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나다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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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부대마크는 82공수사단의 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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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Invasion of Grenada

1983년 10월 25일부터 1983년 12월 15일까지 벌어진 그레나다미국, CPF[1] 동맹군간의 전쟁.

2 침공의 배경

영국의 식민지 통치를 받던 카리브 해의 소국가인 그레나다는 1974년 영국에게서 독립했다. 이후 그레나다의 수상이 된 에릭 게일리는 갱과 비밀경찰을 동원하여 잔혹한 독재정치를 펼쳤다. 이 과정에서 외국 자본과의 유착이 있었기에 실업과 빈곤율이 상승하면서 대중의 불만은 높아져만 갔다.

이런 불만이 가중되던 와중에, 1979년 자유와 복지, 교육 등을 외치며 일어난 뉴 주엘 운동을 중심으로 한 무력 쿠데타가 일어나 게일리의 독재정권은 비밀경찰과 군, 갱단과 함께 무너졌고 에릭 게일리는 처형됐다. 이후 뉴 주엘 운동을 이끌었던 모리스 비숍이 새 수상으로 취임하여 그레나다 인민 혁명정부를 수립한다. 그레나다 인민 혁명정부는 헌법을 정지시키고 의회를 해산하며 영국식 민주주의를 비난하고, 상공회의소 건립과 복지, 교육, 관광산업 등 대중의 지지를 받으며 근대화 사업에 착수했다.

하지만 주변지역의 서인도 제도 연합주(WIAS)는 혁명을 위법이라 보고, 그레나다 인민 혁명정부를 승인하지 않기로 결의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승인하지 않은 국가들은 독립국이던 도미니카와 세인트 루시아 두 국가뿐이었다. 그러나 1980년 그레나다 인민 혁명정부가 가이아나의 포버스 번햄 정부를 비난하는 등 가이아나와의 관계가 악화되고, 자메이카에서도 좌파 정권이 전복되는 등 그레나다는 점점 고립화되어갔다.

이렇게 고립되어가는 와중에, 그레나다는 공산권에 접근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한 UN의 비난결의안에 쿠바와 함께 반대하고, 혁명정부 성립 직후부터 쿠바를 비롯한 공산권 국가에게 군사원조도 받는 등 적극적인 친공산권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는 제 2의 쿠바화를 걱정하는 미국과 공산주의와의 대립노선을 명확히 하던 로널드 레이건정부의 정책에 맞물려 그레나다에 대한 강경책의 원인이 되었고, 1980년 11월 미국은 카리브 개발은행에 원조하지만 그레나다에 대해서만은 원조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조치는 카리브 해 각국의 반발을 초래했고, 카리브 해 국가들은 그레나다와 공존하겠다는 의지로 결속하게 된다.

1981년, 서인도 제도 연합주가 동카리브해 국가기구(OECS)로 발전하며 그레나다도 그 일원이 되었다. 하지만 그레나다의 인접국들은 그레나다 인민 혁명정부에 대한 불신감을 버리지 못했고, 따로 동카리브 안전 보장기구(ECSS)를 만들었다. 이 동카리브 안전 보장기구는 기존의 동카리브 국가기구에서 그레나다, 세인트 키츠 네비스, 영국령 모트세렛이 빠지고 바베이도스를 더한 지역 안전 보장 시스템으로, 그레나다의 인민 혁명정부를 경계하기 위해 새로이 창립된 기구였다. 그레나다는 이를 의식하여 소련과 쿠바를 비롯한 공산권 국가들과 군사 협정을 체결하고 군사 고문을 들여오는 등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어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그레나다의 행동과 3000여명의 그레나다 인민군은 동카리브에선 충분한 위협이었다.

1983년 3월,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그레나다의 군사기지화를 비난했다. 3월 23일에는 그레나다에 대규모의 공항이 건설되는 것을 파악하고는 이를 소련의 군사기지라고 주장하며 비난했다. 또 같은 시기, OECS와 미 해군의 군함이 바베이도스 군항에서 출항하여 그레나다 해역에서 무력시위를 벌이고 그레나다 침공을 가정한 군사훈련을 푸에르트리코에서 진행하는 등 군사적 압박을 강화했다.

1983년 10월 13일, 모리스 비숍 그레나다 인민 혁명정부 수상이 급진적 레닌주의자였던 버나드 코드 부수상을 지지하던 허드슨 오스틴 혁명정부 인민군 사령관에 의해 감금당하게 된다. 미국은 같은달 15일 비숍 수상의 구출을 바베이도스 정부에 의뢰했지만, 19일 비숍 수상을 지지하는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면서 내전이 발생하여 그 와중에 도주하던 비숍 수상과 각료들이 군에 의해 총살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버나드 코드 부수상과 허드슨 오스틴 사령관은 혁명군사 평의회 정부를 수립하고 그레나다 총독을 투옥하며 계엄령을 선포했다. 20일에는 미 정부의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부통령을 필두로 한 특별상황팀이 편성되어 그레나다 침공계획을 수립, 레이건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레이건 대통령도 이를 승인하면서 미군은 그레나다에 대한 본격적인 침공 준비에 돌입한다.

10월 21일, 바베이도스에서 그레나다를 제외한 OECS 회원국과 바베이도스 정부간의 긴급 회동이 이루어져 자메이카와 미국을 초청, 그레나다를 침공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 회의에서 <OECS 조약 8조에 기인한 적절한 조치>를 이유로 그레나다 총독의 석방과 총독의 지휘, 감독 아래 민주적인 선거 개최를 그레나다 군사정부에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는 거의 ' 우리 말 안들으면 침공할거니까 알아서 잘 기어라, ㅇㅋ? ' 수준의 협박이었고, 국제사회에서 많은 비난을 받았다. 이날 그레나다에서는 계엄령이 해체되고, 24일에는 대다수의 상점과 학교가 다시 문을 열었다.

한편 22일부터 23일에 걸쳐 이루어진 카리브 공동체의 긴급회의도 그레나다 총독의 감독과 지회 하에서 민주적인 총선거와 그레나다 군사정부를 비난하는 것에 대한 건에는 의견들이 일치했지만 각국의 평화유지군 파견에는 의견이 분분했다. 평화유지군의 파견을 주장한 OECS 국가들에 대하여 트리니다드 토바고, 가이아나, 벨리즈, 바하마는 강하게 반대했고, 결국 회의는 결렬됐다.

결국 10월 25일 오전 5시, 더이상 상황을 지켜볼 수 없었던 미국은 사전 선전포고 없이 쿠바와 소련이 그레나다에 직접적인 개입을 하는 상황에서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그레나다를 침공하였다.[2]

3 작전명 ' 절박한 분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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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박한 분노(Urgent Fury)[3]라고 명명된 이 작전은 베트남전 이후 미국이 참여한 최초의 대규모 군사작전이었다.

조셉 맥클리프와 노먼 슈워츠코프를 지휘관으로 한 7천 300여명의 미군 병력을 필두로 OECS 회원국들의 353명의 병력이 그레나다에 투입되기 시작했다. 미 해병대, 82 공수사단, 육군 레인저델타 포스, 네이비 씰등이 선두로 그레나다에 공수, 상륙, 침투했고 이 뒤를 따라 보병연대와 공병대대가 상륙했다. 미 해군미 공군도 이를 지원했다. 당시 그레나다측은 정규군 1500여명과 722명의 쿠바 군사고문단, 소련, 북한, 동독, 불가리아, 리비아 등에서 온 60여명의 군사고문단이 있었다. 이외에도 인도에서 200명, 중국에서 82명정도가 더 있었다는 카더라 소문이 있다.

먼저 네이비 씰이 폴 스쿤 그레나다 총독 구출과 통신기지 파괴 등의 특수작전을 실행했다. 임무 자체는 모두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선 상당한 삽질들이 있었다. 당시 '네이비 씰 6팀'이란 명칭으로 활동하던 DEVGRU 중 한 팀은 1차 침투 당시 그냥 구축함에서 보트로 옮겨타고 상륙해도 되는데 굳이 해상 강하를 했다가 장비의 무게를 미처 계산하지 못해서 대원 4명이 익사해 버리고, 막상 사용하려 한 침투용 보트는 모터가 고장나서 해류에 떠밀려가는 바람에 작전을 연기해야 했다. 2차 침투 때는 장비를 실은 보트가 파도에 휩쓸려버려서 임무 자체가 취소되어 버렸다. 다른 팀도 어려움이 많았는데 총독 관저에 침투하던 도중 그레나다군의 대공포 사격으로 혼란이 생겼고 이 때문에 통신장비인 SATCOM을 헬리콥터에 두고 와버려서 상부와의 교신을 할 방법이 없었다. 이 때 한 대원이 혹시나 하고 관저의 일반 전화로 통신을 시도해 봤는데, 대원들에겐 다행히도 일반 전화망은 살아 있었다. 그레나다군이 깜빡하고 총독 관저의 전화선을 끊지 않았기 때문. 그런데 국제전화는 유료인지라 교환원이 그 와중에도 "결제는 뭘로 하실래요?"라고 물었고, 대원의 개인 신용카드를 이용해서 미국 포트 브래그에 있는 합동특수전사령부(JSOC)와의 통신에 성공했다.[4]

한편 육군 레인저와 해병대 등은 펄즈 공항과 파견된 쿠바군이 건설중이던 포인트 살린스 국제 공항을 점거 및 자국민 구출에 나섰다. 그레나다 각지에서 전투가 벌어졌지만 압도적인 병력과 각종 지원을 받는 미군은 정부시설, 군시설, 공항, 대학 등의 거점지역을 차레로 제압해나갔다.

계속된 전투에서 미군은 19명이 전사(미 해병대 3명 포함), 116명이 부상당했고, 그레나다 측은 병사 45명이 전사, 민간인 24명이 사망하고 358여명의 병사가 부상당했다. 파견 쿠바군 또한 24명이 전사하고 59명이 부상당했으며, 638명은 미국의 포로가 되었다. 양측이 동원한 병력을 모두 합쳐도 1만명은 커녕 9천명도 되지 않고, 원래 군 특성상 전체 병력에서 전투병의 비중은 아무리 많아도 3분의 1 가량인데다 대규모 포격및 폭격도 없었으며, 미군 한정으로 의무후송이 발전한 시기의 전쟁에 이 정도 피해라면 양측 모두 실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는 의미이다. 실제 한 레인저 참전용사는 '진흙탕 싸움'이었다고 증언했다. 더구나 주로 보병VS보병이었으니...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한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추측할 수 있다. 워낙에 전황이 급박하여 민가를 오폭하거나 민간인/적군 구분할 여유가 없어 쏘고보니 민간인을 오인사격한 상황이었을 거란 얘기. UN에서는 침공 개시 직후인 10월 25일부터 28일에 걸쳐 긴급하게 안전보장이사회를 개최하여 가이아나, 니카라과의 공동안을 채택시켰지만 미국은 거부권을 발동하여 전쟁을 계속했다. 결국 공동안은 부결되어 11월 2일 UN 총회 심의에 부쳐지게 된다.

안건은 찬성 108표, 반대 9표, 기권 27표로 가이아나와 니카라과의 공동 결의안에 벨기에의 수정안이 더해져 가결되었다. 이 수정안은 군사간섭의 국제법 위반 우려, 그레나다의 주권 보호, 외국군의 즉시 철수 등을 주요 안건으로 담고 있었는데, 미국과 카리브 동맹군은 이 결의안에 응하지 않고 평화유지군이라 이름만 바꿔 치안 유지, 계속된 전쟁에 나서면서 결과적으로는 UN 결의안을 따르지 않게 된다. 미주기구에서는 침공 다음날인 10월 26일에 이사회 특별 회담이 소집되어 31개 가맹국중 쿠바, 수리남이 불참한 가운데 15개국이 침공을 비난했고, 11개국이 침공을 지지하며 의견이 나누어졌기에 표결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회담이 종료되었다.

12월 15일, 그레나다 전역이 미군과 카리브 해 동맹군에 의해 제압되었고 각국의 군사고문단은 연금되었다. 이후 미군의 주력 전투병력은 철수했지만 미군과 OECS 동맹군에 의하여 평화유지군이 새로이 설립되어 그레나다의 평화유지를 맡게 된다.

4 침공 이후

1984년 3월, 그레나다와 세인츠키츠 네비스가 카리브 평화유지군에 참가하여 12월에는 평화군의 감시 하에 민주적인 선거가 이루어졌다. 이에 하버트 브레이즈가 당선, 그가 이끄는 신국민당 정권이 들어섰다. 이 침공은 베트남 전쟁에서 온갖 굴욕과 뼈저린 경험을 겪은 미국에게 있어서 오랜만에 ' 완전한 승리'를 거둔 전쟁이었다. 같은해 레이건은 그레나다를 방문하여 1만여명의 청중을 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그레나다 침공은 어디까지나 주권 국가에 대한 무력 침공이었다. 미국은 그레나다의 공산화 방지와 자국민 보호, 민주주의 수호와 공산국가의 개입 등을 명목으로 침공했지만 주권국가에 대한 무력침공임은 변함없었다. 공산국가들은 말할 것도 없고 서방국가들조차 미국의 그레나다 침공을 비난했으며, 심지어 언론 보도를 제한했다는 사실마저 알려지면서 세계 언론사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이같은 행동으로 인해 그레나다 침공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오판과 실수중 하나로 언급되기도 한다.[5]

미국은 침공 이후에도 그레나다에 1985년 6월까지 미군을 주둔시켰고, 이후 전부 철수시켰다.

5 기타

여담으로 미 육군의 레인저델타 포스, 미 해군의 네이비 씰소속 씰 팀4(남아메리카 담당)와 씰 팀6(훗날의 DEVGRU), 그리고 미 공군의 CCT미 해병대의 해병수색대 '샤크맨' 등 미군 육해공해병의 특수부대들이 대거 참가한 전쟁중 하나이다.

이후 침공에 참가한 OECS 국가와 다른 카리브해 국가들간의 대립은 격화되었고, 카리브 국가들의 공동체 관계는 갈수록 험악해져 갔다. 1984년 5월 카리브 해역 내 카리브 해 국가들의 무역량은 전년도에 비해 13% 감소했다. 하지만 그레나다 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회담을 가지며 관계는 차츰 회복되고 개선됐다.

당시 미군은 M1 헬멧이 PASGT 방탄모로 바뀌고 M16A1 소총이 M16A2 소총으로 바뀌는 등 신형 장비로 교체중이었는데, 이 때문에 당시 사진에서는 미군이 이 둘을 혼용해서 사용하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 또한 걸프전과 함께 특수부대가 재평가받는 전쟁중 하나로 꼽히기도 하며 UDT가 네이비씰에 1983년 초에 통합되어 최초로 작전을 치루었다.[6]현대 미군의 전투식량인 MRE가 1981년에 제식체용된 이후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되었다.

1984년 1984 LA 올림픽에선 그레나다 침공을 이유로 소련을 비롯한 공산국가들이 올림픽 참가를 보이콧했다. 하지만 근본적 원인은 1980 모스크바 올림픽에서 서구권 국가들이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비난하여 보이콧한 일에 대한 보복에 가까웠다.올림픽이 그러라고 있는건 아닐텐데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그레나다 침공에 대한 연설에서 더티 해리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기한 해리 캘러핸이 내뱉은 대사인 ' Go ahead. Make my day'[7]라는 말을 인용하는 바람에 물의를 빚기도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스트우드가 감독을 맡고 주연으로 나온 1986년작 'Heartbreak Ridge'[8]에선 후반부 주요 내용이 바로 이 그레나다 침공이다.천상 공화당빠네

6 관련항목

  1. Caribbean Peace Force, 카리브해 평화 유지군.
  2. 이는 명백한 위법행위였기 때문에 공산권 국가는 물론이고 영국 등 서방 동맹국들도 미국을 비난했다. 더군다나 당시 그레나다 정부는 자국 내부의 서방 국적인들에게 떠나라는 탈출 권고 및 협조조치를 취했으나 미국 정부와 현지 미국인들이 의도적으로 무시해서 비난은 커졌다.
  3. urgent는 긴급한, 절박한, 급박한 등의 뜻을 지니고 있다. 대부분의 번역에서는 절박한 분노 또는 긴급한 분노, 긴급 분노 등으로 표시하고 있다.
  4. 이는 영화 트랜스포머 1편에서 패러디 되었다. 물론 배경은 다르지만 상황이 거의 일치한다.
  5. 주권 국가의 내정을 이유로 무력 침공하는것은 아무리 북한같은 막장 나라라도 힘든 이야기다. 당장 예시로 든 북한이 자국 내에서 막장짓을 벌이며 자국민의 피와 살을 빨아먹어도 각종 제제와 규탄을 제외하고는 그러한 내부 사정 문제로 일어난 군사적 행동이 없었는지를 생각해보자. 이와 같은 행동은 당장의 위험을 제거할 수 있고, 적절한 명분을 만들 순 있었겠지만, 국제적 관례와 절차로는 분명 잘못된 행동이자 국가의 체면에 먹칠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오판과 실수라는 표현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6. 남은 UDT의 대원들은 실 팀에 편입되거나 SDV(Seal Delivery Viehicle)의 운용을 맡았다.
  7. '어디 한번 해봐, 넌 오늘 죽었다'라는 뜻의 말. 정치인이 공식 석상에서 남길 점잖은 말은 아니다. 근데 레이건 이 양반은 원래 말실수를 많이 해서...
  8. 한국에선 '승리의 전쟁'이란 이름으로 비디오 출시. MBC 방영시엔 '외곬의 길'이란 제목으로 방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