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삼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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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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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군
옥저
동예
신라태봉,후고구려
마한백제후백제미군정대한민국
진한신라신라
변한가야
우산국대한민국 임시정부
탐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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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학자들 사이에도 각 국가들의 정확한 위치는 의견이 분분하니 참고로만 볼 것. 무엇보다도 상단과는 달리 하단의 지도에는 부여가 빠져있는데, 이는 제목처럼 한반도에 걸쳐있는 국가만을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원삼국시대를 요약한 영상. 이것 역시 100% 정확한 것은 아니니 참고하기만 하는 것이 좋다. 한사군의 강역이나 고구려의 팽창 과정 등에서 자잘한 오류들이 있다.

1 개요

김원룡이 제창한 용어로서 그의 저서인 한국고고학개설 제 3판(1986)에 의하면 A.D 1 ~ A.D 300년 사이로 정의하고 있다. 그는 이 시대가 삼국사기에 의하면 삼국시대이지만, 실제로는 국가에는 이르지 못한 단계로서 이를 '삼국시대 원초기(原初期)' 또는 '원사(原史) 단계의 삼국시대'라는 의미로서 proto-삼국 즉 원삼국시대로 정의하였다. 교과서의 '여러나라의 성장' 파트가 이 시대를 일컫는다.

위의 지도[1]에도 나오듯이 북쪽은 고구려, 옥저, 동예 등의 국가가 남쪽에는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이 그리고 평양 일대에는 낙랑군 이후 3세기에 대방군이 존재하던 시대이다.

다양한 소국들이 백가쟁명하던 시대로 고구려를 제외하고는 문헌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에 고고학에 의존하는 시대이다. 삼한의 경우에는 적절한 민족지적인 문헌기록이 남아있고, 권역이 남한 지역에 있어 고고학적 자료가 풍부하다. 따라서 문헌기록과 고고학적 자료를 비교 검증하는 것이 가능하여 고고학의 꽃이라 불리는 시대이다. 그만큼 매년 어마어마한 연구가 쏟아지고 있다.

최근에는 김원룡이 제시한 원삼국시대의 연대를 수정하여 기원전 1세기 ~ 기원후 3세기까지 보는 시각이 대세다. 이는 기원전 1세기부터 삼한단계로 볼 수 있는 유물/유적이 확인되면서 연대를 올릴 수 있는 근거가 확보되었기 때문.

원삼국시대에 해당하는 각 소국들의 자세한 사항은 해당 논문 및 저서들을 참조할 것.

2 시대 명칭문제와 원삼국론의 한계

김원룡의 원삼국론은 많은 지지를 받아 현재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네이버 전문정보에 '원삼국'이라고 검색해보면 얼마나 폭넓게 사용되는지 알 것이다. 그러나 폭넓게 쓰이는 만큼 원삼국이라는 용어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단순한 예로 문헌사학계에서는 이 용어를 채택하고 있지 않다. 고고학계 내에서는 학자마다 다른 명칭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

학자이름시대명칭
김원룡초기철기시대원삼국시대
최몽룡철기시대 전기삼국시대 전기(철기시대 후기)
최성락철기시대 전기철기시대 후기
신경철삼한시대 전기삼한시대 후기

예를 들어 부산 경남지방의 학자들은 삼한시대라는 용어를 채택하고 있다. 그들은 김원룡이 정의한 초기철기시대(기원전 300년 ~ 기원후 0년)를 포괄하여 기원전 300년 ~ 기원후 300년을 삼한시대로 정의하고 이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었다.

최성락 교수는 원삼국시대를 철기시대로 하여 김원룡이 정의한 초기철기시대를 철기시대 전기로 김원룡이 정의한 원삼국시대를 철기시대 후기로 나누어 전통적인 삼시기구분법에 따라 이 시기를 정의하고 있다.

최근 국정화 교과서로 논란이 된 최몽룡 교수는 이 시대를 삼국시대 전기로 정의하고 있다.

이처럼 한 시대를 정의하는데 있어 학자 간의 다양한 이견이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또 이러한 '원삼국시대'라는 명칭 문제가 최근까지도 학술논문을 통해 또 학술대회를 통해 많은 논쟁이 일었지만, 사실상 각 주장자마다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즉 백날 싸워봐야 서로 감정만 상할 뿐 아무런 결론이 나질 않는다.

각 명칭마다 고유의 문제점을 안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다.

삼한시대론은 그 연대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한반도 북부지역의 역사적 전개는 무시한 용어로서 한반도 남부지방 밖게 포괄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철기시대론의 경우 철기시대라는 이름에서 원삼국시대라는 시대적인 특징이 뚜렷하게 부각되지 않는 점, 이후의 역사시대인 삼국시대 고려시대 등도 해당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적절하지 못하다. 애초 철기시대라는 용어 자체가 전통적으로 선사시대를 구분하기 위해 사용했던 용어이기 때문에 원사 또는 역사시대에 해당하는 원삼국시대에 이 시대구분을 적용하기에는 적절하지 못하다.

작성자의 사견을 덧붙이자면 차라리 기존의 초기철기시대를 철기시대로 하여 '구석기-신석기-청동기-철기시대(초기철기시대)-원삼국시대'로 하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나 싶다.

삼국시대 전기론은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긍정적 입장에서 바라보고, 삼한시대에서 삼국시대로의 계기성을 인정한다면 명칭 자체의 적절성 문제는 피할 수 있으나, 삼국시대 전기 다음 중기 없이 곧바로 후기로 구분하고 있어 문헌사학계의 견해를 적절하게 반영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또 위의 전기론은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긍정적으로 본 관점에서 인정할 수 있을 뿐이지 현 학계의 시각과 추세와는 맞지도 않고, 위의 시대는 누구나 인정하듯 엄연히 삼한시대에 해당하므로, 삼한과 삼국의 계기성을 인정하여 삼국의 체계가 덜 완성됐다는 의미에서 삼국시대 전기보다는 '삼국시대 조기'로 시대구분을 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그러나 조기론은 아직 뚜렷한 논의가 오간 점이 없다는 점, 원삼국이라는 용어가 한반도 북부지방과 남부지방을 포괄하면서도 학계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원삼국시대가 현재로서는 가장 적절한 명칭으로 보이며, 한국고고학회에서 펴낸 '한국고고학강의'에서도 이러한 점을 지적하며 원삼국시대가 가장 적절한 용어로 보고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러한 기대와는 달리 '원삼국시대'라는 명칭도 사실상 현재까지는 한반도 남부지방(주로 삼한)만을 지칭할 때 사용하고, 그 이외의 고구려나 옥저 동예 등의 정치체를 정의할 때는 이 용어를 전혀 사용하고 있지 않다. 이는 원삼국시대의 연대를 삼한을 기준으로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도 사실상 그 한계점을 노출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많은 고심을 하고 있는 듯 하며, 앞으로는 좀 더 용어 사용을 확대하여 한반도 남부지방 뿐만 아니라 북부지방인 고구려나 옥저 동예 그리고 낙랑까지도 포괄할 수 있는 용어로서 정착이 되기를 바라고 있는 듯 하다.

최근 영남고고학회에서 편 '영남의 고고학'에서 '원삼국시대'라는 용어를 채택하고 있어 주목된다. 삼한시대를 고집하는 부산 경남 일대의 학자들도 다수 참여한 이 프로젝트에서 원삼국시대라는 용어로 합의를 봤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엿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최근 논문들에서도 과거와는 달리 원삼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점에서 이 용어가 점차 학계의 일반적인 용어로서 정착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문헌사학계에서는 20여년 전의 한 논문의 거센 비판 이래로 이 시대에 대한 명칭이 통일되지 못하고, 삼국시대 형성기, 삼국시대 성립기, 삼국시대 전기, 삼한시대 등의 다양한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이제는 과거와 달리 논의의 폭이 넓어진 지금 다시 원삼국이라는 용어에 대해 진지하게 검토해 볼 시기가 오지 않았을까?

2.1 시대명칭 논란 문제의 논문

해당 시대명칭 논란 문제에 대해 관심이 있어 자세히 알고 싶은 분들은 해당 논문을 참고하길 바란다.

문헌사학계
李賢惠, 1993, 『原三國時代論 檢討』, 「韓國古代史論叢」 5
김정배, 1996, 『原三國時代 용어의 문제점』, 「韓國史學報」, 창간호

고고학계
李熙濬, 2004, 『초기철기시대·원삼국시대 再論』, 「韓國考古學報」 52
최성락, 2004, 『"초기철기시대·원삼국시대 재론"에 대한 반론』, 「韓國考古學報」 54
최성락, 2008, 『한국 선·원사 시대구분 재론』, 「韓國考古學報」 67

위의 해당 논문을 읽으면 원삼국이라는 용어의 문제점과 현황을 파악할 수 있다.

이 외 참고할만한 것으로는
金元龍, 2000, 『原三國時代에 대하여』, 「考古學誌」 11
이남규, 2003, 『三佛 선생님과 原三國時代 연구』, 「三佛과 한국 고고학·미술사학 -故三佛 金元龍 敎授 10週忌 追慕學術論叢-」

등이 있고, 최몽룡과 부산 경남지역의 학자들의 시대구분에 대해선
崔夢龍, 1987, 『 韓國考古學의 시대구분에 대한 약간의 提言』, 「崔永禧先生華甲紀念 韓國史學論叢」
申敬澈, 1995, 『三韓·三國時代의 東萊』, 「東萊區誌」

참고하면 좋다.

3 최근 연구동향

원래 마한권역에서는 유적이 잘 확인되지 않아 고고학적 연구에 어려움이 많았으나 80년대 후반 천안 청당동에서 확인된 마한의 무덤을 발견한 것을 시작으로 2000년대 중후반부터 다양한 유적이 확인되면서 연구가 촉발되기 시작했다. 특히 최근 마한권역에서 낙랑과 관련한 여러 유물이 많이 발견되면서 낙랑과의 교류라거나 낙랑 유물의 유통 생산 또는 재지화 등의 재밌는 성과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최근까지도 원삼국시대의 마한 관련 유적은 주로 중부지방 즉 서울 경기 일대를 중심으로 확인되고 이 외의 지역에서는 잘 확인되지 않는데다 기원전 1~기원후 2세기에 해당하는 유적은 거의 발견되지 않아 마한 고고학의 암흑기라고도 불린다.

주로 3세기 중후엽 이후의 유적이 많이 확인되는데, 이 때는 마한이 백제의 영역 아래로 들어갔던 때라 백제 유물과 마한 유물이 혼재되어 나타나 이것이 마한시대에 해당하는 것인지 아니면 백제의 영역화 이후에 해당하는 유구인 지 확인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따라서 세밀한 편년작업을 통해 이 유구가 마한시대의 것인 지 백제에 영역화 된 이후의 유구인 지 구별하는 작업과 함께 취락(마을)을 중심으로 한 해당 지역의 정치체의 성격과 같은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진변한은 과거부터 많은 유물/유적이 확인되었다. 특히 70년대 후반 경주 조양동 유적의 발굴로 영남지역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토기(와질토기)가 확인되면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다. 특히 이러한 발굴성과에 힘입어 80년대 초의 와질토기 논쟁의 시작은 80~90년대에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엄청난 연구성과가 쏟아졌다.

이후 2000년대 초에 들어서면서 대구 팔달동 유적의 발굴, 경산 임당 유적 발굴 등 다양한 고고학적 발굴이 이루어지면서 꾸준한 연구성과가 나오고 있다. 다만 2000년대 초반 이후 기존 학설을 뒤집을만한 새로운 자료가 확인되는 것은 아니라서 괄목할 만한 동향은 없는 듯 하다.

동예 지역도 마한과 마찬가지로 낙랑 유물이 많이 확인되어 이와 관련한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또 이 지역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呂(여)자형 凸(철)자형 주거지가 많이 발굴되어 주로 집자리 중심의 연구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옥저는 크로우노프카문화와 연관있는 것이 확인되면서 이와 관련하여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연구성과가 많이 미비한데다 크로우노프카 문화 전체가 옥저라는 정치체 속에 포함시켜 볼 수 있는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 또 옥저 자체의 연구보다 크로우노프카문화의 토기와 주거구조가 한반도 남부지방과 유사하다는 것이 확인되면서 이와 관련한 연구에 많이 치중되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 옥저라는 정치체가 주체가 된 고고학적 연구 성과가 많이 나올 필요가 있다.

고구려는 2000년도 이후 동북공정과 함께 연구가 촉진되었다. 특히나 동북공정을 즈음하여 중국에서 적석총에 대한 많은 발굴과 보고서가 발간되면서 그 동안 부족했던 고고학 자료가 많이 축적되었다. 또 중국 내에서도 자체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면서 앞으로 원삼국시대의 고구려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도 더욱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4 관련항목

  1. 위 지도도 누가 만들었는 지는 몰라도 지도에 오류가 많다. 원삼국시대에 보라국, 침미다례, 금관국은 없다. 이 국가들은 삼국시대 적어도 4세기 이후에나 등장하는 국가들이다. 신라도 정확하게는 사로국이라 하는 것이 맞고, 백제도 백제국이라 일컫는 것이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