) LEGIDA
- 쾰른 (KÖln) KÖGIDA
- 본 (BOnn[11]) BOGIDA
- 뒤셀도르프 (DÜsseldorf) DÜGIDA
뒥이다? 뒤지다? - 베를린 (Berlin) BÄGIDA[12]
- 하노버 (HAnnover[13]) HAGIDA
- 바이에른 주 (Bayern) BAGIDA
-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주 (Mecklenburg-Vorpommern) MVGIDA
- ↑ 표면적으로는 이민자를 비판하고 있으나 독일 이민자 중 이슬람 교도 비율이 높으며, 많은 외신들이 페기다를 Anti-Islam으로 묘사하고 있다.
- ↑ 철십자, 하켄크로이츠
- ↑ 흔한 편견과 달리 기독교에서 잘만 써먹었던 상징인데 드디어 이걸 더럽히려 하고 있다.
- ↑ 요제프 비르머는 반나치 레지스탕스이다.
- ↑ 물론 ARD 소속인 NDR 등이 페기다를 조롱하는 인터뷰 영상을 기존에도 만들긴 하였으나 어디까지나 지역방송용
- ↑ 유명한 동화 피리부는 사나이에서 유례한 단어이다. 말그대로 쥐를 현혹하는자
- ↑ 헝가리는 당시 같은 공산권 국가로 동독 국민들에게 여행의 자유가 있었고, 오스트리아는 냉전 중 반쯤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했거니와 헝가리와는 외교적으로 친밀한 관계라 당시 이게 냉전이 맞는가 싶을 정도. 아예 이미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을 울타리로 대체시켜버린 상태였다. 이러니 당연히 탈동독인이 가장 몰리는 경로가 될 수 밖에
- ↑ 범유럽피크닉 평화 집회는 그 중에서도 가장 상징적인데, 오스트리아 국경과 불과 몇미터 떨어진 헝가리 지역에서 평화 시위를 연답시고 사람들이 모여들 수 있게 한 후 이 시위에 참가라고 쓰고 몰려온 동독인들 1만3천명이 단체로 국경을 넘었다.
- ↑ NPD라는 나치2.0이 엄연히 존재하므로
- ↑ 불법체류자들이 너무 많았던 탓에 지금도 터키인들은 유럽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단 하루를 입국한다 하더라도 엄청난 양의 서류를 제출해야 하며 심할 때는 터키인 옷차림만 해도 거리에서 몰매를 맞기도 했다.
- ↑ 옛 서독의 수도
- ↑ 베를린을 상징하는 동물이 곰(Bär)이라 그렇다
- ↑ Hannover는 현지 표기, Hanover는 영어식 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