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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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대통령
1대2대3대4대5대6대7대8대9대
이승만윤보선박정희
10대11대12대13대14대15대16대17대18대
최규하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 대법원의 96도3376 전원합의체 판결전직 대통령의 예우가 박탈된 인물
* 헌법재판소의 2016헌나1 판결로 탄핵된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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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박근혜 (朴槿惠)
출생지대한민국 경상북도 대구시 삼덕동[1]
본관고령 박씨
학력장충초등학교
성심여자중학교
성심여자고등학교
서강대학교 전자공학 학사
소속정당한나라당→한국미래연합→한나라당→새누리당
종교(공식적) 무종교[2]/(사실상) 영세교[3]
배우자[4](없음)[5]
선거 슬로건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
준비된 여성 대통령, 희망의 새 시대
출생1952년 2월 2일 현재 64세
재임기간2013년 2월 25일 ~ 2018년 2월 24일(예정)
약칭
서명

1 개요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통령.

박정희 전 대통령의 차녀이자 육영수 여사의 장녀이며 대구에서 태어났다. 1998년, 현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 소속으로 대구광역시 달성군에서 제15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제16·17·18·19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2013년 대한국의 제18대 대통령이 되었다. 대한민국 헌정사상 첫 여성대통령이기도 하다.

자신이 출마한 선거에서 단 한 번도 낙선한 적이 없으며,[6] 소속당 내 주요 인사로서 각종 선거에서 여론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판세를 뒤집고 유리한 결과를 이끌어내어 '선거의 여왕'이라는 이명을 얻기도 했다.

미혼이라 부군(夫君, 여성 대통령의 남편)이 없다.[7]

2 생애

2.1 정계 입문 전 경력

일반적으로 알려진대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며, 5.16 군사정변 이전 유년 시절에는 당시 군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전라남도 광주시(현 광주광역시)와 서울특별시를 오가며 생활했다고 한다. 이런 이력 때문에 실제 출신지는 대구광역시이지만 대구 방언이 아닌, 오랜 서울 생활과 옥천군 출신인 육영수 여사의 영향을 받아 충청도 사투리 억양이 살짝 섞인 서울말을 구사한다.

학력은 서울장충초등학교[8] - 성심여자중학교 - 성심여자고등학교를 거쳐 서강대학교 전자공학과를 졸업[9]했다. 이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으나, 재학 도중 어머니 육영수가 피격으로 사망하자 귀국 후 공석이 된 퍼스트 레이디를 대행하기도 했다.

퍼스트 레이디가 되기 전부터 대통령의 딸로서 여러 외교 행사에 참가해 '소녀 외교'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육영수 여사의 피살 이후 육영수 여사가 자신에게 빙의 되어 딸을 도와주란 말을 들었다고 주장하는 최태민과 인연을 맺었다. 최태민이 발족한 '대한구국선교단’에 명예총재를 맡았으며 이후 '새마음공사단'으로 이름를 바꾸고 최태민과 함께 사회운동 '새마음운동'를 주도했다. 이 과정 중에서 최태민의 딸인 최순실과도 인연을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10.26 사건으로 청와대에서 나온 뒤[10] 1980년 영남대학교, 한국문화재단 이사장 자리에 올랐고 영남대 이사장에서는 1988년 사임했다. 한국문화재단은 2012년 해산될 때까지 줄곧 이사장 자리를 유지했다. 영남대학교 이사장으로 재임 중이던 1982년, 육영재단 이사장을 지냈고 1990년 사임했다.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가 부하의 총에 맞아 사망하고 전두환의 5공 시절은 정통성이 부족한 정부에서 흠을 메꾸기 위해 같은 독재자인 박정희를 비난하던 상황이였다. 박근혜는 이 때를 자신의 인생 최대 암흑기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2.2 정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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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과 거리를 두던 은둔의 시기를 깨고 199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이회창을 지지한다는 선언을 하며 한나라당에 입당,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11] 1998년 전반기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 대구 달성군 지역구에 출마하여 새정치국민회의 엄삼탁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고, 2000년에 한나라당 부총재에 임명되었다.

2002년 한나라당 개혁 문제로 총재였던 이회창과 반목하다 탈당하여 '한국미래연합'이라는 신당을 창당한다. 이 당시 북한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청을 받아 방북하여 김정일 위원장과 면담하기도 했는데# 무단 방북이란 논란(사실이 아니다)에 시달리기도 했다. 현직 의원이라고는 그 하나 뿐인 미니 정당으로 대선 정국에서 운신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고, 결국 대선 직전에 한나라당으로 복당한다.

대선 패배 이후 총재였던 이회창이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박희태 체제를 거쳐 최병렬 체제가 들어섰으나, 불법 대선 자금 수사[12]로 인해 한나라당이 코너에 몰리는 정국이 되었고, 지역 구도를 극복하는 전국 정당을 표방한 열린우리당이 창당하면서 한나라당 내 진보 & 개혁 성향의 인사들[13]김부겸, 이우재, 김영춘, 이부영, 안영근 등이 열린우리당으로 당적을 옮기면서 위기에 봉착한다.

대선 이후 줄곧 노무현과 대립하다[14]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에 참여하였다. 이 당시 탄핵 서류를 제출한 자가 박근혜 대통령의 복심이라 불린 김기춘청와대 비서실장이었다. 참고로 김기춘청와대 비서실장박정희 대통령의 집권 시절인 1972년에 법무부 과장으로서 유신 헌법의 초안작성에 핵심적인 역할로 관여하였고, 유신정권 말기에는 청와대비서관을 지낸 인연이 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 탄핵은 '우리가 뽑은 대통령인데 너희가 무슨 자격으로 탄핵을 하느냐'는 수많은 국민들의 격노를 불러 일으켰다. 한나라당은 이른바 이 '탄핵 역풍'을 정통으로 맞아 차기 17대 총선에서 승리는 고사하고 100석도 얻기 어려울 만큼 치명적인 위기에 처하게 된다. 20대 총선새누리당과 야당의 위치가 반대였다고 봐도 된다. 그때에는 열린우리당이 단독 과반은 따놓은 당상이고 잘 하면 180석~200석까지 차지할 것이라는 예상이 대다수였다.

결국 최병렬 대표가 사퇴하고, 박근혜 의원이 당대표에 올라 사태 수습과 선거 지휘에 나섰다.[15] 차떼기로 모금한 돈을 되갚기 위해 당사를 매각하고 '천막당사'를 차려서 이미지 변신을 꾀했다. 당내 소장파들이 탄핵 찬성 철회를 주장했으나, 이를 거부하여 지지층 이탈을 막는 한편, 거대 여당 견제를 부동층에 호소했다. 이외 동시에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이 실언을[16] 하면서 바닥을 찍는 듯했던 한나라당의 지지율은 반등했다.

그 결과 열린우리당은 국회 전체 의석 299석 중 152석을 얻어 처음으로 원내 제1당 자리를 차지하는 기쁨을 안았으나 180석~200석까지도 기대해볼 만하다는 분위기로 볼 때 솔직히 실망스런 성적이었다. 한편 80석이라도 확보하면 다행이라던 한나라당은 기대 의석을 훨씬 웃도는 121석을 확보하며 기사회생했다.

이후 박근혜 대표는 참여정부와 사사건건 대립각을 세웠고, 참여정부를 가열차게 공격하며 한나라당을 장악하는 데에 성공, 가장 유력한 대권 주자로 떠오르게 된다. 그러나 그녀가 노무현 대통령을 비판하면서 했던 그 구구절절 옳은 비판들이 본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건 참 아이러니한 일이기도 하다.

2007년 참여정부레임덕이 왔다. 한나라당은 박근혜 대표가 잡고 있었으므로 그녀가 다음 대통령이 될 것이 유력할 상황이었으나, 독재자의 딸이라는 거부감, 참여정부와의 대립 과장에서 보인 강경함은 지지율 외연 확장에 방해가 되고 있었고, 당내 지지는 다소 부족하지만, 국민적 인기가 높았던 이명박서울시장이 강력한 경쟁 상대로 떠올랐다. 이 당시 분위기는 한나라당의 대선 승리가 거의 확실했기 때문에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로 결정된 사람이 곧 다음 대통령이나 다름 없었던 그런 분위기였다.

둘은 제1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선언했고 박근혜 대통령과 관계가 안 좋기로 유명한 김무성 전 대표와 유승민 전 원내대표도 이 당시에는 박근혜 후보 캠프에서 각각 조직 담당, 정책 담당으로 일했다. 그런데 이때 한나라당은 각 후보를 지지하는 정치인을 중심으로 친이계친박계로 갈라져 살벌하기 짝이 없는 폭로전을 이어갔다. 이때 싸우면서 생긴 감정의 앙금이 후술할 18대 총선 당시 일어난 친이계친박계 공천 학살과 19대 총선 때 일어난 친박계친이계 공천 학살로 이어졌고, 그 원한은 20대 총선새누리당을 흔들었던 친박계비박계 숙청으로까지 이어져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또한 두 사람에 대한 의혹은 상당수가 이때 나온 것으로, 여담으로 이명박 대통령의 그 유명한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가 이 17대 대선 후보 경선에서 나온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북한 핵실험과 보궐선거 패배로 박근혜에게 불리한 요소가 하나 둘 씩 터졌고 경선 룰 공방을 거쳐 결국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여론조사에서의 우위를 바탕으로 승리했다. 박근혜 전 대표는 경선 결과에 승복하며 다음 대선으로 기회를 미루게 된다.[17]

결국 이명박 후보는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17대 대선이 끝나고 얼마 안 있어 18대 총선이 시작되자 이명박 대통령의 계파인 친이계는 박근혜 의원을 따르는 친박계 인사들을 공천에서 대거 탈락시켰다. 이에 공천에서 탈락한 친박계 인사들은 한나라당을 나와 친박연대(...)라는 사상 초유의 가설 정당을 만들어 18대 총선에 나섰고, 친박연대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들은 '친박 무소속 연대'라는 이름으로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이때 박근혜 의원은 한나라당 공천 심사에서 합격했으나 말 그대로 팔다리가 다 잘린 상태였고 기자회견을 연 뒤 눈물을 보이며 '저도 속고 국민도 속았습니다'라는 말을 남긴다. 또 탈당한 친박계 사람들에게 '살아서 돌아오라'는 메세지를 남기기도 했다.

지난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의 압승이 예상되었던 것처럼 제18대 국회의원 선거한나라당의 압승이 예상됐다. 그러나 18대 총선 결과 한나라당은 국회 전체 의석 300석 중 153석을 얻어 턱걸이 과반에 만족해야 했다. 잘 하면 200석도 차지할 수 있을 지 모른다던 기대에서 한참 못 미치는 성적이었다. 반면 친박연대는 박근혜 의원의 본거지인 대구광역시 & 경상북도에서 돌풍을 일으켜 14석을 얻어 원내 제4당이 되는 기염을 토했고, 친박 무소속 연대도 12~16명의 당선자를 내면서[18] 무려 26명의 친박계 인사들이 살아남았다.

예상 밖의 선거 결과에 한나라당은 내부 진통을 겪긴 했지만 탈당해서 생환한 친박계 사람들을 다시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고, 거기에 보수 성향의 무소속 의원들까지 더해진 결과 한나라당은 무려 183석에 달하는 절대 다수의 의석을 가진 초거대 여당으로 급성장하게 된다. 이때 박근혜 의원은 '여당 안의 야당' 역할을 하며 세종특별자치시 문제 같은 중요한 이슈가 생겼을 때 이명박 대통령과 정면으로 반목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대권 주자로서의 이미지를 굳혀 나갔다.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 만료가 다가오면 다가올 수록 그의 인기도 덩달아 바닥을 찍어 이제는 땅 속까지 뚫기 시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보편적 급식(무상급식)' 문제로 '셀프 탄핵'을 하면서 공석이 된 서울특별시장 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2011년 10월에 실시된 서울특별시장 재보궐선거 결과 친이계로 분류되던 나경원 후보가 무소속 박원순 후보에게 패배하고 말았고, 이때를 시작으로 친이계의 힘이 상당한 속도로 빠지기 시작했다. 고승덕 의원이 홍준표 체제가 선출된 전당대회에서 돈 봉투가 돌았다는 이야기를 폭로하고, 선거관리위원회에게 디도스 공격을 가한 범인이 한나라당 당직자라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홍준표 체제는 붕괴됐고 한나라당의 분위기는 급격하게 식었다.

결국 당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유력 대권 주자였던 박근혜 의원을 위원장으로 하는 비상대책위원회가 꾸려졌다. 박근혜 비대위는 한나라당이라는 이름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외부 인사들을 비대위로 영입하였으며, 당의 색깔을 빨간색으로 바꾸는 파격적인 변화를 보여주었다. 당의 전권을 거머쥔 박근혜 위원장은 18대 총선 때 겪었던 수모를 고스란히 친이계 공천 학살로 되갚아줬다.[19] 그런 가운데 치러진 19대 총선민주통합당이 승리할 것이라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새누리당의 승리로 끝나 박근혜라는 이름의 가치를 최대치까지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박근혜 의원은 18대 대선에 출마할 것임을 공식 선언하였다. 여러 후보들이 경선에 참여했으나 박근혜라는 이름 앞에 모두 듣보잡 취급을 받았고, 새누리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은 박근혜 의원의 싱거운 승리로 끝났다. 그리고 2012년 18대 대선에서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와 가열찬 대결을 펼친 끝에 51.6%의 득표율을 얻어 18대 대통령에 당선, 숙원을 풀게 되었다. 역대 대통령 후보들 중 가장 많은 표를 받은 후보였다.

현행헌법이 탄생한 제9차 헌법개정 후 제6공화국이 출범하며 역대 대통령들이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를 시작으로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등 정부의 가치나 목표를 나타낼 수 있는 슬로건적인 정부명칭을 붙여왔다.

이는 사실 대한민국 역사 속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제1공화국, 장면 내각과 윤보선 대통령의 제2공화국, 박정희 대통령의 제3공화국,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 정권을 의미하는 제4공화국, 전두환 대통령의 제5공화국, 또 후임 정부들이 명칭을 달리하여서 노태우 대통령 정권을 뜻하게 된 제6공화국처럼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어 새로운 행정부가 출범하면 공화국 호칭이 달라지며 별도의 호칭으로 정권을 구분해온 역사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이는 엄연히 말해, 대한민국 헌법이 개정됨에 따라 공화국의 번호가 달라진 것이기에 새 행정부의 출범과는 관계가 없다. 이처럼 헌법이 달라져서 공화국을 구분해온 것이기 때문에 동일한 헌법질서 하에 있는 정부들이 대통령이 다르다는 이유로 명칭을 달리할 수 없다는 법률적 논쟁이 발생했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이명박 대통령 당시에는 '실용정부'라는 명칭이 고려되다가 무산되었다. 후임인 박근혜 대통령 또한 별도의 명칭을 사용하지 않으며 박근혜 정부로 명칭이 결정되었다. (다만, 한동안 '민생정부'라는 명칭이 고려되었다.)

사실 일반적인 경우에서 특정 정부를 칭할 때,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MB정부 등으로 칭하는 것은 명확한 의미가 잘 구분되고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없다면 제재될 이유가 없다. 다만 헌법학적 관점에서 모두 현행 헌법 질서 하에 있는 제6공화국 정부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정부 별 명칭이 달리 한다는 것을 꺼린다는 것을 명심하자.

2.2.1 선거의 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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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대표 당시 천막당사로 현판을 옮기는 모습

박근혜가 당 대표로 선거캠페인을 지휘할 때, 당이 언제나 승리했기 때문에 선거의 여왕이라고 불렸다. 위의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를 시작으로,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까지 총 3번의 선거를 당대표 또는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진두지휘하면서 승리를 이끌었다.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한나라당이 121석을 가져서 열린우리당의 과반의석 확보를 막는 데에는 실패했으나, 원래 탄핵정국에서 열린우리당 180석 vs 한나라당 60석까지 밀릴 것으로 예상되던 것을 크게 반등해서 이 정도로 막아낸 것은 천막당사, 거대 여당의 폭주를 막을 야당의 존재 어필 등 박근혜 대표의 캠페인의 역할이 컸다고 평가된다.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워낙 열린우리당과 노무현 정권에 대한 반대여론이 커서 이기기 쉬운 선거였지만, 유일한 광역자치단체 접전지였던 대전광역시에서는 열린우리당이 앞서고 있었다. 그런데 박근혜 대표가 서울에서 유세 도중 괴한이 휘두른 커터칼에 얼굴을 피습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때 수술 직후 깨어난 박근혜가 당직자에게 첫마디로 "대전은요?"라고 선거판세를 물은 것이 큰 화제가 되고, 결국 대전시장 판세가 역전되어 한나라당 박성효 후보가 승리하였다. 이 때 한나라당은 호남과 제주를 제외한 광역자치단체 12곳을 모조리 이기는 역대 최고의 승리를 거둔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이명박 대통령과 가까운 친이계가 한나라당 당권을 장악하면서, 친박계 현역 의원이 대거 공천에서 탈락한 이른바 '친박계 공천 학살'이 일어났다. 이에 불복한 친박계 인사들이 대거 탈당하여 이른바 친박 무소속[20]으로 출마하거나 친박연대[21]라는 당을 급조해 출마했고, 박근혜 본인은 탈당은 안 했으나 "저도 속았고 국민도 속았습니다"와 같은 발언으로 은근히 친박세력을 지원했다. 이것이 또 한 번 대박을 낸다. 친박연대는 무려 지역구 6석, 비례대표 8석(정당 득표율 13.8%)으로 14석이나 의석을 확보했고, 이와 별도로 친박으로 분류되는 약 16명의 무소속 지역구 의원도 당선되었다. 이들 친박 후보들 덕분에 한나라당은 최대 200석까지도 가능하다는 예상을 뒤엎고 반수를 조금 넘기는 대패를 당했고, 친박 세력은 한나라당 내의 친박 의원 10여 명과 함께 '한나라당 내 야당' 역할을 톡톡히 하게 된다.[22]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박근혜는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당시 한나라당은 연이은 선거에서의 패배, 정권심판론에 따른 당 지지도 추락의 위기 상황이었다. 이대로는 총선과 대선에서 필패라는 위기감이 고조되면서 대권 주자였던 박근혜에 일시적으로 당권을 쥐어 주고[23], 강력한 쇄신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되었다. 그는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고치고, 김종인, 이상돈 등 개혁적 인사와 이준석, 손수조, 이자스민, 문대성 등 젊은 인사를 영입하였으며, 경제민주화와 같은 개혁적 공약과 행보를 보였다. 때마침 민주통합당의 당내 공천문제와 통합진보당과의 단일화 갈등까지 겹치면서, 선거 판세는 참패 위기에서 '그래도 제1당은 할 수 있겠다'(과반까진 힘들겠지만) 정도로 회복되었다. 그런데 뚜껑을 열고보니 152석의 단독과반 확보.

이를 기반으로 박근혜의 선거의 여왕 이미지는 확고해졌으며 그후 자연스레 새누리당의 유일한 대선주자로 발돋움하였으며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에 대해서 사과를 하며 아버지와 선 긋기에 나서면서 차별화된 모습을 보이며 이미지 쇄신에 성공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참고로 대통령이 된 후에도 모든 선거를(재보궐선거 포함) 새누리당을 승리로 이끄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24] 비록 선거를 직접 지휘하지는 않았지만, 필요에 맞게 자신의 이미지 어필을 잘 조절했다는 평.

그러나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이 분열되는 호기를 맞았음에도 새누리당 내부의 공천 파동, 낡아빠진 북풍, 그간 보여온 무능한 모습 때문에 유권자들의 민심이 돌아서면서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치른 선거에서 새누리당이 처음으로 참패하는 모습을 보였다. 향후 남은 임기 동안 극심한 레임덕에 시달릴 것으로 예상된다.

2.3 제18대 대통령 선거

박근혜 대선 후보 포스터
준비된 여성 대통령

ㅡ대선 당시 슬로건

선거캠프에서 처음 발표한 슬로건은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였으나, 2012년 11월 18일부로 '준비된 여성 대통령'으로 변경하였다. 새누리당 내부에서는 박근혜와 대적할만한 인물이 없다시피 했기에 경선에서는 이전과는 달리 84%에 달하는 득표율로 어렵지않게 통과하며 새누리당 후보로 확정되었고, 본선에서는 민주통합당문재인 후보와 빅매치를 벌이게 되었다.

선거 과정에서 토론회에서 눌변을 보이기도 하며 안좋은 의미로 화제가 되기도 했으며[25]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에게 면전에서 "박근혜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서 나왔습니다" 라는 발언으로 곤혹을 치뤘다. 하지만 이는 도리어 보수층의 결집을 불러일으켜 박근혜 당선에 한몫하는 아이러니를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선거의 여왕' 이라는 이명이 무색하지 않게 복지관련 공약을 선점하며 문재인 - 안철수 후보 단일화에도 단 한번의 지지율 역전도 허용하지 않고 승세를 이어갔고[26] 2012년 12월 19일 실시된 제18대 대통령 선거를 통해 51%의 득표율과 역대 최다 득표수를 보이며 제18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8대 대선 진행과정에서 국가기관의 여론조작 의혹이 사실로 밝혀지면서 대선 무효 주장이 표면화되자 곤혹을 치루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하단 참고.

2.4 박근혜 정부

임기 중의 자세한 내용들은 박근혜 정부 문서를 참고할 것.

2.4.1 임기 중 주요 사건 및 사고

박근혜/임기 중 주요 사건 및 사고 참조 (관련 사건 목록은 여기에도 잘 정리되어 있다)

3 평가

자세한 내용은 박근혜/평가 문서 참조.

3.1 경제적 평가

해당문서 참조.

3.2 외교적 평가

해당문서 참조.

4 사이비 종교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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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문서 참조.

5 개인처신 문제

자세한 내용은 박근혜/개인처신 문제 문서 참조.

6 역사관

자세한 내용은 박근혜/역사관 문서 참조.

7 기타

이런 기타를 말하는 게 아니다.(...)[27]

  • 대선 후보 당시 한국경제에서 진행한 문답 인터뷰에서 좋아하는 아이돌 스타로 원더걸스를 꼽았다.
  • 벨기에 만화 땡땡의 모험의 열렬한 팬, 속칭 땡땡주의자다. 농담 아니다! 이 때문인지 박근혜 대통령이 육영재단 이사장을 맡았던 시절, 육영재단에서 발간했던 만화 잡지 보물섬에서 땡땡의 모험이 연재되기도 했다. MBC에서 애니메이션이 방영되기도 했다. 심지어 국회의원 시절에 브뤼셀에서 한국전쟁 참전 기념탑 참배 행사 일정 이후 계획에도 없던 만화 박물관을 방문하기도 했다. 여기서 수행원들에게 열심히 땡땡을 설명했다고 한다.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취임 첫 해인 2013년 프랑스벨기에 영국 해외여행 방문 당시 벨기에 국왕 앞에서 이 만화를 언급하며 팬임을 인증한 바 있다.
  • 정계 입문 시절부터 수첩을 애용(?)하는 모습을 보이고 수첩이 없으면 안 그래도 어눌한 말을 더 못한다 하여 "수첩공주"라는 별명이 있다.
  • 패션에 무척 신경 쓴다고 한다. 취임 1년 동안 공식성상에서만 122벌의 다른 옷을 착용했다.
취임 1년 선보인 옷만도 122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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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패션프로젝트
  • 옷이 아주 많은데 스타일은 전부 비슷하여 화제가 되었다.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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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트남 국빈방문 중 직접 패션쇼에 출연. 베트남 전통 복장을 입은 어리고 예쁜 모델들 사이로 한복을 입고 출연하여 화제가 되었다.영상
  • 박근혜 특유의 머리 스타일은 실핀 10개 이상으로 고정 시켜 만든다고 한다.
  • 대통령 선거 연설 중 배경에 있는 새누리당 로고 앞에서 묘한 위치선정으로 사진이 찍히자 네코미미(..)가 연상되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 관용차는 2세대 현대 에쿠스 특수제작 모델을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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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제네시스 2세대 모델[28]을 타기도 하는 것 같다. 여담으로 뒤의 인물은 국가과학자문기술위원회 부의장이자 울산과학기술대[29] 초대 총장이자 마지막 총장인 조무제 전 총장. 사진을 보면 박근혜 대통령 본인이 직접 운전석에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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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하는 친박연대는 2008년 제18대 총선에서 많은 의석을 확보하는 쾌거를 맛봤으나, 박근혜 팬클럽인 박사모가 기자회견장을 점령하면서 갈등을 빚었다. 이 과정에서 난투극이 벌어졌고 한나라당 의원이 출동하는 소란이 일어났다. 무엇보다 같은 정치인을 지지하는 두 단체에서 일어난 싸움이라 주목을 받았다.영상
  • 커뮤니티에서 '박근혜'의 야민정음 버전으로 '박ㄹ혜'라는 말이 자주 보인다. 물론 대부분 비하적 의미.
  • 가족으로는 여동생 박근령, 장남이자 남동생 박지만이 있다. 박근령은 최근 친일관련 실언으로 논란이 된 적이 있었고, 박지만은 예전에 마약으로 여러번 구속된 흑역사(?)가 있었다. 박근혜는 자신에겐 가족도 형제도 없다 말하며 이들과 선을 그었다. 또한 이복언니로 박재옥이 있다.
  • 젝스키스 멤버이자 가수인 은지원과 친척관계(!)다.좋은건가 박정희의 누나 박귀희의 친손자, 즉 5촌 관계로서 은지원 입장에서는 진외당고모, 약칭으로 고모라고 부르는 사이다. 2011년 같이 찍은 사진이 SNS에 올라와 화제가 된적이 있었으며, 박근혜가 대선 후보였던 시절 선거운동에서 지원유세를 했던 적도 있었다.[30] 대통령의 8촌 이내의 가족 및 친척들은 특별관리대상이 됨으로서 은지원도 그 덕택을 누리게 되었다.[31]
  • 박근혜의 가톨릭 세례명은 '율리아나'이며 불교 법명은 '해당화'이다. 믿는 종교는 불교지만 종교 활동을 한 이력이 다소 독특하다. 가톨릭을 믿은 적도 있고 불교를 믿은 적도 있는데 둘 다 세례 및 수계만 받았다. 다만 한나라당불자회의 회장이 정적인 김무성이던 시절에도 빠지지않고 한나라당, 새누리당의 불자회는 물론 다른 불교행사도 나갈정도로 불심은 있다.
  • 어떤 기자가 박근혜 대통령이 한 말 중 지금의 정치 상황과 관련이 있는 말에 자신의 촌평을 붙여 놓았다.기사
  • 국회의원 재직 시절 본회의장에서 잠을 자거나 볼펜을 세우는 행동을 해 반대파의 빈축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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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개국어를 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중국어 말하는 것을 들으면 매우 초보적인 수준으로 기본적인 4성조차 흉내내지 못하고 있다. 차라리 양꼬치엔 칭따오가 나을 판 영상 2분 45초부터 젊은 시절에 5개국어를 익혀서 국제적 감각을 길렀다고 자랑한 적이 있다. 그런데 중국 칭화대에 방문해 한 중국어 연설을 보면, 기본적인 문장 암기는 고사하고 보좌관이 미리 써준 연설문을 힐끔힐끔 보고 읽는데다가, 그나마 성조도 전혀 지키질 않아서 여러모로 큰웃음을 선사했다. 영어와는 다르게 중국어는 성조가 틀리면 알아듣기 힘들다. 박근혜의 어학능력 부족 자체가 외교적 결례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미 그렇게 된 것 같기도
  •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공동기자회견 중 오바마 대통령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하고 어리버리하다가 엉뚱한 대답으로 넘어가서 뉴스가 되었다. 영상
  • 2016년 5월 1일에 이란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이때 히잡을 착용하겠다고 해서 논란이 일고 있다. 히잡은 이슬람교에서 종교적 율법으로 여성에게 강요하는 일종의 멍에이자 이슬람의 여성탄압의 상징인데, 이걸 상대문화 존중이라는 명목으로 착용하겠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대한민국이슬람 국가가 아니며 이란의 속국도 아니다!!"라는 반응과 "굴욕적이다!!"라는 반응이 공존하고 있다. 참고로 히잡이슬람교의 유입이 시작되는 나라나 사우디아라비아수준의 극렬 이슬람 국가가 아닌 좀 강도가 약한 이슬람 국가에서 반대운동을 벌이고 있는 물건 중 하나다. 영화배우 이자벨 아자니는 아예 히잡 반대 운동을 주동하기까지 하면서 여성인권을 위해 있는 힘을 다한 적이 있었다.
  • 2016년, 4.13 총선 선거운동 당시 박근혜 대통령 존영"대통령 '존영' 반납하라" 논란이 있어 화제가 되었다. 그런데, 7월 14일 주한미군 사드 배치를 한마디 상의도 없이 경북 성주에 배치하겠다고 발표하자, 고령 박씨 문중에서 대통령 사진을 떼어 버렸다. 경북 성주군은 박 대통령 선영(조상의 묘소)이 있는 마을로 증조부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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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통 관련 행사에 여러번 참석했다. 2015년 4월에는 호남고속철도 개통식에 갑자기 나타나서 수많은 철도동호인들이 충격과 공포를 선사하였으며, 2015년 8월에는 경원선 남측구간 철도복원 기공식에 직접 DMZ-train을 각부 장관들과 함께 타고 백마고지역으로 간 덕에 경원선에 경복호가 떠서 수많은 철도동호인들이 몰리기도 했었다. 그리고 광주대구고속도로 확장개통식에도 참석하는등 교통관련 행사에 많이 참석한 듯.

7.1 어록

박근혜/어록 참고.

7.2 각종 타이틀

각종 최초 타이틀이 많은데, 이승만 전 대통령과 비슷하다.

  • 최초의 여성 대통령
  • 최초의 영부인 대행 출신 대통령
  • 최초로 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후 과반을 득표한 대통령
  • 역대 최다 득표수를 얻은 대통령[32]
    •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이 선거에서 박근혜와 문재인을 제외한 나머지 후보들의 득표율 총합이 1%도 안되기 때문이다. 결국 사실상 문재인 한 사람과의 대결에서 이긴것이라 이렇게 된 것인데 그래서 문재인에게는 가장 많은 득표를 하고 낙선한 대통령 후보라는 기록이 추가되었다. 이는 제18대 대통령 선거가 얼마나 빅 매치였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이다.
    • 이전 기록은 02년 대선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얻은 1201만 4277표였다. 하지만 박근혜는 물론 2위로 낙선한 문재인까지 이 기록을 깼다.
  • 최초의 미혼 대통령
  • 1공화국 수립 이후 태어난 최초의 대통령
  • 한국전쟁 중 태어난 최초의 대통령

7.3 대중매체에서

제4공화국(드라마)에서 전유진이, 제5공화국(드라마)에서 고정민이 연기했다. 그리고 코리아게이트에서는 이진아가 연기했다.

8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선거종류소속정당득표수(득표율)당선여부비고
19981998년 4월 재보궐선거 (대구 달성)한나라당34,271 (61.3%)당선 (1위)
2000제16대 국회의원 선거 (대구 달성)한나라당37,805 (61.4%)당선 (1위)
2004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대구 달성)한나라당45,298 (70.2%)당선 (1위)
2008제18대 국회의원 선거 (대구 달성)한나라당50,149 (88.6%)당선 (1위)
2012제19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11번)새누리당9,130,651 (42.8%)당선2012년 11월 의원직 사퇴
(제18대 대통령 선거 출마)
2012제18대 대통령 선거새누리당15,773,128 (51.6%)당선 (1위)

9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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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관련 문서

  1. 대구광역시 중구
  2. 가톨릭에서는 세례도 받았고, 불교에서는 수계도 받았다. 박근혜의 가톨릭 세례명은 '율리아나'이며, 불교 법명은 '해당화'이다.해당 기사
  3. 최순실 게이트와 그동안의 측근들에 의해 밝혀진 사실이다 해당 내용은 관련 항목 참조
  4. 대통령배우자가 있는 여성인 사례가 없다 보니 영부인과 같은 호칭이 아직 없다. 영어의 경우 'First Lady'의 대응표현으로 'First Gentleman'이란 표현이 있으며 주로 '영부군'으로 번역된다.
  5. 결혼을 안해서 부군이 없다.
  6. 엄밀히 말하면 '자신이 출마한 선거'가 아니라 '자신이 관여한 선거'가 맞을 것이다. 그리고 제17대 대통령 선거 한나라당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졌다.
  7. 보통 통령직 여성의 남편을 '영부군'이라고 칭하는 경우가 많은데, '영부인'의 영(令)은 남을 높여 부를 때 쓰이는 접두어로, '대통령'의 '영/령(領)'과는 다르다. 따라서 영부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상대의 남편을 높여 부르는 호칭인 '부군(夫君)'이 적합하다. 실제로 부군이라는 말은 영어에서 여왕이나 여성 대통령의 배우자를 지칭할 때 쓰이는 consort라는 말의 번역어로도 쓰이고 있다.
  8. 이때 정몽준김승연 한화그룹 회장과 동창이었다.
  9. 학부 졸업시 학점은 4.0 만점에 3.82로서 상당히 높았다. 스캔한 성적증명서 참고
  10. 이 과정에서 전두환에게 6억을 받아 논란이 되었다.
  11. 이때 본인의 자서전에는 'IMF 사태를 보며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라고 적혀있다.
  12. 속칭 차떼기 파동
  13. 의외겠지만 당 총재가 공천권을 휘두르던 시절, 김영삼이 개혁 공천을 표방하면서 많이 끌어들이기도 했고, 97년 대선 직전 민주당이 정권 교체냐 3김 청산이냐의 갈림길에 있을 때 3김 청산을 주장하던 인사들이 이회창 지지로 돌아서면서 넘어가기도 했다.
  14. 대립의 근원을 앞으로 당긴다면 2000~2001년 전후로 나타나 이어진 민주당 정풍 운동부터 시작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고, 이후 대선 과정 및 대선 자금 수사, 대북 송금 수사 등으로 곪아 터졌다.
  15. 지금은 숙적이 된 김무성 전 대표와의 인연도 이때 시작된 걸로 알려져 있다. 김무성 전 대표는 박근혜 대표 밑에서 당 사무총장으로 일했고, 17대 대선 후보 경선에서도 박근혜 캠프에서 조직 담당으로 일하며 친박계의 좌장으로 불렸지만, 2010년 세종시 문제로 의견이 갈리게 되었고 박근혜 의원은 '친박에 좌장은 없다'는 말로 사실상 그와 결별하였다.
  16. 젊은이 투표 독려 발언 중 "60대 이상은 투표 안해도 괜찮아요."라는 발언이 노인 폄하라는 논란이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정동영 문서 참조.
  17. 박근혜는 당원, 대의원, 국민선거인단 투표에서 모두 승리했으나, 전화 여론조사에서 뒤집혀 이명박에게 패배했다. 이 전화 여론조사도 사실 뒷말이 엄청 많은데 자세한 내용은 위키백과이명박에 대한 비판 문서에 다 나와있다.
  18. 12~16이라고 한 것은 친박계가 확실한 사람과 굳이 계파 분류를 하자면 친박계로 분류되는 사람을 포함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19. 유승민 의원은 무사히 공천을 받아 출마해 당선됐지만, 비박계로 돌아선 김무성 전 대표는 이때 공천에서 탈락됐다.
  20. 김무성, 김세연 등이 유명하다
  21. 서청원이 당대표를 맡았다
  22. 총선 직후에는 이것이 상당한 충격이었다. 친박 세력이 전략적으로 야권과 공조하면, 친박+자유선진당+통합민주당+민주노동당+창조한국당 세력이 사실상의 여소야대를 이루며 친이계 한나라당의 정국 주도권을 뺏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천시에서, 당시 한나라당 사무총장이자 친이계의 실세로 평가받던 재선의원 이방호가 민주노동당 강기갑에게 178표 차이로 패배했는데, 이것이 친박 성향 한나라당 지지층이 단지 이방호를 떨어뜨리기 위해 강기갑을 지지하면서 벌어진 결과라고 평가받았다. 비록 현실에서는 행정중심복합도시 문제만 제외하면 보수 성향에 맞춰 알아서 잘 협력했지만.
  23. 한국의 정당은 2000년대 초중반을 기점으로 모두 당권과 대권을 나누어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고 있는데, 이를 한 사람에게 몰아 준다는 것은 말 그대로 정당과 정당 구성원의 생사여탈권을 넘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24. 지방선거서 광역자치단체장이 새정치민주연합보다 1석 뒤진 점은 논외로 하더라도 기초자치단체장은 새누리당의 압승이었다.
  25. 자세한 내용은 박근혜 화법 문단 참고.
  26. 초창기 박근혜 - 문재인 - 안철수의 3자 대결에서도 모두 우위를 이어갔다. 다만, 박근혜 - 안철수 양자대결에서는 밀린 적이 있었다.
  27. 전북창조경제혁신센터 출범식에 참석할 당시 탄소 소재로 만든 기타를 만져보는 모습. 실제로 코드 몇 개는 칠 줄 안다고 한다. 이 사진은 종종 나는 지옥의 테러리스트(...)나 걱정 없이 산다(...) 등으로 합성되어 짤방으로 쓰이기도 한다.
  28. 페이스리프트가 되며 제네시스 G80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29. UNIST가 울산과학기술원으로 전환한 이후는 총장직에서 물러났다.
  30. 공인이 정치적인 움직임을 보인다는 이유로 잠시 논란이 된 적이 있었는데, 대다수는 "친척 일을 도울 수도 있지"라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연예인은 공인이 아니다.
  31. 사실 은지원이 1978년생으로서 태어나자마자 박정희가 사망하기까지 1년간 같은 혜택을 누린 적이 있었다.
  32. 총 1577만 3128표
  33. 다소 권위적인 모습에다 코렁탕이 성행하던 시절이 연상되는 출신성분 때문인지 박근혜 관련 유머에 자주 등장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