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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考古學[1], archaeology
고고학은 과거 인류들이 남긴 물질적 자료(즉 고고학 자료)를 통해 당시의 문화, 즉 행위, 사회적 조직, 이념 등을 복원하고 그들의 문화가 어떻게 그리고 왜 변화했는가를 연구하는 학문(Sharer and Ashmore, 1993)이다.[2] 이걸 연구하는 학자가 고고학자다. 인류 시대 이전의 생명의 역사를 연구하는 고생물학과는 엄연히 다른 학문이다.
국내 한정으로 사람들이 이 둘을 같은 것으로 혼동하기도 하는데, 생각보다 아주 흔한 일이다. 고고학자가 꿈이라는 아이들을 데려다가 발굴체험을 시키면 십중팔구는 "선생님 이제 공룡은 언제 찾으러가요."가 튀어나온다. 고고학과를 다니거나 사학과에서 고고학 강의를 들었다고 하면 십중팔구 공룡 이야기가 튀어나온다. 게다가 뭐 어느정도 나이를 먹으면 보물 사냥꾼으로 보기 시작하고, 더 나이먹으면 인사동의 감정평가사 취급을 하고...
일반적으로 역사시대 이전의 선사시대가 주 시간적 대상이 되지만, 문자기록이 애매하거나 상충할 경우, 또는 민중사학적 관점에서 역사시대도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2 고고학의 역사
2.1 한국 고고학의 역사
근대 학문으로서의 고고학이 국내에 도입되기 전까지 우리나라에서 과거의 유물과 유적에 대한 관심은 매우 낮았다. 예외적으로 추사 김정희는 진흥왕순수비를 연구하고 신라진흥왕릉고를 통해 진흥왕릉의 위치를 추정하기도 했지만, 그의 활동은 당대에 끊어져 고고학이 자생할 바탕은 만들어지지 못했다.
최초의 근대적인 고고학 연구는 1905년 을사조약 전후로 한국으로 건너 온 일본 학자들의 조사로부터 시작되었다. 1910년 강제병합 이후로는 일본인들이 모든 고고학 자료를 독점하게 된다. 이들은 일제의 식민사관을 뒷받침할 증거를 찾고자 먼저 가야 지역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임나일본부설을 증명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일본 고고학계의 낮은 발굴 수준으로 사실상 도굴이나 다름없는 작업들이 행해졌고,[3] 제대로 된 보고서도 작성되지 않았다. 임나일본부의 증거를 찾지 못한 일본인들은 이번에는 낙랑 지역으로 눈을 돌려 한사군 유적을 발굴해 한국이 고대부터 중국의 지배를 받아왔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다. 결국 일본학계의 연구는 한국의 선사시대를 애매모호하게 다루었으며, 고대 한국은 중국과 일본의 영향이 없었으면 존재할 수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려던 시도에 불과했다.
따라서 해방 이전에는 제대로 훈련받은 한국인 고고학자가 등장하는 것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1930년대 도유호, 한흥수, 김재원은 각각 비엔나, 프라하, 뮌헨 대학에 유학해 고고학을 공부했다. 도유호는 해방 이후 한흥수와 더불어 북한행을 택하고 북한 고고학계를 발전시킨다.
북한은 모든 토지가 국가의 소유였기 때문에 발굴에 용이했고, 선사시대의 무계급 이상 사회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고고학 연구 환경이 용이했다. 북한 고고학계는 한반도에 구석기와 청동기 시대가 없었다는 과거 일본의 연구를 반박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5~60년대 북한은 구석기와 청동기 시대의 존재를 증명하고, 도유호는 '조선원시고고학'이라는 한국 최초의 고고학 개설서를 출간한다. 그러나 70년대 김일성 유일 체제가 들어서면서 모든 학문적 토론은 중단되고 고고학 해석의 교시가 만들어져, 현재까지도 그 해석을 담습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남한의 고고학은 북한의 고고학보다 더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데 고고학 발굴을 위한 자금 확보 문제나 토지권 해결 문제 등이 있었고 무엇보다 인재가 부족했으며 고고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김재원은 해방 이후 미 군정하에서 총독부 박물관을 인수하고 국립 박물관을 건립한다. 김재원은 아직 한국에 남아있던 일본인 고고학자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를 붙잡고, 그와 함께 1946년 호우총과 은령총을 발굴했다. 1959년 약탈 문화재 반환을 논의하기 위해 일본에 왔던 황수영 교수는 우연히 일본에서 건축학을 전공하고 일본 고대 절터 발굴 작업에 참여했던 김정기 선생을 보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김재원은 김정기에게 편지를 보내 귀국해 국립박물관에서 일해달라는 요청을 한다.
이 요청을 승낙한 김정기는 귀국 후 국립박물관에 들어가 건축학을 바탕으로 한국 고고학에 큰 기여를 한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남한 고고학은 말만 고고학이지 발굴 수준은 그저 땅을 파헤치는 수준에 불과했다. 일본에서의 발굴 경험을 바탕으로 실측과 여러 기록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체득하고 있었던 김정기는 남한 고고학에 실측 개념을 도입하고 고대 건축물의 발굴과 해체를 가능케 했다.
또 1961년 김원룡이 서울대학교에 국내 최초로 고고인류학과를 개설해 고고학을 강의하고 뒤이어 다른 대학과 국가 기관에서 고고학 조사를 시작하며 연구 인력이 배출되기 시작했다. 70년대 초에는 편년체계의 큰 틀이 갖추어졌고, 60년대 학번들이 해외 유학에서 돌아오면서 세계 고고학 사조를 국내에 알리기도 했다. 남한의 고고학 연구는 경제발전과 더불어 활기를 더욱 띄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유일 체제 이후 발전이 멈춘 북한의 고고학과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발달했다.
그러나 유적조사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며[4] 조사 지연, 졸속 발굴, 발굴 자료의 사장과 같은 문제가 새롭게 발생해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며 연구 수준을 높이는 것이 21세기 한국 고고학의 과제가 되었다.
3 고고학의 시대 분류
19세기 초 덴마크의 학자, C.J.톰센[5]은 인류의 도구 발전 단계를 따라 선사시대를 석기, 청동기, 철기 시대로 구분하는 3시대 구분법( Three-age system)을 주장하였다. 톰센의 제자, 보르사에(Jens Jacob Asmussen Worsaae)는 층위학적 연구를 바탕으로 톰센의 이론을 가다듬는다. 그 후 영국의 학자, 존 러벅(John Lubbock)이 석기시대를 구석기와 신석기로 분리하며 선사시대를 5시대로 구분하게 된다.
그러나 이 구분법은 유럽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다른 지역에 들어맞지 않는 경우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일본은 석기 시대에 해당하는 죠몬 시대가 지나자 중국과 한반도의 영향을 받아 청동과 철기 문화를 한꺼번에 받아들여 청동기와 철기가 공존하는 모습을 보였다. 따라서 각 나라의 고고학자들은 유럽의 시대 구분법을 벗어나 독자적인 시대 구분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한국 고고학에서는 구석기, 신석기[6], 청동기, 원삼국시대(초기철기시대, 삼한시대)[7], 삼국시대로 시대를 구분한다.
4 고고학을 가르치는 대학교
고고학과 항목 참고.
5 하위분과
- 시대에 따른 분류 : 기록 유무에 따라 선사고고학과 역사고고학으로 나눈다. 역사고고학은 각 나라 및 시대별로 나뉘는 게 보통.. 선사고고학도 구석기,신석기,청동기,철기시대 등 각 시기별로 나누고 있다.
- 분석대상에 따른 분류 : 골 고고학, 환경고고학, 수중고고학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