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부유해발굴감식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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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ND Agency for KIA Recovery & Identification (MAKRI)

그들을 조국의 품으로

— 국방부유해발굴감식단 부대훈

1 개요

국군 전몰 장병들의 유해를 발굴하는 국방부 직할기관. 단장은 육군 인사행정대령이다. 홈페이지 본부는 서울특별시 금천구 쪽에 있었으나, 현재는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전했다.

2000년 4월 6.25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육군에 의해 시작되어, 2007년 국방부 소속으로 창설된 이 부대는 육·해·공군 및 해병대까지 모두 모여 전몰 장병들의 유해를 찾아 모셔온다. 한국전쟁 격전지 대부분이 산이라 유해발굴병들은 전부 육군 산악수색대에서 차출하다가 개별모집병(현재는 전문특기병)으로 전환하여 개인 지원하여 합격해야 한다. 발굴과 감식병은 전원 육군에서만 뽑고, 나머지 군 출신들은 전부 발굴단 본부의 조리병이나 보급병, 행정병 등만 있다.[1]

발굴과의 편제는 특전사와 비슷하게 각 8개팀과, 그 8개팀을 통합 관리하는 지역대로 이루어진다. 1팀은 각 6~8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팀장은 보통 상사(가끔가다 원사나 중사로 구성되는 경우도 있다). 팀별로 GPS, 통신장비, DSLR, 캠코더와 삽, 호미, 벌목도 그리고 2백개가 넘는 표지판과 관까지 가지고 다닌다. 나눠지면 1인당 대략 20kg쯤 되고, 이걸 지고 1천고지 이상의 산들을 하루 20~40 km 씩 오른다. 공식적으로 1인당 20kg 정도이며 실제로는 유동적으로 짐을 싸기에 무게가 많이 나가봐야 10kg 이다. 막내에게 모든 짐을 지우는 방식은 부조리이며 없어진지 오래이고 팀원 전체가 짐을 나눠서 들기에 서로 부담하는 무게는 적다. 예를 들어 발굴 지역이 3개로 나누어진 경우에는 발굴도구를 3군데에서 전부 사용할 수 있게 나누기 때문에 무게가 많이 나가지는 않는다. 그리고 애초에 소관 같이 부피가 큰짐은 지원부대에게 부탁하여 서로 나눠 들고 올라간다.

현재는 대부분의 팀이 표지판을 유동적으로 사용한다. 예를 들어서 2~3개의 표지판에 흰종이와 아스테이지를 씌워서 보드마카로 개인호의 번호를 적고 촬영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표지판은 대략 2백개정도이지만 장기간 발굴하게 되는 경우 개인호가 1천개를 넘기는 경우도 다수 존재한다.

- 그렇다면 표지판이 천개가 넘게 필요하다는 말인데 이것은 매우 비효율적이다.

2. 기상상태, 표지판을 박은 후의 시간의 경과로 인해 분실, 손실, 유실되는 표지판이 매우 많다.
3. 개인호의 번호를 부여하는 방식은 지형정찰때 이루어진다. 근데 그 많은 표지판을 들고 지형정찰을 하는 경우에는 신속한 정찰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가 되고 만다.
4. 발굴이 끝난후 다시 수거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모든 표지판을 사용하는 방식은 거의 사장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가끔가다가 유해가 많이 발견된 팀이 있을 경우 다른 팀의 팀원들이 지원 명목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 서로 다른 표지판 양식에 적응하지 못하여 애를 먹는 경우가 다소 있다.

장비의 여건과 인원 여건 상, 한개 팀이 진행할 수 있는 일반적인 발굴지역의 한계는 2~3개 지역 정도이다. GPS, 카메라는 한팀의 두개가 배분되기 때문에 무리를 한다면 4~5개의 지역도 돌릴 수 있지만 발굴지역을 많이 설정한다는 것은 각 지역에 팀원이 1~2명으로 잘개 쪼개져서 흩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험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이등병 일병이 발굴지역을 개인적으로 총괄하기도 한다. 발굴장비도 어떤날에는 gps 좌표만 설정하고 그다음날에는 밀린 사진을 촬영하는 등의 장비 운용이 이루어지게 되며 발굴과정을 실수, 문제가 발생하면 그 문제를 커버하는데 큰 골칫거리가 발생한다. 대개 많은 발굴지역을 선정하고 발굴을 나가는 원인은 해당지역의 지원부대가 유해를 많이 찾고자 하는 욕심에 의해서 무리하게 발굴을 진행하는데서 발생한다.

전투식량을 산에 올라가면 매일 한번씩 먹게 되어, 물을 부어먹거나 삶아먹는 구형부터, 발열백으로 데우는 신형까지 다양한 전투식량을 먹을 수 있다. 하지만 발굴 기간이 1달에서 2달을 바라보는 경우가 많기에 결국에는 물리는 경우가 많다. 특히 파운드 케이크는 정말 처음에만 맛있지 나중에는 정말 쳐다보기도 싫어진다. 사실 어느 정도 지나면 아예 전투식량 자체를 쳐다보기 싫은 정도가 될 수도 있다(...). 아마 이 문서를 보고 있을 상병장급 발굴병의 경우 밥을 싸가거나 아니면 파운드 케이크를 별로 먹어보지 않은 후임들에게 줘버리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유해 발굴을 하면서 볼수 있는 배식 방법은 5가지 이다.

1. 주먹밥

- 당일 나오는 배식 재료를 이용하여 볶음밥이라던지 비빔밥 등을 만들어 비닐에 넣고 주물러서 개인이 들고 갈수 있게 한 것. 전투식량의 이 보급되지 않는 부대의 경우 이 방법을 주로 이용한다. 다만 7월달에는 주먹밥이 상할 수도 있고 11월 달에는 밥이 딱딱하게 식는다. 최악의 경우 조끼 내부에서 터지기도 한다.

2. 귀대하여 식사

- 해발 고도가 낮은 산에서 발굴하는 경우, 생활하는 부대가 가까울 경우, 소수의 인원이 나와서 발굴하여 이들을 불러서 부대내에서 먹이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경우 주로 사용하는 방법.

3. 야외 배식

- 밥을 먹기 위해서는 산을 내려가거나 몇명의 희생양이 밥통을 들고 올라와야 한다. 그리고 이후의 방법은 군필자들은 다 아는 비닐씌운 식판에 배식하여 먹는 그런 방법이다.[2]

4. 전투식량

- 대부분의 부대가 전투식량을 보급한다. 부대측에도 이게 제일 편리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냥 나눠주면 알아서 먹으니깐 한달내내 같은 전투식량만 주는 부대가 있어서 물리기도 한다. 운이 나쁘면 한달동안 잡채밥만 먹고 그 이후 잡채밥은 거들떠도 안보게 된다.
  • 특수한 경우 지역 단체나 전우회 등에서 특별한 먹거리를 나누어 주기도 한다. 해병대와 같이 발굴할때 이런 경우가 많다.

(자장면이라던지 회덮밥이라던지 등등)
5. 도시락
- 팀장이 전투식량을 극도로 싫어할 경우 나타나는 희귀한 현상. 도시락이라고는 하지만 아침부터 직접 조리하거나 한다는 건 아니다. 준비된 도시락통에 아침 식사를 조금 덜어 점심때 먹는 정도. 군대 아침식사라는게 다 그렇지만 크게 맛있는 메뉴는 아니다. 물론 물릴 때까지 전식을 먹는 것 보다는 낫지만, 그래도 조금 더 맛있는 점심을 위한 여러 방법이 강구된다. 가장 편한 방법은 레토르트식품을 아침에 미리 데운 후 핫팩에 묶어서 가져가는 방법. 혹 친절한 취사병을 만날 경우 점심때 나올 메뉴를 미리 조리해서 주기도 한다.

보통 발굴 방식은 산을 오르내리며 한국전쟁 당시 쓰던 참호나 개인호들을 찾아내 발굴하는 것이다. 물론 7명만으로는 손이 부족하니 지역 병사들의 지원을 받는데, 한팀+지원병들이이 하루에 300호 정도를 찾아 굴토한다고 한다.
그러나 유해발굴사업이 시작되고 10여년이 넘어가면서 탐사를 통해 찍어놓은 개인호를 거의 다 파버림에 따라 점단위로 굴토하는 개인호발굴은 거의 종료되었고, 2013년부터는 기발굴된 개인호 사이사이를 면단위로 굴토해 확인하는 전면굴토도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전면굴토는 병력들이 일렬로 줄을 맞춰서 사면을 따라 능선 꼭대기까지 올라오면서 굴토하는 방식으로 해당 지역을 빠짐없이 확인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따라서 전면굴토가 이루어진 지역은 발굴이 종료되면 복토가 실시되며, 두번 다시는 발굴병력이 투입되지 않는 게 원칙이다.

파다보면 지뢰부터 포탄, 불발탄이 쏟아져 나오는데, 그 때문에 발굴현장에는 EOD들이 나와있다는 건 거짓, 불러도 높다고 안 온다.(...) 이는 육군 한정으로, 공군 항공탄의 경우 공군이 인계 받아 불발탄 처리를 하게 된다. 단 시간상 현장에 도착할 경우 해가 질 무렵이면 안전상의 이유로 접근 통제 요청을 한 후 해가 뜬 이루 작업을 하게 된다. 병사들도 매달 1만 8천원정도의 생명수당을 따로 받는다.

지원나온 병사들이 유품이나 유해를 찾으면 그 자리를 인계받아 발굴한다.

유해를 발굴하면 보통 주변을 파내고, 유해에 쌓인 흙은 붓질로 처리한다. 그리고 흙을 제거한 모습 그대로 실측도, 영상, 사진 촬영을 한후 유품을 회수하고 소관에 안치한 후 노가리, 소주, 막걸리 등으로 약식 노제를 지낸다. 현장에는 이동식 감식 차량이 있는데, 여기서 국적, 성별 등을 판별한다.[3]
부대내에 마련한 임시감식소로 이송을 하고 그 곳에서 임시감식을 한다.[4]

임시 감식을 끝낸 유해는 봉송 차량 혹은 비행기(비행기로 이용시 군공항인 서울공항으로 유해를 운반)로 서울의 중앙 감식소로 이송하고, 이곳에서 유전자 검사를 통해 유족을 찾는다. 이것을 위해 실종, 전사 장병 유족들의 채혈이 준비되어 있다 DNA채취가 준비되어있다. [5] 유족을 찾은 유해는 국립묘지에 안장되고, 찾지 못한 유해는 현충원 지하 보관소에 안치된다.[6] 조선인민군이나 중국군의 유해는 경기도 파주 적군묘지에 매장한다. 이중 중국군 유해는 일부가 몇 차례 북한을 통해 중국에 송환하였으며, 1992년 한중 수교가 이루어진 이후 중국 측에 직접 송환하는 것을 검토하였고, 박근혜 대통령시진핑국가주석과의 회담을 통해 성사되어 2014년 3월 28일, 437구의 유해가 송환되었다. 이후 2015년 3월 20일, 68구의 유해가 송환되었다. 2016년 3월 31일, 36구의 유해가 송환되어 총 541구의 유해가 중국으로 송환되었다.[7]


발굴병들은 군생활의 대부분을 파견근무로 보내기 때문에 전방이나 후방은 물론이고 심지어 해병대까지(포항에서 발굴하면 백이면 백 해병대이다) 다양한 부대의 생활패턴을 체험할 수 있다. 해병대 한정 어느날 갑자기 해군도 아닌 육군 활동복을 입은 사람이 자신들의 PX를 출입한다는 사실에 당황할 수도 있다.

2000년부터 발굴사업 시작했는데, 본격적으로 사업이 크게 확장된 시기는 2007년이다. 2016년 현재까지 발굴되어 수습한 6.25 전사자 유해 수는 약 9000여구. 아직까지도 수습되지 못한 유해는 약 12만 4천여구라고 한다. 문제는 요즘에 유해발굴 사업하기 무척 힘든 것이 한국전쟁 당시 교전 지역 찾는다는게 굉장히 어려운것도 있거니와, 그 교전지역을 찾는다해도 최근에 개발되는 지역도 굉장히 많아 무척 어렵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경기도 파주 일대가 한국전쟁 당시 격전지 중 하나였는데, 최근 파주는 신도시 개발지역으로 발굴하는데 있어 매우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또한 6.25전쟁을 직접 겪으셨던 어르신들도 날이 가면 갈수록 찾아보기 매우 힘들다는 것도 있으며, 결정적으로 유해가 있다해도 세월이 지났다보니 거의 다 썩어 없어지는 경우가 대부분.


2015년12월7일 중국으로 송환된 중국군 유해 잘못송환 되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국방부 발표가 나오면 추가및 수정바람.

2 관련 항목

  1. 그래서 선임보다 먼저 전역하는 짜릿함을 맛볼 수 있다.
  2. 이런 경우는 잘 없다. 보통 주먹밥이다.
  3. 당일 임시감식을 할 경우에는 현장으로 감식 차량이 간다.
  4. 감식관(군무원) 1명, 감식병 1명이 기본이지만 상황에 따라 다르다.
  5. 보건법이 바뀌면서 채혈이 불가능해져 구강상피세포 채취로 변경되었다.
  6. 무명용사로서 가족을 찾을때 까지 안치된다.
  7. 14년 15년 송환때 적군의 DNA는 채취,감식을 하지않아돈문제,어른들의사정 논란이 일었고, 16년 송환에는 DNA감식을 실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