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로마의 역대 황제
내전기세베루스 왕조세베루스 왕조
19대 디디우스 율리아누스20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21대 카라칼라,게타


Lucius Septimius Severus Pertinax

146년 4월 11일 - 211년 2월 4일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엄격하고 고지식한 위험인물이였다. 생의 마지막 몇 년 동안은 오로지 가마만 타고 이동했다. 사람들은 이를 근거로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려고 하자 그는 조용히 대답했다. "사람은 머리로 통치하지 다리로 통치하지 않는다"

ㅡ 아일리우스 스파르티아누스, 세베루스 18장 11절

세베루스는 키는 작지만 강인했다. 결국에는 통풍 때문에 몸이 매우 쇠약해졌지만 정신적으로는 아주 열정적이고 원기 왕성했다. 학식 면에서는 자신이 배운 것 이상을 원했으며 이 때문에 생각은 많아도 말은 거의 하지 않았다. 친구들에게 무관심하지 않았고 적에게는 아주 가혹했던 그는 이루고자 하는 일은 무엇이든 주의를 기울였지만 자신에 대해 하는 말들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ㅡ 디오 카시우스, 77. 16

1 소개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를 몰아내고 세베루스 왕조를 연 로마 제국황제. 북아프리카 출신의 첫 로마 황제였고 출신지는 렙티스 마그나Lepcis Magna(현재의 리비아)에서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 아버지의 사촌들이 집정관직을 맡는 것을 보았으나 세베루스의 집안은 속주[1]의 가문 출신이였기 때문에 집정관을 맡지 못했다. 그는 부유한 기사계급 출신이였으며, 세베루스의 첫 아내인 파카 마르키아나(Pacca Marciana)는 레프키스 출신이었고 그 역시 나이 들어서까지 아프리카식 말투[2]가 남아 있었다.

세베루스는 18번째 생일이 지나고 곧바로 로마로 왔으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의해 원로원 의원에 임명되었다. 그는 계속해서 군사와 행정의 여러 직위들을 거쳤고 191년에는 중요한 속주인 상판노니아의 총독을 맡았다. 총독 임명에는 실력보다는 같은 아프리카 출신인 근위대장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의 영향력이 더 컸다. 세베루스에게 콤모두스의 사망과 뒤이은 페르티낙스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것은 상판노니아의 수도인 카르눈툼에서였고 그때부터 재위를 향한 그의 노력이 시작되었다. 세베루스는 도나우 군단들에 의해 황제로 선포된 후에 193년 4월에 로마로 진군했다. 원로원은 반대했지만 그가 로마 외곽에 도착했을 때 원로원들은 어쩔 도리가 없다고 판단하여 체념하고 그에게 황제가 되는 것을 승인했다.

2 황제, 경쟁자들을 박살내다

그렇게 세베루스는 콤모두스, 페르티낙스가 연달아 암살당하고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돈으로 황제의 자리를 사는 등 극심한 혼란기에 판노니아(도나우), 알제리 방면군 사령관으로 지내다가 부하들의 추대로 즉위하였다. 곧이어 무지막지한 군세로 로마로 진격하자 193년 6월 1일, 원로원은 결국 세베루스를 새 황제로 인정하고 율리아누스를 처형한다. 9일 후 세베루스와 그의 군대는 개가를 울리며 로마로 들어왔다. 그는 먼저 근위대에 복수를 했다. 그는 페르티낙스 살해에 대한 응징을 명분으로 삼고 그의 이름을 칭호의 일부로 취해 계승권을 주장했다. 그러고는 아주 교활한 계획을 세워놓고서, 근위병들을 소환해 기념식 때의 통상적인 관례대로 도시 밖으로 행군하게 한 후, 페르티낙스 암살에 관여한 근위대원들을 모조리 처형시켰다. 남은 근위대는 해산시키고, 로마 외곽 160km 반경 내에 오게 되면 죽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근위대원들의 자리는 그에게 충실한 군사들로 채워졌다. 그리고 암살당한 선대 황제 페르티낙스를 복권시키고 그에 걸맞는 예우로 장례를 치름으로서 자신의 정통성[3]과 명분을 공고히 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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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우스 페스켄니우스 니게르(Gaius Pescennius niger)[4]

로마에서 황제의 지위를 굳힌 세베루스는 동방 군단들이 황제로 선포한 시리아의 총독 가이우스 페스켄니우스 니게르(Gaius Pescennius niger)를 처리하기로 했다. 군대를 규합한 니게르는 시리아의 북부 측면을 막아주는 타우루스 산맥의 고개들과 시리아의 수도 안티오키아를 요새화했다. 그는 또한 서쪽으로 군대를 보내 보스포루스의 좁은 교차로를 통제하는 비잔티움을 포위하도록 했다. 그러나 세베루스의 군대는 트라키아에서 소아시아까지 진격해 들어갔고, 193년 말 무렵, 니게르 군대를 상대로 두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첫 번째는 마르마라 해 해안의 키지쿠스(Cyzicus)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의 승리였고, 두 번째는 동쪽으로 조금 떨어져 있는 니케아[5]에서 벌어진 전투에서의 승리였다. 니게르는 대비했지만 세베루스의 군대는 타우루스 산맥의 고개를 돌파하여 시리아로 진군했고, 마지막 결정적인 전투는 500년 전 알렉산드로스 대제가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3세를 격퇴한 평원 위 이수스(Issus) 근처에서 194년 3월 또는 4월에 벌어진 전투였다. 니게르의 군사들은 북부 군단들과는 상대가 되지 않았고, 달아나는 동안 세력이 약화되었고, 니게르는 말을 타고 남쪽으로 달아났지만 안티오키아 근처에서 붙잡혀 참수되었다. 그의 지지자들이 무자비하게 처벌되자, 많은 이들이 세베루스의 무자비한 처벌을 당하지 않기 위해 로마의 이웃이며 오래된 동방의 적인 피르티아인들에게 피난하였다. 그러자 세베루스는 195년 여름 동안 니게르와 도망간 그의 군사들을 지원한 파르티아를 응징하기 위해 원정대를 이끌고 메소포타미아 북부로 향했다.

니게르를 무너뜨렸지만 브리타니아의 총독인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라는 경쟁자가 아직 남아있었다. 세베루스는 그에게 지원을 받거나 적어도 중립적인 입장을 지켜주도록 만들기 위해 그에게 일찍이 '카이사르(부황제)'라는 칭호를 주었다. 그러나 세베루스는 알비누스와 실제 권력을 나눌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195년 말 무렵에 세베루스는 명망 있는 안토니누스의 왕조의 후예임을 자처하기 위해 아들 셉티미우스 바시아누스(Septimius Bassianus) 훗날 카라칼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 아들의 이름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로 바꿨고 겨우 7살의 나이에 어린 카라칼라는 '카이사르'의 칭호도 함께 받았다. 이것은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는 더 이상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선택한 후계자가 아니였라는 뜻이였고 미래에 자신이 왕위 계승을 할 수 없다는 뜻이였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상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에게 선전포고를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싸울 수 밖에 없음을 알게 된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는 196년 4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갈리아로 건너갔고, 브리타니아 3개 군단을 주축으로 스페인에 주둔해 있던 제7군단 '게미나'의 지원도 받았다. 그는 리옹에 기지를 두고 추가 병력을 모았으며, 중요한 요새와 주둔군을 중심으로 라인란트를 점령할 생각이였다. 그러나 세베루스는 이와는 대조적으로 새 법령들을 통과시키고 권력의 장악력을 확고히 다지면서 그 해에 많은 시간을 로마에서 보냈다. 그리고 세베루스는 197년 1월이 되어서야 옛 동지이자 지금의 적인 알비누스와 마지막 대전을 치르기 위해 길을 떠났다. 결정적인 전투는 197년 2월 19일 루그두눔 지금의 리옹의 외곽에서 많이 벌어졌다. 오랫동안 결과를 예측하기 힘든 전투가 벌어졌는데 전투 도중에 세베루스가 말에서 떨어지는 일이 벌어졌다. 이는 세베루스의 생사가 경각에 달렸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는 재빨리 황제 의복을 찢어버려서 자신의 정체를 숨겼고 때맞춰 기병대가 도착하면서 위기를 모면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알비누스의 군대는 결국 패배하였고 알비누스는 리옹으로 달아났지만 더 이상 도망갈 길이 없자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세베루스는 벌거벗겨진 알비누스의 시신을 땅에 내려놓고 그위로 말을 달려 시체를 훼손시켰는데 이것은 그의 잔인성이 드러난 모습이였다. 잘린 알비누스의 목은 로마로 보내졌고 시신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의 시신과 함께 론 강에 던져졌다.

로마로 돌아온 세베루스는 니게르와 알비누스의 지지자들을 뿌리 뽑기 위해 가혹한 조치를 실시하였다. 원로원에는 그들의 추종 세력이 많이 있었고 그들은 197년 세베루스의 숙청에 의해서 29명의 원로원 의원들이 사형에 처해졌다. 이렇듯 세베루스가 극도로 무자비한 모습을 보여주자 사람들은 공화정 후기의 내란 시기에 자행되었던 독재관(딕타토르) 술라의 악명 높은 처벌과 연관시켜 그를 '푸닉 술라'[6]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공포정치를 펼치고 자신의 경쟁자들을 모조리 굴복시켰음에도 기원전 1세기의 술라와는 달리 세베루스는 원로원의 신임을 얻지 못했다.[7][8] 그러자 그는 원로원의 지지가 아니라 군대의 지원에 기대는 쪽으로 마음을 바꾸었고 그는 병사들의 급료를 올리고, 결혼 후 병영 대신 아내와 가족들과 함께 집에서 살 수 있게 해주는 조치를 비롯하여 생활 조건을 개선시켰다. 또한 로마 시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계속해서 갖가지 볼거리를 제공하고 전 세계에서 온 수백 마리의 야수들을 도살하는 등의 조치로 환심을 얻고자 했다.

3 20년의 재위 기간

그렇게 이후 20년에 가까운 재위 기간 동안 세베루스는 여러 정적과 외적들을 격파하고, 군과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여러 정책을 펼쳤으며, 자신의 아들 카라칼라를 일찌감치 부제에 앉혀 후계 구도도 명확히 해 두는 등 얼마간의 안정을 이룩한다. 그 후에 그는 군사 원정을 떠났다, 이번에 그의 적은 로마의 주둔 기지를 위협하고 동방 식민지국의 왕들을 위협하는 파르티아인들이였다. 앞서 벌인 원정은 힘을 과시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았기에 그렇게 진지하지 않았으나 세베루스는 두번째 원정은 진지했다. 메소포타미아 북부로 들어간 세베루스는 군사를 함선에 싣고 유프라테스 강과 육로를 거쳐 파르티아의 수도인 크테시폰으로 진군했다, 저항은 약했고 도시는 점령되어 로마의 군인들에게 약탈당했다. 남자들은 모조리 살해당했고, 약 10만명의 여자와 아이들이 포로로 잡혀 노예가 되었으며 파르티아의 황실 국고에 들어 있던 보석과 귀중품들이 모조리 약탈당했다. 그렇게 메소포타미아 북부 지방은 트라야누스 재위 후기에 그랬듯이 다시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다. 크테시폰 점령은 197년 말에 이루어졌다. 세베루스는 5년간 동방에 머물렀는데 처음 2년간은 새로운 로마의 식민지를 편성하고 중요한 무역 도시인 하트라(Hatra)를 점령하는 방법을 모색하는데 시간을 보냈다.[9] 그런 다음에 팔레스타인과 이집트를 돌며 알렉산드로스 대제의 미라를 보고, 나일 강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피라미드와 테베의 신전들을 방문했다.

4 후계 문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202년 여름에 로마로 돌아왔을 때 그의 나이는 56세 정도로 로마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에도 꽤나 고령에 속했고 질병이 재발해 고통을 겪던 그는 이미 198년 초에 친아들 카라칼라를 아우구스투스 직위로 올려줌으로써 제위 계승 계획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로마로 돌아오자마자 아들을 결혼시키려고 애썼으며 그 대상으로 친구인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Gaius Fulvius Plautianus)의 딸인 푸블리아 풀비아 플라우틸라(Publia Fulvia Plautilla)를 선택했다. 근위대장인 플라우티아누스는 황제에게 막대한 권력과 큰 부를 얻었고 모든 전쟁에 황제와 동행했다 그래서 그와 세베루스가 한때 연인 관계였다는 소문까지 돌 정도였다.

그러나 플라우티아누스는 사람들의 신망을 얻지 못했다. 헤로디아누스는 그는 이러한 권력을 남용해 모든 일에 온갖 잔인한 행동과 폭력을 써서 역사상 가장 두려운 프라이펙투스[10] 중의 하나가 되었다고 평가했으며 심지어 그가 성인 남자를 거세시켜 딸의 시종이 되게 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카라칼라는 이러한 결혼을 반기지 않았고 아내와 장인 모두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어 그는 아내와 식사도 하지 않고 잠도 자지 않으려고 했고 자신이 정권을 잡으면 둘 다 죽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결국 이러한 갈등은 3년 후인 205년 1월 22일 사태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사료마다 다르지만 어느 설명에 의하면 카라칼라가 세 명의 백인대장[11]을 설득하여 플라우티아누스를 음해하는 거짓 정보를 보고하게 했다. 그들은 죽은 조상들을 위한 축제가 끝난 후 행동을 개시하여 저녁식사를 하기 직전에 세베루스 황제에게 플라우티아누스가 자신들과 다른 일곱 명의 백인대장들에게 세베루스와 카라칼라를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말했다. 또 다른 이야기인 헤로디아누스에 의하면 그 음모는 사실이었고, 플라우티아누스는 그 음모를 통해 카라칼라의 제위 계승을 막고 자신이 제국을 장악하려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황제와 황태자를 살해하기 위해 고용한 사람이 곧바로 그들에게 가서 그 사실을 알렸다는 이야기였다고 한다. 어쨌거나 저 두 이야기 중에서 무엇이 진실이든 간에 플라우티아누스는 그 즉시 살해되었고 시신은 거리로 내팽겨쳐져서 그대로 방치된 채 민중들의 야유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이러한 상황은 장인과 아내를 싫어했던 카라칼라에게는 매우 좋은 상황이였다는 점이다. 죽은 플라우티아누스의 딸인 카라칼라의 아내는 처형되지 않고 리파리 섬으로 유배되었지만 카라칼라의 증오는 없어지지 않았고 결국 카라칼라는 제위에 오르자마자 그녀를 암살해버렸다고 한다.

5 말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말년은 우울했다. 플라우티아누스의 죽음으로 로마에서 골칫거리 하나는 해결되었을지 모르지만 카라칼라와 그의 동생 푸블리우스 셉티무스 게타 사이에 심각한 반목은 누그러질 줄 몰랐다. 그들의 지지자들이 이러한 적대감을 키우고 부추겼다. 그들의 추종자들은 각자 두 형제의 욕구와 취향에 비위를 맞춰서 아부할 뿐만 아니라, 한쪽을 즐겁게 하고 다른 쪽을 격분시킬 만한 새로운 일들을 계속 찾았기 때문에, 그들을 서로 싸우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브리타니아에서 문제가 발생하자 세베루스가 두 아들을 데리고 원정을 나선 것은 다행이기도 했다.

208년 세베루스 황제는 칼레도니아 (현재의 스코틀랜드) 원정을 실행에 옮겼다. 세베루스는 통풍으로 움직이기가 어려워 가마를 타고 다녀야 했지만 그의 강인했던 의지는 꺾이지 않았고 황제는 어느 곳에서도 필요 이상으로 휴식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고 한다. 세베루스는 이참에 브리타니아 섬 전체를 공격함으로써 끊임없이 발생하는 국경 문제를 해결해버리기로 결정했다. 세베루스는 제국의 내정 문제를 게타에게 맡기고 자신은 카라칼라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하드리아누스 성벽을 지나 스코틀랜드로 들어갔다. 칼레도니아 인들의 끈질긴 게릴라 공격에도 불구하고 2년 뒤인 210년에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고, 북쪽으로 멀리 국경선을 넓히고 브리타니아의 칼레도니아 인들과 협정을 맺는 조건으로 중부 저지대의 권리를 넘겨받았다. 그러나 세베루스는 이제 나이가 들었고 직접 일을 지시하는 것은 점점 힘들어졌다. 그러나 카라칼라는 브리타니아 원정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고 원정을 단지 군대의 신임을 얻는 기회로 여겼다 헤로디아누스에 의하면 카라칼라는 세베루스를 오래 앓기만 하고 빨리 죽지 않는 아버지를 골치 아프고 성가신 존재로 생각했으며, 좀 더 빨리 아버지를 제거하기 위해 의사와 시종들을 설득하려 했다는 패륜적인 인간이였다고 한다. 심지어 자신과 아버지가 병사들보다 앞서 말을 달리는 사이 그의 등을 찌르려 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세베루스는 위험을 알아차리고 무슨 일인지 확인하기 위해 말 안장에서 몸을 돌렸고, 외침소리에 겁을 먹은 카라칼라는 계획을 포기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칼레도니아 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다시 원정을 실시했으나 중병에 걸려 원정은 중지되었다. 세베루스 황제는 에부라쿰(현재의 요크 시)로 자리를 옮겼고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뒤를 이은 카라칼라는 원정을 계속했으나 곧 중단하고 로마군은 하드리아누스 방벽 남쪽으로 후퇴했다. 그 이후로 두번 다시 로마군이 칼레도니아에 발을 들여놓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211년 2월 4일에 65세의 나이로, 스코틀랜드 정복 계획을 미완으로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에 아들들에게 '서로 사이좋게 지내라. 군인들을 부유하게 해주고 다른 모든 사람은 무시하라.'는 유언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유언은 전반부는 지켜지지 못했으나 후반부는 상당히 충실하게 이행되었다. 이어서 '나는 모든 것을 했다. 원로원 의원도 했고 변호사도 했다. 집정관도 했고 대대장도 했다. 장군도 했다. 그리고 황제도 했다. 국가요직은 모두 거쳤고, 임무를 충실히 했다고 자부한다. 허나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그 모두가 다 헛된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 말은 자신의 왕조가 오래가지 못할 것을 깨달은 데서 온 것으로 풀이된다. 두 아들은 군사 작전을 중단하고 아버지의 유골을 가지고 로마로 돌아갔고 하드리아누스 영묘에 안치했다. 곧이어 원로원은 그를 신격화했다.

6 평가

로마 시대의 역사가 헤로디아누스는 세베루스를 "정적들을 상대로 한 내란에서든 이민족들을 상대로 한 외국 땅에서의 전쟁에서든 누구도 그와 같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는 18년간 제국을 통치한 뒤 어린 아들들이 성공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고, 그들에게 이전의 어떤 황제보다 큰 부와 무적의 군대를 물려주었다"라고 평가했다. 전반적인 평가는 냉혹한 성품과 종종 나타난 잔혹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내전에 시달리던 로마에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 준, 명군까지는 아니더라도 준척급 이상의 황제.

다만 그의 사후 제국의 안정성은 다시 크게 흔들리게 된다. 애초에 세베루스는 오래도록 장남 카라칼라한테만 제위 계승권을 인정했고 차남 게타는 한 단계 낮은 대우만을 지속했으나, 결국에는 둘에게 같은 제위 계승권을 인정했고 때문에 두 아들이 심각하게 다투는 상황을 초래하게 된다. 이는 아마도 카라칼라에게 있었던 특유의 심각한 성격적 결함 때문이었던 것으로 여겨지며, 부친 입장에서는 장남과 차남이 서로의 결점을 보완하며 가문을 존속시키는 게 희망이었지만그게 당연한것이 형제간에 싸우고 반목하는 것을 좋아하는 아버지가 세상에 어디있을까? 그런 노력을 할수록 형제는 서로를 적으로 보게 될 뿐이었다.

하여 결국 그의 왕조는 사후 피로 피를 씻는 혈겁을 벌이면서[12] 정국의 안정은 또 다시 흔들리기 시작하여, 불과 수십 년 만에 결국 세베루스 왕조는 문을 닫고 급기야 저 악명높은 군인 황제 시대가 도래하게 된다.[13]

7 트리비아

세베루스 스네이프의 이름이 여기서 따왔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자르다는 의미의 Sever나 잔인하다는 Severe가 어원이란 말이.. 하지만 명군이었다는 점과 마지막의 반전을 고려하면 의외로 어원일지도 모른다.
  1. 식민지 지배자
  2. 고대 카르타고의 억양이 섞인 그리스어
  3. 페르티낙스의 이름을 계승하여 자신의 이름 뒤에 붙이기까지 했다.
  4. 135~194. 탄탄하지만 평범한 군대 경력을 거쳐 189년에 집정관이 되었고 191년에는 시리아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페르티낙스가 살해되자, 그는 193년 4월에 시리아 군단 병사들에 의해 황제로 선포되지만 채 1년도 못가서 살해되었다. 니게르는 남달리 정직한 사람이였다 하지만 군사문제에서는 지나치게 원칙주의자였다고 한다.
  5. 지금의 터키 이즈니크
  6. 푸닉(Punic)은 북아프리카 특히 카르타고 지역을 일컫는 말이기에 한마디로 북아프리카의 술라라는 뜻이였다.
  7. 술라는 기원전 1~2세기의 로마의 혼란이 그라쿠스 형제가이우스 마리우스의 대두로 인해 평민파가 득세하면서 원로원이 주도하는 과두정제가 훼손되었다고 생각하였고, 과두정제를 복원하고 원로원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숙청을 도구화 하였다. 즉, 세베루스와 술라의 숙청 목적이 달랐던 것이다. 또한 술라는 에퀴타스와 평민계급도 참여 가능하였던 배심원제도를 원로원만 가능하게 돌려놓았으며, 전직 호민관의 권한을 줄여버렸다. 그리고 원로원의 권위를 키우기 위해 원로원 의원정수를 기존 300명에서 600명으로 늘렸다. 술라의 업적으로 보자면, 원로원이 술라를 싫어한다는게 오히려 이상해 보일정도다.
  8. 게다가 세베루스가 원로원과 척을 지게 된 결정적인 사건 중 하나는 세베루스의 로마 입성 후 원로원이 기록말살형을 명한 전임황제 콤모두스에 대해 철회한 사건이다. 원로원 입장으로서는 굴욕.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세베루스와 콤모두스 간의 사이가 좋았던 것도 결코 아니었다. 세베루스는 콤모두스의 현역 황제시절이자 세베루스 자신이 군단장이었을 때 콤모두스에게 망신을 당한 적이 있었고 세베루스는 평소에 콤모두스 하면 이를 갈던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세베루스가 왜 콤모두스에 대한 기록말살형을 철회를 명령했냐 하면, 단순히 정치적인 명분을 쌓고 경쟁자인 알비누스의 지지자가 다수 포진해있는 원로원의 권위를 떨어트리기 위해서였다.
  9. 하트라는 끝내 점령하지 못했다.
  10. 최고 행정관이 임명하는 관리
  11. 켄투리온 군단의 최소 단위인 백인대(켄투리온)의 지위관
  12. 그의 후계자들은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모두 암살로 목숨을 잃는다. 아니 군인 황제 시대까지 통틀어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데키우스, 타키투스 정도를 제외하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이후 디오클레티아누스 이전의 모든 황제는 자연사 한 사람이 전혀 없다. 모두 자살이나 암살로 치세의 끝을 맺는다.
  13. 그래서 근현대의 로마 역사서 중 높은 평가를 받는 프리츠 하이켈하임의 '로마사'에서는 "세베루스 왕조가 그에 버금가는 황제를 배출하지 못한 것이 로마의 불운이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또한 시오노 여사도 저서 로마인 이야기에서 세베루스의 죽음을 평하면서, "눈을 감기 직전까지 로마인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갖는 이는 세베루스 이후에도 나타났었지만, 그런 이들이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던 시대는 확실하게 끝이났다."고 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