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의 날

(전승기념일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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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ctory Day, 전승일을 의미한다. 대표적으로는 서방의 Victory in Europe Day(V-E day, VE day, 대독전승일)와, Victory over Japan Day(V-J day, VJ day, 대일전승일)가 있다. 그외의 승리의 날은 여기서.

1 서방 국가들이 기념하는 승리의 날

1945년 5월 8일로, 칼 되니츠 제독을 총통으로 하는 나치 독일 플렌스부르크 정부가 연합군에게 항복한 날이다.

2 소련의 대독 승전일인 승리의 날

1945년 5월 9일 (9 мая)

왜 서방보다 하루가 느리냐면, 히틀러의 자살 이후 나치독일의 최고통치자가 된 칼 되니츠아이젠하워 휘하 서방 연합군에게 항복했지만 스탈린이 소련측 역시 항복협상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되니츠를 베를린으로 소환하느라 하루가 더 걸렸기 때문이다. 종종 이 문제를 '스탈린이 떼를 썼다' 고 해석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 경우 떼를 쓴 것은 오히려 되니츠쪽이었다고 봐야 한다. 애초에 되니츠의 의도 자체가 항복 협상에서 소련을 배제하고 서방 연합군에게만 항복한 뒤 서부전선의 병력을 동쪽으로 돌려 소련군의 진공을 막아내거나, 소련과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를 맺는다는 것이었는데, 서방 연합국과 소련이 동맹을 맺고 독일과 전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독일 좋을대로 한 쪽에게만 항복하겠다는 주장 쪽이 말도 안 되는 어거지다.[1] 당장 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치열하고 처절한 전투가 벌어진 전선 중 하나였던 유럽 동부 전선의 교전국이었던 소련을 배제하고 종전 협상을 진행하려던 되니츠가 억지를 부린 것인지, 아니면 전쟁 당사국으로써 최대의 피해를 입은 소련도 항복협상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 스탈린과 이에 동의한 루즈벨트, 처칠 등 서방 연합국의 지도자들이 억지를 부린 것인지 좀 생각을 해 보자(...).


우리는 승리하였다.

우리의 위대한 인민, 승리자 인민에게 영광을!

당시 소련의 동맹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중화민국의 국기가 뒷배경이나마 같이 펄럭이는 것이 인상적이다. 하지만 이들은 냉전과 함께 적으로 돌변하고... 폴란드네덜란드는 잊혀졌다. 지못미

이 노병은 과연 얼마나 많은 죽을 고비를 넘겼을까?[2] [3]

День Победы(러시아어). '졘 빠볘듸'[4]라고 읽으면 거의 정확하다.

소련 시절에 시작된 러시아의 기념일 중 하나로, 제2차 세계대전, 러시아측 표현으로는 대조국전쟁의 승전을 기념하는 날이다. 거의 대부분의 소련 시절의 기념일들이 사라지거나 이름이 바뀐 와중에도 아직도 기리고 있는 기념일이다. 러시아는 나치 독일의 침략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국가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을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국제질서에서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등장,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소련 시기에는 1945년부터 1948년까지 공휴일이었다가 해제된 후, 브레즈네프가 집권한 후 1965년부터 다시 공휴일이 되었다.

이 날은 러시아뿐만 아니라 과거 소련을 구성했던 대부분의 국가에서도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다.[5] 이들 국가들도 전쟁에서 나치 독일군과 싸우며 적게는 수십만에서 많게는 수백만까지 엄청난 인명피해를 입었기에[6] 러시아만큼 중요시하고 성대하게 기념하지는 않아도 승리의 날을 자신들의 기념일로 여긴다. 심지어 러시아에 비우호적인 이른바 GUAM 국가들도 [7] 예외는 아니다. 특히 러시아와 전쟁까지 했던 조지아에서도 여전히 기념되고 있는 것은 승리의 날이 구소련 국가들에게도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는지 잘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8] 예외라면 소련과 러시아에 대한 반감이 매우 심한 발트 3국인데, 이들 국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로 서유럽은 해방되었지만 자국은 해방되지 못했다는 것이 공식 입장이다. 이들에게는 소련도 나치 독일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압제자였기 때문이다.[9] 따라서 발트 3국은 5월 9일이 아닌 5월 8일을 종전기념일로 인정하고 있고 추모식을 비롯한 대부분의 기념행사도 5월 8일에 열린다. 그러나 이들 국가에서도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지는 않지만 5월 9일도 참전노병들과 러시아계 주민들을 중심으로 기념 자체는 되고 있다.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남오세티야, 압하지아, 트란스니스트리아, 도네츠크 인민공화국, 루간스크 인민공화국 등 러시아로의 통합을 추진하는 친러시아 미승인 국가들에서도 공휴일로 지정되어 기념되고 있다.

2010년 5월 9일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열린 군사퍼레이드. 그러나 2014년 유로마이단 이후 크림 위기와 동부 우크라이나 위기를 겪으면서 반러 경향이 강화된 우크라이나는 2014년 4월 9일 의회에서 채택된 법안에 따라 5월 8일을 '추모와 화해의 날'로 지정하고공식 문서에서 '대조국전쟁'이라는 단어를 '제2차 세계대전'으로 대체했다. 이에 따라 5월 9일도 '제2차 세계대전 대파시즘 승전기념일'로 명칭이 바뀌었다.


2014년 5월 9일 벨라루스 민스크에서 노병들과 거리 행진 퍼레이드에 참가한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 2015년 5월 9일에 열린 군사퍼레이드에서는 전쟁 당시 사용되었던 기갑 차량들이 등장했으며 러시아군 보병, 기갑, 항공 부대가 함께 참가했고, 미군 군악대도 왔다. 영상 링크


2015년 5월 7일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에서 열린 군사퍼레이드. 카자흐스탄은 독특하게 5월 7일을 조국 수호자의 날 겸 남성의 날, 5월 9일을 승전기념일로 각각 기념하고 있다. 군사퍼레이드와 같은 대규모 공식행사는 주로 5월 7일에 열린다. 이 날은 모신나강 소총과 맥심 기관총을 들고 대조국전쟁 당시의 군복을 입은 장병들이 행진했으며 T-34전차와 BM-13 카츄사 로켓도 등장했다. 영상 링크


2014년 5월 9일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참전노병들을 맞이하는 일함 알리예프 대통령


2012년 5월 9일 아르메니아 예레반의 전몰용사 추모비에 헌화하는 정부 인사들. 아르메니아에서는 5월 9일이 '승리와 평화의 날'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2015년 5월 9일 70주년 승전기념일에는 아르메니아 공군 소속 Mi-8 헬기와 Su-25공격기들이 아르메니아에 주둔한 제102 러시아군 기지 소속 MiG-29 전투기들과 함께 예레반의 승리공원 위로 추모 비행을 했다. 기사링크


2014년 5월 9일 조지아 트빌리시에서 전몰용사 추모비에 헌화하는 노병들


2014년 5월 9일 몰도바 키시네프에서 전몰용사 추모비에 헌화하는 니콜라이 티모프티 대통령, 이고르 코르만 국회의장(좌), 유리 랸케 총리(우)


2011년 5월 9일 타지키스탄 두샨베에서 전몰용사 추모비에 헌화하는 타지키스탄군 의장대


2014년 5월 9일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서 열린 전몰용사 추모식에서 조포를 발사하는 우즈베키스탄군 의장대.


2008년 5월 9일 남오세티야 츠힌발리에서 열린 군사퍼레이드


2015년 5월 9일 도네츠크인민공화국 도네츠크에서 열린 군사퍼레이드


2015년 5월 9일 트란스니스트리아 티라스폴에서 열린 군사퍼레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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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모스크바에서 행진 중인 러시아군 뒤에 있는 소련의 상징이 인상적이다.[10][11]

약 4년간의 독소전쟁 기간 동안 군인과 민간인 합쳐서 대략 2800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쟁기간의 대혼란 때문에 정확한 수치는 아무도 모른다. 참고로 다른 나라는 독일 900만, 폴란드 600만, 프랑스 60만, 영국 45만, 미국 40만 정도 수준이다. 전쟁 막바지에는 스탈린조차도 게오르기 주코프에게 "이제 우리나라엔 전쟁으로 친지를 잃지 않은 사람이 없을걸세."라며[12] 그의 몇 번 안되는 진실로 침통한 표정을 보였다고 한다. 당장 이오시프 스탈린조차도 큰 아들을 독일군에게 잃었다.[13] 스탈린은 종전 후 승전 축하연에서도 "우리의 승리에 저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고, 모든 것은 소련 인민들의 피와 땀이 이룩한 것입니다."하고 연설을 했다.

이 날이 되면, 당시 전쟁에 참가했던 노병들에게 꽃을 선물하고 꺼지지 않는 불 앞에 꽃을 바치며 전쟁 당시 사망한 전몰용사들의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 관례다.

묵념하는 러시아군 장병들

크렘린 벽에 위치한 무명용사의 묘에 헌화하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각국 정상들

또한 러시아의 대표 TV 뉴스보도 프로그램인 브례먀(Время)도 이날만큼은 특수 오프닝을 사용한다.

[1]

러시아 도시 튜멘에서 촬영된 영상. 방송이 나올동안 대부분의 시민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전몰용사를 추모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2.1 퍼레이드

[2]

1945년 6월 24일 전승기념일 행사를 편집한 것이다.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의 목소리가 감격에 겨워서인지 매우 쩌렁쩌렁하다. 흑마를 타고 주코프를 마중 나온 제병 지휘관은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원수였다. 두 사람은 올라타면 금방이라도 내동댕이칠 것 같은 말을 잘 다루면서 사열을 받았다.[14] 원래는 소련군 총사령관인 대원수 스탈린이 말을 사열하는 것을 검토했으나, 이미 그는 60대의 노령이어서 간지나게 말 타는 것은 불가능했고,[15] 주코프에게 양보했다고 한다. 영상을 잘 보면 연단 위에 스탈린을 비롯한 당시 소련의 수뇌부들인 외무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세묜 부됸늬,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미하일 칼리닌 등이 보인다.

[3]
1985년, 40주년 전승일 영상. 기념사를 한 소련 국방장관 세르게이 소콜로프 원수는 장고봉 전투에서 참전한 경력도 있는 74세의 고령 장성이었는데, 이후에도 소련 최고령 원수로 장수하다가 2012년 8월 31일에 101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4]
1990년, 45주년 전승일 영상.

[5]

1995년, 50주년 전승일 영상. 1995년 군사퍼레이드는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과 파클론나야 언덕(Поклонная гора) 두 곳에서 열렸는데 체첸 전쟁으로 러시아의 군사행동에 대한 서방 국가들의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졌기 때문에 이를 의식한 옐친 정부에서 기갑 부대와 항공기는 파클론나야 언덕으로 모두 보내고 외국 정상들이 참석한 붉은 광장에서는 노병들과 일부 보병 부대만을 참가시켰다.

[6]

1995년 전승일 영상.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조지아 대통령을 비롯한 CIS정상들과 빌 클린턴 대통령, 장쩌민 주석 등이 참석했다.

2000년, 55주년 전승일 영상.

[7]

2005년, 60주년 전승일 영상. 각 전선에 참전했던 노병들이 트럭을 타고 지나가는 것이 인상적이다. 조지 부시 대통령, 후진타오 주석, 고이즈미 총리 등 외국 정상들이 대거 참석했으며 그 중에 노무현 대통령도 포함되어있다. 46분 00초를 보자.

[8]

2006년, 61주년 전승일 영상.

[9]
2007년, 62주년 전승일 영상.

[10]
2008년, 63주년 전승일 영상. 이 때부터 기갑부대와 항공기들이 다시 대규모로 동원되기 시작했다.

[11]
2009년, 64주년 전승일 영상.

[12]
2010년, 65주년 전승일 영상. 65주년을 맞아 CIS국가들(조지아, 우즈베키스탄, 발트3국 제외)과 미국, 영국, 프랑스, 폴란드 등 서방연합국들이 참가했다.

[13]
2011년, 66주년 전승일 영상. 거의 모든 장병들이 보급이 완료된 신형 디지털 플로라 군복 보급을 입고 나온 것이 눈에 띈다.

[14]
2012년, 67주년 전승일 영상.

[15]
2013년, 68주년 전승일 영상.

[16]
2014년, 69주년 전승일 영상. 해군이 등장하는 27분 41초와 흑해 함대 해군보병 소속 BTR-80이 등장하는 41분 29초에 전설적인 세바스토폴이 연주되는게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17]

2015년, 70주년 전승일 영상. 러시아와 서방의 관계 악화로 일부 CIS국가들과 중국, 인도, 몽골, 세르비아 등 친러시아 국가들의 군대만 참가했다. 퍼레이드 초반부에 외국 군대들의 행진에서 아제르바이잔군이 가장 먼저 행진하였는데 바로 다음 국가가 아르메니아(...). 두 국가는 관계가 매우 안좋은데 순서가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벨라루스-카자흐스탄....) 으로 편성되었다. 서로 증오하는 국가들이 연달아 배치되었다.

[18]
2016년

각 년도의 군사퍼레이드를 더 자세히 보고 싶다면 링크된 유저의 채널을 참고.

이 날만 되면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서 엄청난 규모의 군사 퍼레이드를 벌인다. 최초의 퍼레이드는 1945년 6월 24일에 시작했으며, 그 뒤로는 쭉 독일로부터 항복을 받은 날인 5월 9일에 행사를 치르고 있다. 소련 시절에는 1945년, 1965년, 1975년, 1985년, 1990년에 붉은 광장에서 군사 퍼레이드가 있었다.[16] 60년대부터는 모스크바 이외의 다른 도시에서도 전승 기념일에 군인들의 행진과 전몰자 위령탑에 대한 헌화 및 참전 용사들의 만남이 개최되기 시작했다. 소련 붕괴 이후에는 러시아의 사정이 좋지 않아서 대규모의 퍼레이드는 힘들었으나, 1995년부터는 다시 매년 퍼레이드를 벌이고 있으며 2000년대 들어서는 다시 대규모의 퍼레이드가 열리고 있다. 이는 푸틴 집권 이후 러시아 정치가 안정되고 경제가 빠른 속도로 회복된 덕분도 있고, 러시아 정부 입장에서 소련 붕괴 이후 많은 물질적, 정신적 어려움을 겪은 국민들의 자부심을 고양시키고 애국심과 단결력을 이끌어내는데 대조국전쟁만한 장치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2008년부터는 다시 기갑 차량과 항공기를 대규모로 동원하고 있다.

과거 소련 시절에는 U-2 같은 격추된 서방의 비행기를 전시하는 등 반서방적인 모습을 보였고, 폴란드군, 체코슬로바키아군 등 바르샤바 조약기구 소속 국가 정도만 같이 참여했으나, 페레스트로이카 이후부터는 퍼레이드 연설에서 함께 독일과 맞서 싸웠던 서방측 연합국들의 공로가 언급되고, 2010년에는 독립국가연합 국가들과[17] 미국군, 영국군[18] 프랑스군,[19] 폴란드군이 참여하는 등 서방을 포함한 다양한 참전국들도 같이 초청하여 퍼레이드를 했다. 2005년에는 조지 워커 부시, 자크 시라크, 후진타오, 고이즈미 준이치로 등등 세계 각국 정상들을 대거 초청하였는데, 노무현 대통령도 여기에 참석하면서 러시아의 전승 기념 퍼레이드가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졌다. 그런데 70주년인 2015년에는 안그래도 우크라이나 위기의 여파로 분위기가 싸늘한 마당에 김씨 조선 꿀꾸리우스박근혜 대통령, 아베 신조 등과 함께 초청된 것이 알려지며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보도되기도 했다.말 그대로 이짤이 실제로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결국 김정은과 박근혜 대통령은 방문을 거절했다.[20][21]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2015년에 열린 70주년 군사퍼레이드에는 우크라이나 위기로 러시아와 서방과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된 탓에 2010년과는 정반대로 서방 군대는 참가하지 않은 것은 물론 서방 정상들도 대부분 참석을 거절했다. 대신 러시아에 우호적이거나 반서방적인 국가들의 군대와 정상들이 그 자리를 메웠다. 아제르바이잔군, 아르메니아군, 벨라루스군, 카자흐스탄군, 키르기스스탄군, 타지키스탄군, 인도군, 몽골군, 세르비아군, 그리고 중국군이 참가했다.1980 모스크바 올림픽 다른 외국 군대보다 더 많은 수의 중국군이 가장 마지막에 배치되었고 시진핑 주석은 푸틴 대통령 바로 옆자리에 앉는 등 러시아는 중국에 대한 최고의 대우를 했고, 이후 중국군 열병식에서 중국도 푸틴 대통령을 시진핑 주석의 옆자리를 주면서 화답했다.

1990년대 이후에는 독일 총리가 승전 기념식에 참석하고 있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와 뒤를 이은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거의 매년 전승기념일 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독일의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을 잘 나타내 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2015년 행사에도 당일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다음날 모스크바에 가서 무명용사의 묘에 헌화했다.

가장 유명하고 규모가 큰 모스크바 붉은 광장의 군사 퍼레이드를 기준으로 설명하면, 아침10시에 크렘린 첨탑의 종이 울리고 제병 사령관의 구령과 함께 러시아 국기와 제1벨라루스 전선 제3충격군 제79군단 제150이드리츠카야[22] 소총병 사단[23] 글씨가 적힌 소련 국기[24]를 든 의장대 병사들이 성 바실리 성당 쪽에서 역사 박물관 쪽으로 붉은 광장을 가로 질러 간다.[25] 다음으로 러시아 국방부 장관과 제병지휘관이 탄 두 대의 자동차가 광장을 가득 메운 퍼레이드 참여 병사들을 사열한다. 사열이 끝나면 대통령의 연설이 있고, 연설 중간에 묵념을하고 다시 연설을 재개한다. 전승 기념일을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대통령이 "우라"로 연설을 끝맺으면, 장병들이 일제히 우라삼창을 외치면서 러시아 국가가 연주되고 예포가 발사된다.[26]

예포 발사와 함께 국가가 끝나면 퍼레이드 행렬 맨 앞에 선 제병지휘관의 구령에 따라 의장대 병사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정렬한다. 제병지휘관의 구령이 떨어지면 행진이 시작되고, 드럼을 연주하는 군악학교 학생들과 퍼레이드 시작 때 붉은 광장을 가로질러 갔던 의장대를 선두로 하여 대조국전쟁에서 전공을 세웠거나, 러시아군의 핵심 전력을 담당하는 현역 부대들과 특수부대, 여러 종류의 군사교육기관, 군사조직, 준군사조직(철도경비대[27], 비상사태부[28], 내무군, 국경수비대 등) 부대들이 붉은 광장을 지나간다. 이 때 각 부대의 최고 지휘관들은 붉은 광장을 벗어나 퇴장하지 않고, 중간에 관중석 쪽으로 빠져서 정렬하고 있다가 퍼레이드 이후에 대통령의 사열을 받는다. 이러한 부대들이 지나가기에 앞서 2005년, 2010년, 2015년처럼 대조국전쟁 때의 모습을 재현한 장병들이 나오기도 하며, 2005년처럼 2차대전 참전 용사들과 노동자들, 혹은 2010년이나 2015년처럼 외국 군대가 참여하기도 한다.

보병 부대의 행진이 끝나면 군악대가 국영백화점(일명 ГУМ())쪽으로 이동하면서 자리를 바꾸고, 트베르스카야 거리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갑 차량들이 진입하면서 기갑 퍼레이드가 시작된다.[29]BTR-80, T-90, 아르마타, S-400, 이스칸다르, 토폴-M등 러시아가 자랑하는 첨단 기갑 차량들이 쏟아져 나온다고 보면 된다. 2010년이나 2015년처럼 현대 기갑 차량들이 등장하기 전에 T-34, SU-100같은 2차대전 차량들이 나오기도 한다.

기갑 퍼레이드가 끝나면 항공 퍼레이드가 시작된다. 2005, 2007년에는 Su-27과 MiG-29로 구성된 곡예비행편대가 붉은 광장 상공을 지나쳐가는 것으로 끝났고, 2011~2012년에는 러시아 국기와 육해공군기 등을 매단 Mi-8헬기들이 상공을 지나가는 것으로 끝났지만, 2008년~2010년, 그리고 다시 2013년부터는 각종 헬기와, 전폭기, 수송기, 공격기, 폭격기, 조기경보기, 공중급유기 등을 수십 대 동원해서 대규모 항공 퍼레이드를 한다.[30] 항공 퍼레이드까지 종료되면 군악대가 관중석 쪽으로 전진하고, 의장대도 퇴장. 군악대는 군가를 연주하면서 둘로 갈라진 다음 양쪽으로 퇴장하고,[31][32]대통령과 국방부장관이 군 지휘관들을 사열하면서 퍼레이드가 끝난다. 퍼레이드를 마치고 퇴장한 부대 병사들은 가두 행진을 하고 시민들과 사진을 찍는 등 전승 행사에 참여한다.[33]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열리는 군사퍼레이드에 참가하는 장병들은 실수 없이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어야하기에 몇 개월 전부터 빡세게 연습해야한다. 퍼레이드는 5월 초에 열리지만 연습은 그 전 해의 늦가을이나 겨울부터 벌써 시작된다. 그러니까 거의 반년을 연습하는 셈(...) 차량이나 비행기도 예외는 아니어서 기갑 부대 승무원들도 바퀴까지 먼지 하나 없게 광택이 나게끔 닦아야하고, 항공기 조종사들도 복잡한 비행대형을 유지하면서 정확한 위치와 시각을 맞추어 광장에 진입하는 연습을 해야한다. 보는 사람들은 즐겁지만 준비하는 당사자들은 죽을 맛인건 전세계 어느 행사나 다 똑같다 게다가 사관학교 위주로 보병 행진을 진행하다보니 최선두에는 연대장생도 내지 사관학교장이 서야 하고, 결국 나이 지긋한 중장 상장 할배들까지 고생하게 된다. 그리고 항공기 조종사들 중에도 장성급 조종사를 다수 갈아넣는다. 60 가까이 먹고 공중급유 시범이라니 흠좀무...

다른 지역의 퍼레이드도 형식은 대동소이하다. 다만 퍼레이드 지휘관이 해당 지역의 사령관들로 바뀌고, 해당 도시가 전쟁 기간 어떤 전공을 세웠는지가 뚜렷히 강조된다. 예를 들면 상트페테르부르크 퍼레이드에서는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고 900일이 넘는 포위를 견뎌낸 레닌그라드 공방전의 역사가 항상 강조되고, 블라디보스토크하바로프스크에서는 일본과의 전쟁도 언급되는 식이다. 또한, 경찰, 교도국, 소방대 등의 기타 국가기관 종사자들이나 명문 학교 학생들이 참가하는 경우도 있으며 퍼레이드가 열리는 지역이나, 해당 지역과 가까운 외국의 참전노병이나 군대가 초청되는 경우도 있다.[34] 물론 대외적으로 공개가 제일 많이 되고 신무기가 우선적으로 배치되는 모스크바의 퍼레이드와는 달리 다른 도시에서는 2선급 무기도(S-300, BM-21, BMP-2, T-72, T-80 등등) 많이 보이고 규모도 훨씬 작은 편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나 세바스토폴처럼 항구도시인 경우 해상퍼레이드가 열리기도 한다.

[19]
2015년, 70주년 전승일의 레닌그라드.

[20]

2014년, 69주년 전승일의 세바스토폴.

[21]
2015년, 70주년 전승일의 그로즈니.

[22]

2015년, 70주년 전승일의 블라디보스토크.

[23]

2015년, 70주년 전승일의 볼고그라드.

[24]

2015년, 70주년 전승일의 노보시비르스크.

[25]

2015년, 70주년 전승일의 예카테린부르크.

[26]

2015년, 70주년 전승일의 하바로프스크.

퍼레이드에서 흘러나오는 브금을 맞추는 것도 군가 매니아들에게는 쏠쏠한 재미이다. 퍼레이드에 행진곡으로 사용되는 곡들 중에는 슬라브 여인의 작별, 진격, 카츄샤, 포병 행진곡, 항공행진곡, 우리는 인민의 군대, 나는 믿는다 친구들아, 소련 전차병 행진곡, 세 전차병, 성전(군가), 승리의 날 소비에트 마치 등이 있다. 군가 이외에도 Синий Платочек 같은 2차대전을 배경으로한 군가가 아닌 음악도 들린다.

2.2 여담

참고로 이 날은 히틀러 생일과 마찬가지로, 네오나치스킨헤드들이 극성인 날 중 하나이긴 한데, 그렇다고 전승기념일 날 러시아 전역이 위험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날은 자국민에게 린치당할까봐 스킨헤드가 짜져(…) 있는 날 중 하나이고, 극동이나 시베리아 같이 유색인종 비율이 높은 지역에서의 위험 요소는 거의 없다.

그렇다면 왜 스킨헤드가 극성이냐고? 이런 축제 분위기에 사람들이 들떠 있을 때 원래 깽판부리고 관광객 시비 걸기 더 좋은 법(…). 특히 사람들이 기뻐서 술 취하고 돌아다니는 야밤에 그렇다. 그렇게 큰 걱정을 하지는 않아도 된다.

물론 그렇다고 전혀 걱정 없이 낮에 으슥한 곳을 지나가거나 밤에 유흥가 돌아다니지는 말자.

그리고 매년 퍼레이드 영상에 헬마치 또는 소비에트 마치를 넣은 영상이 유튜브에 나온다.[35] 원조의 위엄

3 러시아의 군가(?)

붉은 군대 합창단 버전

한국어 자막.


작사: 블라디미르 하리토노프 (Владимир Харитонов, 1920-1981)

작곡: 다비트 투흐마노프 (Давид Фёдорович Тухманов, 1940-)

러시아의 군악. 어원은 1번 항목

처음으로 부른 가수는 레프 레셴코(Lev Valerjanovich Leshchenko/Лев Валерианович Лещенко, 1942-)이다.

사실 이 노래는 2차 대전 당시 작곡된 게 아닌, 전후인 1975년에 작곡되었는데, 소련 정부가 2차대전 30주년에 써먹을 곡을 모집하던 중 응모되었던 곡 중 하나였다.

그러나 자본주의 냄새가 풀풀 난다고 기각당했으며, 승전행사는 커녕 밤에 흘러간 노래 위주로 진행되는 갈루보이 오고뇨크(Голубой огонёк)라는, (한국으로 친자면) 가요무대같은 TV프로그램에서나 틀어주던 곡이었다.[36]

바로 이 때에 부르던 가수가 레셴코였으며, 그저 그런 노래로 묻힐 뻔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 해 소련 경찰의 날이었던 11월 10일에 이런 흥행 저조를 1번에 박살내고, 말 그대로 대박을 쳤다고 한다.

하지만 이 노래가 이 날에 항상 틀어주는 단골곡이 된 데에는 더 큰 이유가 있는데, 바로 당시 소련 서기장이었던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이 곡에 아주 빠져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저 그런 가요로 묻힐 뻔한 곡이 결국 정식 군악으로 승격되고, 매년 승전일마다 연주되게 되었다.[37]

저 위에 있는 2011년 퍼레이드의 49분에 이 곡이 연주 된다. 관료주의의 표본이 따로없다. 지난 2007년에는 레셴코 본인이 승전기념 행사에 등장, 이 곡을 직접 부르기도 했다.#

3.1 가사

러시아어로마자한국어
1절
День Победы, как он был от нас далёк,Den' Pobedy, kak on byl ot nas dalyok,승리의 날이여. 이를 위해 얼마나 멀리 달려왔던가
Как в костре потухшем таял уголёк.Kak v kostre potukhshem tayal ugolyok.폐허가 된 고향에서 꺼져가는 포연속에서의 승리의 날이여.
Были вёрсты, обгорелые, в пыли[38]
Byli vyorsty, obgorelye, v pyli승리를 위해, 불타버린 머나먼 길을 달려왔고
Этот день мы приближали как могли.Etot den' my priblizhali kak mogli.이날을 위해 우리 모두 장렬하게 싸워왔네.
후렴
Этот День Победы Порохом пропах,Etot Den' Pobedy Porokhom propakh,강토가 화약냄새로 덮여버린 승리의 날이여.
Это праздник С сединою на висках.Eto prazdnik, S sedinoyu na viskakh.그날의 용사들이 모인 승리의 날이여.
Это радость Со слезами на глазах.Eto radost' So slezami na glazakh.그때의 환희로 우리 모두의 눈에 눈물이 고이네.
День Победы! x3Den' Pobedy! x3승리의 날이여! x3
2절
Дни и ночи у мартеновских печейDni i nochi u martenovskikh pechey,밤낮으로 우리는 시련을 겪었고
Не смыкала наша Родина очей.Ne smykala nasha Rodina ochey.우리의 고향은 잠들지 못했네.
Дни и ночи битву трудную велиDni i nochi bitvu trudnuyu veli,우리는 고향을 위해 악귀같이 싸웠고,
Этот день мы приближали как могли.Etot den' my priblizhali kak mogli.이날을 위해 우리 모두 장렬하게 싸워왔네.
3절
Здравствуй, мама, возвратились мы не всеZdravstvuy, mama, vozvratilis' my ne vse엄마. 그간 잘있었어요? , 우리들 중 몇몇은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지마는…
Босиком бы пробежаться по росе!Bosikom by probezhat'sya po rose!우리 모두 맨발로라도 집으로 가고 싶어요!
Пол-Европы, прошагали, пол-ЗемлиPol-Yevropy proshagali, pol-Zemli유럽의 반을, 천하의 반을 큰 걸음으로 달려왔네,
Этот день мы приближали как моглиEtot den' my priblizhali kak mogli.이날을 위해 우리 모두 장렬하게 싸워왔네.
후렴 x2

보면 알겠지만 가사가 매우 장렬하다. 아니, 이 노래 어디에서 자본주의 냄새가 난다는 거야?[39] 가사는 그럴듯 한데 음악이 좀 뽕짝 냄새가 난다…

4 중국의 전승절

전승절(중국) 항목 참조

5 그 외

터키의 경우 터키 독립전쟁이 끝난 8월 30일을 승리의 날로 삼는다. 공무원들은 8월 29일은 오전까지만 정상적으로 업무를 수행하고 점심에 퇴근하는 식으로 1.5일을 쉰다. 별거 없는 앙카라가 이 날 만큼은 꽉 찬다나 뭐라나. 아타튀르크의 묘는 뭐...
  1. 당시 유럽 전선의 연합군 총사령관이었던 아이젠하워도 이런 독일의 의도가 말도 안 된다고 여기고 동서 전선 동시에 무조건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
  2. 러시아의 한 신문에서는 네오 나치를 비판하려 이 사진과 함께 나치식 경례를 하는 네오 나치의 사진을 대비시켰다.
  3. 본 사진의 주인공은 레프 기체비치(лев гицевич)옹. 1941년에 어머니가 SS에게 총살당한 것을 계기로 입대했고, 1945년 일본군을 상대로 하는 뤼순 전투에도 참여했다. 이 영감님이 찍으신 다른 사진(...). 승전국 참전용사의 여유가 느껴진다
  4. 구개음화 및 모음의 강세 때문에 이렇게 발음이 난다. 마지막 모음이 '의' 발음이 나고 구개음화가 없기에 마지막 발음은 지가 아니라 듸다.
  5. 2015년 현재를 기준으로 공휴일로 지정되어있는 나라는 러시아 외에 벨라루스,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조지아, 몰도바, 그리고 구소련 국가는 아니지만 친러 성향이 강한 세르비아이다.
  6. 특히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몰도바는 전국토가 전쟁터가 되어 전쟁의 참화를 그대로 입어야했다.
  7. 조지아(Georgia), 우크라이나(Ukraine), 아제르바이잔(Azerbaijan), 몰도바(Moldova) 등 4개국의 앞머리 글자를 딴 것 이다. 우즈베키스탄(Uzbekistan)을 넣어서 GUUAM이라고 하기도 한다.
  8. 2011년 조지아 외무부가 승전기념일을 5월 9일에서 5월 8일로 옮기자고 제안했고, 2013년 몰도바에서도 집권당이 국가적 수준에서의 승리의 날 기념을 중단하자고 제안했지만 둘 다 무산되었다. 물론 시간이 좀 더 흘러 대조국전쟁과 소련이라는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는 구세대가 사라지고 반러 경향이 가속화된다면 이들 국가에서는 5월 9일이 공휴일에서 해제되거나 5월 8일 등 다른 날로 옮겨질 여지가 충분히 남아있다.
  9. 일례로 에스토니아는 2007년에 수도 탈린에 있던 소련군 동상을 외곽으로 이전하고 이에 반대하는 러시아계 주민들의 시위를 진압했다가 러시아 해커들로 추정되는 세력에 의해 사이버테러를 당해 국가기간망이 거의 마비된 적도 있다.
  10. 이 날 러시아를 방문한 존 케리 미국 국무 장관은 군 퍼레이드 때문에 공항에 갇혔다. # 푸틴은 오후에 위기의 크림반도로 가서 흑해함대를 사열했다. #
  11. 정확히는 대전 당시나 혹은 전승 기념으로 제정되고 수훈되었던 훈장들의 모습이다. 해당 항목 참조
  12. 러시아의 거의 모든 가정마다 전쟁으로 죽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2010년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도 승전 65주년 군사퍼레이드 연설에서 언급한 바있다.
  13. 스탈린의 장남 야코프 주가시빌리는 포병 중위로 참전했다가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 독일측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포로가 된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원수와 야코프를 맞교환하자고 소련측에 제의했는데 스탈린이 "중위와 원수를 바꾸자니 뭔 개소리냐?"며 단칼에 거절했다. 오히려 "포로가 된 자는 반역죄로 취급하고 가족들도 처벌하라"는 본인의 지시대로 야코프의 가족들을물론 애비 빼고 투옥시켰다.
  14. 아닌게 아니라 이 두 사람은 기병출신이었다.
  15. 그러나 스탈린도 기병부대의 정치장교를 했었기 때문에 승마 자체는 가능했다.
  16. 10월 혁명은 매년 11월 7일 빠지지 않고 퍼레이드가 있었는 데 어째 취급이 안습하다(…).
  17. 반러 감정이 심한 발트 3국은 참가하지 않았다. 2008년 러시아와 남오세티아 전쟁을 벌였던 그루지야도 마찬가지. 우즈베키스탄도 참가하지 않았다.
  18. 버킹엄 궁전 근위대가 참가했다.
  19. 소련 영토에서 창설되어 공중전으로 명성을 떨치고 소련제 야크기를 몰고 파리로 귀환한 것으로 유명한 노르망디-니멘 전투기 연대가 참가했다.
  20. 김정은은 원래 참석 의사를 밝혔으나 이후 번복했다. 아직도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으며 김정은의 외교 의전 경험 부족, 러시아의 대북 무기 판매 요청 거절, 북한 내 쿠데타 우려 등등 온갖 추측이 쏟아지고 있다. 대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김영남을 파견했다.
  21. 국내 러시아 전문가들과 일부 여야당 의원들은 한러 관계와 남북 대화를 위해 박근혜 대통령의 참석 필요성을 주장했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은 이미 한반도 문제와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등을 위해 필수적인 한러 관계를 고려해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서방의 대러 제재에 지금까지도 참여하지 않고 있다. 미국의 우방이자 동맹국인 우리로서는 한국이 대러 제재 노선에서 이탈해있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는 미국을 배려할 필요가 있었으며, 따라서 승전기념일 참석을 강행하면서까지 필요 이상의 무리수를 둘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결국 이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박근혜 대통령의 참석은 완전히 물 건너 갔다. 대신 새누리당 윤상현 의원을 특사로 파견했다.
  22. 러시아 서북부 국경 지대에 근접한 도시, 이드리짜(Идрица)를 해방한 전공으로 수여된 명예 칭호. 소련-러시아군에는 이렇게 도시명이나 지명이 붙은 부대가 많다. 제4 근위 칸테미로프스카야 전차 사단, 제27 근위 세바스토폴스카야 독립 차량화소총병 여단 등등.
  23. 베를린 독일 국회의사당에 소련 국기를 게양한 미하일 예고로프와 밀리톤 칸타리야의 소속 부대.
  24. 퍼레이드에서는 Знамя Победы(승리의 깃발)이라고 부른다.
  25. 여기서 연주되는 배경 음악이 священная война이다.
  26. 소련 시절에는 3절이 다 연주되었다. 현재는 모스크바를 포함, 다른 도시에서도 대체로 1절만 연주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3절까지 다 연주한다.
  27. 2011년에 승격되어 육군의 일부가 되었기에 현재는 아니다.
  28. 비상대책군이라는 준군사조직을 거느리고 있다.
  29. 소련 시절 군사 퍼레이드 때는 붉은 광장 입구에 위치한 역사 박물관 양쪽으로 각 2줄씩 총 3~4줄에 달하는 기갑 행렬이 붉은 광장으로 진입했는데, 현재는 차량 수도 줄어들었고 왼쪽 입구가 복원되어 막혔기 때문에 한 쪽에서만 2~3줄로 나누어 진입한다.
  30. 아예 동원되는 항공기의 숫자까지 해당년도에 맞게 맞추기도 한다. 예를 들면 2014년 69주년 퍼레이드에서는 69기를 동원했다.
  31. 이 때 군악대가 연주하는 군악은 슬라브 여인의 작별, 소련군 찬가, 승리의 날, 우리는 인민의 군대 등이 있다.
  32. 1995년에서 2000년까지는 승리의 날이 연주되었다. 이후 2001년에는 우리에게 필요한 하나의 승리가, 2002년에는 슬라브 여인의 작별이 잠깐 연주되었으나, 이듬해 2003년부터 2009년까지 소련군 찬가가 연주되었다. 그러나 2010년에 외국의 군대와 군악대가 퍼레이드에 참여하면서 이를 의식했던지 다시 슬라브 여인의 작별이 연주되었고, 2014년까지 이 곡이 연주되었다. 2015년에는 70주년을 맞이하여 군악대는 우리는 인민의 군대를 제창하고 승리의 날을 마지막 분열곡으로 연주했다.
  33. 여담으로 2008년에 퍼레이드에 참가한 BMD-4는 이 때 불이 났다.
  34. 예를 들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리는 군사퍼레이드에는 그냥 깃발만 들고 지나가는 정도이긴해도 미군도 자주 모습을 비췄다.
  35. 더욱 아이러니한건 MBC 뉴스에서도 소비에트 마치를 브금으로 넣은 뉴스를 보냈다는 것이다! 심지어 후반의 독소전쟁 기록영상에서는 GIRLS und PANZER 버전의 카츄샤를 브금으로 넣는다!뭐하는거냐 MBC
  36. 항간엔 이 노래가 노병을 주제로 하고 있다 보니, 이걸 들으면 소련군이 힘빠진다고(…) 틀지 말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고 한다.
  37. 정작 브레즈네프는 대조국전쟁 당시 일선 야전군 정치위원이긴 했지만, 뚜렷한 전공을 세운 적은 없었다. 뭐, 공 없는 사람은 군 시절의 향수에 빠지지 말란 법은 없지만…
  38. 원문은 '베르스타(верста)'로 러시아의 거리단위를 말한다. 약 1.067km에 해당.
  39. 소련 등 구 동구권에서 문화매체에 '자본주의 냄새가 난다'고 하는 건 십중칠팔 내용이 감상적이라는 이야기다. 이 노래 가사도 소련군 찬가 같은 군가와 비교하면 꽤 감상적인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