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 맨틀

뉴욕 양키스의 영구결번
1234567
빌리 마틴데릭 지터베이브 루스루 게릭조 디마지오조 토레미키 맨틀
891015162023
빌 디키 &
요기 베라
로저 매리스필 리주토서먼 먼슨화이티 포드호르헤 포사다돈 매팅리
32374244464951
엘스턴 하워드케이시 스텡겔마리아노 리베라 &
재키 로빈슨
레지 잭슨앤디 페티트론 기드리버니 윌리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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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윌리엄스(왼쪽)와 함께.
이름Mickey Charles Mantle
출생~사망1931년 10월 20일~1995년 8월 13일
국적미국
출신지오클라호마 주 스파비노
포지션중견수
투타우투양타
프로 입단1949년, 뉴욕 양키스 자유 계약
소속 팀뉴욕 양키스(1951~1968)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미키 맨틀
헌액 연도1974년
헌액 방식기자단(BBWAA) 투표
투표 결과88.2% (1회)
1956년~1957년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 MVP
요기 베라
(뉴욕 양키스)
미키 맨틀
(뉴욕 양키스)
재키 젠슨
(보스턴 레드삭스)
1962년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 MVP
로저 매리스
(뉴욕 양키스)
미키 맨틀
(뉴욕 양키스)
엘스턴 하워드
(뉴욕 양키스)

1 개요

"양키스가 항상 이기는 원리죠. 핀스트라이프에서 눈을 떼지 못하니까."

"양키스는 미키 맨틀 때문에 이기는 거야."

영화캐치 미 이프 유 캔》 中[* ]

미국 메이저리그의 전 야구선수. 뉴욕 양키스원 클럽 맨으로 MVP 3회 수상자이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5툴 플레이어 중 한 명이며,[1] 역사상 최고의 스위치 히터로 꼽힌다. 그러나 최고의 유리몸까지 타고난 비운의 선수이기도 하다.[2]

통산 성적은 18시즌 동안 타율 .298, 2415안타, 536홈런, 출루율 .421, 장타율 .557, OPS .977, 순장타율 .259, BB/K 1.01, wRC+ 170, 1509타점을 기록했다. 이게 유리몸으로 남긴 성적이라고?

2 유년기

태어날 때 아버지 엘빈 찰스 맨틀(Elvin Charles Mantle)는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디트로이트 타이거즈에서 활동한 MLB 명예의 전당 포수 미키 코크레인의 이름을 본따 이 아들을 미키라고 붙였다고 한다.[3] 아버지는 이후 성장한 아들이 야구를 하려고 하자 미키의 할아버지(왼손잡이였다)와 함께 좌우로 배팅 볼을 던져주는 지극정성으로 스위치 히팅 타법을 익히게 했다. 훗날 이는 플래툰 시스템을 극도로 신봉했던 케이시 스텡겔 감독을 만나게 되며 큰 이점으로 작용한다. 아버지의 이런 플래툰 교육은 선견지명이었던 셈이다. 또한 풍족한 것은 아니었던 형편상 미키도 나름대로 집안 형편을 위해 광산부터 농부까지 갖가지 잡일을 맡아 했는데, 그때 단련된 무지막지한 손목과 어깨 힘은 훗날 대성할 홈런 타자의 큰 자산이 되었다.

그렇게 고교 시절에는 파트타임으로 일하면서 세미프로 팀에서 뛰었으며, 우연히 양키스 스카우트가 펜스 뒤 강에 빠지는 홈런(...)을 지켜보고는 루 게릭의 후계자를 발견했다는 확신을 하였고, 졸업식까지 기다렸다 졸업 당일 사인하는 정성을 다한 끝에 양키스로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3 베이브 루스조 디마지오를 계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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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틀은 마이너 시절 유격수로 뛰었지만, 필 리주토에게 막힌 데다 유격수로서 딱히 수비가 좋은 편도 아니어서 중견수로 보직을 변경했다. 하지만, 양키스에는 이미 중견수 자리를 차지한 괴수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바로 조 디마지오였다. 그래도 맨틀은 강견을 앞세워 우익수로 뛰었지만, 디마지오는 맨틀이 자신을 향후 밀어낼 것임을 직감하고 일부러 츤츤거리면서 쌀쌀맞게 대했다고 한다.

1952년, 디마지오의 예상대로 중견수로 자리잡은 맨틀은 3할 타율을 찍으며 스무 살짜리 치고는 매우 뛰어난 시즌을 보냈지만, 리그 최다 삼진의 불명예 또한 얻으며 양키스 팬들에게 야유를 받았다. 하지만 이후 절치부심한 맨틀은 1955년부터 본색을 발휘하기 시작한다.[4] 23세 시즌인 1955년부터, 1962년까지 그는 비율 스탯 .315 .445 .616에 320홈런을 날렸다. 특히 주목할 점은 MVP 3회 수상과 1956년에 MLB 최후의 통합 트리플 크라운(양대 리그에서 타율, 홈런, 타점 1위)을 달성한 것이다. MVP 3회 수상은 본즈에 이은 메이저리그 최다 수상 타이 기록으로, 이보다 많이 수상한 선수는 7회에 빛나는 배리 본즈, 맨틀 외 통산 3회 MVP 수상자들은 지미 팍스, 조 디마지오, 알렉스 로드리게스, 스탠 뮤지얼, 로이 캄파넬라, 요기 베라, 마이크 슈미트, 알버트 푸홀스뿐이다. 단일 리그 타격 트리플 크라운도 맨틀 이후 1967년 칼 야스트렘스키, 2012년 미겔 카브레라 단 둘뿐이다. 게다가 이 시기 무시무시한 홈런 세례를 퍼부으며 과거 베이브 루스와 루 게릭이 이끌었던 영광스런 시대를 다시 되돌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양키스 타선은 한동안 맨틀 혼자만 이끌어야 했고, 그가 받은 무수한 견제는 역대 8위에 랭크된 볼넷 수로 남아 있다. 역대 1700볼넷 선수 중 20시즌을 뛰지 않은 선수는 맨틀이 유일하다. 2012년에 짐 토미가 최종 1747개를 기록, 1733개를 기록한 맨틀을 제쳤지만, 토미는 이 기록을 달성하기까지 21시즌이 걸렸고 올타임 2위에 해당하는 많은 삼진을 대가로 지불해야 했다.

동시대 뉴욕의 3대 중견수라 함은 뉴욕 자이언츠윌리 메이스, 브루클린 다저스듀크 스나이더와 함께 미키 맨틀을 일컫는 것이었고, 베이브 루스와 조 디마지오의 후계자라는 프리미엄까지 겹쳐진 맨틀의 위상은 하늘을 찔렀다. 부상으로 도루 자체는 많지 않았지만 5툴 플레이어라 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심지어 좌타석에서 번트를 대고 1루로 냅다 뛰면서 상대를 농락하기도 했다. 이쯤 되면 맨틀에 대해서도 'Mickey could do everything'을 말해야 할 듯하다.

특히 맨틀의 홈런에 대해 더 자세히 언급하면, 기존의 담장 살짝 넘어가는 홈런과는 차원이 다른 것들이었다. 그의 홈런은 요새 야구장들이 외야 거리 360피트(110m)만 되어도 펜스 멀다고 징징대는 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450피트(137m), 500피트(152m)급 홈런이 대부분이었다. 양키스 선수가 양키 스타디움에서 날린 유일한 장외 홈런도 그의 기록이며, 다른 팀 선수까지 포함해도 니그로 리거 조시 깁슨의 2개를 제외하면 유일한 기록이다. 그의 홈런 기록에 대해서는 기하학적인 계산까지 동원되며 야빠 수학자들의 단골 떡밥이 되었다. 비공식적이지만 기하학적 계산을 동원하면 650피트(198m)급 홈런도 심심치 않게 나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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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1961년에는 그 유명한 M&M포가 결성, 베이브 루스의 단일 시즌 홈런 기록에 나란히 도전하는 명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결과는 잘 알려진 로저 매리스의 61홈런으로 끝났지만, 뉴욕 팬들은 양키스 프랜차이즈 스타인 맨틀이 54홈런에서 멈춘 것을 전설적인 밤비노에 대한 예우라 여겼다. 실제로는 돌팔이 의사가 스테로이드 주사 바늘로 오염된 것을 쓰는 바람에 엉덩이에 종기가 나서였다고(당시엔 스테로이드가 금지 약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위대한 업적들에 있어 어쩔 수 없는 장애물이 있었으니...

4 유리몸

고교 시절 풋볼 경기 도중 당한 무릎 골수염 부상으로부터 맨틀의 파란만장한 유리몸 이야기는 시작된다. 당시 심하게는 다리 절단까지 염려될 정도로 부상은 심각했고,[5] 이후 야구를 그만둘 때까지 이 부상은 끝끝내 맨틀을 괴롭혔다.

또한 선수 생활 내내 수 차례나 대형 부상으로 병원 입원을 반복하는 등 그의 선수 생활은 고난의 행군이었다. 또한 맨틀의 집안에는 호지킨 림프종 환자가 많았는데, 이 병으로 인해 선조들 대부분이 40대 이전에 삶을 마감해야 했던 것 때문에 맨틀은 늘 자신이 요절할 것이라 여겨 내일이 없는 이처럼 미친 듯이 뛰었고 이렇게 지나친 허슬 플레이들은 부상을 악화시키기만 했다. 그에게 야구 외 유일한 낙은 화이티 포드와의 술자리였다. 결국 이 유리몸은 루스를 뛰어넘을 대타자로 촉망받던 맨틀이 루스의 기록을 넘지 못하게 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어버렸다.

5 쿠퍼스타운 입성, 그리고 은퇴 후 사망에 이르기까지

1968년을 마치고 맨틀은 비교적 젊은 37세의 나이로 은퇴를 선언했고, 1974년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 88.2%의 지지율로 절친한 친구 화이티 포드와 함께 헌액됨과 동시에 뉴욕 양키스의 모뉴먼트 파크에 그의 7번이 내걸렸다.

하지만 사업 실패, 술로 인해 가산을 탕진했고 건강까지 악화되어 이식을 받기도 했으며, 가족들마저 알코올 중독으로 이끌었으며,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런 와중에 맨틀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오래 생존하였으며, 메이저리그의 천재 강타자는 1995년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나이가 들고 "이렇게 오래 살 줄 알았으면 좀 더 자기 관리에 신경쓸 걸 그랬다"는 후회를 하기도 했다.

그 외 자세한 이야기들은 자질왕 미키 맨틀, 레전드 스토리 참조 바람.

6 대중 문화에서

영화 머니볼의 첫머리에 그가 남긴 명언이 나온다.[6]

It's unbelievable how much you don't know about the game you've been playing all your life.

자신이 평생 해온 경기에 대해 우린 놀랄 만큼 무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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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 매리스의 1961년 홈런 기록을 다룬 2001년작 영화 61*에도 등장한다. 토머스 제인이 맨틀 역으로 출연했다. 매리스에게 딱히 악감정은 없지만, 양키즈의 프랜차이즈 스타로서 홈팬들과 구단 관계자, 기자들의 편애를 받는 모습과, 대조적으로 그들의 야유에 시달리는 매리스의 모습이 교차된다. 또한 "우리 집안은 다들 오래 못살았다"면서 몸을 돌보지 않는 모습도 묘사되었다.
  1. 물론 동시대 윌리 메이스라는 또다른 거목이 있어서 '역사상 최고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다만 부상으로 그 툴을 100% 쓰지 못했을 뿐 맨틀 역시 역대 최고의 5툴 플레이어로 꼽히기에 충분하다.
  2. 현역인 조시 해밀턴탬파베이 데블 레이스에 지명될 때 제2의 미키 맨틀이란 말을 들었는데, 자칫 잘못하다간 이 유리몸까지 닮을 기세가 되었다(...).
  3. 그러나 실제로는 코크레인의 본명은 고든 스탠리 코크레인이었으며 미키는 애칭이었다.
  4. 그렇다고 부족했던 건 절대 아니다. 그때까지의 커리어 로우 OPS가 21세 시즌 .895였으니 이건 뭐...
  5. 이 부상으로 한국전쟁 징집 대상자에서 제외되었다.
  6. 원작인 마이클 루이스의 머니볼에는 나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