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수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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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수 대첩
날짜
612년 7월(음력)
장소
살수
교전국1교전국2
교전국고구려수나라
지휘관을지문덕우중문
우문술
조효재
위문승
장근
형원항
설세웅
왕인공
신세웅†
병력불명305,000여명
피해 규모불명2,700여명을 제외하고 궤멸
결과
고구려군의 승리
기타
수나라는 이 전투의 후유증으로 멸망.
살수 강물 파도치며 허공에 출렁이니, 薩水湯湯漾碧虛

수 나라 백만 군사 고기밥이 되었것다. 隋兵百萬化爲魚
지금까지 어초들의 얘깃거리로 남아, 至今留得漁樵話
지나는 나그네의 한바탕 웃음거리 되고도 남네. 不滿征夫一笑餘

고려조선 초기의 문신 조준의 시 안주회고(安州懷古). 중국에서도 굴욕 같은 역사로 아는지 700여년 후, 조선 초에 명나라 사신 축맹이 조선 대신 조준에게 오만방자하게 굴자 조준이 절구로 살수대첩을 언급하며 수많은 중원 젊은이가 고구려에서 물고기밥으로 사라졌다고 비꼬자 축맹은 불쾌한지 입을 다물었다고 한다.참고

1 개요

薩水大捷
612년(영양왕 23년), 살수(현재의 청천강)[1]에서 고구려의 장군인 을지문덕 장군의 주도아래 이루어낸 대첩.

제2차 여수전쟁의 대표적인 전투 중 하나이며 고구려의 청야전술명장 을지문덕의 뛰어난 지휘, 수나라 장수들의 판단 착오, 전술적 오류 그리고 장수들간의 불협화음과 내호아의 욕심이 만들어낸 사건이다. 전투 한번으로 제국을 말아먹었다는 평까지 나오며 실제로 수나라는 여러가지 내부 악재에 살수대첩의 참패의 여파까지 겹쳐서 수 제국이 멸망하게 되었다.

한국인들 상당수가 수공 하면 곧바로 살수대첩을 떠올릴 정도로 수공으로서는 굉장히 인지도가 높지만, 실제로는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수공으로 쓸어버린 건 아니다. 자세한 건 아래를 참고할 것.

2 배경

제2차 고구려-수 전쟁 당시 요동성 공격에서 고구려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많은 손실을 입었으며 전투가 길어지면서 보급이나 사기에 문제가 생겨 전황이 불리해졌다. 이에 수양제는 우중문, 우문술의 30만 별동대를 조직하여 평양성을 직접 공격하기로 한다. 이는 황해를 건너는 수군과의 병진작전을 통한 평양성 함락을 꾀한 것이지만, 정작 내호아의 수군은 고구려의 유인작전에 휘말려 평양성일대에서 괴멸하였다. 이때 고구려군을 지휘한 사람이 영양왕의 동생 고건무(영류왕)이다.

3 진행

기존의 보급문제에 수(水)군과의 병진작전이 불가능해지면서 수(隋)군은 점차 한계에 봉착했으며, 을지문덕 장군은 항복을 구실로 적진을 탐색하여 별동대가 보급이나 사기에 문제가 있음을 간파하였다. 별동군 내부에서는 을지문덕이 자신들의 진영에 들어왔을 때 그를 생포해야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지휘관들의 충돌이 있었다. 우중문과 우문술은 "을지문덕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했으나, 참군(參軍)인 유사룡은 "사신을 함부로 포박하면 안 된다."는 논지로 을지문덕을 그냥 보내주자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갑론을박을 벌이는 와중에 결국 을지문덕은 무사히 탈출하였다.

그 후 별동대는 진군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에 고구려군은 7번 공격하여 7번 퇴각하여, 적군을 평양 부근까지 유인을 하는데 성공한 을지문덕은 우중문에게 입조를 약속하는 듯한 거짓 항복문서를 보낸다.

야사에 따르면 이때 을지문덕은 한편의 시를 더 보낸다. 그 유명한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

神策究天文

신책구천문
귀신같은 책략은 하늘의 이치(천문)를 깨달았고

妙算窮地理
묘산궁지리
신묘한 셈은 땅의 형편(지리)을 다하였도다.

戰勝功旣高
전승공기고
싸움에 이겨 공이 이미 높으니

知足願云止
지족원운지
원컨대 만족함을 알고 그만두기를 바라노라.

천문 지리 다했으면 지구과학 같은걸 끼얹나

언뜻 보면 띄워주는 것 같으나 그 내용은 철저한 조롱이다.그러니까 그만 ㅈ되기 전에 꺼져 줄래? 이만큼 놀렸는데도 불구하고, 아니 놀렸기 때문에 우중문은 평양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냥 물러나고 만다. 그랬으면서 자신은 우문술이 군량이 부족해 후퇴를 요구하자 질책했었다. 이미 을지문덕이 수나라 군을 염탐하고 이후 그들의 상황을 꿰뚫어보고 있었기에 들어가면 깨진다고 본 것. 그런데 이 선택이 그만 그대로 평양을 치는 것만 못하게 되었다. 고구려에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였겠지만, 나갈 때는 아니란다

4 전투 분석

우중문이나 우문술이나 크게 눈에 띌만한 전략, 전술적 오류를 저지른 적은 없다. 수나라 군대는 고구려의 요동-압록 방어선을 일시에 돌파하여 평양에 육박하여 수군에게서 보급을 받고, 평양을 공격하려는 전략을 짰고, 일단 수의 별동대는 전투없이 성공적으로 요동-압록 방어선을 돌파했다. 기록에 따르면 갑자기 대군이 우르르 모든 중요 연결로로 일시에 몰려나오니까인민 웨이브 본래 한 루트로만 수군이 오면 측면을 치려고 했던 고구려군이 각자 현 위치에 고착되어버렸다고... 6.25 전쟁 당시 중공군이 쓴중공 웨이브 전법하고 똑같다. 수나라 군이 일단 평양 인근까지 육박하는데는 성공했지만... 문제는 위풍당당하게 고구려군을 물리치면서(라고 생각하면서) 도착해보니 보급을 맡았던 그놈의 수군이 쫄딱 망해버린 것. 별동대가 도착하길 기다렸으면 되는데 무리하게 평양성을 공격했다가 말아먹은 내호아의 과오가 더 크긴 하다.

물론 살수대첩의 의미는 내호아의 수군 격퇴시점에 따라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수나라 30만 별동대 자체만 해도 당시 을지문덕의 군대가 상대하기는 버거운 군세였으므로, 만약 별동대가 파견되기 이전에 내호아의 수군이 격멸당했다면 이는 보급이 끊긴 적군을 끌어들여 섬멸하려는 유인작전이었을 것이다. 반대로 내호아의 수군 패배 시점이 별동대 파견 이후의 시점이라거나, 혹은 수군이 잔존해 있었다면(내호아의 부관 주아상이 어떻게든 수군을 추스르긴 했다)고구려군이 잦은 교전을 펼친 것은 수군과 별동대가 접선하여 군량 보급이 이뤄지기 전에 수나라 군대의 전진을 지연시켜 되돌려보내려는 의도였다고 평가될 수 있다.

어찌되었건 수군과 별동대가 접선하기 전 수의 수군은 물러났고, 별동대는 보급이 끊긴 상태에서 고립되었다가 후퇴하게 된다. 고구려군은 끊임없이 게릴라전을 펼치며 별동대를 괴롭혔고, 결국 지금의 청천강 일대인 살수에 다다르자 고구려군은 전력을 다해서 총공격을 가하였다. 강을 건너느라 수군이 반으로 나뉘었던 시점에서 고구려군이 맹공을 가했고, 수의 군대도 이를 예견하고 우둔위장군 신세웅이 후위를 맡아 방진을 치고 저항하였지만 지친 수나라 군대는 고구려군의 맹공에 얼마 견디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후위의 붕괴에 동요한 30만 대군이 연쇄적으로 우르르 무너졌다. 왕인공이 일시적으로 고구려군을 격퇴했지만, 제대로 부대를 추스려오지는 못했고 30만 5,000명 중 압록강에 다다른 병사는 겨우 2,700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나마 살아남은 2,700명도 건제를 유지하고 철수한 것이 아니라, 하루만에 살수에서 압록강까지 도망쳐 왔다는 사서의 기록을 볼때 갑옷이고 창검이고 다 팽개치고 걸음아 나살려라 하고 도망친 오합지졸 패잔병 수준. 특히 수나라의 제8군은 지휘관 신세웅을 포함하여 단 1명도 살아남지 못하고 모두 전사했다.

다만 그래도 우중문과 우문술이 이길 여지는 있었다. 을지문덕이 항복합네 하면서 사신으로 와서는 수나라 군영을 죄다 정찰하고 갔는데 이 때 우중문과 우문술이 을지문덕을 포박했었다. 이때 예의고 나발이고 다 팽개치고 을지문덕의 목부터 베었더라면 수나라의 입장에서는 지휘관이 없는 군대를 상대로 전투를 치르는 양상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수나라군 참군으로 있던 유사룡이 "사신을 참수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 짓"이라며 을지문덕을 풀어주는 바람에 우중문과 우문술은 승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고구려군이 수공을 펼쳤다는 주장도 있으나 근거가 약하다. 살수대첩 당시 수공설은 1차 사료에는 등장하지 않고 근대 기록에서나 나타난다. 사실 고대의 기술로는 전쟁 도중의 짧은 시간에 엄청난 격류를 만들어낼 댐을 만들 기술도 없었을 것이고, 설령 만들었다고 해도 타이밍 맞게 내려보내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지금도 댐하나를 만들기 위해선 엄청난 양의 시멘트나 콘크리트같은 물량과 인원 그리고 건설기기들이 총동원되는 토목공사중에서도 난공사로 악명높다. 더구나 이때는 토목기술을 커녕, 공병이라는 개념도 세워지지 않았던 상태에서 강을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나중에 고려사에서 여요전쟁 때 흥화진 전투(귀주 대첩이라고 가끔 오인되는 전투이다.)에서는 강감찬이 수공했다는 이야기는 나오는데, 강물이 얼어서 잠시동안 물을 흘려 거란군을 분열시키려는 의도로 평가되며 사람 쓸어내릴 정도의 격렬한 수공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발목 정도 물만 돼도 사람은 충분히 넘어진다. 귀주대첩 항목 참조.

그리고 고구려군이 저런 어마무지한 전공을 거둘수 있던 이유 중 하나는 보급문제로 곤죽이 되어버린 수군인데다가, 진격보다 어렵다는 후퇴상황, 게다가 가장 기피해야 하는 도하 중 교전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손자병법에도 '적군이 강을 건널때 공격하면 필승!'이란 이야기가 나올 정도다. 그야말로 모랄빵나기 딱 좋은 상태를 골라서 대규모 공세를 펼쳤다는 것으로 수군은 이미 을지문덕의 손바닥 안에 있었던 것이다.

5 결과

수나라 군대 2,700여명을 제외하고 궤멸. 이전 기록에는 압록강을 건너 수양제의 본진으로 귀환한 병역이 약 2,700명 정도였다는 중국측 기록을 참고하여 전원 전사자로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귀환병을 제외한 병력이 모두 전사했다고 표기하는 건 상식적으로 잘못이다. 고구려측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 그 비율은 모르지만, 포로가 되거나 뿔뿔이 흩어져 버린 인원도 엄청날 것이다. 또한, 전투에 끝난 이후에 고향으로 복귀한 병력도 존재할 것이다. 철저한 포위전이 아닌 이상, 부대의 전멸이란 전사자가 발생하는 상황보다는 병력들이 통제를 잃고 와해되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한다. 어쨌든 30만명이 2,700명으로 변하긴 했지만

이후 2,700여 명의 병력들이 간신히 본진에 도착하자 수양제는 대노하여 이들을 모두 쇠사슬로 포박해서 끌고가며 퇴각했고, 수나라에 도착하자 마자 이들을 감옥에 가두었다. 특히 참군으로 이 전투에 참전했던 유사룡에게는 을지문덕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패전의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당해 참수형을 당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참패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내호아는 정작 아무 처벌도 받지 않았다. 다만 설세웅의 경우는 갑옷이 무겁다고 해서 갑옷을 벗어던지고 살수대첩 후에 뒤를 추격해오는 고구려군을 맞아 싸워 이기고 종횡무진 활약한 공으로 패전의 책임을 물지 않고 오히려 승진하였다.

수양제는 이후 3차, 4차 침공을 계속했으나 결국 고구려 정벌에 실패했으며, 이렇게 무리하게 고구려 정벌에 나선 수나라는 결국 국력이 고갈되어 당나라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갔다.

6 관련 항목

7 창작물

이 때 당시를 배경으로 한 창작물이 있다.

  1. 살수는 현재의 청천강이 아닌 다른 강이라는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