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포로 참사

1 개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삿포로에서 당한 "OME"급 경기력을 보여준 것을 말한다. 두 경기 다 공통점으로 삿포로 돔에서 일격을 당했는데, 기자들과 몇몇 팬들이 쉴드를 칠 때 삿포로돔 적응을 못해서, 삿포로돔 구장 내 산소가 부족해서라는 소리도 하면서 생긴 말이다. 물론 조건은 상대 팀도 마찬가지고 돔 구장이라고 산소 부족할 일은 없다. 그냥 핑계일 뿐.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은 2003년에,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2011년에 참사를 일으켰다.

2015년 11월 8일 프리미어 12 야구 대표 팀이 일본 대표 팀에게 0:5 영봉패를 당하면서 이 문서에 3번이 생길 뻔했지만, 조별 리그에서 탈락을 한 것도 아닌데다가, 4강에서 한국 대표팀이 믿기지 않는 역전승을 거두고, 아예 우승까지 했기 때문에, 그 때의 패배는 잊혀졌다. 거기에 일본의 꼼수까지 생각한다면 위의 두 참사보다는 정상참작을 할 만한 사항이 있다.

2 제1차 삿포로 참사(야구)

40px 역대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4대 메이저 대회(올림픽, 아시안 게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프리미어 12)만 기술
1982 | 1988 | 1994 | 1996 | 1998 | 2000 | 2002 | 2003 |
2006 | 2007 | 2008 | 2009 | 2010 | 2013 | 2014 | 2015 | 2017 |

역대 대한민국 야구 대표팀
김인식호김재박호김인식호 / 김재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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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전 패배 당시.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스포츠 흑역사 중 하나.

2003년 11월, 삿포로 돔에서 열린 아테네 올림픽 아시아 대륙 예선에서 야구대표팀의 안습한 성적을 일컬어 부르는 말.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참사계의 시초가 되는 삿포로 참사의 후폭풍은 프로야구의 근간을 뒤 흔들 정도로 무서웠다.

2.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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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멤버였던 조인성심수창[1]

2003년 아시아야구선수권 대회가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아시아 예선대회와 통합해서 열렸다. 상위 2팀에게는 다음해 열리는 아테네 올림픽 본선 진출 티켓이 주어졌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본선 진출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 높았다. 불과 1년 전에 2002년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딴 상황이었고, 무엇보다 출전팀이 대한민국, 일본, 중국, 대만 이렇게 단 4개국가 뿐이었다. 당시 대만은 한수아래로 평가되었으며, 중국은 정말 아마추어 동호회 수준이라 무시할만했고 거의 올라간다는 것은 기정 사실화 되었던 분위기였다. 단 2승만 하면 올림픽 본선 진출인 상황.당시 기사

이처럼 야구계에서는 본선 진출이 용이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던 상황에서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수장 자리는 2003년 한국시리즈 우승팀 현대 유니콘스의 주역이었던 김재박 현대 유니콘즈 감독이 선정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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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갈 팀을 가리키는 재박량
하지만 그팀이 우리팀일줄은..

2.2 준비 과정에서의 잡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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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선발에 약간의 잡음이 있었다. 국내파 선수들의 경우엔 최고 스타 플레이어들을 뽑았는데 56홈런을 쏘아올리며 아시아 신기록을 세웠던 삼성 라이온즈이승엽과 일본 복귀 후 최고의 모습을 보여준 기아 타이거즈이종범, 현대 유니콘스의 에이스였던 정민태등 초호화 멤버들이 출동했다.

하지만 송진우(한화 이글스), 이상훈(LG 트윈스), 이승호(큰 승호, LG 트윈스), 심정수(현대 유니콘스), 김한수(삼성 라이온즈)는 부상을 이유로 엔트리에서 빼줄 것을 요구하는 등 팀 분위기가 엉망이 돼버린 상황이었고[2] 해외파들도 박찬호(텍사스 레인저스),서재응(뉴욕 메츠), 김병현(보스턴 레드삭스), 구대성(오릭스 블루웨이브)등 해외파들이 메이저리그 사무국, 일본야구기구의 규정과 소속팀의 사정 때문에 불참하게 되었다. 조웅천의 경우엔 부상을 달고 있었지만 2003 시즌 SK 와이번스를 한국시리즈에 올려놓은 활약을 들어 예선전 때 뛴 심수창을 빼버리고 급하게 수혈한 케이스.

거기다 포스트시즌 일정 때문에 대표팀에 선정된 선수들끼리도 손발을 맞춘 건 겨우 1주일 밖에 되지 않았던 열악한 조건이었다.근데 국내파로만 소집되도 빵빵해 보이는데?[3]

2.3 경기 결과

2.3.1 대만전

2003년 11월 5일 12:00 삿포로 돔
1회2회3회4회5회6회7회8회9회10회R
대한민국20001000104
대만0011000021X5

이번 대회 출전전, 대만은 상당한 전력을 구축해 등장했다. 12년 만의 올림픽 본선을 위해 왕젠민뿐 아니라 일본 세이부 라이온즈의 선발 장치지, 쉬밍지에 등 해외파 전원을 소집해 준비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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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초, 선두타자 이종범이 상대 실책으로 출루한후 2루 도루를 성공 시키고 있다.

이날 경기 대만의 선발은 왕젠민(당시 뉴욕 양키스 산하 더블 A). 대한민국의 선발은 한국시리즈 MVP 수상자였던 정민태(현대 유니콘스)였다. 1회에 이승엽의 우전 적시타와 장성호의 우익선상 2루타로 득점, 3:2로 앞선 9회초에 이종범의 적시 2루타로 4:2로 앞섰다. 하지만 고비때 마다 도루사, 어이없는 주루플레이로 찬스들을 다 날려버렸다.

9회말, 5회부터 버티며 공을 뿌리던 임창용의 2타자 연속 볼넷, 부랴부랴 등판한 조웅천이 2아웃까지는 잘 막아냈다.[4] 하지만 천즈위안에게 중전 적시타를 허용한 것을 포함 2안타를 내주며 2실점으로 4:4 동점이 되어 연장전을 치르게 되었다. 연장 10회말, 한국은 1사후 볼넷과 안타를 내주고 뒤이은 만루작전에서 가오즈강에게 좌익수 앞에 떨어지는 중전안타를 맞으며 4:5 패배를 맞이 했다.

여담으로 이날 패배는 한동안 대만에서 TV 국가 연주 배경화면으로 사용되었다고.

당시 기사

2.3.2 중국전

2003년 11월 6일 12:01 삿포로 돔
1회2회3회4회5회6회7회8회9회R
중국0000100001
대한민국21000030X6


뒤이은 중국전에서 6-1 대승을 거뒀으나 이경기는 중요하지가 않았다. 1승 1패를 거두었지만 올라가기 위해선 무조건 2승 1패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다음 경기가 매우 중요한 경기였다. 하지만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일본 대표팀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2.3.3 일본전

2003년 11월 7일 18:34 삿포로 돔
1회2회3회4회5회6회7회8회9회R
일본0010010002
대한민국0000000000

1년전 아시안게임과는 달리 정예멤버로 꾸렸던 일본은 말그대로 초대 드림팀이었다.[5] 일본의 야구영웅 나가시마 시게오가 대표팀 감독을 맡았고, 또한 마쓰이 카즈오메이저리그 진출 쇼케이스나 다름없었을 정도로 일본 내에서도 관심이 많았었고, 후쿠도메 고스케 등 일본 프로야구 최고 수준의 선수들만 모아 출전 시켰다.

그리고 아시아 최종 예선을 가리는 시합. 일본은 2승을 거둬 여유있는 상황이었고 한국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겨서 2승 1패로 진출했어야 했다.

한국 선발은 LG의 이승호[6], 일본의 선발은 2003년 신인상과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우승 주역 와다 츠요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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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와다 츠요시의 5.1이닝 4피안타 9탈삼진 무실점을 비롯해서 투타에서 한국을 압도, 한국대표팀은 2:0 패배를 하게 되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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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전적 1승 2패를 기록해, 3전 전승의 일본과 2승 1패의 대만 이 올림픽 본선에 진출했으며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은 3전 전패를 한 중국 대표팀과 함께 귀국해야 했다.

2.4 후폭풍

사실 이해 경기에 대한 팬들의 반응은 "답답하긴 한데 이해는 한다"라는 반응. 언론의 설레발도 있긴 했지만 팀원들이 손발을 맞출 시간도 부족했던 터고 또 주요 해외파가 불참한 것등으로 동정여론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만전이 너무나 아쉬웠고 중국전과 일본전에서는 할만큼 했으니 아쉽다라는 의견이 대세였다[8]. 그리고 당시 프로야구는 암흑기였기 때문에 팬이 없었던 것도.. 그래도 열혈팬은 대만 전에서 어처구니없이 진 걸 보고 뒷목 잡았다.

사실 다른 소위 참사들과 비교하면 참사라고 부르기도 미안해질 정도로 아쉬웠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도하 참사타이중 참사의 경우엔 팬들의 비난과 여론의 냄비근성만으로 끝이 났지만, 2004년 삿포로 참사는 프로야구의 근간을 뒤흔든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바로 이듬해에 발생한 2004 프로야구 병역비리 사건. 2003년 11월에 열린 삿포로 대회를 통해 올림픽 메달을 꿈꾸며 병역 특례를 노렸던 몇몇 선수들이 대거 브로커에게 돈을 주고 병역 면제를 꿈꾸다 들킨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금메달, 2000 시드니 올림픽 동메달,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금메달의 영광을 뒤로하고 프로야구에 일종의 경종을 울린 참사였다. 하지만 이 때의 실책을 고치지 않고 3년뒤 최상의 전력으로 금메달을 자신했지만 엄청난 결과를 저지르고 마는데... 이때도 감독이 재박량..

3 제2차 삿포로 참사(축구)

틀:21세기 대한민국 스포츠 쇼크 역사

3.1 소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참사 중 하나.

2011년 8월 10일 친선경기에서 벌어진 한일전의 충격적인 패배를 일컫는 말이다. 당시 조광래 감독이 이끄는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은 적지인 삿포로 돔에서 경기를 펼치게 되었다. 이 때는 박지성이영표가 대표팀 은퇴를 한지 얼마 안 되었고, 부상으로 인해 이청용지동원이 불참한 상태였다. 일본은 불과 1년 3개월전, 박지성박주영의 득점으로 사이타마에서 일본의 콧대를 꺾은 그경기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듯이 베스트 11중 7명을 유럽파를 채워 넣었은 초호화 멤버를 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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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시작 후 약간씩 밀리던 대한민국 대표팀은 전반 25분 왼쪽 수비수였던 김영권이 발목 부상으로 조기 교체되면서흔들리기 시작했다. 전반 35분, 이근호가 수비에서 드리블 하다 뺏긴 것을 그대로 득점으로 연결 시켰고, 후반 8분과 후반 10분에 혼다 게이스케가가와 신지가 득점에 성공하며 3:0까지 점수차를 벌려놨다.

3.2 충격과 공포의 3대 0 패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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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골 차이로 완벽하게 발린 것은 37년 만이고, 37년 전에는 그나마 한 골을 넣기라도 했지 이번엔 완벽히 클린시트를 안겨주었다. 경기 내용면으로도 왼쪽 수비는 자동문이었으며 미드필드진은 공을 잡으면 당황했다. 그나마 축구 제대로 한 선수는 차두리를 위시한 노장들. 답이 없다. 이렇게 참패를 당한 광경을 본 한국의 축구 팬들은 단체로 뒷목을 잡았다.

경기내용은 상당히 안습했는데, 중앙 미드필더에다가 오랜 기간 경기를 못 뛴 구자철을 윙으로 박아 넣는 등 헛웃음만 나오는 선수 기용과 전방압박의 실종, 혼다와 가가와의 개인기에 한국 미드필더진, 수비진이 초토화가 되었고[9] [10] 정성룡의 선방쇼가 아니었다면 5:0으로 밀렸어도 할말이 없던 상황이었다. 경기가 끝난 후 한국 선수들도 일본이 너무 강했다며 인정했고, 가가와 신지는 "우리가 패스할 때마다 공간이 생겼다. 한국선수들은 우리를 따라오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이런 말을 할만도 한게, 카가와를 비롯한 일본 선수들은 전방위 압박에 약한 대신 패싱 능력은 탈아시아급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대 한국 감독들이 일본이 패스를 시도하기도 전에 강력한 압박과 피지컬로 찍어 눌러버렸던 것이다. 간혹 유럽팀들이 일본을 무시하고 압박을 풀어버리다가 일본에게 의외의 일격을 맞는 경우가 많다. 이런 선수들 상대로 압박을 풀어버리니 그 뒤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11]

그래도 위의 경기내용을 써놓은 것을 보면 알겠지만 3:0 이후 불쌍했는지 일본의 압박이 느슨해지면서 막판에 잠시 주도권을 가져왔었다. 그리고 김신욱, 구자철에게 결정적인 기회가 몇번 걸렸는데 둘 다 약속이나 한듯 어처구니 없이 날려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3골차는 안된다 and 한골이라도 넣어라 축막ㅅㅂ들아 를 염원했지만 결국 무득점 3:0게임으로 끝나고 말았다. 특히 구자철은 적어도 2골은 확실히 넣을 수 있는 찬스를 잡았지만 경기감각이 없었는지 성공시키지 못하며 아쉬움만 남겼다.

특히 이때는 대한항공 A380 독도 시범비행 이후의 일본의 깽판 때문에 국민 감정상 매우 중요한 경기였는데 졌으니 박탈감이 보통이 아니다. 이러다가는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원정 16강은 커녕 본선도 못 올라가게 생겼다 이놈들아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2011 아시안컵도 그렇고 한/일 양국의 선수들의 이적 소식이나 경기 결과를 볼 때 동북아시아의 주도권을 완전히 넘겨준 셈. 지성이형 돌아와요.

당시 이청용이나 손흥민, 지동원이 각각 부상등의 개인사정으로 인해 소집되지 못한데다 박주영기성용은 제 컨디션이 아니었고 대표팀은 일본으로 건너가 조명시설조차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동네축구장에서 연습했다. 반면 일본은 홈경기인데다 베스트 멤버에서 나가토모 유토만이 불참한 최상의 컨디션 등등 입에 담아봤자 비참해지기만하는 변명거리는 많았지만, 부상자가 많아서 패했다는 건 핑계일 뿐이다. 차두리 말대로 크게 반성해서 좋은 기회로 삼는 게 나을 것이다.

그리고 거의 정확하게 1년 뒤, 한국은 비록 A매치는 아니지만 비교가 안되는 큰 게임에서 일본을 상대로 설욕에 성공한다. 이 당시 한국팀에선 삿포로 참사에서도 뛰었던 박주영, 구자철, 기성용, 정성룡, 김영권, 김보경 등이 스타팅으로 뛰었고 박주영과 구자철[12]이 각각 골을 넣었다. 이 당시 일본팀에도 역시 요시다 마야와 삿포로 게임에서 2번의 어시시트를 했던 기요타케 히로시 등 삿포로 참사 멤버들이 몇 있었다.

3.3 트리비아

  • 국내 기사로 혼다가 조롱적인 세레모니를 했다고 개드립을 치고 있다. 뭐 댓글로는 기자에 대한 비난이 압도적으로 폭발했지만.
  • 일본 대표팀은 이번 한일전이 열리기 약 일주일 전에 심근경색으로 사망한 마츠다 나오키를 애도하기 위해 모두 완장을 차고 출장했다. 적절하게도 마츠다 나오키의 생전 등번호는 3번이었다. 이 항목도 3.3번이다 흠칫
  • 이 경기에서 부상당한 박원재부분적인 기억상실증세를 보였다. 어쩌면 이딴 경기 기억하고 싶지 않아!!라는 뇌의 자기방어일지도... 그래, 기억하지 않는게 나아. 잊어버려.
  • 언론으로 작게 씹힌 기사이긴 하지만, 조중연 대한축구협회 회장은 여러 도내 축구협회장들을 데려와 직접 경기를 관람했다가 선거를 앞두고 재선을 노리고자 선거운동 한 거 아니냐는 지적을 받았다. 뭐 경기를 대패하면서 현장에서 본 조회장과 다른 도내회장들 기분은 어땠을려나.
  • 그리고 한국 축구는 4년 4개월 만에 더 큰 대참사가 발생하고 말았다. 자세한 건 항목 참고

이래저래 삿포로는 대한민국 국가대표와 궁합이 맞지 않는 곳인 듯하다. 그리고 2015년 프리미어 12로 일본과 맞붙었다가 0:5 떡실신... 괜찮아. 제2차 도쿄 대첩을 찍었으니 상관없어[13]

4 다른 나라의 삿포로 참사

위에 말한 두 사건에 앞서 2002년 월드컵에도 삿포로 참사로 불릴만한 사건이 있었다. 그 중 유명한 것이 당시 우승 후보로 평가되던 아르헨티나가 그 삿포로 돔에서 숙적 잉글랜드에게 패한 경기로, 삿포로에서 잉글랜드에게 굴욕적으로 패한 아르헨티나는 결국 이 대회에서 광탈하였다.

이외에도 사우디아라비아는 이곳에서 독일에게 0-8이라는 어마어마한 점수로 패하여 결국 뒤에서 1등으로 광탈하였다.
  1. 한양대를 우승으로 이끌며 국가대표팀에 발탁, 지역예선에서 뛰었지만 최종 예선에선 조웅천과 교체되 빠졌다. 광저우 아시안게임 때의 김명성으로 생각하면 될 듯.
  2. 하지만 대표팀에서 빠지지 못했고 전부 참가했다.
  3. 해외파는 핑계인게 박찬호는 텍사스에서 먹튀행각의 절정을 보여주던 중이었고 김병현은 2003년 4월 부러진 배트에 맞아 부상당한 이후 하향세를 타고 있었다. 구대성도 이해 방어율 4.99를 찍으며 부진했다. 해외파 중에 제몫하고 있던 건 서재응 정도였다.
  4. 사실 9회말 임창용과 조웅천에게 변명거리를 말해주자면 9회부터 갑자기 심판의 판정이 병맛이 되어버렸다. 임창용의 볼넷도 사실 스트라이크성 공까지 볼 판정을 내주며 볼넷을 내준 셈이었고..
  5.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당시엔 프로와 아마추어를 섞어 놨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일본 야구 대표팀은 일본 야구사 최초로 프로 1군 정예 선수들로 채워진 첫 멤버들이었다.
  6. 큰 승호 혹은 엘승호.
  7. 임창용이 가장 아쉬워 했던 대회가 바로 이 대회라고 한다. ##
  8. 대만전은 아쉬웠고, 중국전은 잘했지만 결과에 크게 영향을 미칠수가 없었고, 일본은 진짜 강력했다.
  9. 사실 좀 불운했던게 김영권이 부상으로 아웃되고 교체로 들어갔던 박원재가 5분만에 뇌진탕으로 아웃되어 박주호가 투입되는 등 수비진 왼쪽이 붕괴되긴 했다. 하지만 전방 압박이 실종된 상황에서 불운이 없었다고 해도 과연 잘 해냈을지는 의문이다. 게다가 김영권도 교체전까지 썩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박주호는 탈탈 털렸다(...)
  10. 더불어 당시 센터백 중 1명이었던 이재성은 이 경기가 무려 국가대표 데뷔전이었다. 김영권 박원재 같은 풀백들도 당시 A매치가 경험이 한 손으로 꼽을 정도의 새내기들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한일전 일본 원정에서 뭔 깡을 부린 걸까. 감독님은.
  11. 거기다 공미를 보는 혼다 게이스케는 공미라는 높은 지점에서도 한국의 힘에 밀리지 않는 피지컬 + 한국 수비를 갖고 노는 테크닉을 겸비한, 일본 초유의 공격형 미드필더였다. 일반적인 일본 선수였다면 조광래 생각대로였을지 모르겠지만...생각도 없이 지 전술 완성 생각이나 했겠지
  12. 구자철은 게임 후 인터뷰에서 삿포로 참사를 기억하면서 게임을 뛰었다고 했다.
  13. 일본에게 0:5로 패배한 직후, 나무위키에서는 삿포로 참사에 해당 내용을 추가할 것인지에 대한 토론이 진행되었었다. 결론은 '끝날 때까지 지켜보자'였고, 결국 우승을 차지해서 쏙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