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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유물을 몰래 묻다가 찍힌 사진 |
1 소개
藤村新一
1950년에 태어난 후지무라 신이치가 고고학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은 1972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였다. 졸업 후 독학으로 고고학을 연구하며 살아가던 중 1981년에 미야기 현에서 4만 년 전 유물을 발견했다.
당시 일본에서 발견된 유물의 연대는 가장 오래된 것이 3만 년 전 것이었기에 일본열도는 후지무라의 유물 발굴에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덕에 그는 전국적으로 널리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후 90년대 말까지도 계속 오래된 유물들을 속속들이 발굴해 내어 일본의 구석기 시대의 연대를 계속 앞당겼는데 무려 70만 년 전의 구석기를 발굴해내서 일본의 역사 연구에 한 획을 그었으며 심지어는 교과서에도 그의 업적이 실릴 만큼 위대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아예 신의 손(神の手)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였다. 그는 토호쿠 구석기문화연구소 부이사라는 높은 자리에 올랐으며 몰락하기 한달 전에도 그는 아사히 신문에 자신이 80만년 전 유물을 발굴했다고 또 유물을 들이밀며 자신의 발견을 10만년 더 끌어올리고 영광의 절정을 누리고 있었다.
2 진상
그의 몰락을 알린 마이니치 신문 기사. 보다시피 주작질의 현장까지 생생히 포착되었다. |
하지만 아마추어 발굴가의 인생역전 스토리로 보였던 것의 모든 것이 조작이었다. 후지무라가 발굴한 유물은 모조리 가짜였다. 그는 먼저 가짜 유물을 미리 준비해 두고 유적지로서 그럴법한 곳에 묻어둔 다음, 며칠 후 가짜 유물을 묻은 그 곳을 찾아가서 발굴하는 척하는 수법을 사용한 것이다. 고고학사에 길이 남을 후지무라의 사기극… 역사미화가 주업무인 우파학계의 합작품
그렇게 후지무라의 낚시극이 펼쳐지던 2000년의 어느 날 어떤 제보자가 후지무라의 조작을 눈치채고 이를 마이니치 신문에 제보하기에 이른다. 마이니치 측은 전부터 후지무라의 유물 발굴에 뭔가 이상하게 여겨지는 점이 많았던 터라 사실 확인을 위해 조사에 착수했다. 그렇게 마이니치 촬영팀은 몰래카메라로 조작 현장을 포착하는데 성공, 이를 기사화하여 만 천하에 까발리게 된다. 조작 현장을 포착하자마자 바로 보도한 건 아니고, 조작 영상을 촬영한 후 센다이 시의 한 호텔에서 인터뷰를 가지면서 조작현장을 촬영한 영상을 보여 주었다. 이렇게 한 이유는 빼도박도 못하고 조작을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한국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후지무라는 자신의 조작 모습이 담긴 비디오를 보며 "전부 조작한 건 아니다.마(魔)가 낀것 같다."고 변명했다고.
당연히 일본 열도는 후지무라 신이치의 유물 발굴 알고보니 조작이라는 충격적인 보도 내용을 접하고 패닉 상태에 휩싸일 수 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정밀 조사가 벌어져 가짜 유물에 대한 문화재 지정 취소는 물론이고 교과서에서 후지무라에 대한 내용 삭제와 더불어 본인도 고고학계에서 영구제명 당했으며 후지무라의 책 또한 출판사에서 모조리 다 거두어가고 애지중지하던 그 모든 석기 유물은 죄다 폐기처분하거나 증거품으로 보관되는 신세가 된다. 당연히 각계에 큰 파장을 몰고 왔다.
사실 후지무라의 발굴은 그 초기부터 숱한 의혹을 받아 왔다.
- 뗀석기를 만든 수법이 수십만 년 전의 것과 너무 차이가 난다.
- 수십 킬로미터 간격으로 떨어진 석기들의 아귀가 우연치고는 너무 정확히 들어 맞는다.
- 발굴된 석기의 석재가 주변 석재와 차이가 난다.
- 방금 파낸 유물에 마른 흙이 묻어 있는데, 땅을 팔 경우 땅 속에는 대개 젖은 흙이 나온다.
- 구석기 시대 유물에서 철로 조각해서 만든 철선상흔이 발견됐다.
- 구석기 시대 유물을 발견되면 필수적으로 주변에 석기의 원본이 되는 돌의 조각이 있어야 하는데 없다.
- 구석기 시대 유물인데 고도의 문화 흔적인 제사유적이 발견되었다.
- 석기가 발견된 지층이 화쇄류가 퇴적된 지층이므로 실제 유물이라면 구석기 시대 일본인들은 용암 위에서 석기를 제조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 후지무라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 아무리 같은 곳을 뒤져도 유물이 안 나온다.
- 결정적으로 해외 학자들의 공동 연구 제의를 죄다 거부했다.
이렇듯 수상한 점이 많았으나 후지무라가 자신의 석기를 치밀하게 구석기 시대의 지표를 골라서 묻고 구석기의 유물 대조가 어려운 관계로 그의 조작은 20년간 밝혀지지 않았으며 이걸 의심하면 매국노 취급을 당했다고 한다. 게다가 일본 사회의 보수성, 견고성은 이미 유명한 바인데 후지무라의 발굴이 교과서에 까지 오름으로 학계의 인정을 받게 되자 후지무라의 업적에 의구심을 품는 것 자체가 백안시된 것이다. 이거 어째 어디서 많이 본 시추에이션인데?[2] 이로 인해 후지무라의 사기극 20년 동안 단 두편의 의혹 제기 논문만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극우 세력도 좋아라 자기들의 교과서에 이걸 싣기까지 했다. 극우단체에서 쓴 역사책에서까지 후지무라가 발견한 유적을 첫머리에 내세우며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보다 연대가 앞선 문명이 일본에 존재했다"고까지 주장하며 일본을 '세계 4대 문명' 가운데 하나로 끼워넣었으니 말 다했다. 한 마디로 환빠 일본판. 거기에 후지무라가 조작극을 벌인 곳이 토호쿠 지방이었기 때문에 토호쿠 지방은 이를 지자체 돈벌이에 이용할 수 있다고 판단, 이를 대대적으로 홍보하여 후지무라를 지원사격해주어 후지무라의 입지를 든든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조작이 드러나자 같이 개망신당했다.
그리하여 정작 까발려진 것은 20년 가까이 지난 2000년이 된 때였다. 과학이 국가적인 자존심과 경쟁력 때문에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겠다.
사실 후지무라가 이런 조작을 하게 된 배경은 한국의 구석기 유물과 무관하지 않다는 의견이 있다.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 선사유적지에서 발견된 구석기[3]는 무려 27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었기 때문에 일본에선 한국에도 수십만 년 전 구석기가 있는데 일본에도 없을 리가 없다라는 일본 학계의 열폭으로 결국 후지무라의 조작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더불어 일본은 그동안 오래전부터 일본이 한국이나 중국보다 역사적으로 더 먼저였다고 주장해왔던 것이 있었다. 칭기즈 칸이 일본인이라며 고고학으로 무덤을 발굴하려던 일 말고도, 중일전쟁 당시 중국에 있던 북경원인 해골도 일본인이라고 하여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뼈를 손에 넣으려고 했다가 실패했던 과거[4]를 봐도 알 수 있다.
3 결과
이 사람이 일으킨 조작 사건의 여파는 컸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가가와 미쓰오(賀川光夫)라는 벳푸 대학 명예교수. 가가와 교수는 1962년 히지리다케 동굴 발굴 당시 후기구석기의 석기와 뼈를 발견했는데 이 교수가 발견한 유물에 일본의 신석기 시대에 해당하는 조몬 시대의 유물이 섞이면서 한 언론이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결국 가가와 교수는 죽음으로 항의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2001년 3월 9일 자살했다. 그러나 가가와 교수가 발굴을 한 1962년은 조몬 시대의 유물이 발견되기 이전이라 조작보다는 연대착오나 당시 일본 고고학계의 한계였다는 것이 현재의 정설이다. 게다가 이 사람은 가장 양심적인 고고학자로 평가받을 정도였으니 그런 의혹을 받는 것이 억울했을 만도 하다. 후일 유족들이 언론사를 상대로 소송을 걸어서 승소했다지만 죽은 사람이 그런다고 살아 돌아오겠는가. 저런 파렴치한 때문에 양심적인 사람까지 피해를 본 사례라 할 수 있겠다.
또한 일본 학계 역시 신뢰가 바닥까지 추락하는 아픔을 맛봐야 했다. 2001년 국제 고고학 회의에서 일본인 학자들은 진실성이 의심된다고 참가 거부를 당했고, 2002년에서야 참가하게 되지만 일본 학자들은 이 당시 말도 못하고 종일 죄인처럼 시무룩하게 앉아만 있었다고 당시 한국 학자들의 증언이 있었다. 나중에 나가노에서 구석기 유적이 발견되자 한국 학자를 초빙해서 연대측정을 할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이는 일본 고고학계의 신뢰도가 바닥으로 떨어진 탓에 한국 학자들을 통해 확실하게 인증을 받을 용도로 그런 것이다. 한국과 일본이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은 각국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관계로 한국이 이 유적의 연대를 인증하면 자연스럽게 검증 인증이 되기 때문이다. 비슷한 예를 들자면 아폴로 달 착륙 음모론에 대한 가장 확실한 반박근거중 하나가 바로 소련의 침묵이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래저래 안습한 상황으로 아마추어 학자 하나 때문에 연좌제를 적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으나 20년동안이나 학계 전체가 신의 손이라 추앙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조작을 밝혀낸 것 역시 학계가 아니라 언론사였던 만큼, 당시의 일본 역사 학계는 스스로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전체의 자질이 의심받아 마땅한 상황이었던 것.
한편 동료학자들이 갈굼을 먹고 있을 당시 후지무라는 병원[5]에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이혼절차를 밟고 있었다. 너무 주변의 비난이 심해서 결혼생활을 유지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아내가 이혼을 요구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병원에서 자리보전하고 있을 때도 환자로 있던 한 여성을 알게 되어 2003년에는 이 여성과 재혼한다. 재혼 무렵에는 해리성 정체감 장애 판정을 받고 정신장애 3급 장애인 판정을 받는다. 장애 판정이 나온 게 단지 꾀병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 이 때 후지무라는 화훼용 작두로 오른손 중지와 검지를 절단한 상태였다. 사고였는지 자해였는지는 불분명하나 후생노동청 심사관의 눈에는 일단 정상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던 듯.
이후 후지무라는 후쿠시마 현 장애인 취업센터에서 자원봉사자(NPO)로 근무하다가, 2010년에 아내의 지병이 도지자 간병을 위해 자원봉사를 그만두고 연금을 신청해 후쿠시마 현 동북부에 위치한 미나미소마시에서 연금을 받아 먹으며 살게 되었다[6]. 인터뷰에 따르면 날조에 관한 기억은 기억상실로 남아있지 않다고. 편리하다
4 기타
20세기 초 이와 비슷한 사건이 다른 섬나라에도 있었다.
한국에도 별황자총통 발굴조작 사건라는 흑역사가 있다.
한창 한일감정이 안 좋았던 시기이기도 해서 당시 주요 일간지에 대서특필 되었다. 중앙일보는 아예 1면을 전부 할애했다.
2010년 10월 3일 방영된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그를 다룬 바 있다.
고우영의 수레바퀴에서 무학대사에 대해 음모론(?)을 제시할 때, '가짜를 땅에 묻고 다시 발굴하는 것은 일본인도 할 줄 안다'는 의미심장한 글귀를 적었는데, 수레바퀴가 출판된 게 2000년대 초반이란 걸 감안하면 아무리 봐도 후지무라 신이치를 말하는 것 같다.
2014년 일본에서 또다른 학계의 조작 사건이 터졌다.- ↑ 정식 고고학자가 아니다.
- ↑ 학문 연구를 국가적 위신과 연계시켜서 일체의 반론을 봉쇄하는 것이 황우석 사건 당시 국내언론이 보여줬던 태도와 정확히 일치한다.
- ↑ 이 석기는 정식 발굴로 발견된게 아니다. 당시 주한미군이었던 그렉 보웬(Greg Bowen)이 여자친구와 휴가를 나와 한탄강가에서 놀던 도중 여자친구가 만지던 돌을 보고 그것이 의심스러워 대학 교수에게 신고를 했고, 그것이 구석기 시대 유물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이것을 신고한 보웬은 미국에서 고고학을 전공하던 학생이었다고. 자세한 내용은 전곡리 선사유적지 항목 참고.
- ↑ 현재 북경원인의 해골은 행방불명 상태다. 이는 전쟁 때문에 유골을 포장해서 미국으로 수송하던 도중에 사라졌기 때문이다. 직접적으로 강탈하진 않았지만, 결국 그 전쟁을 일으킨 게 일본이라 전혀 책임없다고 할 순 없다.
- ↑ 정확한 병명은 불명이다. 해리성 장애는 이후의 일.
- ↑ 당연히 도호쿠 대지진 당시에는 피난 생활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