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먼 슈워츠코프

H. Norman Schwarzkopf Jr.[1]
( 1934. 8.22 - 2012.12.27 )

1 개요

미합중국 육군장군으로, 걸프 전쟁 당시 미군 70만명 포함 100만에 달하는 연합군을 지휘하여 65만의 이라크군과 격돌하는 동안 수백명의 전사자(미군 전사자는 148명)만으로 이라크군 전사자와 실종자만 합쳐서 25만을 달성하게 만들고 이라크 전역을 초토화시키는데 성공하였으며, 첨단 유도병기와 디지털화된 전장의 시대를 열어 현대전의 개념을 바꿔버린 장군이다. 당시 합참의장 역시 미군 역사에서 손꼽히는 인물인 육군대장 콜린 파월 장군으로서, 둘의 손발이 맞았던 것도 성공 비결이었다. 하지만 슈워츠코프 장군은 파월 장군의 정치 행보를 못마땅하게 여겨 '파월은 정치군인이 되었다' 라고 자신의 자서전에서 비판하기도 했다. 아래에도 나오지만 군인으로서의 명예를 대단히 중시하고 권력을 극도로 혐오한 슈워츠코프 장군이 파월 장군의 행보를 좋아할리 만무하다.

노턴 슈워츠와 헷갈리면 곤란하다.

2 일생

1934년 뉴저지 주 트렌튼에서 육군 장교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어린 시절의 일부를 이란에서 보내기도 했는데, 훗날 이것이 슈워츠코프를 미 중부사령관으로 이끈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1956년 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보병소위로 임관, 육군사관학교 교수요원으로 재직했다. 이후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 육군 군사고문과 미 육군 제6보병사단 1대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는데, 그 때 입은 부상과 세운 전공으로 은성 훈장과 퍼플 하트 등을 받았다. 1983년에는 육군 제24보병사단장으로 그레나다 침공 작전에 참가했다.

1988년 미 중부사령관에 취임, 재직중 걸프 전쟁을 맞았고, 이라크를 격퇴하기 위해 편성된 다국적군의 사령관이 되었다. 그리고 "제2의 베트남 전쟁"이 될 것이라는 전세계의 우려를 가볍게 씹어버리고 불과 백 단위의 아군 사상자만 남긴 채 이라크군을 사실상 와해시키고 쿠웨이트를 해방시켰다. [2]

다국적군의 작전명인 "사막의 폭풍(Desert Storm)"은 슈워츠코프 장군의 별명인 "폭풍의 노먼(Stormy Norman)"에서 따온 것이었다(그 외에 "곰(the Bear)"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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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프 전쟁 당시 작전 브리핑을 하는 노먼 슈워츠코프 장군

이후 육군참모총장 제의를 받았으나, 이를 거절하고 전역했다. 역시 정치계에서 영입하려는 시도들도 많았으나 모두 거절했으며, 회고록을 쓰거나 군사자문 등을 하며 조용히 지내다 2012년 겨울, 7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여담

  • 멘사 회원이라고 한다.
  • 의외의 사실이지만 군 생활 초기에 여러번 육군이 엿같다는 이유로 군복을 벗으려 했다(...).[3] 미군도 결국 군대인만큼 부조리나 무능한 상사 등이 존재할 수 밖에 없는데, 작전지휘와 업무 자체를 할 마음이 없는 상관을 고발하거나 자리 보전만 하려는 간부들을 여러 번 몰아세웠다가 자기 자신만 다치는 결과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어찌해서 육군에 남아있다가 결국 대장까지 달았다고 한다. 육군의 부조리로 실의에 빠진 슈워츠코프 장군에게 어느 선배 육군 장교가 해준 충고가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그 내용은 "자네가 택할 길은 두 가지네. 하나는 지금 당장 육군을 나가는 거고, 또 하나는 높으신 분이 된 후 놈들을 해치우는 거네. 그러나 잊지 말게. 자네가 지금 육군을 그만둔다면 나쁜 놈들이 이기는 거네"였다고. 슈워츠코프 장군은 나쁜 놈들이 이기는 걸 바라지 않았기에 군에 남았다고 본인의 자서전에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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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의 베트남 공화국 육군 아저씨의 표정이 시크하다. 아마 목숨 걸고 지뢰밭 갔다 오는데 사진 찍는 것을 보고 빡친듯?
  • 베트남에서 대대장 시절, 연대의 무리한 작전으로 부하들이 희생되는 것을 막기 위해 명령 수행을 거부, 한 차례 진급이 누락되기도 했다. 또한 지뢰밭에서 부상당해 쓰러져 있던 병사 한 명을 맨몸으로 뛰어가 구출하여 끌고 나와 후송 헬리콥터에 실어 보내 목숨을 건지게 했는데, 종군기자 한 사람이 이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언론에 퍼지면서 유명세를 탔다. 게다가 구출된 병사가 흑인이었다는 사실이 당시로서는 더 화제를 모았는데, 당시만 해도 미국에서 인종차별이 엄청난 상황이었기에 흑인 병사 한 명을 위해 백인 장교가 목숨을 걸었다는 사실은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4]. 대대장이 되자마자 장교 식당을 없애고 장교들도 부사관 및 병들과 함께 줄을 서서 배식을 받고 같은 식탁에서 식사하도록 해 부하들의 신망을 얻기도 했다.
  • 24사단장과 1군단장 재직시 "주말에 훈련을 하고 싶으면 6주 전에 계획서를 제출하고 결재를 받으라."는 지시를 하달했는데, 사실상 주말의 휴식을 철저히 보장토록 한 것이었다. 부대 PX의 햄버거가 너무 맛이 없다는 부하들의 불만을 접수하자 과감히 영내에 버거킹 지점을 입점시키기도 했다[5]. 오오 슈워츠코프 오오
  • 베트남 전쟁그레나다 침공 당시 특수부대의 시행착오와 뻘짓을 직접 목격했기에 특수부대들을 건방진 양아치 집단처럼 여기며 싫어했으나[6][7], 걸프 전쟁에서 그린베레 등 특수부대의 맹활약상을 본 뒤로 생각을 바꿔 "특수부대 팬"에 가까울 정도로 호감을 가지고 이들을 칭송했다.
  • 자서전 "영웅은 필요없다.(It doesn't take a hero)"가 있다. 자서전에서 슈워츠코프 장군은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겼는데, 권력자가 되는 순간 들어오는 수많은 아부성 발언들을 경계하라는 금언이다.
"하룻밤 사이에 모든 사람이 내 너절한 농담에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ㅡ 준장으로 진급한 직후, 노먼 슈워츠코프 장군.

끝까지 군인으로 남고 싶어했으며 결국 군인으로 남은 진정한 참군인 중 한명
  • msn.com에서 미국 최고의 전쟁영웅 16인 중 한 명으로 뽑히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김영옥(군인) 참조.
  1. 이름 앞에 붙어있는 H는 문자 그대로 에찌H다. 그의 아버지인 허버트 노먼 슈워츠코프는 허버트라는 이름을 싫어하고 H. 노먼이라고 불리기를 바랐는데, 매정한 육군은 꿋꿋하게 공문서에 '허버트'라고 표기했기에 첫번째 이름을 H라는 글자 하나만으로 지었다고 슈워츠코프 자신이 자서전에서 밝혔다. 다른 이들과는 달리 퍼스트 네임이 아닌 미들 네임이 더 잘 알려진 이유는 이 때문.
  2. 그나마 그 아군 사상자들 중에서 반이 사고사 혹은 아군의 오발사격/오폭이였다(.....)
  3. 역사적으로도 군사적 재능이 특출나고 실적 또한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군대 자체에 실망해서 고생한 군인은 흔해 빠졌다.
  4. 슈워츠코프는 이때 지뢰의 폭발로 가슴에 부상을 입었으며, 당시에는 겨를이 없어 자기가 구한 병사가 흑인인지 아닌지도 몰랐고, 나중에 다른 흑인 병사들이 자신에게 감사를 표한 후에야 알아차렸다고 한다. 물론 흑인임을 알았더라면 방치했을 것이라는 것은 아니고.
  5. 현재 미 육군부대 PX인 AAFEX에 유일하게 입점해 있는 햄버거 체인점이 버거킹이다.
  6. 당장 델타 포스 항목을 읽어보시길.
  7. 본인도 특수훈련인 레인저 스쿨을 수료하긴 했으나, 레인저 스쿨은 특수부대와 무관한 부대 소속이라도 미 육군에서 별을 달기 위해서는 사실상 필수적으로 이수해야 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특수부대뿐 아니라 일반보병이나 여러 병과들에서도 야심 있는 간부라면 입교를 희망할 정도다. 슈워츠코프 역시 레인저스쿨은 수료했지만 특수부대에서 근무한 적은 한 번도 없다.