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시미누스 트라쿠스

로마의 역대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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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대 알렉산데르 세베루스25대 막시미누스 트라쿠스26대 고르디아누스 1세/고르디아누스 2세(공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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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ximinus Thrax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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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미누스 트라쿠스 또는 막시미누스 트락스. 로마 제정 최대의 혼란기로 뽑히는 군인 황제 시대의 첫 황제. 본명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미누스 트라쿠스(Gaius Iulius Verus Maximinus Thrax : ?~238). 재위 기간은 235부터 238까지이며, 최초의 일개 사병 출신 로마 황제이기도 하다.

2 생애

2.1 황제가 되기 전

그 악명 높은 군인 황제 시대를 열게 된 첫 타자. 그 이유라면 이유랄까, 일개 대대장이었던 사람이 황제가 되었다! 군단장이었다면 그 전에 원로원 의석을 얻었겠지만, 그 아래의 일개 대대장에게는 원로원 의석이 주어지지 않는다. 아니, 원로원 계급으로 태어난 초짜 젊은이들이 군대에 들어가서 제일 처음 하는 게 [1]대대장이다. 그전까지의 황제들이 아무리 어려도 형식적으로는 원로원을 거쳤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황제를 왜 그렇게 원로원이 견제해댔는지 알 수 있다. 애초에 트라쿠스라는 말 자체가 "트라키아를 정복한 자"라는 칭호가 아니라 트라키아 촌놈이라는 비하의 뜻이 담긴 말이다!

이름대로 트라키아 출신이다. 농민 집안에서 태어나 양치기로 생활했다. 그러다가 또래 속주민들이 그렇듯이 성공을 위해, 또는 배고픔을 극복하기 위해 신분보다는 능력이 중시되는 입대를 선택, 보조병으로 입대했다.[2] 그러니까 막시미누스는 태어났을 때부터 로마 시민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발칸반도 출신의 속주민[3], 또는 어쩌면 그 당시 로마인들이 말하는 '문명화된 야만족'이었을지도 모른다. 시민권도 얻고 성공도 하기위해 입대한 그는 젊은 시절부터 8피트 6인치라고 기록되어있을 정도[4]로 체격도 매우 좋고 힘도 좋고 털털하고 친근한 성격에 호쾌한 청년[5]이라 마침 자기 부대에 들렀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눈에 띄어 황제 경호병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말과 달리기 시합을 해서 이기고, 엄지손가락이 워낙 굵어서 귀부인의 팔찌를 반지로 써도 될 정도였으며, 마차 한 대쯤은 가볍게 맨손으로 끌었고, 말에게 펀치를 날리면 말의 이빨이 우수수 떨어졌다고 한다(;;) 과장이 많이 섞이긴 했지만 그야말로 엄청난 괴력과 강건한 신체를 지녔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그 뒤로 전방에서 백인대장을 오랫동안 지내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시절에 라인강 방어선의 신병 훈련 책임자로 대대장을 지냈다. 엄하지만 병사들을 잘 챙기고 성격 털털하고 계급 안 따지는 좋은 아버지 혹은 형님 같은 사람이라 병사들이 그를 매우 좋아했고, 그 때문에 알렉산데르가 죽자마자 병사들이 이 아저씨를 황제로 추대해서 덜컥 황제 자리에 올랐다.

2.2 황제

하지만 이러한 배경[6] 때문에 원로원과의 관계는 최악이었다. 황제 등극 과정에서 완벽하게 무시당한 원로원은 야만족 출신일지도 모르는 국경지대 출신의 이 황제를 교양 하나 없는 반 야만족이라고 깠고, 황제는 이런 원로원을 철저히 무시하고 자기 할 일ㅡ야만족 격퇴에만 신경 썼다. 원로원과의 관계가 어찌 되었건 전선 군단병들은 자신을 신뢰하고 있고,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은 어쨌든 야만족 격퇴였으니까.[7]

이렇게 3년간 서로 반목하다가 북아프리카에서 농장주들이 높은 세금에 반발하여 세리를 죽이고 북아프리카 속주 총독인 79세의 고르디아누스 1세를 황제로 내세우자 원로원이 이에 흥분하여[8] 현직 황제인 막시미누스를 국가의 적(공적)으로 선포해 버린다.(...) 하지만 원로원의 예상과 달리 북아프리카 속주 바로 옆인 누미디아 속주 총독 카펠리아누스는 이런 원로원의 공문을 과감히 무시해버렸다. 그는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 고르디아누스 부자와 북아프리카 속주를 토벌하겠다고 발표했고, 북아프리카 유목민을 방어하는 병력을 제외한 군단병들을 이끌고, 카르타고로 쳐들어갔다[9]. 치안 경비병에 가까운 1개 군단을 싸그리 모아서 방어하던 아들 고르디아누스 2세는 그대로 패배해서 전사했고, 소식을 들은 고르디아누스 1세는 자결했다.

2.3 암살

동시에 야만족 방어를 위해 전선에 나가 있던 막시미누스는 화가 나서 로마로 진군한다. 궁지에 몰린 원로원들은 빼도 박도 못하게 돼서 자기들 중에 경력과 실적이 좋은 엘리트 둘을 뽑아 공동 황제로 세웠다. 그들이 바로 발비누스푸피에누스다. 그리고 고르디아누스의 (외)손자인 고르디아누스 3세를 차기 황제로 지목했다.

이래저래 내전이 시작되었지만, 막시미누스 본인의 예상과 달리 뜻대로 일이 안 풀리게 되었다. 그는 아퀼레이아를 포위했다가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장기전을 치뤄야만 했다. 오랫동안 전투에서 잔뼈가 굵은 황제가 이끌고 있는 야만족과의 전투 경력이 풍부한 정예군임에도 불구하고, 반역을 저지른 원로원을 토벌하러 가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본국 이탈리아에서 시민들의 저항을 맞아 장기전에 처하게 되자, 이에 불만을 품은 병사들 중 일부가 어이없게도 자신들의 상관인 황제를 살해해 버렸다. 어떻게 보면 병사들의 인기로 황제가 되었고, 병사들의 인기가 사라지자 폐위되어 버린 케이스. 이때 아들이자 황태자였던 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미누스도 살해되었다.

여담으로, 이렇게 어이없게 막시미누스라는 거대한 공적이 사라져버리자, 발비누스와 푸피에누스는 공동 통치로 정권을 유지해 나가긴 커녕 서로를 의심하고, 동료들인 원로원마저 두 황제파로 나뉘어 다투는 사이에 불만을 품은 병사들에게 살해되고 만다. 그리고 군인황제 시대에서 그나마 안정적이고 평화적으로 고르디아누스 3세가 뒤를 잇게 되었다. 고르디아누스 3세도 비슷한 사정이었던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비슷하게, 실무자의 도움을 받아 몇년간 잘 통치하다가, 실무자가 죽고 나서 혼란에 빠졌다가 야심가였던 신임 근위대장 필리푸스 아라부스에게 살해당한다.

3 평가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게르만 족과 도나우 강 일대의 야만족들을 상대로는 뛰어난 장군이었다고 하더라도, 지중해식의 공성전에는 전략, 전술적으로 별로였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두 전투 방식은 차이점이 있고, 전투방식도 달랐기 때문이라고 변명할 여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어찌되었던 간에 이것도 능력은 능력인만큼 그가 공성전을 벌이면서 장기전에 이르게 해서, 병사들의 불만을 일으킨 것을 보면 군사적 재능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술라, 폼페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트라야누스에는 당연히 못 미치고, 그보다 아래로 취급 받아도 어느 정도 뛰어난 군인으로 평가되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급의 재능 또한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본인 역시 인생에 있어서는 제국이 혼란기만 아니었고, 자신을 등용하여 지휘관급으로 만들어준 세베루스 왕조가 유지되었다면, 전선에서 신병들을 토닥이면서 행복하게 살다가 로마 군단장을 거쳐 노년에 원로원 의석을 얻어 수도 로마에서 노후를 보장받고 살았을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군단장에 원로원 의석을 얻은 상태서 황제가 되었더라면 군인 황제시대의 전개가 매우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던 간에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는 그 뒤에 등극할 갈리에누스처럼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고 하더라도, 혼란스러운 군인 황제 시대를 연 인물이자, 최초의 사병출신 황제로써 그 뒤로 등장한 사병출신 군인 황제들의 모델이 된 인물인 것은 분명하다.
  1. 주홍띠를 두른-원로원 계급의 상징
  2. 시민권이 없었다는 말이다. 카라칼라 황제가 제국 내 모든 자유민에게 시민권을 부여하기 전까지 로마 시민권을 가지지 못한 이들은 보조병으로 입대해서 로마 시민권을 획득했다.
  3. 트라키아 지방은 오늘날의 발칸반도 남동쪽인 불가리아, 터키 이스탄불, 유고연방 지방이다.
  4. 2미터 60센티미터(...)
  5. 그냥 덩치가 크로캅 스타일이라고 이해하자.
  6. 트라키아 속주민 출신 + 태생부터 로마시민권을 가지지 않은 자 + 일개 사병 출신 + 즉위자체도 찬탈형식
  7. 트라쿠스 황제 치세에 게르만족을 말 그대로 박살낸 라인 강 전선은 이후에도 그 기능을 오랜 기간 유지했다. 3세기의 위기라 불리는 시기에 침입해 온 게르만족이 공격한 지역 대부분이 도나우 강 방어선이라는 것이 그 증거다.
  8. 고르디아누스 1세는 당대 최고 명문가이자 공화정 시대부터 400년 넘게 원로원 의석을 지킨 가문출신이다. 혈통으로도 본인은 2명, 아들은 3명의 황제의 후손이었다. 또한 로마 최고 부자이기도 했다.
  9. 내란이라고 볼 수도 있고, 반란 토벌이라고 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