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먼 먼슨

콧수염이 포인트.

이름Thurman Lee Munson
출생~사망1947년 6월 7일 ~ 1979년 8월 2일
국적미국
출신지오하이오주 애크런
포지션포수
투타우투우타
소속팀뉴욕 양키스 (1969~1979)
뉴욕 양키스의 영구결번
1234567
빌리 마틴데릭 지터베이브 루스루 게릭조 디마지오조 토레미키 맨틀
891015162023
빌 디키 &
요기 베라
로저 매리스필 리주토서먼 먼슨화이티 포드호르헤 포사다돈 매팅리
32374244464951
엘스턴 하워드케이시 스텡겔마리아노 리베라 &
재키 로빈슨
레지 잭슨앤디 페티트론 기드리버니 윌리엄스
1970년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 신인왕
루 피녤라
(캔자스시티 로열스)
서먼 먼슨
(뉴욕 양키스)
크리스 체임블리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메이저리그 선수로 지금은 고인이다. 뉴욕 양키스에서 10년 동안 안방마님으로 활동했다.

1 아마추어 시절

고교 시절에는 다재다능한 만능 스포츠맨으로 활약했다.[1] 고교 1학년 때 주로 소화했던 포지션은 유격수였는데, 투수 친구를 위해 2학년 때부터 포수로 전향했다고 한다. 이후 장학금을 받고 켄트 주립대학에 입학한다.

1967년 먼슨은 케이프 코드 리그[2]에서 4할 2푼을 치며 소속팀 역사상 최초의 우승을 이끌었고, 이후 케이프 코드 리그에는 먼슨의 기록을 기념하여 그 해 타격왕에게 서먼 먼슨 상을 수여하게 된다.

1968년 드래프트에 나온 먼슨은 뉴욕 양키스의 전체 4번 지명을 받아 양키스에 입단하게 되었다.

2 루 게릭을 잇다

1970년 신인왕에 뽑힌 것을 시작으로, 프로 커리어 11년 동안 7차례나 올스타에 뽑혔으며 양키스의 주장이라는 프리미엄을 감안한다 해도 우수한 성적이 뒷받침된 선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76년에는 아메리칸 리그 MVP 타이틀을 따기도 했다.

통산 타율 2할 9푼 2리에 전성기 시점인 1972년부터는 매 해 140~150경기 가까이를 꾸준히 소화하며 강력한 공격력을 갖춘 포수로 각광을 받았다. 최고 전성기라 할 수 있을 1975년부터 1978년까지의 4년 동안 서먼 먼슨은 157경기/152경기/149경기/154경기를 소화했다. MVP를 수상한 1976년의 성적은 17홈런 105타점에 14도루(11실패는 애교로 넘어가자), 3할 2리의 타율을 기록했다. 4년간 53홈런 378타점을 기록했는데, 연평균을 내면 13홈런 94타점을 매 해 올린 셈이다. 그것도 체력 부담이 막심하다는 포수 포지션을 소화하면서.

타격 스타일은 매우 공격적인 편으로 그 덕분에 볼넷이 적은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3] 삼진도 볼넷을 따라서 적고, 좋은 컨택과 집중력으로 안타를 쏟아내는, 파워가 좀 더 좋고 발이 느린 스즈키 이치로를 연상할 수 있을 스타일이다.

센터라인의 핵심이랄 수 이는 포수로서의 역할도 잘 해냈는데, 통산 도루 저지율이 이반 로드리게스 (.456)에 이은 2위 (.445)를 기록할 정도로 강한 어깨를 갖추고 있었다. 73년부터 75년까지 3년 연속 골드글러브를 수상하기도 할 정도로 수비에서도 정평이 나 있는, 포수로서도 뛰어난 선수였다.

먼슨은 또한 불같은 승부욕과 각별한 리더십으로 팀을 이끄는 훌륭한 클럽하우스의 리더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그는 루 게릭 이후 30여 년이 지나서야 탄생한 양키스의 공식 주장이었다.[4] 양키스의 6대 주장이 된 먼슨은 주장을 맡은 다음 해인 1977년과 1978년의 2연패를 이끌었다.

3 죽음

그러나 먼슨은 한창 주장으로서 주가를 올리던 중이던 1979년 8월 2일 비행기 추락사고로 안타깝게 생을 마감해야 했다. 그리고 이 시기 팀의 구심점이던 먼슨을 잃고, 우수한 클로저였던 구스 고시지까지 떠나보낸 양키스는 괴짜 보스가 저지른 실수들과 함께 추락하면서 최악의 암흑기를 보낸다. 그의 등번호이던 15번은 영구결번으로 처리되었다.

4 이야깃거리

4.1 피스크와의 악연

Fisk_Munson_Fight_19730801.JPG

1970년대 칼튼 피스크와 먼슨 사이의 치열한 악연은 뉴욕 양키스보스턴 레드삭스 간의 살벌한 라이벌 관계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로 남아 있다.

피스크와 먼슨은 툭하면 쌈박질을 일삼았는데, 같은 포지션인데다 두 팀이 전통적인 라이벌이기에 그럤던 것도 있지만, 먼슨은 자신보다 잘생긴 얼굴을 가지고 있던 피스크를 질투했었다고 한다. 성형하지 그랬어요……. 1973년 8월 1일 경기에서는 홈으로 들어올 때 피스크가 일부러 먼슨과 부딪쳤고, 그 뒤로 먼슨과 피스크가 서로 신나게 두들겨 패면서 벤치 클리어링이 일어났다. 위의 사진은 바로 그 장면.[5]

4.2 기타

상당히 가정적인 인물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집이 오하이오 주에 있는지라 시즌후 아니면 원정경기때나 집을 찾았는데 당시 어린 아들이 자지않고 칭얼대면 잘 타일러서 자게 했다고. 그래서 양키스와의 계약이 끝나면 가족과 가까이 있을려고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서 뛰기를 원했지만 양키스가 끈질기게 구애를 하는 바람에 결국 무산 지못미. 가족들을 뉴욕으로 데려오든가 하지. 먼슨: 세금이 무서버.

레지 잭슨의 별명인 '10월의 사나이'라는 별명을 지은 사람이기도 하다,단 이건 칭찬이 아니라 비꼬는 의미로 한건데 양키스가 월드시리즈에 올라간 이후 2연패를 할동안 부진한 레지 잭슨을 비꼬아서 말한 별명이지만 이후로 폭발(...) 그 뒤로도 정규시즌도 잘했지만 가을시즌이면 폭발하면서 말 그대로 '10월의 사나이'가 되었다.

추가바람.
  1. 물론 상당수의 메이저리거들이 다재다능한 만능 스포츠맨으로 커리어를 시작하긴 한다. 조 마우어농구주전 가드/미식축구의 슈퍼스타 쿼터백/최고의 포수 세 자리를 차지했을 정도니까. 그리고 먼슨도 풋볼에서는 하프백, 야구에서는 주로 유격수, 농구에서는 가드를 봤는데 3종목 모두 주장을 맡았고, 실력은 캔튼은 물론 오하이오 주 전체에서, 그리고 3종목 모두에서 최고였다.
  2. 전미 최고의 대학 유망주들이 참여하는 리그로, 나무 배트를 사용하기 때문에 스카우트들이 주목한다.
  3. 1976년에는 3할 2리를 쳤는데 출루율은 3할 3푼 7리였다. 이 해 얻은 볼넷은 29개. 프로 초년에는 4~50개 가량을 얻어냈는데, 커리어 중반으로 가면서 볼넷과 타율을 바꾼 인상을 줄 정도.
  4. 양키스는 공식 주장을 두는 데 인색한 편이다. 게릭 역시 전 주장 에버렛 스캇 이후 10년만에 탄생한 공식 주장이었고, 데릭 지터가 공식 주장이 된 것도 돈 매팅리가 은퇴한 1995년으로부터 8년이 지난 후였다.
  5. 근데 먼슨은 체격도 그렇고 생김새가 이대호와 정말 많이 닮았다! 단 먼슨은 키가 1미터 80센티, 이대호가 1미터 94센티라는 차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